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보기 원하느냐?"
"사로잡혀" 천국에 올라갔다는 (신사도 계열의 독립 교단을 주도하는) K 교회의 어느 교인은 "무엇을 보기 원하느냐?"는 '주님'의 3회 질문에 응해 차례로 생명책, 아브라함, 제자 요한을 보기 원한다고 했고, 차례로 그대로 이뤄졌단다. 천편일률적인 다른 간증에 비해 약간 특이한 흐름인데, 내용인 즉 역시 황당한 부분이 많다.
"무엇을 보기 원하느냐?"는 물음은 "내가 그대에게 무엇을 해 주길 바라오?"라고 하셨던 주님의 질문 군(群)을 차용하지 않았나 싶다(마르코스복음서/맑 10:51, 루카복음/뤀 18:41). 즉 딴 성구를 슬며시 빌린 듯한 말투다.
이 입신자는 '생명책'의 한 쪽에 많으면 '3개', 적으면 '1개' 씩의 이름만 적혀 있다는데, 과연 그런 지 어떤 지는 훗날 우리가 하늘에서 확인해 볼 일이다.
그 다음..빌 해먼 집회를 다녀오면서 "믿음으로 성취하라"는 메시지에 마음이 갈급해진 상황에서 입신 때 "만난" 아브라함이 "나는 실제로는 믿음의 삶을 산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입신자에게 '고백'했단다. 그 까닭으로는 두 번 아내(사라)를 '부인'한 일, 이슈마엘(이스마엘)을 낳은 일 등이 떠올랐단다. 이것은 미안하지만 거짓말에 가까운 말이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아내로서 '부인'한 일도 없거니와 인간은 살아가노라면 누구나 실수와 흠이 생기는 법이며, 그것 때문에 당초 가진 믿음이 폐기 처분되진 않는다는 것이다.
아브람은 분명히 처음에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카나안으로 가라 하실 때 순종했고 후에도 계속 믿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의가 된 것이다(창 12:1-8 참조, 13:6, 롬 4장 전체 참조). 그리고 하가르(하갈)를 첩으로 들여 이슈마엘을 낳은 것은 아브람의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카나안 정착 10년 후 사라가 그것을 원했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상황이었다.
입신자의 주장과는 달리, 성경의 증거는 이렇다.
"아브라함은 소망이 전혀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네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자기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을 믿고 소망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백 살이나 되어 거의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게 되었고, 사라도 나이가 많아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불신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약속을 굳게 믿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능력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롬 4:18-23 쉬운성경)
즉 불가능과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해지지 않았고 불신하거나 의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굳게 믿었고 확신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이 "실제로 저는 믿음의 삶을 산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한 입신자에게 '고백'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의로 여기시고 인정해 주신 믿음을 한꺼번에 부정함과 다름 없는 소치다. 이런 걸 가리켜 거짓 겸손이라고 한다. 천국(?)에서 이런 거짓 겸손을 보인 이 '아브라함'은 진짜일 수가 없다. 그런데도 이 입신자는 그 거짓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전이'를 원하여 안수를 받았다고 한다. 고인의 영들로부터 다양한 것들을 '전이'해 받는다는 것이 신사도운동자들의 특징이다. 즉 이 입신자는 아브라함을 가장한 친숙령에게 안수를 받은 셈이다. 그렇게 해서 믿음이 전이될 수 있다면야 누구든 입신을 하려고 들 것이다.
이 입신자의 정격성은 갈수록 자동 부정된다. 그 다음으로 그가 평소 남달리 생각하며 보기 원했던 '제자 요한'을 만났는데, 그 첫 마디는 "계시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습니다"란 것이었단다. 철학적인 것 같으면서 모호한 말이다. 어떤 계시의 삶? 계시를 따르는 삶?
그 다음 이 입신자의 말을 보자. "– 아마 제가 요한에 대하여 가진 이미지는 <주님의 무릎에 기댈 만큼 주님과 가깝고.. 또 사랑을 받으며 주님을 사랑한 분, 그리고 하늘의 기이한 계시들을 받아 계시록을 작성한 분>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중략)..<주님의 무릎을 벤 주님과 가까운 주님을 사랑한 자>라는 저의 생각을 아는 듯.."
주님의 무릎? 그 무릎을 요한이 베고 누웠다고? 성경엔 분명히 요한이 주님의 가슴에 기대었다고 했다(요복 13:25, 21:20). 그럴 수 있음은 물론 주님이 어린 요한을 사랑하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유대 식사 관습 상 다들 오른 쪽 옆으로 비스듬히 누웠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마지막 만찬'은 당대 유대식 식습이 아니다! 입신자들의 성경 읽기와 이해 수준이 발각되는 대목이다. 모든 것을 자동으로 밝히 알게 된다는 천국 입신의 깨달음과 이해가 이 정도인가? K교회 측이 구태여 "무릎을 베고"를 "가슴에 기대어"로 고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성경보다는 이 입신에 정통성을 부여하려고 했든가 아니면 성경을 잘 몰라서든가.
이 입신자가 누군지(카톨맄 사제 출신?)는 모르나 '아브라함'처럼 '요한'도 참회 비슷한 것을 고백했단다. 이 입신자 앞에서 문제의 '요한'이 읊었다는 참회록 내지 고백성사(?) 같은 걸 들어 보자.
“나는 순탄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30대까지의 어부의 삶도 그랬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의 시기도 그랬고, 또 복음의 핍박을 받으며 지낸 사도의 시기가 그랬고, 밧모 섬에 갇혀 유배의 생활도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밧모 섬에서 계시를 받아 기록한 것만을 기억하지만, 그곳에 갇혀 지낸 시간도, 그리고 죽음을 당하기 까지 편하고 순탄한 삶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 '요한'이라는 존재는 이 입신자 앞에서 '순탄하지 않은 삶'이란 말을 세 번 연거푸 하고 있다. 이건 요한이 했다기보다 고백을 받은 입신자 자신의 입버릇으로 붙은 평소 관용구이든가 생각이 아니었을까? Well..모든 사도들과 초기교인들은 누구나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그런데 요한만 유달리 그것을 강조할 이유를 우린 성경에서 찾지 못한다. '30대까지' 어부생활을 했다는 말은 30~39세 중 어느 기간으로 포함될 수 있는 말이다. 아마도 이것은 30세까지 목수 생활을 했던 예수님의 경력에서 유추한 듯 하다. 그런데 이 말도 엉터리다! 왜냐 하면 갓 서른 살 된 예수님이 12 제자들과 공동생활을 할 당시 요한은 형 야코보와 함께 어업생활을 뒤로 하고 주님을 따른 가장 어린 제자였는데, 예수님이나 다른 11 제자들보다 더 어린 그가 어떻게 예수님과 동갑나기인 30살까지 어부생활을 했겠는가? 그러므로 이 입신간증은 말짱 엉터리요 거짓말이거나 가짜 아브라함, 가짜 요한을 만났다는 결론이 된다. '복음의 핍박'이란 말도 문법적으로 말이 안된다. 복음이 핍박을 가한다는 말인가? "복음 때문에 받는 핍박"이어야 한다. 아무리 전직 어부였다지만, 요한이 그런 엉성한 문법을 썼을 리가 없다.
이 입신자는 입신 도중 이 '요한'의 고백과 함께 (멜 깁슨의 문제작 영화) '크리스토의 수난'에서 요한이 도망가던 한 장면이 오벌랩 되어 떠올랐단다. 그렇다면 천국에서의 입신 도중 깁슨의 문제작 커트가 활용됐다는 얘기가 된다. 깁슨의 이 영화는 매우 비성경적이며 중세 수녀 안나 카타리나 에머맄의 리얼한 입신 간증을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출'식 잔혹/리얼기법을 모방해 리사이클링한 것이다.
