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새해 들어 두 번 째 TLT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며..
주님을 찬양합니다!
사실 예배란 늘 드리고 또 드리고 매일 드려도 아쉽지요.
주님을 아무리 찬양하고 또 찬양해도 그저 부족하고 아쉬운 것 같지요?
바로 그런 심정을 그린 노래가 찬송가 82장입니다.
1.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마음 뿐이라
5. 나의 진정 사모하는 예수님 음성 조차도 반가워
나의 생명과 나의 참 소망은 오직 주 예수 뿐이라
우리가 친아버지를 대한대도 아침마다 정답게..
"아버지,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늘 아침은 기분이 좀 어떠세요? 어디 불편하신 덴 없으세요?.." 하고 문안 인사를 드리지 않습니까?
하물며 우리의 하늘 아버지이시겠습니까!
우리가 육친을 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다정하게..그러나 단순한 문안 인사가 아닌 거룩하고 온전한 경배를 드려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더욱이 물과 성령님을 통해 거듭난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크리스토의 영을 우리 속에 모시고 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와 그 아버지 사이는 얼마나 가깝습니까..
친아버지보다 더 가까운 사이 아닌가요. 오 할렐루야~!
그렇게 생각하면, 그 아버지께 매일 우리의 정성을 다해 좋은 것을 바치고 싶어지지요.
우리네 옛 소설 '심청전'에서는 효녀 청이 소경 아버지(심학규)한데 얼마나 극진한 효성을 바치고 지극 정성으로 봉양을 합니까? 비록 불교/유교 정신이 섞인 얘기입니다만. 급기야는 아버지를 위해 인당수에 몸을 내던지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과연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그 절반 만큼이라도 섬기고 있나 자신을 돌아 볼 때 그지없이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우리가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면 아버지 앞에 참 예배자가 될 수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심청 같은 효성이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께 참된 예배자가 되어 그분을 섬길 수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요? 신령과 진리로! 성령과 말씀 안에서! 영이신 아버지 하나님께 영적인 예배를 드리면 참된 예배자라는 말이지요.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와 화목하기 원하셨던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말이죠..몸소 만드신 첫 사람 아담/하와와 늘 친근하게 교제하길 원하셨습니다.
왜, 유명 화가들이 명작이라고 남겨 놓은 그림들 중에 자화상이 있지 않습니까? 거울을 들여다 보며 그렸지요. 마치 그처럼, 하나님도 당신 모습과 형상을 따라 대 조각가가 혼신을 다해 일대 명작을 만들 듯 흙으로 하나하나 손수 빚어주신 작품이 바로 아담 아닙니까.
그렇게 정성껏 만드신 아담을 지극히 사랑하고 아끼셨기에 미리 만들고 아름답게 꾸며 놓은 '요람'-에덴에 두십니다. 그리고는 그 동산에서 함께 거닐고 정답게 대화를 나누며 사귐의 시간을 오래 오래~ 즐기기 원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슬기롭게 모든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 주는 아담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 보시며 흐뭇해 하셨지요.
그랬던 것이..슬프게도 아담과 그 짝으로 지어주신 하와는 간교한 뱀(싸탄)의 말에 유혹 받아 하나님을 배신하고 맙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얼마나 가슴이 저리셨을까요? 그렇게도 사랑하고 가까이 지내길 원하셨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아들인 성자님을 둘째 아담으로 보내셨습니다(코린토A 15:45~49. 21,22와 로마 5:11~21도 참조). 그 분을 맏아들로 삼아 모든 형제들을 이끌어 하나님의 가족 안으로 들이시기 위해서지요(히브리 2:10~17).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사랑 때문이지요. 아버지의 사랑! 동산에서 함께 하기를 원하셨던 아버지 하나님의 그 심정을 바로 예수 크리스토 안에서 맛 볼 수 있습니다. 누구나 좋아하는 찬송가(한국찬송가 499장) 1절을 통하여 우리 다 함께, 예수님의 그 심정을 느껴 보도록 하지요.
저 동산에 장미꽃들 아직 이슬 맺힌 그 때에
나의 귓속에 들리는 소리 하나님 아들 음성
주님 함께 거닐고 말하며 나를 주의 것이라네
우리 서로 나눈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어라
잠깐만요..여러분. 동산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려는 주님의 심정, 즉 하나님 아버지의 그 심경이 느껴집니까? 예..바로 그것입니다!
아담/하와는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거부하고 뱀의 말과 불순종을 택하고 말았지만..
