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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과 검증/기타

'성화'를 보고 "거듭난" 친첸도르프

친첸도르프를 거듭나게 해 주었다는 도메니코 페티의 '에케 호모'



'성화'를 보고 "거듭난" 친첸도르프

-친첸도르프와 모라비아교(2)



성도 개인의 삶에서 거듭남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그 순간 단순한 교인으로부터 신자로서의 삶이 새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교인의 성경대로 거듭남의 여부가 확실치 않다면, 그의 삶이라면 몰라도 신앙에 대하여는 더 깊이 논할 수가 없다. 별 의미가 없어서이다. 모든 신자가 마찬가지다. 이렇기에 한 사람의 신앙을 논하려면, 그의 참된 거듭남 여부를 먼저 관찰해야 바른 수순일 것이다. 


교회 역사상 명사의 한 명이었던 모라비아 교회 최고의 지도자, 친첸도르프(기타 표기: 진젠도르프, 진젠돌프)의 거듭남은 분명하지가 않다. 과연 그는 성경대로 말씀 진리와 성령의 권능으로 거듭났을까? 마침, 친첸도르프의 거듭남인 듯이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한 사건이 있다. 그것은 한 중세 '성화(聖畵)'와의 조우였다. 이 사건을 함께 깊이 검토해 보도록 한다.



지난 2009년 좐 파이퍼 목사는 목회자 설교 사이트, sermonaudio.com에 올린 '하나님 자신의 피값으로'(At the Price of God's Own Blood)라는 제목의 오디오 파일[각주:1]에서 친첸도르프에 관한 언질로 화두를 열면서, 친첸도르프가 여행 중 뒤셀도르프에서 이탈리아 화가 도메니코 페티(Domenico Feti,[각주:2] 1589-1623)의 Ecce Homo('에케 호모')[각주:3]라는 그림을 본 사건을 설명했다. 그 그림의 맨 아래에는 "나는 너를 위해 이것을 하였다.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왔느냐?"라는 라틴어 문구가 들어있었다. 파이퍼는 그 사건이 친첸도르프의 삶을 "바꿔 놓았다"면서, 그 때부터 친첸도르프는 자신을 자기 것으로 볼 수 없었고, 자신이 누구의 것인지, 자신을 얻기 위해 어떤 대가가 필요했는지, 무엇을 위해 크리스토(그리스도)님께서 친첸도르프를 값을 치르고 사셔야 했는지를 자문하면서 온전히 그 분께 헌신을 했다고 주장했다.

사실 파이퍼는 친첸도르프 예찬론자의 한 명인 문제 명사이다. 


그런가 하면, 종교미술 비평 사이트인 '이코니아'의 블로거, 메나헴 웨커는 페티의 이 그림이 비슷하거나 동일한 주제를 다룬 티티안, 틴토레토, 메믈링, 렘브란트, 뒤러, 보쉬 등의 그림보다 예술적으로 "더 낫지 못한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이 작품의 "종교적 유용성에 관해 왈가왈부하기 어렵다"고 말한 바 있다. 



자, 그런데 과연 성경 말씀도 아닌 페티의 미술 작품이 교인의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사건인 거듭남을 일으킬 정도로 거룩하고 성령의 권능이 넘치는 것이었을까? 그것이 친첸도르프는 물론 파이퍼의 믿음인 것 같기에 하는 소리다. 만약 한 미술품이 그런 영적인 파워를 지녔다면, 그것을 그린 화가 역시 영적으로 거룩하고 탁월한 신자로서 성령의 영감을 받아 대언자나 전도자 같은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고 봐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페티의 이 그림이 친첸도르프를 거듭나게 해 주었다기 때문이다. 아니면 친첸도르프가 이 그림을 보고 있는 순간, 그림 속의 '이 사람'-크리스토가 마치 살아있는 듯 튀어나와서 친첸도르프의 영에 접근해 강력한 도전을 줌으로써 그로 하여금 헌신하게 만들었다고 봐야 하든지. 


과연 하나님이 한 미술 작품 그것도 중세의 '성화'를 통해 그런 역사를 하시는가?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물음이다. 그림이나 영화, 음악 등의 시청각적 매체를 통하여 거듭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꽤 많기도 하다. 