'요한'의 참회를 계속 들어 보자.
“ '제가 만일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하였다면, 그 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결박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예수님의 십자가까지 좇은 자로 사람들은 기억하지만, 저는 그 수많은 기회에도 예수님을 당당하게 시인하고 함께 고통을 당하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저를 예수님을 사랑한 자로 기억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라고 말하는 요한의 표정에는 그 당시를 후회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읽혀졌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예수님 사랑함을 전이 받고자 안수를 부탁했을 때, 제자 요한이 제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하여 주셨습니다."
만약 요한이 이토록 후회하고 부끄러워 일개 한국인 입신자 앞에서 참회할 일이라면, 고대 당시 주님의 고난과 부활 속에서 이미 뉘우치고 잊었거나 오순절 성령강림 때 또는 파트모스(한글 성경 '밧모') 섬에서 충분히 참회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 입신자가 한 가지 빠트린 중요한 사실은 요한은 여느 제자와는 달리 주님의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가 마리아를 돌봤다는 것이다(요 19:26,27). 비록 요한이 일시 두려움 탓에 달아났는지 몰라도 십자가 아래까지 주님의 어머니 곁에 서 있었다는 사실은 비겁이 아닌 용기가 아닌가!
그런데도 그 '부끄러운' 추억을 천국에서 현재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간직하며 입신자에게마다 참회한다면 '문제아' 요한이 아닐 수 없다. 주님이 이미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다 용서해 주신 것을 천국에서도 길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인데..필자는 그런 요한을 진짜 요한으로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아브라함과 요한의 현재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신들의 믿음의 결과다. 그렇다면 은혜에 감격하고 찬양하며 살아 갈 일이지, 천국에서까지 과거를 시시콜콜 기억하며 천국 방문자들에게마다 매번 참회고백을 해 가며 괴로워 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 입신자의 간증은 대상에 대한 자신의 철학적(?) 고찰이나 여기저기서 주워 들은 얘기를 종합하여 꾸민 게 아닌가라는 의혹이 자연스레 일게 된다.
그는 이어서 '지옥' 구경을 하면서 두려워 떨다가 '주님'의 눕히심과 천사들의 '만짐'과 먹임, 그리고 B 전도사의 안수와 B 목사의 안수 등으로 다시 지옥에 이른다. 지옥 입구에서 싸탄이 그에게 악한 대적의 말을 한다. 그 다음으로는 불구덩이 지옥이 빙벽이 변해 가더란다. 당시만 그랬는지 현재도 빙벽인지는 모를 일이다. 비유적 비화이다.
또 지옥의 공중에 박쥐 같은 새가 날아 다니더니 입신자를 공격하려 들었는데, 이 새는 뾰족한 입으로 사람들의 눈과 살, 가슴을 쪼아 찢어 발긴다고 한다. 그래선지 주변엔 안구가 빠져 나와 대롱대롱 매달린 사람, 입이 불에 데어 문들어진 사람, 두 귀에 다이너마이트 폭탄꾸러미를 달고 있는 사람(폭발하면 부위가 찢어져 조각이 나서 흩어진단다) 등이 지옥에 보였다고 한다.
물론 성경엔 전혀 없는, 상상조차 잘 안 가는 내용이다. 성경대로의 지옥은 구더기도 타 죽지 않는 유황불이 타 오르는 영원히 목마른 불못일 뿐 더도 덜도 아니다. 그런데 거기 아닌 밤중 홍두깨 격인 다이너마이트가 왜 필요한가? 어디서 제조된 다이너마이트인가?
그런데 그런 지옥을 아래로 내려다 보며 피눈물이 맺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단다.
"나는 이것을 계속적으로 지금까지 몇 천 년을 한 순간도 놓지 않고 보아야 했단다. 이것을 보기를 결단해 준 것이 고맙다. 나와 아픔을 공유하길 원해 주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참 난감하기가 그지없다. 천국 보좌에서 하늘 대사제(대제사장)로서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버지 앞에서 늘 중보하시느라 바쁘신(?) 예수님이 지옥 구덩이를 몇 천 년간 한 순간도 놓지 않고 지켜 보시며 피눈물을 흘리셔? 주님이 지옥 문지기나 지옥감독관이시라는 뜻인가?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옥을 감시하시며 입신자들과 아픔을 공유하셔? 이미 영멸할 자들이 던져진 그 곳을 주님이 왜 피눈물로 지켜 보셔야 하는가? 이 입신자는 전혀 근거 없는 책임을 주님께 뒤집어 씌우고 있다.
이 입신자의 간증에서는 또 지옥의 영혼들과 여유 있게 '대화'하는 장면이 있는데 불못 구렁 저 편에 있던 낙원에서 부자를 대상으로 한 아브라함이라면 모를까, 일개 입신자로서는 전혀 불가해 보이는 황당한 내용들이다.
그 다음은 다시 천국에 올라와 눕혀져 '단 물복숭아'를 먹고 나서 들려 올려진 곳에서 다시 만난 주님은 주일에 간증된 '낫'의 기능에 대해서 '삭' 베든지 '사사삭' 베든지 강약의 조절을 주님이 하시는데, 낫의 날이 최상으로 유지돼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단다. 천국의 낫이 늘 최상이 아닐 수도 있는가? 그 낫의 날카로움은 인간의 전폭적인 신뢰와 순종에 의해 유지된단다. 그럴 듯 하지만 성경엔 없는 말이다. 이 낫을 들고 시범적으로 베는 사람이 (K교회의) B목사이고 그 뒤엔 커다란 '자동추수 기계차'가 여러 대 일렬로 서 있었단다.
이런 입신자들의 간증에서 공통되게 느끼는 점은 충격을 받아 힘이 빠질 때, 천사들의 만져 주기(천국 머사지?)와 잠 재우기, 먹여주기 등 지상과 똑 같은 일종의 원기회복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 천국이 늘 완전한 곳이라고 인식해 온 우리들에게 이런 점은 매우 의아스럽게 해 준다.
물론 대언자들도 그랬지 않냐는 주장을 할 텐데 대언자들이 계시를 기록할 때 모두 천국이나 지옥에 있었던 것은 아니잖나?
이 입신자는 또 천국의 한 '다람쥐'와 대화를 나누는데, 다람쥐가 사람에게 반말을 하는 풍도 그렇고 다분히 동화적이다. 혹시 입신자가 주일학교 동화담당 교사인지? 천국에 알밤 줍는 다람쥐가 정말 있는지, 다람쥐와의 대화가 가능한지 모르겠다. 물론 불가능이란 없겠지. 그런데 천국 기행 입증에 다람쥐와의 대화마저 동원돼야 하는가?
이 다람쥐가 말하는 다음 부분이 있다.
"너 그리고 이거 아니? 여기 사람들(세상에 속한 하늘을 방문한 사람들이라는 감동이었습니다)도 가끔 온다! 또 어느 때는 여러 명(세계적으로 유명하다기 보다는 정결한 어느 사람들이라는 감동)이 한꺼번에 예수님과 모여 회의를 하기도 한단다."
세상에 속한 사람이 하늘을 방문하는가? 신자는 결코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또 위 대목은 마치 신사도운동자들이 하늘의 전략 원탁회의에 수시로 참석한다는 낭설을 '뒷받침'해 주는 친숙령(?)들의 소위로 보인다. 아니면 그런 유의 예언을 들어 온 이 입신자의 상상이든지.
