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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리뷰/뉴스단평

하나님보다 관대한 사람들

하나님보다 관대한 사람들이 많아져 간다.
하나님을 무한 관대하시다고 믿을 뿐더러 그렇게 믿는 자신을 스스로 관대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 말씀과 비교해 자기 주제를 파악해 보지 않은 결과다. 그런 오착된 윤리관은 후대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물론이다.

하나님을 무한 관대하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아가페의 적용 범위를 혼동해서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무조건 구원하실 만큼 무한 관대하시진 않다. 예수를 믿고 구주로 모셔서 거듭나야만 한다는 조건이 있다. 그런데 이 조건을 무엇보다 싫어하는 사람들이 세상엔 부지기수로 널려 있다! 

또 다른 중요한 오해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그걸로 그냥 "깨끗이" 끝내시는 분이라는 생각. 미안하지만 그건 일대 착각이다. 죄의 경중에 따라, 하나님이 용서하셔도 징벌과 심판은 별도로 따른다.

예컨대 다윋 왕은 밭쉐바와의 간음, 밭쉐바의 본 남편 우리아  암살 등의 중죄를 뉘우쳐 분명히 하나님께 용서 받았지만, 장기간의 중한 심판도 받았다. 죄의 씨인 첫 아들이 죽었고..한 왕자가 한 공주를 강간한 뒤 피살되는가 하면, 두 왕자가 반란을 일으키는 등 왕가에 말썽이 끊일 새 없었다. 심지어는 다윋 자신의 후궁 열 명이 백주에 아들 압샬롬에게 강간 당했다. 하나님은 이 점을 예고하셨었다.  

그렇다면 구약시대가 아닌 오늘날은 하나님이 심판을 중지하시고 더는 안 하시는가? 그렇지 않다. 알게 모르게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은 다가온다. 그래서 질병도 죄를 회개하면 비로소 낫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더러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결단코 잊어선 안 된다. 그분은 사랑으로 용서하는 만큼 정의로 심판과 징계도 하신다. 하나님은 거룩과 의, 사랑의 균형을 늘 지니고 계시다.

잘못된 관용의 심각성

하나님이 조건 없이 무한 관대하시다고 믿고 남에게도 그렇게 무차별 관용을 베푸는 사람들이 많다. 또 베푼 만큼 자신이 범죄했을 때도 같은 성질과 부피의 관용 아니 그 이상의 것을 바라기도 한다. 현대사회와 교계에 이런 give & take 비슷한 관행이 은근히 불문율로 작용한다.

하지만 균형 잡히지 못한 잘못된 발상이다. 그런 치우친 관용은 공평과 정의를 적용할 권능과 권세를 잃는다. 정의를 부정하는 성향에 불과하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셨지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조건/단서를 다셨다. 또 성전 장사아치들을 용서하지 않고 채찍을 휘둘러 내쫓으셨다. 사도들의 서신서를 약간만 봐도, 교회가 무차별적 관용의 장이 아님을 즉각 느끼게 된다.

최근 우려를 낳아 온 일부 목회자들의 이중/삼중 성생활은 무차별적 관용의 대상이 아니다.
왠지 요즘 '파워 목회자'들 가운데는 '일부다처'적 성향이 내비치고 엿뵌다. 앉은 자리와 눈의 위치가 점점 올라가면 주위의 모든 게 자기 것으로 보이는 탓인지도 모른다.
옛 족장이나 왕, 황제 같은 생각이 아니라면 왜 아내 외에도 여러 여성들을 차지하려고 할까. 그것도 비밀리에. 일부다처가 좋다면 금지된 일각의 보수적인 몰몬교로 가든지 아니면 정명석이 처럼 이단 교주라도 돼 볼 일이다. 

문제는 그 자신보다 주위의 태도에서 더 발견된다. 죄상이야 어떻든 무조건 관용과 용서를 주변에 주문하는 성향 말이다. 과연 그것이 성경적인 태도인가? 회개는 관용을 받아내기 위한 만능 조건이 아니다. 

