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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과 검증/기타

모라비아교와 친첸도르프(진젠도르프)1

헤른후트와 친첸도르프



'모라비아'라고 하면, 흔히들 감리교 창시자인 존과 촬즈 웨즐리 형제를 연상할 것이다. 

1736년 1월 하순, 미 대륙으로 향하던 배 위에서 웨즐리는 생명을 위협하는 폭풍 속에도 흔들림 없고 두려움 없는 모라비아 형제회 교도에게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최근 모라비아교(Moravian Church) 관련 뉴스들이 심심치 않게 뜨곤 한다. 이 교파는 웨즐리 형제에게까지 영향을 준 경건주의(Pietism)로 유명하지만, 그들의 경건주의는 성경이 말하는 진짜 경건을 추구한다기보다 그들 나름의 경건주의라고 판단된다. 까닭은 여러가지이지만, 이들은 특히 20세기였던 지난 1974년대에 이미 동성애자들을 "완전한 교인들"로 포용하고 있음을 인정했고, 2002년 북부지방대회(NPS)는 당분간의 유예기간을 두고 있다가 올해 드디어 동성애자들의 안수례를 허용키로 NPS가 표결했고, 심지어 북미주 동성애자들의 '결합예식서'를 작성, 발표했다. 다만 여타 지방회는 아직 이렇다할 입장 표명을 하지 않고 있다. 

이런 현상은 모라비아교가 에큐메니즘을 지향해온 때문일 것이다. 예부터 '경건'을 자랑해온 모라비안들치고는 참 놀라운 일이다. 결국 옛 파리새(바리새인)와 다름없는 경건이려나. 

  

가장 근래엔, 신자는 모름지기 매일 24시간 기도를 해야 한다며 '연쇄기도'를 강조하는 소위 '24/7 기도운동'을 해온 마이크 비클의 아이핲(아이합, IHOP)이 모라비아교와 연계되어 부각돼 왔다. 원래 이 기도운동의 뿌리가 친첸도르프와 그의 모라비아교 집단인 헤른후트이기 때문이다. 나중 언급할 테지만, 아이핲과 모라비아교의 연계는 이것 말고도 여럿 있다. 또 비클과 무관하지 않은 사이인 맄 조이너[각주:1] 역시 모라비아교와 연계가 있다. 


모라비아교 경건주의의 선구자였던 독일의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친첸도르프(Nikolaus Ludwig von Zinzendorf, 영어: '니콜러스 루이스 진젠돌프')는 지금까지 경건주의자의 모델로 늘 떠받들어져 왔다. 모르긴 해도, 친첸도르프와 모라비아는 아마 웨즐리와 감리교에 준 영향으로 톡톡한 점수를 따 왔을 것이다. 아울러 웨즐리 형제와 친첸도르프는 모두 미국 대륙을 방문한 일로 미국인들에게도 호감을 사 왔다. 그래서 친첸도르프는 모국인 독일보다는 오히려 해외에서 더 많이 알려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연 친첸도르프와 모라비아 교인들은 세계 크리스천들의 상찬을 받아 마땅할 만큼 경건하고 훌륭한 신자였을까? 수많은 설교가, 교회사가들이 경건의 모범적 사례로 들 만큼 유명한 그가 가르친 경건주의는 정말 성경적이었을까? 

정작 살펴 보면 의혹스런 구석이 한 두 가지가 아니기에, 이를 따져 보기 위해 친첸도르프와 모라비아교에 관한 시리즈를 모두 3회에 걸쳐 마련해 본다.



모라비아란?


친첸도르프 백작은 독일 귀족으로, 본래는 놀랍게도 모라비아와는 전혀 무관했다! 그 점에서 특이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모라비아는 중앙 유럽에 있는 지역으로 체코(오늘날의 체코공화국)의 동부 대부분을 차지하며, 역사적으로는 보헤미아, 체코 실레지아와 함께 체코 동쪽에 있던 나라의 하나였다. 모라비아라는 이름은 이 지역 북서부에 있는 모라바(Morava, 독일어 '마르히')강에서 유래했다. 