거듭나게 해 주는 대작의 힘?


친첸도르프는 이른 바 '봔더야르'(Wanderjahr)[각주:4] 때, 젊은 귀족들의 '통과의례' 격이던 그랜드 투어를 한 지 약 1주 째인 1719년 5월 20일, 뒤셀도르프의 한 미술관에 들렀다가 이 그림을 처음 보았다. 그랜드 투어 중 5번째로 방문한 미술관이었다. 중세에 발달한 명 화가의 그림을 전시한 당대의 미술관이나 화랑은 귀족들의 문화 사교 중심지의 하나였다. 문지기가 깊숙이 절을 하자 친첸도르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그는 자신의 새 가정교사 리더러 및 이복형 프레데맄과 함께였다. 벽마다 둘러 보며 딴 그림들은 여타 미술관과 별 다름없다고 느끼던 그는 문득 이 작품 앞에 멈춰서서 유다른 인상과 감흥을 느끼며 묵묵히 바라보다가, 심오한 감동과 함께 위 문구의 말이 마치 크리스토님 자신이 그의 심정에게 한 말로 들리는 듯한 "거의 신비적인" 체험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전기작가들에 따르면, 그 날 그는 속으로 "(예수님을 위해) 뭔가를 더 해야겠다"고 결심 속에 한가로운 여행 따위로 시간을 보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프레데맄이 다가와 "나머지도 보지 않을래?"라고 물으며 "넌 여기서 15분동안 황홀경에 빠져 있어"라고 일러 주자 친첸도르프는 "그래야겠지"하고 비로소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친첸도르프는 그 날로 크리스토님께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서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깊은 감동을 받은 것과 초자연적인 거듭남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조지 W. 부쉬가 빌리 그래엄의 교훈을 받아서, 그래엄을 통해 술을 끊게 되고 예수를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새롭게 보게 됐기에 결국 그래엄을 통해 "거듭났다"는 식의 '나름 체험'을 성경이 말하는 참 거듭남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 스토리에는 몇몇 버전들이 있다. 페티의 그림 자체가 '에케 호모'를 비롯해 작품마다 다양한 버전들이 있어, 당초 친첸도르프가 감상한 실제 그림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예를 들어 피렌체의 갈레리아 데글리 우피지에는 동일한 화가의, 동일한 제목의 딴 그림이 있다. 그러나 친첸도르프가 본 작품은 현재 뮌헨의 바이예르쉐 슈타츠무제움(바바리아 주립미술관)에 있는 것(윗 사진)이라는 설이 최종적으로 유력하다. 이 작품의 맨 아래 붉은 난간 부분에, 전술한 문구가 다음과 같이 라틴어로 적혀 있기 때문이다. 


   Ego pro te haec passus sum (에고 프로 테 해크 파수스 숨)

   Tu vero quid fecisti pro me (투 베로 퀴드 풰키스티 프로 메)


이 그림을 유심히 보면, 우선 대다수의 중세 성화처럼 역시 백인에 가까운 귀족적인 면모와 차림새의 '예수'가 가시관을 썼는데도 핏방울은 모두 얼굴 정면을 비켜 가고 있다. 되도록 환한 얼굴을 보이기 위해서일 것이다. 슬프고 비참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기보다 온화하고 힘 없는 표정이다. 손가락은 비참한 정황에 비해 너무나 섬세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거의 여성적이기까지 하다. 비록 수염이 나긴 했지만, 이 인물의 전체 분위기가 남성적인 듯 하면서도 여성적이다. 


해당 시간의 정황과 과정을 묘사한 성경의 수난 내레이션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성경의 예수님이 가시관을 쓰신 시각은 필라투스(빌라도) 총독의 프레토리움[각주:5]에서 이미 채찍 형벌을 받고 난 뒤였다. 사형인 십자가형의 도입 격인 채찍 형은 널리 알려진 대로, 긴 가죽 조각 끝에 방울 모양의 납 덩이 등 금속 조각과 뼈/생선가시 등이 달려 있는 플라겔룸(flagellum)으로 병사가 반복해서 맹타하면 죄수의 살점이 쩍쩍 묻어나면서 등살 등이 너덜너덜해지도록 갈기갈기 찢기다시피 하는 극형이었다. 때로는 죄수의 등뼈가 드러나기까지 하면서 심한 출혈과 탈진으로 집행 도중 또는 집행 후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죄수의 경우도 타격 회수만 남성보다 10회 정도 더 적었을 뿐 대동소이했다. 

