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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음악

'보혈을 지나' 촌평 (수정)



작시/작곡자 김도훈 목사가 본 TLT를 방문, 몇 차례의 댓글을 통해 이의를 제기한 점들이 일리가 있다고 판단되어, 원글 내용을 상당량 추후 정정했음을 밝힙니다(2011년 10월 28일). [ 편집자 주]


오래 인기를 끌어온 
'보혈을 지나'라는 한국 경배찬양곡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보혈로써 속죄/대속을 받아 거듭나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다는 내용이겠습니다. 

30대 후반의 젊은 찬양곡 작곡가, 김도훈 목사가 2003년 작사/작곡한 이 노래는 '보혈찬양' 물결에 편승한 최근 노래들의 하나가 아닌가 싶군요. 순복음 계열 사역자인 김 작가는 최근 일본으로 선교 사역 차 떠난 바 있습니다.  


이 노래는 리듬이 대체로 젊은이들 노래답게 약간 까다로워 보이지만, 구성상으로는 매우 단순하고 흐름도 쉽습니다. 
가락/형식부터가 대중적 감흥이 있지요. 

김 목사는 이 곡을 2003년에 '환상'을 본 후 작시/작곡했다고 합니다. 하늘에서 주먹 만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봤는데, 알고 보니 핏방울이었답니다. 그러고 보니, 멜 깁슨 감독의 영화, '크리스토(그리스도)의 수난'(2004년)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듯한 대목이군요. 영화에서는, 하늘서 하느님의 눈물(?) 같은 물방울이 떨어지는 부분입니다. 실은 이 영화의 성경 밖 장면들 대부분도 에머리히 수녀 등의 환상/계시에서 딴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 제작 연도보다는 김 목사가 말하는 '환상'의 연도가 더 앞선다는 점에서 더 오리지널(?)성을 띠는 듯합니다. 
 
물론 작가의 선의나 사명 등을 폄하할 뜻은 없습니다. 그러나 흔히 '비전'이라는 것은 모종의 영적 권위 주장의 배경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작가가 밝히는 이 '환상' 스토리가 이 노래의 영적 권위(?)를 뒷받침하는 유일한 소스인 듯 합니다. 


그런데, 언론에 보도된 작가의 간증 내용을 보면, 그의 꿈은 ‘천천천’- 60세까지 1000곡을 만들고, 1000장의 워십 음반을 내며, 죽기 전 1000일 동안 예배하는 것-이라는데..과연 바람직한 꿈/비전/이상인지 약간 의아스러워집니다. 
김 목사는 또, 자신의 10년 후 모습은 "온 지구가 성전이 되도록 기도하고 찬양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는데, 결정적으로 잘못된 포부임을 지적하고 싶군요. 세상이 어떤 곳인지와 성경의 종말론을 제대로 알면, 그런 포부가 나오질 않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이 세상은 장차 곧 망할 곳이기 때문이지요. 이 땅은 예수님의 평화 재림 전에는, 세상 신이요 임금인 마귀에게 지배 받는 곳입니다.
따라서 김 목사의 포부는 지상왕국적/주권신학적 비전이기가 쉽고, 자칫 마귀에게 이용 당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갑니다. 


아무러나, 노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시)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시)네
 



일부 버전에서, '나가네'(出)는 '나아가네'(進)가 어의상 더 정확하지만, 음율에 맞춘 가사의 제한상 대체로 준말로 폭 넓게 활용돼 왔습니다. 

'보혈을 지나'에서 '지나'라는 진행적인 개념은 문법적으로, "거쳐서"와 "지나쳐서"라는 두 가지 통과 개념으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전자의 개념이 분명할 것이며, 대다수의 신자들이 그렇게 이해할 것입니다. 