신자가 일부일처의 궤도를 벗어나 엘리엍 스피처 전 뉴욕 주지사처럼 아슬아슬한 혼외정사를 즐기고도 그것이 '회개'와 '관용'으로 간단히 끝날 일이라면, 혼음이나 일부다처 행각, 동성애 등도 교회 안에서 간단히 '회개'와 '관용'만 곁들여지면 아무래도 괜찮다는 얘기가 돼 버린다.

이건 되는데 저건 안 된다는 막연한 표준이 성경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교계의 '명사', "굵직한" 지도자라고 해서 더 큰 관용이 논해진다면 그야말로 인종차별 내지 인간 차별대우에 불과한 것이다.
또..남의 간음을 조건 없이 기꺼이 관용하고 싶다면 자신의 배우자가 간음했을 때도 너그럽게 관용할 수 있다는 말도 된다. 이런 무차별적 관용은 향미래적 또는 영구적인 역효과를 낳게 된다. 이 글은 바로 그 점을 성경적으로 입증해 보이려고 쓴다.

1. 파울은 무차별 관용자가 아니었다

코린토교회엔 자기 아버지의 아내와 통간한 교우가 있었다(코린토A서 5장 참조). 그런데도 동료 교우들은 '관용'이란 걸 한껏 베풀며 가만히 앉아들 있었다. 이에 대해 파울은 관용은커녕 놀랄 만한 극단의 처방을 내린다. 파울의 태도는 관용 중심적인 현대교회 인사들과는 정반대다.

코A 5장에서 한 번 구체적으로 살펴 보자.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5:1. 이하 한글개역 개정)

파울은 이 교우의 두드러진 간음사건과 관련, 이방인들 곧 교회 바깥 사람들을 의식하고 있다. 특히 코린토 교우들 자신이 본래 신전에서 잡신들을 섬기며 성적으로도 문란했다. 더구나 고대 신전의 여 사제들은 성매매를 겸했다. 그러다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들이다. 그런 판국에 다시 세상과 똑같은 행실을 드러내니 놀라운 것이다.  

파울은 그 다음,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2절)

파울은 지금, 교우들 중 아무도 음행자를 지적하지 않고 짐짓 '사랑'으로 덮어 주고 잠자코 있는 일을 겸손하고 아름답다긴커녕 '교만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왜 통한스럽게 여기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음행자를 왜 내쫓지 않느냐는 것이다.

교우 중 간음자를 두둔하고 비호하는 것은 '사랑'과 '관용'이기 전에 방임과 교만이다.

그 다음을 보자.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5:6~8)

위 말씀은 얼핏 삼천포로 빠지는 듯 하나, 여전히 음행자 관련 교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같은 컨텍스트다. 파울에 따르면, 지금 코린토 교우들은 자랑을 하고 있다. 웬 자랑? 그들은 자신들이 음행자를 비호하고 두둔하고 덮는 사실을 진정한 사랑 실천이고 통이 큰 관용인 양 은근히 자랑하고 있다는 얘기다. 

왜냐 하면 그들은 한 음행자의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고 있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파울은 중요한 말을 한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 라는 말. 파울은, 우리가 누구나 예외 없이 눈과 맘, 몸으로 간음할 소질이 있기에 '누룩 있는 자' 라고는 하지 않는다.

사실 어찌 보면, 파울 스스로가 '죄인들의 수괴였다'고 표현할 정도로 모종의 죄책감이 아닌 죄 성향에 대한 강한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내랴!"고 자신의 육욕과 죄성을 통탄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간음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 모두가 누룩 있는 자다"라고 선언하지 않는다. 그럴 가능성은 누구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타 코린토 교우들을 "누룩 없는 자"로, 그 음행자를 '적은 누룩', '묵은 누룩'으로 칭한다. 파울은 새 덩어리가 되려면 묵은 누룩을 내 버리라며, 우리를 새 덩어리가 되도록 하려고 유월절 어린양 크리스토께서 희생되셨다고 말한다. '수난절'을 지키는 사람들이 이 기간에 숙고할 만한 내용이다. 

