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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선지서

[암 9:15] 살기 위하여 (아모스서 묵상)



                    예언대로 파괴된 쇼므론(사마리아) 왕궁의 폐허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을 테니
     그들이 내가 준 땅에서 다시는 뿌리뽑혀 나가지 않으리.'
     - 주/야웨, 네 하나님의 말이다.
(아모스 9:15. 이하 성구: 사역)


사람이 모국이나 오래 살던 곳을 떠난다는 것은 큰 도전이고도 두려운 일입니다.
외국에 사는 수많은 한민족은 설령 본의에 의해 고국을 떠났더라도 늘 실향민 같은 마음을 안고 살아갑니다. 
하물며 가족과 친척과 헤어져 60년을 살아온 이산가족이겠습니까.

고국에서는 추석 연휴를 맞을 때마다 '민족대이동'을 하며 옮겨 다닐 만큼, 뿌리를 못내 그리며 고향 친척을 찾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자신이 처음 살던 고장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온 지구촌에 흩어져 살아도 늘 고국을 맘에 둔 겨레는 한 뿌리임을 여실히 느낍니다.
그러나 한 뿌리여도 나쁜 가지와 좋은 가지가 있습니다. 다 같은 뿌리에서 나의 적과 같은 사람들도 태어나기 때문이지요. 동족이 동족을 괴롭힌다는 것..역설적인 비극이지요.

유다 나라도 그랬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동족이 동족을 서로 악하게 대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저버렸기에, 결국 '디아스포라'(=흩어짐/분산)가 되어 온 세계에 흩어지는 민족이 됩니다. 그나마 그들의 일부가 본토로 돌아오고 나머지도 지금처럼 된 것은 하나님의 큰 은총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참 메시아를 거부합니다!


본문 말씀을 예언한 대언자 아모스.. 그는 흔히 '정의의 대언자'로 불리곤 하지요. 분열왕국 시대에 남 유다의 베틀레헴 교외에 있는 테코아 광야에서 양지기 겸 뽕나무 배양자로 지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북 이스라엘에 거주하면서 당대 여러 나라의 왕실과 사회의 온갖 비리와 부정을 가차 없이 비판했습니다.

위 본문 말씀은 본서의 맨 끝 부분으로서..바로 앞 부분인 8-14절까지가 일견 '해피 엔딩'으로 보이지만, 1장부터 본문이 있는 9장 전반까지 놀라울 정도로 거의 한결같이 무서운 심판과 저주의 예언들입니다. 물론 모두 말씀 그대로 성취됐지요! 경고했지만 경고로 듣지 않고, 받아 들이지 않은 탓입니다.  

아모스는 남 유다의 우지야 왕, 북 이스라엘의 야로브암(여로보암) 2세 시대에 활약했습니다. 야로브암 2세는 북국 초대왕 야로브암 1세와 마찬가지로 우상숭배를 방치/방관하면서, 예후 왕조의 선대들 못지 않은 악정을 베풀었습니다(왕들B=왕하 14:23,24).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은 크셔서..그 시대에 이스라엘 영토를 유다에게 속했던 하맡에서부터 멀리 아라바까지 넓혀 주시고, 심지어 아람의 다메쉨(다마스쿠스)까지 차지하게 하셨습니다(왕B 14:25-28). 이 영토 확장 사실도 이미 대언자 요나를 통해 예언(!)된 것입니다. 하지만 야로브암과 그 국민은 승리감에 도취해, 그들을 도우신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지 않았습니다. 아니 깨닫기를 거부했습니다! 강퍅하기 이를 데 없는 백성이었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본서에서 경고하십니다:

    "내가 한 나라(아씨리아)를 일으켜 너희를 칠 테다. 그들이 하맡 어귀에서 아라바 강까지 너희를 학대할 것이다." (아모스 6:14)

본서 앞 부분을 보면, 주님께서는 대언자 아모스를 통하여 먼저 아람의 다메쉨, 펠레쉩의 가자, 쪼르(튀로, 한글 성경의 '두로'), 에돔의 데만과 보즈라, 암몬과 모압 등 주변 국가의 죄악을 지적하시며 그들의 왕궁이 고루 불타 버릴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유다와 이스라엘에도 전운과 재앙이 미칠 것을 경고하십니다. 특히 이스라엘 수도 쇼므론(사마리아)에서 벌어지는 온갖 불의와 부패상을 고루 지적하시면서, 그들이 장차 받을 벌을 열거하십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악상을 살펴 볼까요?

