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애독자의 지난 칼럼들/은강의 순례여정

1 - 3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무개 학생, 여기 있습니까?"
 
시원시원한 걸음걸이로 들어와 출석 확인도 할 거 없이 곧 바로 강의를 시작하려던 교수가, 아차 생각났다는 듯 우리를 둘러 보았다.
 
어, 누구?
잠시 잠깐 나는 혼돈에 빠졌다.
나? 나를 왜? 내가 뭘?
재빨리 머리를 회전시켜 봤지만 감은 전혀 잡히지 않았다. 내 이름조차 알 까닭이 없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낮은 잡음이 들리나 했더니만 이크, 손 하나가, 내가 궁금해 하는 사이에 슬그머니 올라가고 있다!  
앗, ㅈ, 안 돼 안 돼, 나 여깄어, 지금 출석 부르는 게 아니잖아, 마음이 급해졌다.
 
"전데요!"
 
마음이 급해지니 목소리가 커졌다.   
손을 반쯤 올리던 ㅈ이 움찔 돌아 보고는 한 눈을 찡긋, 했다. 되돌리는 뒤꼭지에 끼들끼들 웃음이 가득했다.
으이그 고맙긴 하다만 쫌만 참지, 이 시간은 내가 안 빠지는 거 아직도 모르냐.  
 
"아, 여학생이었습니까..."
 
이런 또 듣네, 아 이게 왜 내 탓이냐고, 내 이름을 글쎄 내가 지었냐고,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냐고.  
아버지는 딸 이름을 어쩌면 이렇게 창조적으로 지었을까. 아들 셋 다음에 일명 '양념딸'을 얻었으니 서운할 일도 없었으련만, 어떻게 아들들에게서도 찾기 드문 희귀한 이름을 딸에게 줄 생각을 했는지, 어디서 소개라도 할라치면 도무지 한 번에 넘어가기가 어려웠다. 상대가 못 알아 들어 세 번 네 번 반복하고 그래도 안 되면 적당한 단어를 이용해 한 글자씩 풀어주어야 알아 들었다. 이름이 특이하네요, 그러고 나면 한 마디씩들 했다. 그 작업이 얼마나 불편한지 아버지는 생각도 안 해 봤으리라. 하기는, 할아버지 작품이라는 아버지 함자도 독특하긴 매한가지니 어쩌면 내림이었나.
 
대학은 재미없었다.
예의 그 '아카데미'로 이미 상당히 고급스레 훈련된 내 귀에, 지방 국립대의 나이 많은 인문학부 교수들의 강의는 대부분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전혀 지적이지 않았다. 그들의 실력까지야 속속들이 알 수 없었지만, 교수력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연구는 가능한지 몰라도 가르치는 재능은 별로 있어 보이지들 않았다.
 
이게 뭐야, 큰 대 배울 학, 크게 배운다는 곳이 뭐 이래, 꽃도 피기 전에 마음은 시들해졌다.  
고등학교 때 수업이 오히려 나았다. 실력있는 몇몇 선생님들의 수업은 잘 짜여진 한 편의 오픈 드라마였다. 때로는 배우로 때로는 관객으로, 우리는 기꺼이 드라마에 동참했다.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교실에서 나가면 우리는 비로소 숨을 쉬었다. 한 시간 동안 숨 한 번 안 쉬고 공부한 기분이었다. 숨을 한 번 고르고 난 다음에야 우리는 재잘재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서울로 갔어야 해.. 그러나 차마 우길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오빠들 만으로도 이미 힘에 부쳤고 나는 그 사실을 넘치게 알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조르는 데에는 별로 소질이 없는 나.  
 
공부에 흥미를 잃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재미없는 강의를 밥 먹듯 빼먹는 나를 위해, 어쩌다 교수가 출석을 부르면 눈치껏 대신 대답해 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주로 남학생들이었다. 그럴 때면 내 이름은 아주 쓸모가 있었다.
그 날도, 내가 얼른 나서지 않으니까, 안 들어왔나? 주로 일선에서 해 주던 ㅈ이 손을 들던 거였다.  
그렇지만 그들이 눈치를 못 채서 그렇지, 나는 그 강의는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여기 혹시, 누구, 빠리에 가 봤습니까?"
"그 기가 막힌 빠리의 뒷골목들, 생각나는 학생 있나요?"
"지중해의 하늘을 본 적이 있습니까?"
 
