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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의 지난 칼럼들/은강의 순례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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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많네.. 느린 속도로 한 장씩 밀려 나오는 종이를 보며 나는 생각한다. 한 권으로 묶어질까?
안 되면 나눠서 해야지 뭐, 그렇지만 한 권으로 정리가 되면 좋겠다. 자료도 쌓이면 귀찮아진다. 많아지면 오히려 손이 안 가서 덜 보게 된다.  
보고 있는 사이에 프린터가 마지막 장을 토해 낸다. 명령을 무사히 수행한 프린터가 더그르륵 끼르르륵 카트리지를 제자리로 보낸다. 덜커덕 뭔가가 내부에서 닫히는 소리, 그리고 침묵. 사방이 고요하다.  
 
그가 묻는다.
 
[이 아름다운 서사시는, 도대체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요?]
 
'이 아름다운 시'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으니, 그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의 안에서 생겨난 것은 생명이었으니, 그 생명은 모든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요 1:1~5 표준새번역)
 

5절까지 읽고 멈춘다.
그가 말하는 아름다운 시란 요한복음의 서시다. '이 아름다운 서사시'는 18절까지 계속되지만 나는 이미 초입부터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마찬가지다. 같은 부분을 두어 번 되풀이해 읽어봐도 별로 다르지 않다. 언어적 감수성이라면 나도 설마 평균은 넘지 싶은데 이건 감이 오지 않는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상동, 개역개정)      
 
 
번역의 문제일까? 다른 역본으로 다시 읽는다.
그래도 다를 바 없다. 이게 아름답다고?
말씀이 있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고 말씀이 하나님이고.. 아무리 서사시라지만 시작부터 이런 동어반복의 연속이라니, 긴장감은 떨어지고 덕분에 촌수는 헷갈린다. 말씀에 하나님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말씀이 하나님이라는 건지 말씀은 말씀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라는 건지 하나님이 말씀이라는 건지, 말씀의 의인화인지 일종의 상징인지, 아름다움은 모르겠고 머리 복잡해지는 것만 알겠다.     

이리도 아름다운 시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이냐고 그는 묻고 있는데 나는 정작 시적감흥도 채 일지 않고 있으니, 정답을 찾기는 애시당초 그른 모양이다.
 
[이미 다 알고 계시는 내용입니다.]
 
그가 말했었다. 요한복음의 파일을 보내주면서 그렇게 덧붙였다.
다 알고 있어? 아름다운지조차 모르겠는데 뭘 다 알아? 아무래도 그는 나를 과대평가했다.
하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과 문제의 해법을 찾는 것은 별개이긴 하다. 공감은 못 하더라도 문제를 풀 수는 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것은 별개로 하고, 이 서사시가 왜 여기에 있느냐, 이게 문제다. 왜 있지?      
요한이 그렇게 쓰고 싶었나 보지, 아 왜 시작할 때 폼 좀 잡으면 근사해 보이잖아.  
그래도 뭔가 이렇게 쓴 이유는 있었을 거 아냐.  
이 시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이 있었나 보지.
그러니까 글쎄 그게 뭐냐고.  
......
 
망할, 첫 쪽부터 이렇게 막히면 어쩌란 말이냐.
프린터가 쏟아낸 종이를 모아 추스르며 첫 쪽을 들어 눈 가는 대로 읽다가, 나는 그만 김이 빠져 내려 놓고 만다.
 
네 귀를 맞추어 챙겨놓은 인쇄물은 제법 양이 많다. 한 권으로 될까.  
스태플러를 꺼내어 조심스레 찍어 본다. 안 된다. 아래 부분이 침에 꽂히지 않아 반듯하게 맞추어 놓은 귀가 어긋나 버린다. 역시 무리인가. 스태플러의 침과 인쇄된 용지의 두께를 번갈아 쳐다보며 가늠해 본다. 잘 하면 될 것도 같다. 어긋난 귀를 다시 맞추어 재도전을 한다. 이번에는 과감히 단번에 스태플러를 콱, 누른다. 이크, 종이를 뚫기도 전에 침이 휘어져 버린다. 힘이 넘쳤다. 포기할까? 반씩 나누어 둘로 묶어? 그렇지만 정황이 영 터무니없지는 않다. 포기하기에는 아쉽다. 그래도 하나가 낫지. 다시 스태플러에 힘을 준다. 들어가는 듯 하다가 또 휘어져 버리는 침.
오기가 난다. 좋아 누가 이기나 해 보자구.
신중하게 힘을 조절한다. 실패를 바탕삼아 힘을 어림잡아서는, 그 힘을 유지한 채 지그시 누른다. 아 들어간다. 침이 종이를 뚫는 느낌, 성공 예감, 다 들어갔지 싶은 순간에 마지막 힘을 준다. 됐다, 성공이다. 일단 고정은 됐다. 뒤집어서 침을 하나 더 박아 넣는다. 한 번 성공하니 두 번째는 쉽다. 탄탄하다. 
 