오늘, 지금,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와 함께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들딸들과 함께 거닐기를 원하십니다.
이 찬송, 다시 한 번 부를까요?
저 동산에 장미꽃들 아직 이슬 맺힌 그 때에
나의 귓속에 들리는 소리 하나님 아들 음성
주님 함께 거닐고 말하며 나를 주의 것이라네
우리 서로 나눈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어라!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된 모습 이대로는 동행하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완전하시기에 우리의 악하고 더러운 모습 그대로로는 계속 동행하기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하와를 위해 어린양을 희생시키셨습니다. 짐승을 죽여 그 가죽옷을 입히셨습니다.
거듭나면 우리의 영은 늘 깨끗하여, 몸과 마음도 늘 깨끗하길 원하지만, 우리에겐 죄가 없을 수가 없지요. 몸이 약하고 마음이 약한 탓에.
그래서 주님 앞에 늘 자주 죄스럽고 부끄러운 우리는..그 좋으신 아버지 앞에 나아가기 위해 어린양을 힘 입을 수밖엔 없지요. 그밖엔 달리 길이 없습니다. 오직 그 분의 어린 양 예수 크리스토를 통하여..
함께 부를까요?
(다디 램보-Dottie Rambo의 노래 '바라보라 어린양'- Behold the Lamb 입니다. 부족하나마 직접 한글로 옮겨 봤습니다.)
(후렴)
바라보라 주 어린양
세상의 창조부터 죽임 당한
십자가 달리신 오 거룩한 희생
하나님 어린양 바라보라
금관 드려, 합당하신 주
찬양, 찬양, 하늘과 온 땅아!
바라보라 주 어린양
세상의 창조부터 죽임 당한
십자가 달리신 오 거룩한 희생
하나님 어린양 바라보라
하나님은 오로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원하여, 아버지와 아들/딸 사이로 화목하게 지내시기 위해 어린양을 내려 주어 죽게 하신 것입니다. 오 주님께 영광~!
(우리, 함께 마음을 모을까요?)
아버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나의 아버지~
하나뿐인 아드님, 귀하신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으니 정말 감사합니다
오직 아버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임마누엘-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기 원하여
말씀이 몸을 입으시고
우리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감사합니다!
그 소중한 피를 흘려 주신 것, 고맙습니다!
주님, 합당하십니다!
길이 찬양 받으시기 합당하신
하나님의 귀한 어린양이십니다
부족한 나의 찬양이나마
모자란 목청으로나마
주님을 찬양합니다
영광 받으소서, 내 주님!
가장 고귀한 예수님의 이름으로..아멘
499장 2절 함께 부를까요?
오 주님의 맑은 음성 새들 노래 잠잠케 한다
주님 나에게 주신 가락이 내 맘에 울려난다
주님 함께 거닐고 말하며 나를 주의 것이라네
우리 서로 나눈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어라
후렴만 다시~천천히 또박또박 :
주님 함께 거닐고 말하며 나를 주의 것이라네 (오 할렐루야!)
우리 서로 나눈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어라
여러분.. 바로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늘 우리와 함께 거닐고 싶으신 심정..그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에덴입니다
작은 에덴입니다
(에덴은 '기쁨'이란 뜻이지요)
하나님과 함께 있는 곳
하나님과 함께 머무는 곳
그곳이 에덴입니다
주님 나와 함께 거닐며
나와 속삭이고 말하는 곳
그곳이 에덴, 곧 천국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은 우리를 늘 돌보시지요.
목자가 양떼를 아끼고 돌보듯 우리의 모든 문제를 돌아보시기 원하십니다.
잠시 마르쿠스(마가) 복음서 8장 앞 부분을 묵상합니다.
그 무렵, 큰 무리가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긴다네.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사흘인데 먹을 것이 없으니까. / 또 내가 그들을 굶은 채 각기 집으로 돌려 보내면 그들이 길에서 쓰러질 터이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멀리서 왔다네." /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했다: "어떻게, 누가 이들을 빵으로 배부르게 할 수 있을까요, 이런 빈들에서?" /
주님께서 물으셨다: "자네들, 빵은 얼마나 갖고 있나?" 그들이 말했다. "일곱 개입니다." / 그래서 주님은 사람들을 땅에 앉도록 지시하시고 빵 일곱을 가져다 축복하셨다. 그리고는 떼어 제자들에게 나눠 주며 그들 앞에 놓도록 하셨고 그들은 무리 앞에 갖다 놓았다. /
또 그들은 몇 마리 작은 물고기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축복하시고 역시 그들 앞에 놓게 하셨다. /
그들이 배불리 먹고 나머지를 모으니 일곱 광주리였다. / 먹은 사람들은 약 4천명. 그리고 나서 주님은 그들을 돌려 보내셨다.