'Y 자매' 입신 간증
"찬양시간부터 주님의 갈급함이 물을 쏟아붓는 듯 제게 임했습니다. 그리고 P 목사님의 말씀 또한 제 자아를 무너뜨릴 수 있는 귀한 말씀으로 주님을 만나고 싶은 갈망이 더 증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P 목사님께서 안수해 주시자 성령의 불이 저를 덮었고, 제 생각, 자아를 모두 주님께 내어 드렸습니다. 그러고 나니 입가에 미소가 띄기 시작했고, 제 영이 가벼워졌습니다. ..성가대 가운처럼 하얀 가운에 금색으로 브이넥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저를 안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크신지 새삼 한 번 더 느끼게 되었습니다(제가 예수님께 안길 때 배꼽도 안 되는 키였습니다)."
이 '간증'은 초두부터 문제가 발견된다. "주님의 갈급함이 물을 쏟아붓는 듯 임했다"는 표현은 어느 모로 보나 비성경적/비논리적이다. '주님의 갈급함'이란 게 뭔가 모르게 모호한 개념이며, 갈급과 물 쏟아붓기는 정반대개념인데도 병립시켜 억지때려맞추기 격이 됐다.
"자아 무너뜨리기"와 "생각, 자아를 모두 주님께 내어 드리기" 개념은 매우 관상적이고 비성경적이다. 무아경으로 가기 위한 소위 자기 비우기와 공허를 연상시킨다. 그런데도 '성령의 불'이 덮은 역사로 합리화된다.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육정을 이기는 것이고 자기부인이지 결코 '자기 허물기'나 자기포기 개념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맘의 생각으로 인해 "영이 가벼워졌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성경에 없는 개념이다.
초자연적인 입신을 한 사람치곤 말이 정돈되지 못한 편이다. (요즘 카톨맄적이라고 하여 교계 일각에서 적극 피하고 '찬양대'로 대치해 온) '성가대'란 용어도 그렇지만 "흰 가운에 금색 브이넥을 갖춰 입었다"는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인공적/세속적인 냄새가 난다. 아니 주님이 뭐가 모자라 세상의 '브이넼'을 갖춰 입으셨다는 것인가?!
예수님의 키가 너무 커서 자신의 키가 (예수님의?) '배꼽도 안 된다'는 표현은 용어도 그렇거니와 문장도 정리되지 못했을 뿐더러 결과적으로 묘한 상상을 불러 일으키며, 예수님이 그런 거인이라는 암시를 성경에서 전혀 얻지 못한다.
'새삼 한 번 더 느끼게 됐다'는 말은 예수님이 얼마나 (키가) 크신지 뭇 성도더러 깨달으란 말인가? 사람의 몸을 입은 채 신령체로 변화 받아 하늘로 오르신 주님이 갑자기 거인으로 돌변하셨다는 말인가? 그래서 이 '예수님'은 혹 타락한 거인 천사가 분장한 모습은 아니겠는가 생각해 본다.
"..사도 요한을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갈색 머리에 금색 천으로 만들어진 관을 쓰고 있었고, 옷은 하얀 가운에 옆구리 쪽에 금색으로 장식이 되어 있는 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턱수염도 있었습니다. 나이도 많아 보였습니다. 저는 2주 전부터 사도 요한이 보고 싶은 갈망이 생겼습니다. 책을 통해 그리고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사랑의 통로가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을 보자마자 제가 사도 요한에게 '어떻게 사랑의 통로가 될 수 있으셨어요?'하고 물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빙그레 웃으시며 '그냥 예수님을 사랑했을 뿐이랍니다'. 이 한 마디 외엔 아무 것도 없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입신자는 지금 사도 요한의 '갈색 머리'를 언급하고 있다. 이 헤어 칼러가 용케도 맞으면 좋지만, 혹 이 다음에 딴 입신자가 요한 머리의 딴 색깔을 부를 경우, 모순이 발생한다. '옷은..가운에..옷을'로 중복된 것도 초자연 증언치곤 문법이 그르다.
그 다음 문제는 요한이 청년시절 가장 어린 나이의 제자였는데도 불구, 천국에서 (턱수염이 더부룩한) 늙은(?) 모습이라는 것. 딴 독자의 경우는 몰라도 필자의 소감은 왠지 서글프다. 천국에서도 모든 노인들은 영원히, 죽을 당시의 늙은 티를 내게 되는 걸까? 새파랗게 젊어 죽은 사람들만 영원한 젊음을 간직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천국이 좋을 게 뭔가..안타까운 노릇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젊어서 일찍 죽은 사람들은 천국에서도 더 '얼짱'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다들 일찍 가고 볼(?) 일이다.
이 입신자는 담임목사(?)의 설교에서 요한이 사랑의 통로(채널?)가 됐다고 한 말을 듣고 요한을 보고픈 갈망, '사랑의 통로'가 되고픈 열망이 있었다. 그래서 그 말 그대로 이 '요한' 앞에서 적용했고 답변을 받는다. 즉 B/P 목사의 논조가 천국에 반영됐다고 보여진다. 과연 그럴까? 필자가 알기로는 천국에서는 오로지 성경과 주님의 논조만 반영되는 줄로 안다.
"그냥 예수님만 사랑했을 뿐이랍니다"란 '요한'의 왠지 어슬픈 말도 그렇다. 요한복음서와 그의 서신서를 보면 사도 요한은 예수 크리스토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 용어는 전혀 없는 것을 보면, 이 입신자의 주일학교형 "사랑의 예수님 지향성"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한 마디로 균형 잡히지 못했다!
그리고 "이 한 마디 외엔 아무 것도 없다"는 단언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나 주님의 사랑이 아닌 사도 요한 자신의 '예수 사랑'이 중심된 것도 빈약하고 좀 석연치 않다.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엄청나게 많은 말들을 한 요한의 기록에 비하면 무척 대조적이다.
"('예수님'이)..다니엘을 제게 보여 주시며 인사를 나누게 해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푸른 가운을 입고 계셨는데, 그 모습을 보기만 해도 신비스러웠습니다. 사도 요한보다 젊어 보였지만 나이는 모릅니다. 천국은 말을 안 해도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압니다. 다니엘 역시 제 마음을 알고 제게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저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게 다였어요..'".
빛나고 깨끗하고 맑은 세마포 옷이 강조된 천국사회에서, 지금 다니엘이 입은 '푸른 가운'은 어떤 암시인지는 알 수 없다. 천국은 말을 안 해도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는데 '나이'는 모른다는 것도 좀 이상하기니와 영원한 천국에서 다니엘의 나이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궁금하다. 다니엘이 사도 요한보다 "젊어" 보인다는 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이 다음에 확인해 볼 일이지만 별 의미 없고 좀 생뚱맞은 비교다. 그리고 다니엘은 바벨론-메대/페르시아 왕조의 여러 군주들을 거쳐갈 정도로 매우 오래 살았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
아울러 사랑의 채널이 되고 싶어 단지 요한을 보고팠던 갈망이 다니엘에게 아무 설명 없이 이양/적용된 점은 다니엘의 독특한 위치와 특성이 전혀 무시된 게 아닌가 싶다. 아마도 독자들은 필자가 남의 말꼬리를 잡아 시시콜콜히 캔다고 짜증을 낼지 모르지만, 필자는 이런 입신 '간증'이 아무 검증 없이 마치 진리처럼 받아 들여지는 데 대해 신경질이 나려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에 저를 데려다 주셨습니다. 주변은 온통 하얀 이슬과 아주 하얀 안개 그리고 가운데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빛이 엄청나게 발산 되고 있었습니다. 바닥에는 투명유리가 깔려 있었고 밑에는 바다를 볼 수 있었습니다. 아주 맑은 바다라 바닥에 자갈 같은 돌들도 보였습니다(마치 수족관을 바닥에 인테리어 해 놓은 듯 투명한 유리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얀 가운을 입은 12명의 사람이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12사도인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일을 하고 있는 모습만 봤기 때문입니다."