모라비아 교의 유래


마르틴 루터의 개혁 이전에 존재했던 사상 최초의 신교 교파인 모라비아교는 처음에는 14세기 말 체코-보헤미아의 개혁가, 얀 후스(Jan Huss 영어 존 허스)의 사상을, 훗날에는 독일의 슈페너와 프랑케의 루터교 경건주의 등 두 줄기의 영향을 받게 된다. 후스는 로마 천주교에 반대하여, 라틴어가 아닌 비잔틴 초기 시대에 영향을 받은 모국어(체코) 사용, 빵과 포도주를 모두 사용하는 성찬, 사제혼인제 등으로 복귀하기를 원했고, 면죄부와 연옥설을 거부했다. 후스와 모라비아교는 보헤미아 왕실의 지지를 얻었으나, 그는 콘스탄체 공의회에서 이단 단죄를 받아 1415년 7월 6일 화형 당했다. 이로 인해 1419~1437년 '후스 전쟁'이 일어났는데, 처음엔 천주교도인 지배자와 후스 파(Husité, 영어 Hussites) 사이에, 나중엔 후스파 사람들끼리 벌어졌다. 온건주의 후스파였던 '울트라퀴스트'들은 천주교와 손잡고 다른 후스파와 맞서 싸우다, 1434년 리파니 전쟁에서 상대 후스파가 패전한 뒤, 1436년 7월 5일 바젤 조약을 맺었다. 


1457년, 후스의 제자들 일부가 독립적으로 보헤미아 형제회(Čeští bratři) 또는 형제연합(Jednota bratrská 라틴어 Unitas Fratrum)을 보헤미아의 쿤발드에 설립했다. 

[ 이것은 포데브라디의 게오르게 왕의 사유지에서 피신처를 얻었기 때문이다. 왕 자신 후스파 지도자인 휘네크 프타체크가 죽은 뒤 후스당의 주요 지도자가 된 데 이어, 1458년 보헤미아 왕위에 올라, 신구교 사이의 중도적 입장이 되어 다스렸다. 그후 친교황측 귀족들과 적대 관계가 되자, 1465년 젤레나 호라(그뤼네베르크)에서 열린 친 교황측 회의 후 이듬해 12월 23일, 천주교황에 의해 출교된다. 이를 틈탄 프레데맄 3세 황제와 헝가리의 마티아스 왕이 그를 적대해, 결국 1469년 5월 3일 모라비아 수도인 올로무츠에서 마티아스가 보헤미아 왕위에 오르게 된다. 게오르게 왕은 마티아스와의 전쟁에서 이기고도 추종자들의 뜻과는 달리 1470년 화해조약을 체결한 이듬해 죽었다. ]


16세기 중반까지 체코 왕정 지역 인구의 90%와 귀족들 대다수가 신교인들이었다. 또한 모라비아 교회가 세운 신교계 학교와 출판사 등이 번창했다. 후스파의 특징은 귀족화된 천주교와는 달리 일반 교인들을 위한 보편적 교육을 시행한 점이었다. 급기야 체코 땅에는 신교 학교가 없는 도시가 단 한 군데도 없을 정도가 되었고, 주요 도시인 질라바에는 6개나 설립됐다. 수도에 있는 프라하 대학교도 신교인들이 주도하여, 천주교는 교육에 관한 한 맥을 못추게 되었다. 


이에 다급해진 천주교는 합스부르크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예수회 회원들이 체코 땅으로 진입하여 수도 올무츠(1566년)를 비롯한 여기저기에 천주교 교육기관을 세우게 된다. 마티아스 신성로마황제는 카톨맄 교도인 페르디난트 2세를 보헤미아 왕으로 즉위시키려 들자, 이미 2개의 신교 교회를 강폐 당한 뒤인 1618년, 보헤미아 신교 귀족들이 이에 반발하여 '보헤미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2년 후 프라하 근교의 빌라 호라(하얀 산이란 뜻)에서 벌어진 백산전쟁(Bitva na Bílé hoře)에서 패전했다. 이 전쟁은 '30년 전쟁'으로 발전한다. 