그러므로 주님이 이 극형을 견뎌낸 것은 다년간 목수 일로 다져진 신체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행진하는 동안 이내 쓰러지셨다.  


기원전 195-123년에 집필된 '렉스 포르키아'와 '렉스 셈프로니아' 등에 따르면, 로마 제국은 이런 채찍 형을 비 시민 사형수에 해당하는 형벌로 유보해 두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의 로마 서정시인, 호라티우스[각주:6]가 이 '공포의 채찍'에 관하여 언급한 바에 따르면, 최소 2명에서 6명까지의 집행자(lictor/맄토르라고 불렸다)는 죄수의 벌거벗은 몸을 키가 낮은 기둥에 엎드리게 하거나 세운 기둥에 똑 바로 묶어 둔 채, 맨 어깨부터 발바닥까지 온몸을 교대로 채찍질했다. 때로는 몸을 뒤집어 놓고 가슴을 치기도 했는데, 물론 그만큼 치명성이 가중되었다. 채찍의 타격 회수는 맄토르 자신들이 결정했다. 

그러므로 크리스토님이 채찍형을 받은 뒤의 피투성이 형상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페티의 그림 속의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우리는 멜 깁슨 식의 '리얼' 기법을 통한 참혹한 묘사를 구태여 필요로 하지 않는다.[각주:7] 공상도 상상도 아닌 그냥 생각과 묵상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친첸도르프는 이 비현실적인 '예수'의 모습에 "거듭날" 정도로 크게 감동 받은 모양이다. 

   


그런데 정작 페티의 '에케 호모'속 '예수'의 왼손 손가락들은 무슨 상징에 가까운 수상쩍은 '포즈'를 하고 있으며, 목에는 두 손목에 연결된 밧줄이 늘어져 그 끝은 난간 한 가운데 마치 교수형에 쓰이는 올가미[각주:8]의 작은 모형처럼 의미심장하게 늘어져 있다. 왜 하필 올가미인가? 올가미는 흔히 비밀집단 가입의식 때의 맹약에 쓰이는, 널리 알려진 중요한 오컬트 상징물의 하나이다[각주:9]. 페티는 혹시 당대의 수많은 화가/조각가/건축가 등 전문인들처럼, 메이슨리와 유사한 공인/장인들의 비밀단체에 가입 또는 개입해 있던 것일까? 아니면 오컬트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그림 속 '예수'를 통해 비밀집단을 간접홍보하려던 것은 아닐까? 이 '크리스토'가 그림 감상자에게 묻는 은밀한 물음은 "그대 역시 맹약의 올가미를 목에 걸칠 의사는 없는가?"라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친첸도르프가 받은 감동과 그의 이 '거듭남'과 '헌신'이란 것은 어처구니 없는 것일 수 있다. 필시 당대의 다양한 오컬트와 비밀집단에 대한 선지식을 갖고 '겨자씨회'라는 문제집단을 몸소 만들다시피 한 그가 이 오컬트적(?) 그림의 '암호'를 발견하고 반가워(?), 화가와 서로 이심전심으로 통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깊은 속뜻을 누가 알랴.



"너도 나처럼 채찍형을..."?


이 문구의 물음에 그런 암시적 의미가 전혀 담겨있지 않고 순수하다면, 아직 십자가 형을 받기도 전인 그림 속의 '예수'가 감상자에게 질문/요구하는 것은 자신과 같은 채찍 형에 준한 벌을 자진해서 받으라는 뜻일까? 구태여 이렇게 묻는 이유는, 실제로 중세의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율법적인 금욕이나 모종의 계율을 위하여 자신을 채찍질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자기 채찍 형벌'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음은 물론, 오히려 이교적인 근거가 있다! 