하얀 이슬과 짙은 안개, 의자, 투명유리, 해저의 자갈돌, 수족관 비유 등 한 마디로 좋게 말해 문학적(?)이고 안 좋게 말해 자연적/세속적인 보좌의 모습이다. 12인(사도)들이 보좌 주변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보좌 앞 24 장로들이 찬양과 영광 돌리기에만도 바쁜 것으로 묘사돼 있지 않은가.
[ 보좌 앞 24장로 대신 12사도만 간증문 전체에 두 번 강조한 점도 다소 비성경적이다. 나머지 12장로들이 섭섭해(?) 할 노릇이다. 계시록을 얼마나 읽어 봤는지? 입신이 참이려면 자기 생각과 상상이 아닌 성경을 뒷받침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제가 요 근래 들어 예수님을 사랑하고 만나고 싶은 갈망이 너무나 큰 나머지 눈물 마를 날 없이 울면서 기도하여 눈이 붓기가 가라앉을 날이 없었는데..제가 주님을 만난 것이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그 행복을 잠시 맛본 후 임재에서 일어났습니다."
"눈의 부기가.."가 맞다. 행복은 "잠시" 맛보는 게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신 주님의 영을 통해 늘 이어진다. "임재에서 일어났다"는 표현은 어법상 맞지도 않을 뿐더러 신사도운동권의 유행어다.
"(B) 목사님의 어머님을 보았습니다. 목사님의 어머니께서는 아주 천사처럼 하얀 옷을 입고 계셨고, 얼굴에선 빛이 났습니다. 그 모습이 굉장히 밝고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문을 여시는 그런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내가 천국에서 잘 있다고 전해 주라고 하셨고..목사님을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고개를 밑으로 내려다 보시며 목사님의 하시는 일을 보시고 흐뭇해 하셨습니다."
어머니를 부각시켜 이를테면 은근히 B 목사 '간접추앙' 효과를 노린(?) 대목. 딱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은 천국에서 완전해진 어머니가 과연 B 목사의 이런 비성경적인 신사도운동을 포함한 모두를 흐뭇해 하냐는 것이다. 천국이 지상의 세속운동을 옹호해 주는 그런 곳인가? 오히려 슬퍼하지 않을까?
"이 날은 지하철 총신대 입구역부터 기름부음이 시작되어 교회에 도착했을 때는 걷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자리에 앉아 '주님을 원합니다. 생명수로 나를 깨끗게 하소서' 하고 기도를 하는데, 주의 강에서 마음껏 씻는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관행성, 습관성(?) 입신까지의 도입 경로가 엿뵈는 대목으로 흥미롭다. 입신용 '기름부음'이 특정장소에서 시작돼 걷기도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주님을 원한다면서 생명수로 깨끗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는데 맘껏 씻는 환상을 봤다고 한다. 크리스토의 피로 씻음 받은 우리가 왜 생명강에서 또 씻어야 하는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생명강은 혹시 "때 빼고 광 내기" 용인가? 주님은 심지어 페트로의 발을 씻기시면서 아울러 손과 머리도 씻겨 달라는 페트로에게 "이미 목욕한 사람은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하시면서 "온 몸이 깨끗하다"고 하시지 않았는가(요복 13:8-10a)?
미안하지만 혹시 입신자는 지금까지 "그대들이 깨끗하지만 다는 아니네"(요복 13:10,11)라는 범주에 속해 있었는가? 계시록에 나타난 생명수 강의 유일한 용도는 해갈(요계21:6)과 주변 생명나무들의 결실이다(22:1-2). 어린양의 보혈로 이미 다들 깨끗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10시 50분까지 사로잡혀 있다가 '주님께 나아가길 원합니다. 기도의 줄로, 주님과 내가 닿을 때까지 가게 하소서' 기도한 후 '주의 보좌'를 반복하여 외치다 엎드러졌을 때, 제 영이 주의 보좌 앞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상 시간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끄는데 모종의 사실성과 결과적인 정격성을 겨냥한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 우리 속에 모신 성령님은 어쩌고 입신으로 '주님께 나아가길' 원하는지 알다 모를 일이다. 사뭇 관상적인 표현이다. 성령님에 우리 속에 계신데도 기도의 줄로 주님과 내가 서로 닿기까지 "가야" 하는가? 입신 갈급증과 습관성의 문제점이 느껴진다.
"주의 보좌 앞 그 주변에는 12사도와 천사들과 많은 사람들이 저를 둘러싸고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저를 보며 '이가 (B) 목사의 뒤에 한 줄로 선 자라'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에 대한 관심이라기 보다는 (B) 목사님에 대한 천국인들의 지대한 관심으로 여겨졌습니다. 그 관심 때문에 저를 주의하여 보고 있었습니다."
점입가경이다. 역시 24 장로 대신 12 사도가 강조됐다. 입신자를 둘러 싸고 내려다 보는 '천국인'들의 지대한 관심이 입신자 자신보다 B 목사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천국에서도 개인이 이처럼 한 교회의 목회자/지도자 중심의 노예(?)여야 하는지 서글픈 심정이다.
이 부분에는 특별히 다음과 같은 B 목사의 '주'도 붙어 있다:
"이것은 저 개인(B 목사)에 대한 관심이 아니고 단지 저희를 통해 이루시는 주의 일에 대한 관심입니다. 천국에 있는 분들은 구름 같이 둘러 싼 증인들이거든요. 그 분들이 땅에서 주의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입신 도중 주님께서 제가 주의해야 할 것 두 가지를 말씀해 주셨다는데, 그것은 제 가슴에 새기고 이곳에는 소개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B 목사의 '주'는 'B 목사에 대한 천국인들의 지대한 관심'이라고 명언한 입신자 자신의 말과 정면 배치된다. 또 주의 일에 대한 관심이 그 다음엔 주의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다시 둔갑한다. 입신자가 정녕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어딘지 모르게 정격성(?) 부각을 위해, 쏠리는 눈길을 애써 피하려는 거짓 겸허와 미화를 위한 허식의 느낌이다. 그리고 과연 B 목사에 대한 온 천국의 관심이 그리도 '지대'한가. 혹 K교회나 B 목사 자신의 희망사항들이 입신자들을 통해 계속 반영되는 건 아닌지.
"엎어져 있는 제게 주님의 보좌와, 예수님의 (맨)발과, 많은 천사와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주님 저를 주님의 옷자락으로 덮으소서'할 때에, 예수님께서 엎드린 제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아 주셨습니다. “오늘은 아무 것도 보려고도ㅡ 말하려고도 하지 말고, 이 곳에 누워 있으라. 내가 너를 준비되게 하며 강하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보아즈(보아스)에게 한 뤁(룻)의 말(뤁 3:6)을 인용한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으소서'라는 말은 노래 가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기업 무를 자의 아내가 되길 원하는 여성이 기업 무를 자에게 의탁하며 보호를 요청한다는 뜻의 특이한 표현으로 성경 전체중 이곳에만 사용됐다. 요즘 정서에 호소하기 위해 자주 쓰이는 듯 한데 차라리 주님의 날개로 덮으소서가 낫지 않을까.