요한의 이야기, 맨 앞 장 맨 위에 그렇게 쓰여 있다.
요한의 이야기? 요한에 대한 이야기인가 요한이 하는 이야기인가.
뻔히 알면서 괜한 시비를 한 번 건다. '아카데미' 후유증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에 관한 강의를 파일로 보내 주었다.
교육용 자료로 전에 만들어 놓은 것이라 했다. 그걸 읽으면서 요한복음을 다시 정리해 보라는 의미였다. 나는 기쁘게 받아 인쇄를 했다.  
그동안 성경을 모니터로 읽었다. 그의 강의도 모니터로 읽었다. 그 밖에 간단한 자료도 모니터를 통해 해결했다. 그러다 보니 눈에 느껴지는 피로감이 이미 일정 수준을 넘고 있었다. 틈만 나면 눈이 감겼다. 크게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눈에 오는 이런 종류의 피로감은 처음이었다. 눈을 너무 혹사했나 보다. 그동안이야 모니터로 읽을 밖에 다른 수를 내기 어려웠으나 이건 파일로 된 강의록이니 종이에 인쇄해 찬찬히 읽어 볼 심산이었다.   
 
종이는 모니터에 비해 정겹다. 그야말로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다. 반사광도 없다. 이동도 가능하다. 얼마든지 들고 옮겨 다닐 수 있다. 심지어 움직이면서도 읽을 수 있다.
모니터는 나를 많이 구속했다. 모니터는 힘이 세다. 종이는 나를 구속하지 않는다.  
이동이 자유롭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나는 스태플러로 고정시킨 인쇄물을 들고 거실로 나간다. 소파에 깊숙히 앉아 눈으로 종이를 본다. 인쇄된 검정 글자가 오랜만이야 인사를 한다. 반갑다. 아무래도 나는 종이책 체질인가 보다.     
 
요한의 이야기.
요한, 사랑의 사도라고 했던가.  

그는 요한을 좋아했다. 많이 좋아했다.  
요한복음 곳곳에서 요한과 동행하면서, 요한이 보는 것을 함께 보았고 요한이 듣는 것을 같이 들었다. 요한복음을 읽을 때면 그는, 요한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이 강의록을 일찍 보내주지 않은 것은 님의 자유로운 사고에 영향을 줄까 봐 염려가 되어서였습니다.]
 
나는 이미 요한복음을 읽었다.
그 때 그는 이 강의 파일을 보내주지 않았다. 이런 것이 있노라는 언급도 하지 않았다. 내 자유로운 사고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다는 거다. 이제는 읽어도 되리라 여겨지나? 지금은 읽어도, 내 자유로운 사고가 강의록의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 생각되나?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좀 다릅니다. 다른 세 권의 복음서가 비슷한 사건과 설교 내용을 담고 있어 공관복음이라 불리는 데 비해, 요한복음은 요즘 말로 단독 특종 기사를 많이 싣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이 공관복음의 내용을 알고 있었으리라 추정하는 열쇠가 됩니다. 즉 요한은 이미 알려진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피했던 것이지요.]
 
요한.. 요한.. 성경엔 도대체 웬 요한이 그리도 많은지, 우리 식으로 하자면 철수나 영수쯤 되는 보다. 마리아는 영희쯤 되나?  
그에겐 친구 같다는 요한, 그의 친구라면 어쩌면 나도 낯가림은 안 해도 될 거 같긴 한데.