    그들은 은돈을 받고 의인을, 신 한 켤레에 빈민을 팔아 넘깁니다.
    남의 것을 노리다 보니, 가난한 사람 머리 위의 '티끌'까지도 탐낼 정도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가는 길을 비뚤게 합니다.
    부자가 젊은 여인네를 탐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합니다.
    모든 제단 곁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워 뒹굴뒹굴 지냅니다.
    우상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십니다.

이상은 전체 죄악상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 '새 발에 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난 날 그들에게 베푸셨던 은총을 상기시킵니다.

즉 카나안 정복시대 때 나무처럼 키가 큰 거인 아모리 족을 뿌리뽑듯 뽑아 내버리고, 40년 광야생활을 거친 뒤 2세들로 하여금 그 땅을 차지하게 하신 과거사들. 또한  이스라엘 청년 가운데서 대언자들을 일으키고 주님께 평생을 헌신한 거룩한 남/녀 '나지르'들을 일으키셨던 일(민수기 6장 참조). 그러나 아모스 당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언자들에겐 예언을 하지 마라고 가로막고, 나지르들에겐 포도주를 마시게 하여 서원을 깨뜨리게 만들었습니다(2:12)! 이러니..그들의 사악함을 가히 짐작할 수 있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다짐하십니다: 땅의 모든 족속들 가운데 '너희들'만 알아 주시고 고르셔서 돌보신 만큼, 이젠 '너희'의 모든 죄값을 물어 고스란히 벌로써 되갚아 주시겠다고! 사랑하셨던 만큼 배신 당한 주님의 진노도 크다는 의미이지요.
그러면서 주님은 언약의 배신자에게 합법 차원에서 응징하시되..미리 대언자를 통해 경고하신 뒤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3:3-8). 경고 역시 주님의 온정이고 사랑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경고를 으레 저주로 받아 들입니다. 그래서 무고한 대언자들을 임의로 처단하곤 했지요.

주님은 또 주변 나라들에게 이스라엘의 범죄 현장을 살펴 보라고 부르시면서..사마리아가 결국 주변국가에 포위돼 '사면초가'가 되면서, 거기서 구원 받을 사람은 마치 양을 삼키는 사자의 입에서 겨우 양의 두 다리나 귓조각을 건져냄과  같을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날. 마지막 응징의 날에 이스라엘의 모든 우상 제단들이 궤멸될 뿐더러 이스라엘 왕의 휴가철 겨울궁과 여름궁, 상아궁 등 큰 궁궐들이 죄다 결딴 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수위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수도권 귀족들을 "바샨의 살찐 암소 떼"로 비유하시고, 그들은 빈민들을 학대하던 나머지 그 가장에게 술을 퍼 와서 자기네한테 마시게 하라고 명령하기까지 한 사악한 죄를 지적하시며 주님 스스로 맹세하십니다:     "때가 너희들에게 닥칠 것이다. 원수들이 갈고리로 너희들을 끌어가고 낚시로 너희의 남은 무리를 낚아 끌고 갈 것이다"고. 
더욱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야웨님 대신 베텔과 길갈에서 아침마다 희생제물을, 3일에 한 번씩 십일조를, 누룩을 넣은 소제를 불살라 바치고 소리 높여 낙헌제를 선언을 했습니다(4:4,5).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을 달래기도 하시고 으르시기도 하셨으나 그들은 막무가내였다고 지적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래서..무려 다섯 번(!)이나 연거푸 똑같은 탄식을 하십니다(4:6,8-11) :

    ..(그래도)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주님의 이 애타는 마음, 우리가 가히 짐작할 수 있을까요? 대언자들을 보내어 아무리 애타게, 온갖 말씀으로 경고하셔도 이스라엘 백성은 들은 둥 만 둥, 아는 체도 하지 않고 대언자에게 콧방귀나 뀌었다는 것입니다.
이래선 안되겠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을 통한 주님의 경고에 경청하고 반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공식 통보를 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너의 하나님 만날 준비를 해라."
그러시면서 이스라엘이 멸망을 내다 보고 몸소 지으신 애가(哀歌)를 들려 주십니다.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려졌다네,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
          자기 땅에서 내동댕이 쳐졌다네.
             일으켜 줄 사람도 없으리!
 