(맑 8:1~9 사역)
이 말씀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 우리를 늘 돌아 보시고 때로는 안타깝게,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그림처럼 잘 그려져 있지요. 사실 주님은 이보다 앞서, 5000명에게도 먹이신 적이 있습니다. 빵 다섯, 물고기 두 마리로 말이지요.
이처럼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온정으로, 돌보십니다. 불쌍히 여기십니다.
불쌍히..? 현대인들은 자존심이 대단합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교회마다 거의 가난한 교우를 돕는 구제부 또는 구호사역부라는 게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빈민들을 공개적으로 도와 주면 아주아주 싫어해요! 극비리에 갖다가 그것도 공손히 바치다시피 해야 받을까 말까 입니다.
또 되도록 좋은 걸 드려야 돼요. 물론 당연하죠. 좀 시시한 걸 갖다 주면 큰일 납니다. "내가 거지입니까, 이런 걸 받게!?" 하기 쉽다는 말이지요. 값싼 동정은 금물입니다. 주는 쪽과 받는 쪽, 양쪽 다 쉽사리 상처 받게 됩니다.
그럴 바에야 되도록 좋은 걸 미리 마련해서 갖다 드려야죠. 기왕이면 현금이 제일 좋습니다. 맘대로 쓰시라고. 그래야만 정말 진심으로 온정을 베푸는 줄로 안다..이겁니다. (물론 길가의 중독자들에겐 현금보다 식품이 좋지요.)
물론 가난한 분들을 우습게 보면 안됩니다. 나 자신처럼 소중하게 다뤄야 합니다. 아니, 경우에 따라 "가난한 사람"이라는 말조차 삼가야 합니다! 구호/구제란 말도 함부로 쓰지 말고. 웬만하면 그냥 '도우미'가 좋습니다.
우리 어릴 때는 한국전쟁 후라서, 미국에서 교회로 구호물자가 엄청 많이 날아 왔지요. 특히 성탄절 같은 때. 물자들이 다 새 것은 아니고 쓰던 것도 많았어요. 심지어 미군부대를 거쳐 온 크리스마스카드까지 무더기로 교회에 보내 왔으니까. 그때는 전쟁 통에 부모를 잃은 고아들도 참 많았습니다. 고아원도 많고.
저도 다니던 고향 교회를 통해서 구호물자 '맛' 좀 봤습니다만, 그땐 그게 그렇게 좋더군요! 오죽하면 아이들이 성탄절 찬송가 "기쁘다 구주 오셨네"도 "기쁘다 구제품 나왔네~!"로 빗대어 부를 정도였으니까.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응당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 한 가지가 오만한 마음씨입니다.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고 싶지 않아 했습니다. 함께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네 자신이나 불쌍히 여겨라"는 식의 태도였습니다.
물론 주님은 내심 그들도 불쌍히 여기셨지요. 그게 세상 영혼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심정이니까요.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니까 4천명의 무리가..그것도 (당대 관습에 따라) 여성과 아이들을 빼고 어림잡은 무리의 수가 4천명이라니 얼마나 큰 군중입니까. 오늘날로 치면 가히 중대형교회 규모지요. 그들이 사흘간 꼬박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는 겁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도 의자나 잠잘 곳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빈들에서 사흘동안 꼬박. 졸리면 그냥 누워 자는 겁니다.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요 삼고 팔을 베개 삼아. 완전히 야외수련회지요. 그러니 그들이나 주님이나 얼마나 대단한 열성입니까?! 그 정도로 주님의 말씀 듣기가 좋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사흘째가 되다 보니 각자 싸 온 도시락까지 동이 났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셨습니다. 비록 4천명 넘는 큰 무리지만 이들을 지금 그냥 보내면 배고파서 안 된다..가다 쓰러질라. 어떻게라도 배를 채워서 기운 차린 다음에 보내야지 - 이게 주님의 심정이었습니다. 온정의 마음이지요.
그런데 말이죠. 지난 번에 이미 벹새다에서 5000천명 넘는 무리를 먹이셨고 지금 거의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는데도 제자들의 보는 시각은 여전히 다릅니다. 아이고..이 엄청난 무리를 어떻게 우리가 다 먹인담?..얼른 집으로 보내서 식구들이랑 먹도록 해야지..이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보시는 각도와는 180도로 딴 판이죠.