상대가 진짜 예수님이면 다행이지만, 예수님을 가장한 친숙령일 경우는 "덮으소서"가 순식간에 원치 않는 '덮치소서'로 둔갑될 수도 있다. 신사도운동의 배후를 보면, 그런 우려는 자연적이다. 대뜸 누워 있으라는 '예수님'의 말씀 내용도 다소 의아스럽다. 누움은 물론 쉬임도 되지만, 사람으로서 가장 vulnerable한 포즈이기도 하다.
"제가 바로 뉘어졌을 때, 천정의 밝은 빛과 안개가 화려하게 보이고 그리고 각색의 보석들이 천천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이 보석을 좋아하는 것은, 저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천국을 소망함의 일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시 후“내가 너를 이 교회와 천국을 잇는 전령으로 세운다. 너는 기도의 줄을 잡고 내게 나아 올 것이며, 네게 날개를 달아 주노라.”하셨습니다."
보좌 앞 천정의 밝은 빛과 화려한 안개? 자못 몽환적인 정경이다. 입신자 자신이 안개를 선호하는 경향인 듯 한데 혹시 천국 보좌 모습이 안개뿜기 기계를 설치한 지상의 쇼 무대 모습과 비슷한가?
'사람들이 보석을 좋아하는 것은, 저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천국을 소망함의 일환이다'란 말이 그럴 싸 해 뵈지만 사실 성경은 영적인 보석과 세속적인 보석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으며 땅의 보석들을 자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계 18:12).
뿐만 아니라 싸탄도 초기엔 주얼리로 화려하게 장식된 자이며 그래서 에덴을 아쉬워한다(에제키엘=에스겔 28:13). 아닌 게 아니라 그가 지배하는 장차 망할 바빌론 성이 온갖 화려한 보석들과 함께 거래하는 상품의 하나가 인간 영혼이다(계 18:13)!
그리고 아까 위에서도 언급했듯 요즘 신사도 기적들 중엔 여성천사의 보석 떨궈주기 기적도 속출하고 있다. 그런데 목격자들의 눈엔 싸구려 보석처럼 보인단다.
"내가 너를 이 교회와 천국을 잇는 전령으로 세운다. 너는 기도의 줄을 잡고 내게 나아올 것이며, 네게 날개를 달아 주노라."- '예수님'이 입신자에게 엄청나고 굉장한 미션을 부여하는 이 대목은 은유적이고도 의혹스럽다.
성경엔 없는 '기도의 줄'(기도끈)이라는 표현을 예수님이 그대로 사용하신 것도 그렇거니와 우리 속에 계신 주님께 매 번 그 줄을 잡아야 나아올 수 있다는 식의 표현이 구약적 또는 관상적이고, '날개'를 달아 준다는 표현도 아무리 비유적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신화적/시적이고 좀 우습다. 날개? 어떤 날개란 말인가? 중세 그림에 나타난 '천사' 같은 한 쌍의 날개? 그런 날개는 비성경적이다.
[ '날개 달린 전령'이란 일반적으로 로마 신화의 메르쿠리우스(그리스의 헤르메스, 영어의 '머큐리'에 해당)를 암시한다. 신들의 사절인 그의 사명은 죽은 사람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것. ]
"천국의 저의 집을 다시 보여주셨습니다. 특별히 보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보이길 원하셨습니다. 5월 샨 볼츠 집회 때 본 하얀 색의 아담한 건물로 앞뜰에 많은 붉은 색 장미꽃이 피어 있었고, 연못에 물고기들이 있었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설 때, <확장 중>이라는 단어를 주시며, 천사들이 알려 주기를, 주님이 설계를 변동하며, 많은 소망과 기쁨 가운데 계시다고 말하여 주었습니다. "
신사도운동권의 핵심에 있으면서 '사도'였다가 동성애 추문에 휩싸였던 라버츠 리어든의 여덟 살 적 천국기행 내용과 비슷한 세속 가옥 분위기다. 미상불 션 볼츠 집회 때 봤다고 하니 이해는 간다. 볼츠 역시 문제가 많은 신사도다.
"다시 보좌 앞이었습니다. 저는 집도 좋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길 원한다고 말씀드리며, 그렇게 하고 싶은데 잘 안 됩니다, 도와주세요 할 때, 예수님께서 그 곳에 둘러선 사람들에게 안수하여 전이해 주라고 말씀하셔서, 모든 사람들이 저를 둘러서 손을 뻗어 제 몸에 안수하여 주었습니다. 그때 제가 예수님께 예수님의 제자들과 주님을 사랑하였던 많은 선진들의 <주님을 향한 사랑>을 전이 받길 원한다고 간절히 말씀 드렸습니다.
천국에서의 집단 안수와 전이(임파테이션?) 모습이다. 과연 주님이 이런 신사도적 '전이' 안수를 천국에서도 원하실까? 선진들의 주님을 향한 사랑은 아가페 사랑의 반영일 텐데, 그것은 성령님께서 지상신자들을 통해 맺게 하시는 9 열매 중 첫 열매의 결실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인가?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지 않고 '선진'들에게 '전이' 받아야 할 사랑인가?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마저도 신사도운동의 방식과 전략을 모두 인정하시고 지지 옹호하시는가란 인상과 의혹을 금할 길이 없다. 주권운동이라는 세속 세력을 배후에 업고 있는 신사도운동권을 주님이 유일한 천국 확장의 방도로 천국 '원탁전략회의'(?)에서 채택이라도 하셨다는 말인가? 너무나 아전인수 격 간증이 아닐 수 없다.
K 교회 교인들은 성경보다는 신사도운동가들의 예언이나 체험간증 따위를 매우 중시한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그들의 성경 이해는 B목사의 권위적 해석을 통한 것이 아닐까. 카톨맄 적 방식이다.
감성적인, 너무나 감성적인 K 집사의 입신간증
하이디 베이커의 간증을 읽다가 통곡하다 잠이 들곤 다시 교회 새벽기도 때 안수를 받고 입신했다는 K집사의 간증의 일부는 이렇다.
"갑자기 제가 바위 뒤에 숨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다 벗고 있었습니다. 두려워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손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제게 가죽 옷이 입혀졌습니다. 근데 그 손에서 엄청난 슬픔이 느껴졌습니다. 제 가슴도 너무나 슬퍼 터져나갈 것 같았습니다. 제 자신이 이브가 된 것 같았습니다. 걸어서 어디론가 내려가면서 너무나 괴로와하고 슬퍼했습니다. 주님이 제 곁에 없는 것이 미칠 것 같았습니다. 울고 있었습니다..(중략)..저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 슬픔을 잠시 느꼈지만 괴로움과 슬픔의 전이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너는 이브다. 아버지는 다시 이브들을 데려오시려고 하고 계신단다. 나의 신부들이란다...'"
지극히 감성적, 센티멘털한 표현들로 넘친다. 스스로 이브로 느껴졌다는 것도 다분히 은유적/몽환적/시적인 표현들이다. 이브 같다고 해도 거듭난 사람이 예수님으로부터의 슬픔의 전이를 받아? 항상 기뻐하라시는 주님으로부터? 주님이 곁에 없음이 미칠 것 같아? 거듭난 이래 줄곧 우리 속에 늘 계시는 주님이 "곁에 안 계신다"니? 아무리 이브 같다기로서니 천국에서 이렇다는 것..필자로선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대목들이다.
"너는 이브다"라는 선언 역시 별 의미 없이 이상야릇하며 시적/은유적인 표현이다. 은유는 은유로서의 자리가 있는데 이런 대목에 어울리는 자리는 아니라고 느껴진다.