이를테면 파울은 음행자를 교회에서 축출하기 위한 단계로서 여타 교우들과 음행자를 차별화 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 차별화가 안 되고 경계선이 모호해 진다면 누룩은 금방 퍼져서 누구나 누룩이 돼 버리거나 너도나도 누룩으로 보이게 돼 버린다.   

과연 한국교회/한인교회는 이 묵은 누룩, 적은 누룩을 내 버리고 있는가? 과연 파울, 코린토교회와 같은 차원의 의식이 한인 교회나 교계에서 실천되고 있는가? 거의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교계나 교회의 압도적인 경향은.."시간이 지나면 으레 다들 잊어 버리기 마련. 너도 나도 오십 보 백 보, 도토리 키재기 아니냐..?" 그러니 서로 용서하고 관용하고 이해하자는 방향이다.
전체교회 유교화(有酵化) 내지 누룩화를 자처하고 있는 셈이다. 또 다른 간음사건을 예방하긴커녕 불러오기가 더 쉬운 자세다. 그런데도 아무도 파울의 엄한 교훈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

그 다음을 또 보자.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 /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5:9~13).

사도 파울은 기왕에 쓴 (본 코린토A서가 아닌) 딴 편지에서 "음행자들을 사귀지 말라"고 했다. 파울의 이 말은 세상의 음행자들을 사귀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었다. '형제'라는 교우, 교회 내부 인사가 음행을 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하면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라는 것이다. "악인이니까 내쫓으라"고 한다. 
우리는 파울의 이 교훈을 지키는가? (필자의 말이 아닌) 파울의 교훈에 따르면, 우리는 음행자를 교계에서 추방해야 하며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그러고 있는가?

지금 사도 파울이 문제 삼는 더 중요한 것은 음행자 자신보다 주위 동료 교우들의 자세다. 음행자 비호 세력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얼마나 지키고 있는가? 무엇이 행동의 바탕인가? 성경법 아닌 교단법인가? 그렇다면-지키지도 못할 교훈일 바에야 교인들 앞에서 설교한답시고 파울의 이름조차 거들 건덕지는 있는가?

그런데..이 파울의 처방이 현대교회에 먹혀 들기나 하는가? Hardly! 교회가 썩어 가고 있는 증거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참된 교회다"라고 목청 높여 떠들지 말아야 한다.

문제는 범죄자 자신보다는 성경이 무조건 관용을 베풀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더 있을 수 있다. 하나님보다 더 관대해지려는 무차별적 관용은 교만이고 비성경적이다.
만약 필자더러 "당신은 어떻소? 당신 팔은 그렇게 굵어?" 한다면 지상의 그 누구도 강단에 서지 말아야 햔다. 사도 파울 자신조차도.

2. 위선과 무차별 관용은 차세대의 위험한 환멸감을 부른다

뉴욕 모 대형교회 L 목사의 이중 간음사건이 드러난 뒤 아멘넷에 올려진 해당교회 여러 청소년들의 반발성 영문 댓글을 눈여겨 본 적이 있는가? 단말마적인 그들의 입장은 공통되고 단호하다: 간음자가 뉴욕을 떠나라는 것이다.
그들에게선 무차별적 관용은커녕 보통의 관용도 발견하기 어려웠다. 어른들이 행동의 모본을 보여주지 못할 때 자녀들은 엄청난 가치관 혼동을 겪으며 자신들이 어른으로 성장하기까지 큰 고통을 겪는다. 역사가 증명해 주는 결과다.  

2007년 12월 8일 아침.
콜로래도스프링즈 인근 아바다의 YWAM 선교 컴플렉스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져 2명이 숨졌다. 이튿날인 9일엔 뉴라이프교회에서도 두 명의 10대 자매가 숨졌다. 범인은 매튜 머레이(24). 불행 중 다행인지 뉴라이프에서는 자원봉사 안전요원이 범인에게 총 세 발을 쏴 중상을 입히자 머레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놀랍게도 머레이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일종의 신자였다! 더욱이 그의 부모는 표면상 매우 경건한 신자요 지성인들이다. 아버지 라널드 머레이는 신경외과 의사.
아무튼 뉴라이프 주차장에서 발견된 범인의 자동차인 1992년형 토요다 캠리의 뒷 자석엔 "하나님께 보내는 편지"와 함께 책 두 권이 놓여 있었다. 책 한 권은 '난 말할 것이 있었다', 다른 한 권은 '연쇄살해범과 피해자들'.