고대 로마의 루페르칼리아(Lupercalia) 축제기간인 2월 13-15일에 악령을 내쫓고 도시를 정화하여 다산과 건강을 증진하기 위해 희생 제물인 동물(februa)[각주:10]의 엉덩이(hide)에서 벗겨낸 가죽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주위 사람들을 치고 다녔다. 여성과 소녀들은 장사진을 치고 늘어서서 이 가죽채찍을 맞았는데, 불임 방지, 다산 촉진, 산통 절감을 위해서였단다. 적어도 낙태를 위해 채찍을 맞지는 않은 모양이다. 로마 때의 사가, 플루타르크는 이 축제를 이렇게 묘사했다:  


   "루페르칼리아는 많은 사람이 관련 글을 써온 대로, 고대 목자들이 즐기곤 하던 절기로, 아르카디아의 뤼케아(Lycaea)와도 모종의 연계가 있다. 이 시즌에 수많은 귀족 청년들과 시민 청소년들이 벌거벗고 시내를 두루 누비는가 하면, 스포츠와 웃음을 터뜨리며 털이 달린 가죽끈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후려치곤 한다. 귀족 여성들도 일부러 그 앞에 나서서 어린이들처럼 손을 내밀어 일부로 채찍을 맞곤 한다. 임신과 출산을 쉽게 하고, 불임을 다산으로 바꾸기 위해서이다."


호라티우스도 그의 서시 'Ode III'에서 루페르칼리아를 묘사한 바 있다. 사실 '늑대 축제'라는 뜻인 루페르칼리아는 로마의 건국자로 알려진, 암늑대 '루파'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고아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전설과도 연계돼 있다. "지난 계절을 속죄하고 새 봄을 정화하기 위한" 이 축제는 전통적인 건국 지점인 로마 중앙 언덕, 팔란티네 위의 루페르칼 동굴 인근에서 관련 행사가 치러지곤 했다. 기원전 44년 기록만 해도 축제가 지속되다가 동굴이 회복되기 어렵게 파손되었다가 아우구스투스 때에 와서야 복원된 뒤 축제가 재개됐다. 지난 2007년 아우구스투스 궁의 유적지 지하 15m 지점에서 발굴된 동굴이 바로 이것이었다는 학설이 있다. 


축제는 루페르키(Luperci)[각주:11]에 의해 진행됐는데, 이들은 반신반수의 음란한 목신(牧神), 파우누스(Faunus, 그리스의 Pan. 참조 그림 링크 >)의 사케르도테스(사제)이기도 하다. 루페르키들은 퀸크틸리아[각주:12] 족 출신의 '퀸크틸리아니'[각주:13]와 파비아 출신의 '파비아니' 등 두 그룹으로 나눠져 있었고, 이 그뤂 위에 감독관[각주:14]이 있었다가,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각주:15]를 기리는 제3의 그뤂인 '율리'가 추가되었고, 이 세 그뤂 위에 최초로 감독관이 된 사람이 바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였다. 그는 축제기간중 카이사르에게 관을 헌정했는데, 카이사르가 조만간 왕이 되리라는 표징으로 해석되었다.[각주:16] 루페르키는 축제 때 맨 몸에다 옷 아닌 염소가죽만 걸치고 진행했고, 황제시대엔 모두 말을 타고 있었다.  

  

이 축제는 루페르키 또는 유피테르(주피터)신의 사제들인 '플라멘 디알리스'가 늑대 신에게 숫염소 두 마리와 개 한 마리를 바치는 제사로 시작됐다. 그 다음으로는 두 명의 젊은 귀족 루페르키가 안내를 받아 제단에 이르면, 이마 위에다 제물의 피를 붓고, 제물의 피로 난자한 칼을 우유에 적신 털로 닦아 내고는 미소와 웃음을 웃었다. 제사가 끝나면 루페르키가 희생동물(페브루아)의 가죽으로부터 끈을 만들어 들고 제물로 바친 염소의 가죽을 걸쳐 루페르쿠스의 모습을 꾸미고는, 돌로 표시해 놓은 선을 따라 팔란티네 성의 벽을 돌며 두 떼로 나누어 군중들 특히 다산과 임신을 바라는 소녀들과 여성들을 가죽끈으로 후려치곤 했다(참조 링크: >). 