복음서 네 권 중 가장 늦게 쓰여진 책이 요한복음이라고 했다. 그러니 굳이 그의 해설이 아니더라도, 요한은 복음서를 쓸 때 이미 나와 있는 세 권의 복음서에 대해 알고 있었으리라. 필사를 하던 시절이었으니 책은 귀했겠지만 요한의 위치 요한의 관심으로 그것을 몰랐을 리는 없다. 공관복음과 비슷한 내용이라면, 상식적으로 한 권 더 쓸 까닭이 없다. 그래서 관점을 달리한 복음서를 썼나 보다. 그는,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쓰여진 것이라 했지만 어쨌거나 직접 쓴 건 사람이니까. 
      
익숙한 말투로 그가 계속 이야기한다. 그가 말하는 방식에 나는 이미 길들여졌는가.
 
[이 공부의 목적은 요한복음을 외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의 삶에 필요한 감동이나 교훈을 얻으려는 것도 아닙니다.]
 
미치겠다, 이 진지한 내용 앞에서 오래된 광고 카피 따위가 왜 생각이 나는 걸까.
이 소리가 아닙니다, 이 소리도 아닙니다.. 오래 전 나왔던 모 제약회사의 제품 카피였다. 카피 때문에 그 약은 성공했다. 기관지가 안 좋던 아버지도 오랫동안 그 약을 복용했다. 약 심부름 다니던 기억이 난다. 포장도 생각난다. 용기도 생각난다. 가격은 생각 안 난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자리가 편하니 생각이 느슨해지나.  
 
[성경이 제시하는 세계관을 발견하고, 우리 자신의 생각을 말씀에 맞도록 새롭게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강의록을 작성한 목적을 그는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세계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결국 가치관이다. 내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어떤 관점으로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가. 어떤 생각을 토대로 바라보는가.  
 
성경적 세계관은 뭐지?
성경은 어떤 가치를 기반으로 세계를 바라보나?  
모르겠다. 나는 성경에서 말하는 세계관이 어떠한지 아직 잘 모르겠다. 복음이 어떻게 세계관과 연결이 되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라고?
후우, 한숨이 나온다.
그는 뭔가 대단히 잘못 알고 있다. 나는 온통 모르는 것 투성이다. 아는 게, 정말로, 없다. 아는 게 없어서, 모르는 게 무엇무엇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말했다. 내 자유로운 사고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아서 이 파일을 일찍 보내지 않았다고.
자, 냉정하게 생각하자. 나는 요한복음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지? 얼마나 알고 있나?
 
기록자가 요한이라는 거?
공관복음이 아니라는 거?
온갖 비유가 등장해 나를 괴롭혔다는 거?
예수의 마지막 장면에 책의 상당한 분량을 할애했다는 거?
요한이 무척 사랑받은 제자라는 거?

이런 것을 아는 것이 요한복음을 아는 것인가?
그의 해설을 읽으면서, 나 자신의 생각을 부분적으로라도 놓치지 않고 지니고 있을만큼 요한복음을 알고 있나?  

참 내, 말도 안된다. 대체 내가 요한복음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단 말이냐.
섬세하게 하나하나 읽지도 못했다. 언어적 의미나 해독하면서 전체적으로 몇 번 읽었을 뿐이다. 자유로운 사고라니, 어림도 없다. 그럴만큼 요한복음을 알고 있지 못 하다. 단편적인 몇 가지나 겨우 기억하고 있다.

당장 강의록 처음부터 막히고 있는 것을. 
그에겐 아름다운데 내게는 못 아름답고, 왜 여기 있는 것이냐고 부담없이 그는 묻는데 나는 감도 잡을 수 없다. 
 
별 수가 없다.
다시 읽어야 할 것 같다.

이렇게도 준비 없이 그의 마지막 강의를 읽을 수는 없다. 이건 그에 대한 예가 아니다.
그가 보낸 강의록, 프린터로 뽑아 여러 번 시도 끝에 가까스로 스태플러로 눌러 놓은 인쇄물을 잠시 접어둔다.

다시 읽어 보리라.
내 힘으로 요한복음을 좀 더 읽어 보리라. 
그런 후에 그의 강의와 만나 보리라.
그 때 비로소, 강의를 통해 그와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다시, 모니터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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