"예수님께서 제 손을 잡아주셨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 평화가 가슴에 꽉 찹니다. 그리고 저를 해변가로 데려가셨습니다. 3번째 온 것인데 정말 넓고 아름다운 곳입니다. 고요하고 따스하고 편안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저는 뛰었습니다. 바닷물을 텀벙거리다가 얼굴을 씻었습니다. 그 물이 떨어지면서 꼭 작은 투명한 보석처럼 결정체를 이루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모래는 아주 고운 반짝이는 보석처럼 보였습니다. 바닷물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웃으셨습니다. 예수님께 달려가서 어린아이처럼 무릎에 고개를 얹었습니다."
소녀적 감상이 어린 장면들이다. 그런데 입신해서 예수님과 함께 해야 평화가 '꽉 차는' 것인가? 평소 거듭난 우리 속에서 늘 함께 하는 샬롬은 어떤가? 여기서도 보석 얘기가 나온다. 물방울도 모래알도 모두 보석 같다는 표현이 그것.
흡사 무슨 영화 장면 같은 해변가 대목에서 필자는 분위기가 비슷한 주남 토머스의 책 내용이 연상됐다. 아닌게 아니라 이 입신간증의 바로 다음 대목이 이렇게 이어진다.
"근데 문득 토마스 주남 여사의 간증이 생각났습니다. 여사님도 이곳에 오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웃으시면서 '곧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전 '여기서요?' 라고 기뻐서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아니, 교회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에 올 것이고 우리 교회에 올 것이라고... 그 동안 미국에서 밖으로 나가지 않으셨는데 이젠 나갈 것이고 한국을 제일 먼저 오게 되는데 우리 교회에도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주남 토머스가 위 '예언'대로 이 교회를 방문했는지는 확인해 보지 않아 모르겠다. 그리고 위에 따르면, K 간증자가 입신했을 당시 토머스도 동시 입신을 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이 '예수님'이 당시 방문한 그 토머스를 기쁨으로 기대하는 입신자의 맘을 구태여 무시 또는 슬쩍 깔아 뭉개시어(?) 굳이 천국에선 안 만나게 해 주고 한국 방문과 K교회 방문만 언급하셨다는 게 좀 의아스럽다. 주님이 간증자의 맘을 그렇게도 몰라 주신다는 말인가?
토머스의 책을 읽으며 며칠 통곡을 하며 지내곤 미국에 가겠다고 난리를 쳤다는 게 K 간증자의 얘기다. 그 마음을 그렇게도 몰라 주신 주님이신가.. 그리고 최근 B 목사가 토머스를 경원시하거나 피차 소원한(?) 관계라는데, 이 입신 예언과는 성격이 배치되지 않는가. 그것은 주님이 소원(所願)하시는 소원(疏遠)인가., 단지 B 목사 개인의 정책인가.
"예수님께 기뻐서 막 신나 웃고 있는데 예수님이 안아 주셨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엄청나게 커서 전 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도 '거인' 예수님의 언질이 나온다. 왜 주님이 골리앝 같은 거인이셔야 하는지 필자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오래 전 읽은 케닡 헤이긴의 환상 '간증'에서 '주님'은 헤이긴보다 약간 키가 더 크다고 했다. 사진에서의 헤이긴의 키가 필자보다 더 크니, 주님의 키가 그 정도라 해도 필자보다 충분히 많이 크시다는 느낌이다(필자는 헤이긴 역시 신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주님이 골리앝 같은(헉!) 거인이시라니 황당하다.
"예수님께서 제가 지옥에도 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 전에도 그러셔서 못 갈 것 같다고 했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과연 제가 그걸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예전 처럼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몇 번 제게 말씀하셨기에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전에 충분히 천국을 맛볼 것이라고. 지옥에 영원히 두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옥을 강제로 보여 주시겠다는 게 '예수님'의 방침이시다. 지옥방문의 분명한 목적의식도 배제돼 있고 방문해야 하는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없다. 모든 것을 금방 알 수 있다는 천국에서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정도로 애매모호한가..?
"예수님은 제 어깨와 머리를 만지시고는 아기처럼 안아 주셨고 잘 재우시는 것처럼 토닥이셨습니다. 그리고는 깊은 잠에 빠져 든 것 같았습니다. 어제부터 심하게 두통과 목이 아팠는데 일어나니 몸이 가벼웠습니다..지옥에 갔다 온 후 처음엔 잘 몰랐는데 몸이 너무 아프고 기운이 없는 것이 지옥 경험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계속 회사에서 거의 근무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만져 주시고 안아 주시고 토닥여 잘 재워 주셔서 푹 쉬었다는 말과 단지 '지옥'에 갔다 와서 몸이 너무 아프고 기운이 없어 근무도 제대로 못했다는 것은 뭔가 모순된다. 이것은 성경 대언자들이 힘이 빠졌다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다. 주남 토머스의 입신 후 분위기를 연상시킨다.
"그러다가 저녁 9시경 즈음으로 기억하는데 집의 창 쪽으로 천사가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워낙 비몽사몽이라 꿈일 수도 있지만... 교회 아닌 저희 집에 천사가 온 것으로 느껴진 건 처음입니다. 천사는 그렇게 크지 않았고 얼굴이 굉장히 아름다웠습니다. 제 왼손의 손바닥을 지긋이 누르는데 점점 몸에 생기가 돌았습니다..그러나 아직도 천사가 절 진짜 방문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생각만으로도 너무 신기합니다."
역시 토머스를 연상시킨다. 워낙 비몽사몽이라..방문 여부를 잘 모른다..천사는 택하심 받은 사람 주변에 늘 있다. 그런데 창문을 타 넘고 집에 찾아 온 것으로 느껴지는 그 천사는 혹시 아름답게 가장한 타락한 천사는 아닐까..? 토머스의 '천국' 간증에서도 '주님'이 창문을 타 넘으신다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큰 의자에 앉아 계셨습니다. 전 주님께로 갔습니다. 선물 박스 같은 것을 주셨습니다. 사방 30cm 정도 되는 박스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게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풀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는 빈 박스였습니다. 제가 실망스럽기도 하고 의아해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선물로 주셨다는 빈 박스는 역시 시적/은유적이다. 여기 없지만 그 다음 부분에서 예수님을 빈 박스 안에 "담는다"는 표현..기발나긴 하지만 좀 그렇다. 다소 신성모독적이고 황당하다. 물론 성경엔 우리 마음 그릇에 보배를 담는다는 표현은 있다. 그러나 에제키엘(에스겔)적 은유 기록계시 부여가 끝나고 이젠 모든 것이 확실해야 할 천국 입신 현장에서 새삼스런 이런 은유성 표현은 의아스럽게 한다. 입신기록이라기보다 간증자의 마음의 표현은 아닐까. 거듭난 우리는 누구나 이미 그 영 속에 주님을 모시고 있다. 천국까지 가서 새삼 빈 박스에다 주님을 '담아야' 하는가.
"그곳은 꼭 산의 약수터처럼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주위는 너무 아름다웠고 물은 너무 투명하고 깨끗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물을 떠서 마셨습니다. 물은 너무나 상쾌하고 달다는 표현은 그렇지만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물이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그건 '지혜의 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제게 많은 깨달음이 올 것이고 네가 이전과 달라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네 주위도 변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이라면 누구나 마실 수 있는 생명강수가 있는데도 (전에 가 본 듯한) 산 숲속 약수터 같은 곳에서 흐르는 물을 주님이 마시게 했단다. 역시 의아스럽다. 왜 굳이 산 속 약수터 같은 곳에서..? 애매한 물맛은 둘째 치고 '지혜의 물'? 처음 듣는 얘기다. 지혜의 샘물을 마시면 '깨달음'이 오고 자신과 주변이 이전과 달라진다..? 여전히 은유적/시적/감성적이다. 성경을 읽고 성령의 영감으로 깨달음이 오며, 거듭날 때 이미 우리의 삶이 새 피조물로 바뀌지 않았는가? 자못 관상적이다.