대상과 개념이 이렇다 보니, 이들 사이에는 학대성/피학대성 성욕(마조히즘/사디즘)과 주물숭배 감정이 교차했을 테고, 실로 문자 그대로 양탈을 쓴 늑대들인 셈이었다. 오늘날 검정 가죽옷을 입고 가죽 채찍을 든 파트너가 파트너를 때리고 맞으면서 서로 학대/피학대 성욕을 돋운다는 변태적이고 가히 악마적인 페티쉬즘(fetishism) 행습은 파우누스 신도 연계된 바로 이 음란한 축제에서 비롯된 것임이 거의 틀림없다.     



◀ 자신을 채찍질하는 중세 고행자들


그 후 5세기 말엽에 천주교황 겔라시우스 1세의 치하 때 이 관행은 "수치스런" 것으로 여겨져 폐지되는 듯 했으나, 어이없게도 천주교 속에 은연중 침투하여 자기금욕과 고행의 도구로 둔갑했다. 어떤 학자들은 겔라시우스가 이것을 양성화하여 '복된 정녀 마리아의 정화 축제'로 대체했다고 한다.[각주:17] 

  

아무튼 기독교에 없던 자기 채찍 형벌이 천주교에 생긴 것은 로마 제국에서 비롯된 이교적 연원임을 필경 알아채 수 있다는 것이다.(참고 링크: >)


흥미롭게도 이런 자학적인 자기 채찍질은 회교 등 이교에서도 흔히 발견된다.(링크: >사실 우리의 생각에 선뜻 떠오르는 광경은 고대 카르멜(갈멜)산 정상에서 엘리야와 겨룬 바알과 아쉐라 사제/'예언자'들이 하늘에서 바알의 불이 내려오지를 않자, 자기네 몸을 학대하며 피를 뿌리던 진풍경이다(왕들A=열왕상 18'26~28).  



이 문구가 만약 "내가 받은 고난과 십자가형을 본받아 그대도 나름대로 십자가를 지고 받으라"는 주님의 교훈에 근거한 순수한 의미였다고 가정한다면, 프레토리움에서의 그 분이 아닌 십자가 위의 그 분이 하신 말일 때 비로소 제대로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채찍형은 단지 수난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응보적 대가를 요구하는...?


"나는 널 위해 이것을 했노라. 너는 날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오해하지 마라! 이 라틴어 문구는 실제로 주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라, 상상의 소산일 뿐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성경엔 이런 되바라진 보상의식적인 개념이 없다. 자칫 비슷해 뵈는 개념은 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각각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음은 성경대로이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너를 위해 이렇게 했는데, 너는 왜 아무 것도 할 생각을 않느냐"는 식의 응분의 대가를 요구하는가? 주님은 결국 인류에게서 어떤 대가를 바라고 십자가를 지신 것인가? 과연 우리 자신의 십자가로 주님의 대속의 희생과 사랑에 대한 대가를 "치를" 수나 있겠는가? 주님이 우리에게 생명까지 거저 주신 것은 무조건적인 아가페 곧 사랑 때문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페티의 '에케 호모'의 문구는 문제점을 드러낸다. 주님이 채찍형과 십자가형을 받으신 것은 조건 없이 죄인을 용서하고 정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지, 인류 각 사람에게서 대가를 바라고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독생자의 죽음을 통해 바라신 것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라는 것이지, 죄과에 해당하는 속전을 물어 내라는 뜻이 아니었다. 단지 그 분이 무한한 사랑으로 치르신 그 고귀한 희생에 응하여 구주이신 그 분을 믿어 영생을 얻는 것-그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이다. 또한 제자가 되려면, 각자 제 몫의 십자가를 지고 그 분의 뒤를 따름으로써 그 분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이 주님이 명하신 바이다. 