   1. 보혈을 거쳐, 즉 보혈 속/아래를 지나서 간다 
   2. 보혈을 "놔 두고" 지나쳐 간다
   
1. 은 말하자면, 보혈로 씻겨 모든 죄의 정함을 받고 나아간다는 뜻이겠습니다. 상식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문법적으로는 2와의 혼동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애당초 작가는 이 '혼동'을 피하려는 노력을 하진 않았으나, '환상' 속에서 보혈이 폭포수를 이뤘다고 했기 때문에 응당 1일 터입니다. 구태여 1과 2 둘 사이를 가릴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겠고, 가락이 가사보다 먼저였거나, 가사보다 리듬을 더 중시해서였을 수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아무튼 작가가 당초 의도한 대로는 '보혈 속을 지나' 또는 '보혈을 거쳐'가 더 옳겠지요. 그러나 후자는 발음이 좀 거친 편입니다. 

"보혈 속을 지나서"라면, 홍해를 통과한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납니다. 파울은 이 사건을 ('세례'보다는) 침례로 비유했지요(코린토A서=고전 10'1,2). 
 

한 걸음씩

다음으로 눈길을 끄는 부분은 '한 걸음씩 나(아)가네'입니다. 
'한 걸음씩'은 느린 행진을 연상시킵니다. 이 곡의 (평균) 속도나 전체 분위기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혈 속을 지나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향해 한 걸음씩 서서히 나아갈까요?..아니면 그 품에 즉시 안길까요? 후자로 보입니다. 주님의 '탕자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과거를 뉘우치고 귀가할 때, 맨날 집 앞에서 기다리던 아버지는 미리 마중 나와 있다가, 멀리 오고 있는 아들을 불쌍히 여겨, 달려가서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고 했습니다(루카복음서=눅 10'20).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보혈을 거쳐 죄 씻음을 받아서 아버지께 나아오는 사람이 갓난아기처럼 한 걸음씩 또박또박 느린 행진을 하여 도달하기까지 보좌 위에서 물끄러미 지켜 보며 기다리실 것 같지 않습니다. 눈 깜짝 할 사이, 단번에 보좌 앞에 이끌려 갈 것 같지 않나요? 

우리는 또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보혈에 의거하여 지은 죄를 회개합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총을 얻으려고 은총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갑니다(히브리서 4'16). 그런데 '한 걸음씩'은 담대하기 보다는 웬지 주저하는 듯한 인상이 드는 것은 필자만일까요. 담대히라면, 주저하지 않고 서슴 없이, 단번에 나아가지 않을까요?

찬송가엔 '한 걸음' 또는 '한 걸음씩'이란 말이 꽤 있지만, 성경엔 (신/구교) 공동성서 밖에는 없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김 작가의 '한 걸음씩'은 환상과 영감에 의한 것이기보다 관용적 용례 곧 관용구에 따랐기가 더 쉽다고 보입니다. 
'한 사람씩'이었다면 더 나았을 성 싶습니다. 거듭남과 용서는 개인 차원이기 때문이죠. 집단 차원의 용서는 구약적입니다. 


'존귀한 그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시)네' 

이 부분에서..존귀한 보혈이 영을 새롭게 하는 것은 단 한 번-죄인이 거듭날 때입니다. 회개할 때마다 영이 새롭게 되지 않습니다. 위로써 태어나 거듭난 영은 두 번 거듭나지 않지요. 다만, 회개할 때 말씀으로 새로워지는 것이 우리의 혼/마음입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서 '존귀한 그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네'란 부분의 가사는 죄인이 거듭날 당시만 적용됩니다. 이 점에서, '존귀한 그 보혈이 내 혼을 새롭게 하네'라고 한다면, 좀 더 보편성을 띠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보혈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경우와 날마다 말씀으로 새롭게 되는 경우를 둘 다 언급/나열할 수도 있겠지요.

곧..
 
   존귀한 주 보혈로 내 영혼 거듭나네
   존귀한 그 보혈이 내 혼을 새롭게 하네

식입니다.


음악적 면모를 볼 때, 노래 앞 부분은 순차적 진행이 많고 반복적이어서 부드러워 대중성이 높은 것과 직결됩니다. 그러나 후반부는 '그 보혈이'에서 6도 도약진행이 나타나 전반부와 대조적 균형을 이루며, 이 점에서 작가의 음악성과 기량이 돋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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