결국 합스부르크 왕조는 독일계 천주교도들로 바뀌고 신교 귀족들은 처형/축출됐으며, 전쟁과 역병, 기타 악영향으로 인구 300여만이 80만으로 급감했다. 또 예수회의 공작에 의하여 1622년까지 신교 학교들은 모두 폐쇄된다. 예수회에 의해 모국어로 된 책들은 불태워지고 모든 신교 출판물은 '이단서적'으로 단죄됐다. 


이에 따라 형제회 사람들은 지하활동을 하다가 결국 북부 유럽 저지대 등으로 흩어졌는데, 체코 모라비아 교회 최후의 감독인 얀 아모스 코멘스키(코메니우스) 감독 등이 재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형제회 최대 그룹은 폴란드 레스노에 남아 있었는데, 그들은 코멘스키가 선조의 복음주의 신앙을 보존하기를 바랐던 '숨겨진 씨앗'이었다. 


이로부터 약 100년이 지난 1722년 6월 17일쯤, 모라비아 북부에서 지하생활을 하던 보헤미아 형제회 '숨겨진 씨앗'의 일부가 박해를 피해, 니콜라우스 루드빅 폰 친첸도르프의 소유인 베르텔스도르프 영지에 도착한다. 그들의 지도자인 순회 목수(木手, 일설엔 도공), 크리스티안 다뷔드가 친첸도르프를 만나 친교를 나눈 결과였다. 그들은 친첸도르프의 호의로 루사티아 북부(현재 독일 동부의 작센 지방, 오벌라우지츠)에 정착하도록 허락받는다. 바로 여기에 이들의 새 마을인 헤른후트(Herrnhut, '주님의 지켜 돌보심'이라는 뜻)가 세워졌다. 



친첸도르프의 생애와 경건주의


모라비아 교의 지도자이자 찬송가 작가인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친첸도르프 백작(1700~1760)은 1700년 5월 26일, 독일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당대 유렆에서 가장 오랜 전통의, 오스트리아 북동부 귀족층으로, 개혁시대 때 루터교인이 되었다. 친첸도르프 선조들 가운데는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도 있다. 루드비히의 할아버지인 에라스무스 막시밀리안 폰 친첸도르프는 천주교로 개종하기를 거부하고 오스트리아의 모든 재산을 팔아 독일 프랑켄('프랑코니아')으로 이주했다. 


루드비히는 생후 6주만에 아버지를 여의어, 할머니 헨리에테 카타리나 폰 게르스도르프와 이모가 사는 그로스헤너스도르프의 성에 보내졌고, 4살 때 어머니가 재혼하는 바람에 주로 할머니의 손 아래 자랐다. 당초 루드비히의 부모는 경건주의에 심취하여, 경건주의 학자 필맆 야콥 슈페너를 루드비히의 대부로 모셨다. 

루드비히가 평생 경건주의 영향 아래 살게 된 내력의 일부가 그랬다. 그는 어릴 적부터 깊은 루터교 신앙을 지녀, 8살 때 예수님께 '사랑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각주:2]. 청소년기에 들어서자 그는 자연히 미래 사역자로서, 그리고 귀족(백작)으로서의 할 일도 생각해야 했다. 친첸도르프는 그가 숭모하던 마르틴 루터와 마찬가지로 강렬한 감정의 사람이었고, 자주 슬픔과 기쁨 등의 감정에 쉽사리 좌우되곤 했다. 