"내가 대가를 치렀으니 너 또한 응분의 대가를 치러라"-이것이 십자가의 정신이 아니다. 주님은, 무엇인가 주어졌으니 무엇인가 받게 되리라는 'Do ut des(도 우트 데스)'의 원리에 의하여 우리에게서 뭔가를 기대하신 것이 아니다.  



'성화'는 계명 위배


그보다도 이런 그림을 제작하는 행위가 십계명의 제 2 계명(플러스 제1계명)을 어겼다는 더 큰 문제가 있다. 혹 우상숭배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우상 제조/구매 혐의가 있다는 말이다. 

필자가 중년에 미국에서 성령의 은총을 입고서야 비로소 깨달은 사실이지만, 신/구/정교계를 막론한 예술품인 모든 '성화'나 조각상 따위는 우상숭배의 대상이기가 쉽다. 따라서 교회당 안이나 신앙단체의 건물 내부, 올바른 신자의 생활공간에 '성화'나 종교영화 장면 속 주인공 같은 '성경인물'의 사진 따위가 있어선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미술품들이 모종의 외경이나 '숭경심'을 자아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천주교당 주변의 모든 '성상'들도 마찬가지이다. 단, 이것을 제거할 때는 율법적인 단죄를 삼가고 어진 충고로 해야 할 것이다. 필자의 딴 글에서 비쳤듯, 예수회 사제회원이었던 관상가 헨리 나웬은 정교의 성화상을 앞에 놓고 하는 관상기도에 관한 책을 쓸 정도로 성화상 숭경에 몰입했다.( > ) 이 모두가 제 2 계명에 위배되는 행위이다. 

독자에게 권하건대, 당장 집안의 모든 '성화'들을 제거하라. 교회에서도 역시 지도자들이 그런 단행을 하는 것이 좋다. 물론 율법적으로가 아니라 부드럽게 권유조로 해 나가길 바란다. 신자가 이런 '성화'를 가까이 할 아무런 성경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림 속 또는 조각상의 인물이 실제 성경 인물일 가능성도 없거니와 실제적 근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상의 제작은 성경이 권하는 바가 아니다. 이 모두가 주로 눈에 보이는 것을 갖고 섬기는 천주교/정교에서 온 관행이다.    



페티의 다른 작품, '멜랑콜리'(옆 사진)에서는 등장인물이 해골을 끌어안다시피 한 채 묵상/고심을 하고 있다. 멜랑콜리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  > ). 

또 다른 중세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신화 속 주제를 다루었는데, 대표적인 작품은 '베르툼누스와 포모나'(Vertumnus et Pomona)이다( > ). 신화 작가 오비드의 '메타모르포시스' 제 14장에 따르면, 베르툼누스는 '계절의 신'으로 자기 마음대로 모습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이용, 늙은 여인으로 위장해 아름다운 요정 포모나의 과수원에 침투하여 다양한 이야기로 유혹하다가 강간한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 

본래 에트루리아에서 왔다는 베르툼누스 신 숭배 관행은 기원전 약 300년에 로마에 입수되어, 에트루리아의 볼시니[각주:18]가 함락되던 해인 264년, 고대 로마 근교의 7개 언덕의 하나인 아벤티네 언덕에 그 신전이 세워져 매년 8월 13일 그를 기리는 축제가 열리기도 했다. 또한 페티의 작품 '헤로와 레안데르'(Hero et Leander) 역시 신화적 소재를 다루었다. 

그밖에도 중세 천주교도인 그로서 어쩔 수 없었겠지만, 비성경적인 성모 '무염시태'도 있고, 정체 미상의 해골을 든 채 '회개'를 하고 있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그림도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이런 소재들을 갖고 미술 활동을 한 페티가 성령의 영감이나 권능을 지닌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을 리가 만무하다! 그는 당대의 수많은 카톨맄 화가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인사였다. 