주님: 먹여서 보내야 한다
제자들: 보내서 먹게 해야 한다
이 제자들의 문제는 말이죠..이미 같은 경험을 했는데도 주님의 마음을 잘 몰라준다는 데 있습니다. 이게 문젭니다. 믿음으로 체험을 했으면, 사건 자체는 혹 일일이 기억 못하더라도 당시의 믿음과 심경은 속으로 간직해야지요.
벹새다 광야에서 5000명 이상을 먹였으면, 주님이 지금도 맘만 먹으면(잡수시면) 그런 권능을 행하실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거 아닙니까? 지금 그때와 아주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는데도 딴 소릴 하고 있다 - 이겁니다. 제자들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도 자주 그러죠! 믿음망각현상, 기억부족현상이라고나 할까. 이게 문젭니다. 그래서 우린 자주 믿음의 증언/간증을 해야 합니다. 까 먹고 잊어 버리기 보다.
전처럼, 지금도 주님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럼 제자들도 당연히 무리를 불쌍히 여겨야 할 거 아닙니까? 단지 "다들 배고프겠다. 아무렴, 나도 고프니까" 차원이 주님처럼 "정말 사람들이 가다가 쓰러지겠다..뭘 해서라도 꼭 먹여 보내야지"여야지 않겠습니까? 정작 제자들의 마음이 이렇다면 믿음이 거의 없다고 봐야지요. 그렇지 않은가요.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광야에서 먹이신 게 어디 하루 이틀입니까? 그 옛날 구약시대 때도 성자님으로 땅에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안식일 빼 놓고 주중 6일, 날이면 날마다 만나와 메추라기 떼로 먹이신 분 아닙니까? 마실 물도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야말로 광야에다 식탁을 차린 분 아닙니까? 주님을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면 그런 권능을 행하실 수 있는 분임을 알아야지요.
문제는, 상대를 측은하게,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럼 그들의 시장끼를 먼저 해결해야겠고, 해결하려면 뭔가가 있어야 겠고, 믿음도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 한 가지,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무슨 일을 이루시기 위해선 그냥 무조건 하늘에서 번쩍, 쿵~! 하고 떨어뜨려 주시는 게 아니라 반드시 사람이 앞서 뭔가 희생하고 바칠 것을 기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내가 적당히 먼저 바쳐서 받아 내겠다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식 '도 우트 데스'(do ut des)의 원리와는 다른 겁니다. 그야말로 잘못된 기복주의이죠. 그건 주님께 삶을 맡기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려는 잘못된 태도이죠. 우린 이걸 잘 분별해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가진 빵, 너희가 챙겨놓은 음식, 너희가 "꿍쳐" 둔 건 얼마나 되냐고 물으십니다. 일곱 덩어리가 있다고..자수(?)합니다.
제자들은 아마도 여차 하면(=정 배가 고파지면) 무리를 일단 다 따돌려 놓고, 이 일곱 개로 주님과 모두 열 셋이 사이좋게 나눠 먹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주님 한 개 드리고 나머지 여섯을 둘 씩 쪼개 먹으면 딱 맞으니까요.
그런데 주님은 그걸 가져 오라고 하십니다. 너희들만 먹겠다는 심보를 고치고 나눠 주라는 겁니다. 내 것으로 챙기기 전, 내 걸로 꿍쳐 놓기 전 먼저 남한데 나눠 주겠다는 참된 온정과 희생의 마음을 갖게 되면..그 다음엔 믿음으로 역사가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심정입니다. 주님 자신도 희생을 중시하십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주님도 사람이신지라 지금 더 없이 피곤하고 갈증 나고 시장하실 터입니다. 사흘동안 계속 최소 4천명의 청중에게 있는 목청을 다해 말씀을 전하셨으니 오죽하겠습니까. 청중은 마냥 듣기만 하고.
그런데도 주님은 "아이고, 배고프다! 도저히 허기져서 안되겠다. 나부터 먹을 테니 나머지는 늬네들이 알아서 해라. 다들 보내고 자네들끼리 나머지를 나눠 먹든지.." 하시지 않습니다. 물론 충분히 그러실 권한도 자격도 있지만 그러시질 않습니다. 먼저 무리를 생각하십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아주 멀리서 온 사람들도 생각하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그렇습니다. 지금도 여러분과 저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친부모가 자녀를 아끼듯이 항상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에게 뭐가 부족한지를 살펴보십니다. 주리고 있지 않은지, 목 마르지 않은지, 너무 피곤하진 않은지, 우리를 늘 돌아보십니다. 물론 우리의 영혼을 먼저 돌보십니다. 영적 상태를 먼저 불쌍히 여기십니다. 마치 목자가 자기 양떼를 돌보듯.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 함께 거닐고 말하며 나를 주의 것이라네..