'겨자씨회' 결성


1715년, 당대 경건주의의 온상인 할레 아카데미에 다니던 친첸도르프는 4명의 귀족 친구들과 함께 기도와 책임성을 모토로 하는 하나의 비밀모임을 결성했는데, 이것이 훗날 공식 명칭인 '겨자씨회'(Senfkornorden 젠프코른오르덴)로 발전한다. "영적인 비밀 기사단"이라는 개념으로였다. 현재도 있는, "크리스토(그리스도)님을 위한 순정적/관계적/선교적 삶을 살려는 목적"을 지녔다는 OMS(영어 겨자씨회의 줄임말)라는 그뤂의 시조이다. 20세기 모라비아교 감독, 허버트 스포그는 OMS의 헌신 내용을 1. 크리스토님께 신실하기, 2.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기, 3. 세계에 복음 전하기로 요약한 바 있다. 겨자씨회에 관해서는 잠시 후 재론하겠다. 


그후 루드비히는 귀족으로서 걸맞은 외교관 경력을 쌓기 위해 법학을 공부하러 1716년 뷔텐베르크 대학교에 진학했다. 3년 후 그는 유렆 여행을 떠나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의 다양한 지역들을 다니면서 신/구교 명사들을 만났다. 돌아오던 길에는 자신의 친척이 거주하는 뉘른베르크 근교 오버뷔르크와 카스텔을 방문했다가 카스텔에서 사촌누이 조피 테오도라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테오도라의 어머니인 과부 백작부인이 둘의 결혼을 반대하는 통에, 테오도라는 (루드비히의 친구이자) 로이스의 영주인 하인리히 29세 백작과 결혼해 버렸고, 루드비히는 당일 결혼식장에서 만난 신부의 동생, 에르트무테 도로테아와 일년 후인 1721년에 결혼하게 된다. [ 그래서 친첸도르프의 교회를 본뜬 모라비아교회가 하인리히의 영지인 에버스도르프에도 세워진다. 이 교회는 귀족과 평민의 경계를 허물고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며 지냈다. ]  



소명? 


어릴 적부터 귀족으로서 할 수 없는 것이 별로 없었던 젊은 친첸도르프가 뜻밖에 첫 사랑을 이루지 못한 이 첫 '실망사건'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을 느끼게 된 동기가 된 모양이었다. 그는 과거 외교관이 되어 주길 바라던 가족의 소원에 따르려던 나머지, 칸슈타인 남작 대신 할레 고아원을 맡아 달라던 경건주의 학자,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의 초청을 거절한 적이 있다. 이 부담감을 덜려고 루드비히는 그냥 농장주로서 자신의 차지인(借地人)들을 위한 삶을 보내기로 결심한다. 그는 할머니에게서 베르텔스도르프를 매입한 뒤, 요한 안드레아스 로테를 영지목사로, 요한 게오르크 하이츠를 대리인으로 불러들이고, 자신의 집부터 짓는다.  


그는 슈페너의 루터교 경건주의 이상을 보다 실천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일종의 개혁에 나섰다. 그래서 로테 목사, 괴를리츠의 멜키오르 쇄퍼 목사, 어릴 적 친구인 프리드리히 폰 봐테빌레 등과 '4 형제팀'을 이뤄 크리스토님과의 개인적인 신뢰의 정감을 보존하는 종교를 일으키고자 했다. 에버스도르프(현 튀링엔)에 있는 그들의 전속 출판사는 값싼 성경과 교리문답, 찬송가와 기타 신앙서적들을 대량으로 펴냈다. 요한 아른트의 '참 기독교'의 불어판도 여기서 발행했다. 


루드비히는 당대의 건조한 루터교 정통 교리를 싫어하여 교리를 공격하는 이성주의 경향에 어느 정도 동조했지만, 양쪽의 문제점을 모두 파악하고 역사적인 크리스토와 초대교회의 관행 및 영성을 추구했다. 바로 이 국면이 그를 보헤미아 형제회로 눈길을 돌리게 했다. 