그러면서 예고하십니다: 이스라엘 중 1천명이 행군해 나아가던 성에서는 100명만 남고 100명이 나아가던 곳에는 10명만 남을 것이라고.
  
그러나 한편으로 하나님은 안타깝게  촉구하십니다(5:4,6,14):

    "너희는 나를 찾아라! 그러면 살 테니."
    "너희는 주/야웨를 찾아라! 그러면 살 테니."
    "너희는 살기 위해서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마라.."

위기의 마지막-벼랑 끝에 다다랐을 때라도 하나님을 찾으면 살게 돼 있습니다. 아멘! 온정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캄캄한 저~ 터널 끝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어둠의 때, 위기의 때, 경제난국의 때, 역병의 때, 도덕상실의 때에.."살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찾아야겠습니다! 오직 주 예수 크리스토만이 우리의 살 길입니다.  

아모스는 심판의 경고만 할 뿐 아니라 도움기도도 합니다.

즉 황충이 온 땅의 풀을 먹는 심판의 환상을 보고, "용서하소서! 야콥이 미약하니 어떻게 서겠습니까?" 하고 외치지요. 그러자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시어 "그러면 이걸 이루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 다음, 불이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어 치우려는 환상이 보이자 아모스는 또 외칩니다: "주/야웨님! 바라오니 그치소서! 야콥이 미약하니 어찌 서겠습니까?" 하나님은 "이것도 이루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 중재적 기도는 소돔/고모라를 위해 기도하던 고대의 아브라함과 예루샬렘을 위하여 하던 다니엘의 도고를 상기시켜 줍니다. "자신들이 하는 일을 모릅니다"고 하시던 십자가 위의 주님을 연상시킵니다.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소서!" 부르짖던 스테판 집사를 떠올려 줍니다.

우리도 아모스와 같기를 원합니다. 심판과 멸망을 조만간 앞둔 세상 사람들, 비신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도 간구하길 원합니다! 특별히 어려운 시험과 사랑받는 자녀로서 주님의 징계를 받는 형제/자매들을 위한 도움기도가 필요합니다.
    "주님, 그들이 약합니다. 돌아보소서!"라고.

아모스의 중재적 기도를 들으시던 하나님은 그러나 다림줄을 손에 쥐시고 쌓은 담을 다림(수평/수직 여부를 측정) 하시듯 이스라엘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왕가를 치시리라고 예언하십니다.

여기까지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자, 이를 견디다 못한 베텔의 신상 사제 아마찌야가 야로브암 왕에게 전갈하여 고자질합니다.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 아모스는 임금님을 모반합니다. 그의 온갖 예언은 이 땅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지경입니다. 아모스가 말하는 군요: '야로브암은 칼에 죽고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들의 땅에서 떠나가게 된다'고."

그러면서 아마찌야 사제는 아모스에게 호통치며 은근히 겁을 줍니다:
 
    "어이, 선견자. 자네 말야..유다 땅으로 도망 가서 거기서나 떡을 먹으면서 거기서나 예언을 하게. 다시는 베텔에서 하지 말라구. 여긴 왕의 성소이고 궁궐이니까. 엉?"

나라를 위해 도움기도까지 한 대언자에게 이게 배은망덕이요 무슨 망발이란 말입니까?
아모스가 대답합니다:

    "난 대언자도 아니고 대언자의 아들도 아니오. 양지기에다 뽕나무 배양자였는데 양떼의 뒤를 따를 때 주/야웨님이 나를 데려다 내게 말씀하셨소.'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고."

그러면서 아모스는 성령을 통하여 즉석에서 아마찌야 개인을 향한 무서운 심판을 예고합니다: 
"주 야웨님의 말씀이오: '네 아내는 성에서 창녀가 될 것이다. 너의 자녀들은 칼에 쓰러질 것이다. 네 땅은 측량해서 분할될 것이고,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게 될 것이다'.." (7:17).