우리는 그 분의 것, 그 분의 자녀, 그 분의 소유물입니다. 그 분 목장의 양떼, 우릿간의 양들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범사에 우리를 챙겨주시지 않겠습니까? 모든 일에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지 않겠습니까? 할렐루야!
..My God shall supply all my needs
according to His riches in glory;
He will give His angels charge over me;
Jehovh Jireh cares for me, for me, for me
O Yaweh Yireh cares for me.
..주님 나를 돌봐 주시니
그 풍요로움 영광이 넘친다(필리포 4:19)
천사들을 보내어 지켜 주시니(시 91:11)
오 야웨 이레 돌봐 주시네 나를 나를
오 야웨 이레 돌봐 주시네(창 22:14)
야웨 이레는 날 돌보시고 필요를 따라 미리 마련해 두시는 주님이시라는 뜻이지요. 야웨 이레 늘 준비하셔서 공급하시는 주님이 바로 예수 크리스토 이십니다! 할렐루야.
구약의 하나님은 늘 헤쎄드(아가페)와 에메트(진리)로 행하신 분이시지요. 우리와 함께 하시러 땅에 내려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마음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불쌍한 사랑의 심정으로 다시 이적을 베푸십니다.
자, 우선 사람들을 나란히 줄지어 앉게 하십니다. 그래야만 빵을 나눠주기가 쉬우니까. 당대의 유대 식습은 주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누워 먹었으니까 다들 다리를 뻗고 옆으로 눕는 자세였겠지요.
그리곤 일곱 덩이의 빵을 갖다가 하늘을 우러러 축복하시고 떼어서 나눠 주시는데, 제자들이 사람들 앞에 갖다 놓는 족족 계속해서 끝도 없이 빵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남자만도 4천명이 넘는 큰 군중이 모두 하나도 빼 놓지 않고 배불리 먹고도 일곱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빵만 먹으면 목이 막히기 쉽지요. 반찬도 있어야 좋지요. 그래서 누가 가져 온 생선 두어 마리를 역시 축복하시고 역시 나눠 주시니 4천명이 다 먹고 남기까지 물고기가 계속 돌아가는 겁니다.
이전에 5천여 명을 먹일 때는 소년이 갖다 바친 5병2어(빵 다섯, 물고기 둘)로 이적을 행하시어 다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았지요. 7과 12 - 둘 다 완전수이지요. 이처럼 주님은 모두를 위해 완전히 행하십니다.
주님은 하늘에서 내린 생명의 양식, 삶의 만나이십니다(요복 6:47~51, 6:22~59도 참조). 그분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습니다. 태어나신 곳도 베틀레헴(Beth + lehem)-'빵집'입니다! 더구나 양들을 먹이는 구유 안에 태어나셨습니다. 자신을 주어 양떼를 먹이러 오신 생명의 먹거리, 빵이십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그 양식을 먹여 주기를 늘 바라십니다. 목자가 넓고 푸른 풀밭에서 양떼를 먹이듯 우리에게 말씀의 양식을 먹여주기를 원하십니다. 잔잔한 물가로 이끌듯 우리에게 생명수를 먹이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더러도 남에게 이웃에게 말씀의 양식을 나눠 주라고 하십니다. 무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우리도 가지라고 하십니다. 나만 배불리 먹을 게 아니라 남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지니라고 하십니다. 내게 있는 것을 희생시켜서라도 남을 돌 볼 생각을 하라고 하십니다.
무엇보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길 원하십니다.
에덴에서 첫 사람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은 동시에 우리와 함께 하러 내려 오신 임마누엘이십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늘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목자처럼 양떼를 거느리고 이끌고
먹이고 마시우는 님!
생명의 떡
하늘의 만나
그분이 바로 예수 크리스토이십니다!
이 분을 내 이웃과 주변에 전합시다.
그래서 그들도 생명의 양식을 먹게 합시다.
이 양식을 못 먹고 주려 죽어 가는, 지옥 불못으로 내닫는
이웃의 영혼들을 불쌍히 여깁시다.
주 예수 크리스토의 은총과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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