어느 날 연이어 우리를 향해 물어 왔었다. 저런 기 죽기 딱 좋은 질문을 던져 놓고 강사는, 진심으로 우리 중 누군가의 호응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무슨, 빠리 뒷골목? 뭐, 지중해의 하늘?
70년 대 그 암울했던 시절, 절대로 범상할 수 없는 질문을 지극히 범상하게 하는 그 비범상함이 부러워, 나는 그 날 내내 쓸쓸했었다.    
인간의 사회화에 대해 강의를 하던 중이었을 거다. 유럽 유학파 출신답게, 듈껭에서 시작해 프랑스를 거쳐 지중해로 가더니, 어느 순간 얼굴에 향수 비슷한 기운이 감돌면서 자연스럽게 꺼낸 질문이었다. 요 옆 동네 가 봤습니까? 표정은 그랬다.
 
가끔, 자주는 아니었다, 가끔 그런 식으로 우리 자신을 연민하게 만들었던 그 교수는 사회학 전공의 시간 강사였다. 내가 교양과목으로 그 강의를 신청한 것은 그나마 선견지명이 작용한 셈이었다. 강의가 좋았다. 때로 우리 기를 죽이는 예의 그 화법에도 그리 큰 거부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더러는, 차라리 흥미로웠다. 칙칙하고 우울한 회색빛 강의들 속에서 그것은 드문 자극제였다.   

"이번 시험의 답안이 아주 훌륭합니다."
"?!....."
 
 
민망해 혼났던 오래 전 기억.
그 때 그 강사는 이듬 해, 어디 국립대학교 전임이 되어 떠났다. 그럴 줄 알았다, 시간 강사로 오래 있을 듯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 날 강의 끝나고, 몇몇이 몰려와 소위 '야지'를 얼마나 놓아댔던가. '땡땡이'는 혼자 다 치면서 호박씨는 또 따로 까고 있었다는 거지. 그 때 그 '야지'꾼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을까.  
 
답안이 훌륭했다고? 그렇지.. 공부, 많이 했었다.
그 과목의 시험 공부는 재미있었다. 그러니 대충 이해만 하는 걸로 끝내지지가 않았다. 읽고 이해하고 외우고 관련 자료도 찾아 읽었다. 나보고 그 부분을 강의를 하랬다면 그것도 아마 가능했을 것이다. 흥미있는 공부는 적당히가 안 되는 법이다.   
서술형 문제 두 개였나, 아는 대로 쓰시오. 당시 시험 문제는 거의 그런 식이었다. ~에 대해 아는 대로 쓰시오.  
나는 나의 언어로 답안을 썼다. 강의해 준 내용 그대로 쓰지는 않았다. 출제자의 취향이란 게 채점 시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미처 생각 못 하고, 공부한 게 아까워서 들은 대로만 작성할 수는 없었다. 소화한 강의를 바탕으로 내 식으로 재구성해 답안을 썼다. 다행히도 그게 썩 마음에 들었던 거라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생각했었다.
내 젊은 날의 여덟 학기 중 아마 가장 좋은 점수를 받은 게 그 과목 아니었을까. 그 학기에 어느 과목인가는 겨우 줍기도 모자라 급기야는 흘리고야 말았었다.  
 
나는 왜 그리 좋은 강의에 목말라 했던가.
지금도 남아있는 그 갈증.  


그는, 나에게 A+의 학점을 주었다.
나는, 그에게 강의 평점 만점을 주었다.

당연히 A+ 이라고, 그는 말했다. 최고의 학생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사양했지만 그는 단호했다.
그리고는 정작 자신의 평점은 사양했다. 만점은 자신에게 과하다 말했다. 그렇지만 나도 단호했다.

그렇게, 만점과 A+을, 주고 받았다.
시험 한 번 치르지 않고 리포트 한 쪽 내지 않고, 학점만 받고 나는 종강을 맞았다.
단 한 명의 학생과 단 한 명의 강사가 서로에게 최고점을 준 채, 짧은 계절학기가 그렇게 끝났다.
내 생애 가장 짧은 학기였다.    


그리도 기승을 부렸던 더위가, 조금, 아주 조금 물러서 있었다.

'애독자의 지난 칼럼들 > 은강의 순례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1 - 5  (1) 2008.02.03
1 - 4  (0) 2008.01.29
1 - 2  (13) 2008.01.22
1 - 1  (0) 2008.01.20
들어가는 기도  (7) 2008.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