"전 그 말씀을 듣고 다른 무엇보다 무디와 같은 영을 부어 달라고 했습니다. 목사님께 이름만 들었는데 갑자기 그 분에 대해 알고 싶어 며칠 전 검색을 해 보고 감동을 받고는 그분 생각만 났었습니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주님에 대한 단순한 열정적인 믿음이 너무나 닮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케네스 해긴 목사님이나 캐더린 쿨만 여사 같은 분의 책을 읽을 때마다 그 분의 영을 부어 달라고 기도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제가 너무 욕심이 많고 철없이 여겨졌습니다."
'주님'은 지금 지혜의 샘물을 말씀하시는데 간증자는 무디의 영을 부어 달라고 한다. 무디와 같은 영? 헤이긴과 쿨먼의 영? 영계에서 고인의 '영'들을 자주 만난다는 신사도운동/캔저스시티그룹/플로리다부흥권의 임파테이션이 떠오른다.
이런 말은 매우 위험하다. 이런 갈망을 이용해 고인들을 흉내내 나타나는 게 소위 친숙령들(familiar spirits. KJV 참조)이기 때문. 벤틀리가 영계에서 만났다는 순다르 싱, 싱이 만났다는 스베덴보리 등은 모두 실제 고인들이 아닌 친숙령들이다. 어떻게 단정하냐고? 너무도 비성경적인 전후 정황을 살펴 보면, 그런 결론 밖에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B 목사의 입신간증집에는, "검증된" 세계 7대 입신간증의 첫 번째로 싱의 간증이 올라 있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제는 한 사람에게 하나의 영만 부어지지 않는다. B 목사에게는 세례 요한, 엘리야, 다윗과 같은 영을 부었다. 이제는 요셉과 같은 영이 부어졌다.’ ‘그에게 물질과 사람을 잘 다룰 수 있는 지혜가 부어질 것이다. 그리고 일곱 형제가 와서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그를 높이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일곱 형제는 기존의 대형교회를 짊어진 사람으로 제 눈에 환상이 비추어졌습니다."
필자가 알기로는 주님은 분명 카톨맄식 세례가 아니라 나아만 장군 식 침례(침수례)를 받으셨다. 받으신 뒤 분명히 요르단 강물에서 올라오셨다고 했다. 그래서 침례가 성경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은 기존 한글성경과 전통교회의 전례를 따라 '세례 요한'으로 부르신 모양이다.
지금 입신자가 무디/헤이긴/쿨먼의 영을 바라고 있는 한편 주님이 변목사에게 다양한 고인들 '같은' 영들을 부으셨단다. 그리고는 물질과 사람을 잘 다룰 지혜가 부어질 것이란다. 이 대목에서 벤틀리의 '재정천사'와 '엠마'가 연상된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고인들의 영을 논하지 않고 다만 예수님께도 부어졌던 성령님의 일곱 영들만 중심으로 논하고 있을 뿐이다(이사야 11:2). 이 점에서 매우 비성경적이다.
본 필자는 그 어느 누구 위대한 신앙 선진의 영이라고 해도 싫다. 하나님의 영, 크리스토의 영인 성령님으로 족하다!
대형교회를 짊어진 7형제가 B목사에게 고개를 숙이고 높여? 주님이 아니고? 영광을 다른 신에게 주시지 않는다는 주님께서? 그리고 천국도 대형교회 중심으로 돌아 가나? 이 간증을 보면 왠지 점점 천국이 한심스러워지는(?) 건 나만인가?
이 간증 끝부분은 입신자가 '주님'의 명령대로 지혜의 샘물을 한 바가지 퍼다가 목사에게 퍼 붓는 대목이다. 역시 은유적/시적인 표현이다. 뭐라 해야 할지 막막하다.
Y 사모의 간증
K목사가 무척 감격했다는 이 간증 역시 많은 문제가 비친다.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는데 문득 옆을 보니 왼쪽에 '주님'이 앉아 계셔서 너무 기뻐 사랑을 고백하며 보고 싶었다고 고백했다는 말로 시작한다. 주님이 계속 그러셨단다. 목사가 앞에 나와 기도를 받으라고 할 때 "주님 같이 가세요"란 말을 하고 앞으로 나가는 순간 그 주님이 자기 몸 속으로 들어와 합일 됐단다. 뭔가 이상한 장면이다.
거듭난 우리는 늘 주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영 속에 모시고 살아 가기 때문이다. 이런 체험을 다시 한다는 것이 이상하다.
아무튼 그러자 뼈 속부터 진동이 오고, 기도하고 안수를 받는데 다리가 후둘거리고 힘이 빠져 서 있을 수 없었단다. 속에서 눈물이 솟구치고 진동과 함께 폐부에서 통곡이 나오는데 "정결하다"란 음성이 들렸단다. "정결치 못합니다"라고 고백하는데, 얼굴을 쳐 드시는 '주님'의 머리 위로 엄청난 빛이 떠보였단다.
순간 어느 방에 들어갔는데 온통 새하얗게 보이고 천사들이 손에다 부케 같은 꽃 묶음을 쥐어 주고 머리에 화관을 씌워 준다. 이 때 마귀가 나타나 단죄하려다가 입신자의 명령으로 쫓겨난다. 그리곤 '주님'께 인도됐는데,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여"라며 화관을 만지시자 화관이 "비둘기 날개" 모양의 왕관으로 변했단다.
흡사 왕과 왕비의 혼례식 같은 장면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의 다른 권서 특히 신약에서 전혀 인용되지 않은 '노래들의노래'(아가)가 우주사상 처음(?)으로 예수님의 입으로 직접 인용되는 장면을 접한다. 입신자가 아무 것도 드릴 게 없다고 안타까워 하자, '주님'은 두 손을 벌리며 "너면 됐다! 너를 원한다"고 하신다. 이 '주님'이 진짜 예수님이면 천만다행이지만 가짜 예수님일 경우 소름 끼칠 노릇이다. 방정맞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세상에 흔해 빠진 가짜 재림주들처럼 가짜 예수가 영계에도 있기 때문. 지금 이 입신자가 만난 '주님'도 객관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예수이다. 진짜 예수님인지 아닌지 이 비성경적인 입신 내용으로 어찌 알랴.
화관을 만지니 비둘기 날개 모양 왕관이 됐다는 건 마치 마술램프를 연상시킨다. 물론 주님은 전능하시니 못하실 일은 없지만 너무나 비성경적인 표현이라서 하는 얘기다.
그 다음 다시 엄청난 빛으로 사물을 분별할 수 없을(??) 정도의 밝은 방에 들어갔는데 임재만 느껴질 뿐 주님도 자신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천사들의 옷자락만 살짝 보일 뿐이고, 천사들이 "거룩하다! 기쁘도다!"를 연발하며 찬양하고 자신은 주님과 손을 잡고 춤을 추고 있었단다. 너무도 기뻐 그곳을 떠나기 싫었단다. 잘 보이지 않는 대상과의 매우 어색한 천상의 댄스 장면이다. 입신자의 평소 희망사항이 구현화 된 게 아닌가 싶다. 그런 희망사항을 자꾸 뿜어내다 보면, 무엇이든 갖다 입신거리로 보여주는 재주가 친숙령들에겐 있다.