오늘날도, 하나님의 말씀에 도도히 도전하여 끝내 거역하는 사람은 비참한 말로를 겪게 됩니다. 주님을 거부하는 땅의 명사들이 가는 곳은 영원한 멸망입니다. 그러나 뉘우치고 하나님께 돌이키는 사람들은 주님의 온정과 사랑을 받게 됩니다. 이방신 사제 아마찌야도 이때 아모스의 말을 믿고 회개했다면 물론 살 길이 있었을 터입니다. 하지만 그는 보나마나 콧방귀를 날리며 아모스더러 "할 대로 해 보쇼" 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후 하나님은 아모스에게 여름철 열매 한 광주리를 보이시며 히브리어로 '카이츠'(여름열매)와 '케츠'(끝)의 발음이 같음을 상기시키시면서, 마치 여름철 열매가 '반짝' 한때 뿐이듯 이스라엘의 끝이 왔기에 하나님이 두 번 다시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십니다.
그래서 왕궁의 노래가 애가가 되고 명절이 애통의 날이 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보라! 그 날이 오면, 내가 굶주림을 땅에 보내리.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고 물이 없어 마름이 아니어라. 
    주/야웨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어라! (8:11)

이 바다에서 저 바다, 한 쪽 끝에서 다른 끝으로 달려가도 말씀을 구하지 못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것을 다 얻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얻지 못하면 본질적인 존재, 참 자아인 영이 굶주리고 목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최악의 상황이고 가장 무서운 기갈입니다.

오늘날도 유사합니다.     
모순되게도..겉으로 보기엔 온통 널려 있는 것이 성경책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영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충족되지 못하고 갈급합니다. 참된 영감의 말씀이 희박하기 때문이지요. 성경책은 흔한데도 정작 그 말씀에 대한 바른 가르침과 이해는 희소가치가 있다니, 이게 웬 말인가요..
오히려 북한 등 공산국가에 있는 사람들은 성경책을 못 얻어 안타까워 하면서도 그들은 참된 영의 갈망과 오직 주님만 바라는 내적인 소망이 있습니다. 

요즘 지구인들, 특히 네티즌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영적인 것에 대한 탐구열이 강합니다. 그러나 유일한 구주이신 예수 크리스토와 성경의 진리를 찾지 않고, 그 왕성한 영적 욕구를 만족시킬 길을 온갖 잡된 영성에서 찾습니다.
웹 여기저기서 찾아낸 제멋대로 식 종교와 엿장수 맘대로 식 신념을 참 신앙인 양 붙들고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참된 문과 길이 열릴 길이 없지요.
오직 양의 문, 길/진리/생명이신 예수 크리스토를 통해서만 그 문과 길을 찾아 들어갈 수 있을 뿐입니다!

지구인의 약 절반인 문화인들에겐 성경책이 흔해 빠졌는데도 참 말씀은 기갈이고..
나머지 절반은 성경책이 없어 아쉬운데도 속엔 참된 갈구가 넘치는 상황..
이것이 아이러니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러나 믿는 우리는 참 이스라엘, '그루터기'로서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무리가 됐습니다(9:11. 비교: 행전 15:16-18). 그래서 예수쟁이 내지 예수 믿는 사람, 크리스천들이 된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던 그 날, 본토에서 뿌리뽑히지 않고 남은 참 이스라엘/유다의 무리에 우리도 끼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이제 주님의 백성된 자리에서 영원히 뽑히지 않고 참 예루샬렘, 새 예루샬렘에서 길이길이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우리 삶 속에서 두렵게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며 늘 회개하고 지냄으로써 그 분의 눈에서 튀어나지 않게, 겸손한 복종의 삶이 되길 갈망합니다.
그리고 아모스처럼 민족과 비신자를 위해 도움기도를 주님께 늘 아뢰기를 원합니다. 
잘못할 때마다.."주님, 제가 뉘우치고 주님께로 돌아옵니다. 주님, 제가 주님만 찾습니다. 제가 살 길은 주님 뿐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땅에서 나그네인 우리의 마음의 고향은 주님 나라이기에.
우리 영혼의 고향은 하늘나라이기에..


티엘티 독자들에게 이런 복이 넘치길!

 필자는 외래어는 되도록 원음에 가깝게 표기하자는 생각입니다. 
이 점, 독자의 이해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