전자의 저자는 마이크 조운즈이다. 독자는 조운즈가 누군지 기억하는가..? 바로 2006년 11월, 뉴라이프교회의 담임목사이자 전국복음주의협회(NAE) 회장이었던 텓 해거드의 성추문을 폭로한 해거드의 '에스코트' 즉 3년간 동성애 파트너로 밀회를 갖던 성매매자다. 폭로한 이유는 단 한 가지: 해거드의 위선 때문이었다! 즉 해거드가 위선만 안했더라도 당시는 그냥 넘어갈 뻔 했다는 얘기다.

문제의 책은 조운즈가 어릴 적부터 살아 온 과거와 함께 해거드 목사와의 밀회 건으로써 매듭 짓는 내용이다. 조운즈는 심지어 이번 3월중 책과 같은 줄거리로 쓰여진 대본에 따라 원맨쇼(독백극)를 7회 공연하기도 했다.

살해범 머레이가 평소 반종교 웹사이트에다 기독교에 "거부/남용/질식"을 "당한" 데 대한 증오심을 내뿜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최소한의 범행 동기와 범행 방법 일부를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4, 5세부터 주의결함활동항진장애(ADHD) 환자였고 19세까지 주기적으로 약(리털린)을 복용했던 그는 몰몬교에 잠깐 머물기도 했다. 컴퓨터에 능숙했던 그는 평소 거부감/소외감을 느꼈고 특히 남을 괴롭힌다고 보는 대상을 용서할 줄 몰랐다. 부모는 그의 폭력적 살의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적어도 머레이는 이 책을 (전체 또는 일부를) 읽고 해거드에 대한 혐오감에 치를 떨다가 뉴라이프를 범행 대상으로 굳히게 된 게 분명하다. 다른 책과 함께 당초 범행 동기와 아이디어, 범행을 결단하고 끝까지 감행할 '용기'까지 일부 제공했고 자신이 그런 동기로 범행하게 됐다는 증거로 남긴 셈이다.

비록 ADHD 문제가 있고 책 말고도 웹에서 증오심을 키워온 것을 감안해도 그렇다. 표면상 경건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머레이의 반기독교 혐오감은 어느 정도였냐면, 차 트렁크 안에는 AK-47 자동소총과 2개의 플라스틱 탄창, 별도의 28개 탄창, 약 2천발의 다양한 탄환, 15발의 비폭발성 최루탄이 들어 있었다. 실로 소름 끼치는 일이다.   

이렇게 볼 때 적어도 뉴라이프의 스테퍼니(18), 레이철(16) 두 자매의 죽음은 해거드의 간접 책임도 있다는 얘기다.

뭘 말해 주는가? 우리 기성 신자들은 자녀들과 차세대 앞에 모범을 보여야 하며 되도록 위선을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또 죄를 제대로 죄상대로 다스려 성경적인 정의의 실천 모본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3. 생각 없는 범죄자 비호는 또 다른 범죄를 부른다

성경 상으로 명백한 범죄자에게 '사랑'과 '관용' 차원에서 비호하고 둘러대기만 한다면, 또 다른 범죄자 내지 범죄 가능자는 응당 누구나 그런 범죄 후 관용을 기대할 것이다. 말을 바꾼다면 정의의 측면을 무시하는 무차별적인 관용의 악순환은 범죄의 악순환을 가져 올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물론 우리 자신들도 눈이 달리고 몸을 가진 이상 주의하지 않으면 어디서든 언제든 유혹 받을 수 있는 연약한 존재들임을 시인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처방을 무시한다면 계속 악순환이 될 수 밖에 없다. 관용한다고, 침묵한다고 모든 게 다 자동 해결되는 게 아님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끝으로..혹 이 글의 필자를 원망하고 싶거들랑 먼저 성경부터 원망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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