그 다음 장면으로는 타작한 벼들과 정미기의 은유가 나타난다. K 교회와 B 목사가 그 정미기란다. 과연 주님께서 지상의 한 특정교회를 이처럼 특대하시고 은유로 활용하시는지 궁금하다.
그 다음으로는 B 목사가 입신자에게 주님의 재림이 (대) 환난 전인지 아니면 환난 뒤인지를 주님께 "여쭤 보라"고 기도로 파송한다. 초자연적인 영계 환경을 이용한 질문이다.
이 시점에서 입신자는 과거 초등학교 시절 교회 다니기 전 "실제로" '주님'을 만났다는데 시골집 동쪽 마당에 서 있었더니 마차를 타신 '주님'이 동쪽 하늘에서 서쪽으로 가는 모습이었단다. 그래서 "예수님, 저도 같이 가요, 데려가 주세요"라고 외치자 "곧 오마"라는 한 마디만 남기셨단다.
잠시 후 갑자기 동쪽에서 엄청난 수의 마귀 군대가 나타나 온 하늘을 뒤덮는데, 큰 함대 같은 것에 큰 악령들이 들어 있고 소름끼치는 기계 소리에 무섭고 놀라 엉엉 울었다고 한다. 입신자는 그때 본 것을 환상이 아닌 "실제로"라고 단언한다. 무엇에 근거해 실제라는 것인지..? 그런데 그 때 영상이 다시 보이고 주님이 먼저 오시고 나중 7년 대환란이 오신다는 깨달음의 감동을 주셨단다. 과연 예수님을 믿기 전 그런 '실제'가 보이는지도 궁금하고 천상계에 그런 질문을 묻기 위한 대리파견이 가능한지도 궁금하다.
Y 사모의 천국입신 간증에서는 B 목사의 신유의 말씀을 선포할 때 신유의 기름부음이 강력히 임해 영/혼/육이 모두 잠겼고 목사로부터 섬광 또는 불길 같은 빛이 레이저 쏘듯 와 닿았다고 한다. 물론 타드 벤틀리를 연상시킨다.
또 구름을 타고 임하시는 '예수님'이 각 성도의 심령에 보석 하나씩을 주시는 것이 보였단다. 앞서 말한 보석 떨구기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목사의 안수를 받고 쓰러져 주님을 바라보기 원하고 주님을 구하자, 그 '주님'이 길고 투명한 물병에 가득 담긴 물을 먹여주셨는데 몸에 흡수돼 배에 가득 채워져 영이 시원해지고 생기가 돌고 영에 힘이 솟더란다. 길고 투명한 물병이라..사뭇 은유적이다.
그 다음은 주님과 동산을 거닐다가 환상이 열려 광활한 대지로 보이는 곳에 다채로운 보석들이 박혀 있는데, 순서와 배열에 맞춰 박혀 있고 그 한가운데 추 같기도 한 엄청나게 큰 꽃모양의 보석이 박혀 있고 그 곳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지시와 계획을 받아 땅의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교두보 역할을 하는 곳이며, 보석 하나 하나는 K교회 성도들의 심령, 그 엄청난 꽃모양은 K 교회라는 감동을 받았단다. 앞서처럼 역시 보석 개념과 여성이 연계된 경우이며..K 교회가 천국에서 특대 받는다는 인상이 강하다.
그런데 잠시 후 보니 주님의 손에 쥐어진 아까 본 꽃 모양의 보석이 박힌 나침반이라는 것이 느껴졌단다. 그 나침반을 주님이 소중하게 손에 쥐었다가 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시 꺼냈다 하는 환상이 보였단다. 보석이 박힌 나침반이라..나침반은 컴퍼스와 함께 프리메이슨들의 전형적인 상징이다. 신사도운동권의 배후엔 물론 기사단 같은 비밀집단들이 있다는 의혹이 있어 왔다.
이 역시 은유적인데..주님이 왜 나침반 따위를 소중히 '주머니'에 간직하고 계신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 입신자는 거기 대해 아무 설명이 없다.
J 자매의 천국 간증
J 자매는 B목사의 손만 머리에 올려지면 "그냥 열리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갑자기 안수기도를 받고 천국에 올라갔다.
꽃밭을 혼자 거닐다 순간이동으로 하나님의 성 앞으로 갔단다. 문 앞에서 예수님이 기다리고 계셨단다. 그렇다면 아까 그 꽃밭이 어딘지가 궁금해진다. 천국 외곽지대의 정원?
천국 문을 열고 앞에서 기다리시는 '예수님'이 얼굴이 잘 안 보이는데 윤기 나는 곱슬머리가 어깨 위까지 내려왔고 옷은 수수하면서도 우아하고 성령의 기름이 흐르고 있다고 표현했다.
하나님의 성 안 어느 방은 금괴가 가득 차 있고 이 금괴가 모두 K 교회 용 재정이란다. "나(주님)만을 의지하는 자가 받는다"는 이 금괴는 J에게도 이미 주셨단다. '계시의 방'(??)에는 책장에 두루마리가 잔뜩 쌓여있고 문 정면에 금고가 있는데 이 두루마리는 대 부흥때 일꾼이 받는 특별계시란다. 그러니까 벤틀리 같은 신사도운동 명사들이 수시로 받는 계시인가 보다. 두루마리 하나를 펴시니까 거기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란 글씨가 쓰여 있더란다.
옆 방엔 기도가 담긴 '계시의 항아리', '사랑의 항아리', '주님만을 의지하는 항아리' 등 세 항아리가 있고 쌀 1톨만 있는 끝 항아리에 들어 가라는 '감동'을 주셨단다. 뭔가 이상하다. 앞 방은 그리스도 향기의 방인데 자신의 영에 향기가 가득 채워졌단다. 영에 채워지는 향기가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앞 방으로 갔는데 말로 표현 못할 경건/거룩/임재 등이 가득한데 이름이 보좌의 방, 임재의 방이란다. 이처럼 하나님의 보좌도 방 안에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사람이 현재 세계에 많은가라고 여쭸더니(질문 자체가 이상하다),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란다. "누가 이곳에 들어와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나요?"라고 물었더니 주님만을 의지하는 자란다. 아마도 전세계에서 신사도운동자들만 국한되지 않나 싶다. 갈 때가 되어 금괴를 주시면서 "목사님께 갖다 드려라"고 했단다. (표준 어법상 '너희 목사에게 갖다 주어라'가 맞다.) 금괴엔 새겨진 글씨는 "K교회, B 목사에게, 예수님께서"라고 돼 있었단다. (바른 어법은 끝 부분이 '예수'라고 돼 있어야 한다).
2006년 6월18일 찬양축제는 "목사님의 회복을 위한 거란다. 주님의 온전한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기 위한 축제란다"라는 말씀을 천국에서(?) 방언으로 주셨단다.
즉 주님이 성경에서는 한 번도 쓰시지 않던 방언을 사용해서 '축제'라는 말, "온전한 임재로 들어간다"는 말, '목사님'이라는 존칭을 써 가시며, 그의 회복을 위해 '주님'의 중심을 쏟고 계시는 놀라운 열정과 사랑을 느낀다. 과연 이 분이 주님이신가, '주님'인가?
이상에서 보듯 K교회 사람들의 입신 체험담은 거의 예외 없이, 거의 모두 황당한 비성경성을 내비치고 있다. 어느 모로 보나 입신을 조심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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