1722년, 루드비히는 천주교 예수회의 박해를 피하여 온 모라비아와 보헤미아 출신의 신자들을 맞아 그들의 피신처로서 베르텔스도르프의 한 구석을 제공하여, 헤른후트 마을을 조성하게 했다. 헤른후트가 커지고 '종교자유의 처소'로 알려지면서 '슈벵크펠더'회 등 다양한 피박해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복잡다단한 그뤂들이 한데 엉겨 있다보니 서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루터교 목사인 로테와 영지 관리인인 하이츠의 신앙부터가 서로 다른 데다 요한 지기스문트 크뤼거의 종말론적 가르침은 더욱 종교적 긴장을 부추겨 마을이 온통 혼란의 도가니가 되어 갔다. 


마을 설립자인 크리스티안 다뷔드를 포함한 일부는 종말론에 빠져 심지어 친첸도르프를 (계시록에 나타난) '종말의 짐승', 로테 목사를 '거짓 대언자'라고 칭하기까지 했다. 결국 친첸도르프는 드레스덴 궁중 임무를 무기한 쉬기로 하고, 저택으로 돌아와 마을의 화해/중재에 나섰다. 그는 집마다 방문하며 함께 기도하기를 요청하고, 마침내 마을 사람 전체를 불러 집중 성경공부에 들어갔다. 핵심과제는 성경이 공동체 생활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느냐는 것. 이 공부와 집중기도를 통해, 마을 사람들 다수는 사랑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소명이고 자신들이 겪어온 갈등은 성경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결론을 믿게 된다. 이것이 헤른후트의 '초기개혁'이었다. 



과거와 현재의 연계


헤른후트 공동체가 점점 성장할 동안, 친첸도르프는 초기 보헤미아 연합체의 교회질서 규범인 '라티오 디스키플리나'(Ratio Disciplina) 한 권을 얻은 뒤, 보헤미아 역사를 공부하면서 초기의 우니타스 프라트룸과 헤른후트의 신학 사이의 "파워풀한 공통점"을 발견하고 놀란다. 그와 헤른후트 사람들은 모라비아교회 감독 요한 아모스 코멘스키의 저술물에 깊은 공감을 느껴 과거의 많은 개념들을 도입해 답습하게 된다. 그러나 친첸도르프는 분리된 교단보다는 모든 교파를 규합한 단합의 불꽃으로 보았다. 그는 또 머리(head)의 종교보다는 심정(heart)의 종교를 추구했는데, 이것이 후기 모라비아 교회의 특징을 이룬다. 


이리하여 헤른후트의 정신적 헤게머니를 쥐게 된 친첸도르프는 마을 사람들을 수도원 영성에 근거한 중세 십자군이 아닌 '가족생활'에 근거한 크리스토의 군사들로 조직해 나아갔다. 그러나 그가 맘에 둔 '가족'은 전통적인 핵가족이 아니라 오히려 전통가족의 울타리를 깨고 연령과 혼인, 성에 바탕을 둔 공동체적인 가족 개념이었다. 또한 '반덴'(banden/소그뤂)은 나이와 결혼 여부, 성에 바탕을 둔 '코르'(성가대라는 뜻)로 조직되었다. 친첸도르프는 나름의 신학에 따라, 인생의 각 단계별로 다른 영적인 욕구와 주님과의 다른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이런 모델에 의하여 세워진 모라비안 공동체는 훗날 미국의 베틀레엄, 펜설베이니어, 세일럼, 놅캐럴라이나 등에도 생긴다. (미국)베틀레엄에서는 미 원주민과 귀족들이 한 장소를 나눠 쓰고, 세일럼에서는 흑인노예들이 교회의 공식 일원이 되어 교회 지도자로 선출되기도 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친첸도르프는 1737년 5월 20일, 베를린에서 다뷔드 니취만과 다니엘 에른스트 야블론스키, 두 감독에 의하여 감독 안수를 받는다. 


친첸도르프는 흔히 여러 교파 사람들이 협력하고 서로 존중하는 것을 선호하고 옹호했다. 1742년, 그는 에프라타 수도원 등에 있는 미국 필라델피아의 독일어권 사람들이 토요안식일 준수에 존중을 표함으로써, 최초로 이틀간의 주말을 지키는 관행을 증진한 셈이 되었다. 그는 또 주일을 복음 전파에 사용했다. 