참고로, 페티는 1589년쯤 로마에서 태어나 루도비코 치골리 문하에서 미술 수업을 한 뒤, 1613-1622년 만투아의 추기경이었다가 훗날 기회를 틈타 '성직'을 버리고 공작이 된 페르디난도 빈첸조 곤자가 1세의 궁정화가로 일하면서, 특히 신약성경의 비유들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그렸다. 1622년 9월쯤 그는 만투아의 명사들과 서로 다투던 끝에 베니치아로 옮겨 잠시 작품생활을 계속하다, 1623년에 죽었다.[각주:19] 

이러한 페티의 삶 속에서 남을 거듭나게 할 만큼 "신적이고 위대한" 영감의 작품을 그렸을 여지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밖에도 '너는 날 위해 무엇을..' 스토리엔 몇 가지 버전이 있는데, 그 한 가지는 '슈테른부르크' 또는 슈텐베르크라는 화가가 어린 짚시 소녀에 질문에 감화를 받아 그림을 그렸다는 근거 없는 일화가 그 하나이다. 



또 다른 '감동' 간증


이 그림을 갖고 각별한 '체험'을 한 사람은 또 있다. 바로 우리네 찬송가 '네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흘려'[각주:20]의 작시자인 영국의 여성 시인/찬송작가 프랜시스 리들리 해버걸(사진. Francis Ridley Havergal, 1836-1879) 양이다. 8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해버걸은 '나의 생명 드리니', '복을 세어 보아라' 등 수많은 명찬송시를 쓰면서 독신으로 지냈다. 


해버걸은 뒤셀도르프에서 유학을 하느라고 유렆 대륙에 머물던 시절, 독일 목회자의 서재에서 머물던 1858년 1월 10일, 페티의 이 그림과 문구를 처음 대했다. 그녀는 이 작품을 보는 순간 스르르 온몸의 힘을 잃는 듯 이 그림 앞에 주저앉았단다. '구주님'의 눈길이 그녀에게 머무는 듯 했단다.[각주:21] 해버걸이 문구를 읽으면서 머리 속에 흐르듯 떠오르는 찬송시를 종이에다 연필로 써 나아갔다. 바로 '나 너를 위하여 내 생명 주었단다'(I Gave My Life For Thee)였다. 그러나 시를 다시 살펴보면서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에 난로불에 던져 넣느라고 했더니, 그냥 바닥에 떨어졌단다. 1859년 이 시는 소책자에 실렸다가 이듬해 '좋은 말씀'(Good Words)에 실려 출판됐으며, 1869년에는 아버지가 붙인 가락(곡명 'Baca')과 함께 처음 선을 보였다. 해버걸이 이 시를 아버지에게 보여드리면서 느낌을 말하자 아버지는 잘 간직해 두라고 일러주고는 이 시를 위한 가락(곡명 Baca/'바카')을 작곡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같은 시에다 미국 작곡가 P. P. 블리스가 붙인 곡(곡명 'Kenosis')으로 더 널리 불려진다. 그래서 이 유명한 찬송가가 태어났다.( > )

 

해버걸이 같은 그림의 선배 감상자인 셈인 친첸도르프의 일화를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영국의 모라비안들을 만났을 가능성은 없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친첸도르프 역시 상당한 경력의 찬송가 작가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림에 얽힌 이런 짧은 감동 문구에서 큰 영감을 얻는 모양이다. 

작가들이 쓴 이런저런 찬송시들은 성경과 같은 격의 계시적 영감을 받고 쓴 것일까? 그럴 수도 없거니와, 비성경적인 부분을 지닌 다수의 찬송시가 이 물음에 의혹을 던져 준다. 또 중세 천주교의 '성화'에 불과한 그림을 보고 이런 찬송시를 썼다면, 그것은 성령이 주시는 감동이라고 하기 어렵다.

더욱이 전술했듯, '에케 호모' 속 의문의 밧줄 '올가미'와 실상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문구 등이 우리에게 의문을 던져 준다.



친첸도르프와 해버걸이 페티의 '에케 호모'로부터 어떤 감동을 받았든지 성령의 역사라고 보기 어렵다. "성령께서 하찮아 뵈는 재료로도 그런 역사(役事)를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물을 독자가 있을지 몰라도, 천만에다. 필자가 아는 한, 성경의 성령님은 십계명에 직접 위배되는 그런 '성화'를 통해 역사하지 않는다. 성령님은 이런저런 요소를 적당히 활용하셔서 진리를 타협하시는 분이 아니라, 철저한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착각하지 말기 바란다.  