겨자씨회의 실체


한편 '겨자씨회' 회원들은 겨자나무 그림이 새겨진 상징 브로취를 달고, '우리 중 아무도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롬 14'7)는 그리스어 문구가 새겨진 반지를 끼고 있었다. 겨자씨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왕국은 겨자씨처럼 처음엔 작게 보여도 큰 나무처럼 된다는 예수님의 교훈에 근거했다(마태 13'31,32, 맑 4'30~32, 루카 13'18,19). 아울러 주님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이 바다에 던져지게 명령할 수 있다고 하셨다(마 17'20, 뤀 17'6).     


친첸도르프는 그후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겨자씨 회원을 포섭해 나갔는데, 그 가운데는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인물들도 포함돼 있었다:


   루이-앙트와느 드 노와유 대주교(천주교 파리 대교구)  

   존 포터(영국 국교회 캔터베리 대주교) 

   크리스티안 6세(덴마르크/노르웨이 국왕) 

   제임즈 에드워드 오글톮(조지아 식민지 개척자/총독, 영국 장군, 국회의원, 자선가) 

   토모치치(미 원주민 크리크 족 추장) 

   얼스킨(영국국회 스코틀런드계 의원)  

 

위의 사람들이 혹 친첸도르프의 고상해 뵈는 이상(理想)에 맞는지는 몰라도, 과연 크리스토님의 교훈에 걸맞은 사람들이었을까? 그러진 못했다!  



포터 대주교는 자신의 저서에서 성매매의 '유용성'을 지지/방어하기도 했고, 왕정복고적 국교회를 지향하였다.

 

독일 출신의 덴마르크 왕 크리스티안 6세는 수줍은 군주여서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추구했지만, 조용한 커튼 뒤에서 절대 전제주의에 의한 독재와 압제,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청교도적' 경건주의를 함께 추구한, 소극적이고도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큰 근심거리였던 일부다처를 자행한 아버지 프레데맄 4세의 유언을 무시하고, 아버지가 납치해 강제 결혼한 계모, 안나 조피 왕후를 폐위시켜 그녀의 어릴 때 집으로 보내버렸다. 또 사촌인 크리스티안 에른스트 백작을 왕의 고문 역으로 불러들여 거의 섭정을 맡기다시피 해서, 왕후 전속 조리사까지 교체하는 등 사사건건 내정간섭을 하게 만들었다. 왕은 또 농민의 타주여행권을 박탈하여 한 고장에 "말뚝 박게" 했다. 그가 죽자, 덴마르크에서 경건주의가 힘을 잃고 만다. 물론 그의 장점도 없지는 않았다. 


오글톮 장군/총독은 미국 조지아주에다 영국 식민지를 개척한 사람으로 미 대륙을 방문한 웨즐리 형제를 돕기도 한 인물이다. 박애정신 등 좋은 점도 있었지만, 그는 프리메이슨이었다! 


결국 친첸도르프의 겨자씨회는 고상한 목적과는 달리,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기독교' 지상왕국을 확장하는 데 급급한 주권주의/지배주의 단체가 되었고, 교파를 초월하여 영적인 '하나님의 왕국' 건립에 동참한다는 공동 목표 아래 (중세 개혁 이후) 최초의 에큐메니즘을 구현했다. 


(계속)

 

관련 글 링크 >


  1. 현재 '모닝스타 미니스트리' 대표인 조이너는 대표적인 '신사도'의 한 명이다. 과거 밥 조운즈, 마이크 비클, 폴 케인과 함께 캔저스시티 대언가그뤂(KCF)에서 활동했고, 비밀집단의 하나인 모 기사단 소속이며, 수 년 전 패가망신하다시피 한 문제투성이 '부흥강사' 타드 벤틀리의 소위 '회복'을 도와왔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조운즈와 각별한 사이였다. [본문으로]
  2. 이런 사실은 훗날 그의 특이한 신학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성을 띠는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