바로 그래서 '에케 호모'를 보고 "거듭났다"는 친첸도르프 및 모라비안들과 좐 파이퍼 등 여타 인사들의 주장은 비성경적이라는 결론이다. 


또 화가 페티가 어떤 의도로 썼는지 모를 문구를 갖고 큰 감동을 받아 썼다는 해버걸의 찬송시도 성령의 영감으로 왔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그냥 명언에 의한 해버걸의 문학정서적 감동의 소산이라고 하면 모를까. 



친첸도르프는 중세 유렆의 수많은 화가들에 의하여 판 치던 이런 미술품 중심의 시각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은 모양이다. 퍽 감성적 성향이었던 그는 만년인 훗날에 미술 정서에 치우친 나머지, 흔히 '성화'에 보이곤 하는 '예수' 옆구리의 창자국을 '옆구리 구멍(Seitenhölgen)'이라고 부르며, 이 '구멍'에 대한 온갖 상상을 동원하여 영적이 아니라 센슈얼하다 못해 섹슈얼하기까지 한 기묘막측한 "성적(性的) 신학"을 만들어 낸다. 같은 시대에, '나를 위해 틈새가 난 영원한 바위(만세반석), 나를 숨겨 주소서(Rock of Ages, cleft for me)'라고 읊은 영국 개혁주의 시인, 어거스터스 토플래디의 찬송시도 이와 과히 무관하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시리즈 차회에서 논하겠다.


(계속)

관련 글 링크 >


 



  1. 해당 영어 파일을 다음링크에서도 들을 수 있다. http://scissurl.com/5/msi [본문으로]
  2. 또는 Fetti [본문으로]
  3. '이 사람을 보시오'라는 뜻의 라틴어(요한복음서 19'5). 불가타 성경(Vulgata)의 본문대로이다. 필라투스(빌라도)가 법정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한 말이었다. [본문으로]
  4. 독일 대학 입학 직전후에 갖는 휴가. [본문으로]
  5. Praetorium. 로마 제국 장군 또는 총독 등 고위관의 천막 또는 관저, 사령부 건물 등을 가리키는 폭넓은 의미의 말.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필라투스 총독에게 재판 받으신 곳. [본문으로]
  6. 퀸투스 호라티우스 플라쿠스, 영어의 '호러스'(Horace). [본문으로]
  7. 깁슨 감독은 작품 '크리스토의 수난' 에서 '예수'의 한 쪽 눈이 감길 정도의 리얼 기법을 썼으나, 왜 오컬트 상징인 외눈이어야 하는 지 의혹을 사 왔다. 그의 영화사 로고에도 외눈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8. hangman's knot 또는 Evans knot라고도 불린다. [본문으로]
  9. 필자의 관련 글 'KJ는 프리메이슨이었다!'는 글을 구글링에서 검색해 참조하길 바란다. [본문으로]
  10. 바로 이 어원에서 2월의 영어 낱말인 February가 유래했다. [본문으로]
  11. '늑대/루푸스의 형제들'이라는 뜻 [본문으로]
  12. 또는 퀸크티아 족 [본문으로]
  13. 또는 퀸크티알레스. [본문으로]
  14. magister, 마기스테르 [본문으로]
  15. 영어의 줄리어스 시저 [본문으로]
  16. 참고로, 쉐잌스피어는 그의 극시 '줄리어스 시저'를 루페르칼리아 무렵으로 시작하고 있다. [본문으로]
  17. 켈로그와 칵스 같은 학자들은 소위 '밸런타인(데이)' 곧 '성 발렌티나'의 축제 일부가 루페르칼리아에서 왔다고 추론한다. [본문으로]
  18. 고대의 벨즈나, 현재의 이탈리아 볼세나 인근의 오르비에토라는 설이 유력함 [본문으로]
  19. 일설은 1624년 [본문으로]
  20. 새찬송가 311장, 옛 (통일) 찬송가 185장 [본문으로]
  21. 이 대목에서, 소위 '성화' 속의 예수님, 구주님을 참 존재로 믿고 대하는 흔하고 위험한 성향을 발견할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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