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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음악

'보혈을 지나' 토론 후기

김삼
 


한 독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찬양곡을 대다수 신자들이 무조건 수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인데, 수많은 찬양곡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요즘, 작곡/작사자와 신자들의 분별력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요즘 교계는 하고많은 '영성'들이 판 치는 통에, 통찰력과 분별심이 발동한 성도는 무슨 세미나나 특강, 설교자의 설교나 명사들의 강의를 일단 경계하고 듣는 경향이 부쩍 늘고 있지만, 찬양곡들에 대해서는 거의 그렇지 못한 실정입니다. 

이것은, 찬양곡이 가사 내용이야 어떻든, 일단 흐르는 시간예술인 음악에 담겨 감정/정서에 호소하는 데다, 노래를 배워 함께 부르다 보면 어느 새 쉽게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해당 노래가 주가를 올린, "뜬" 곡일 경우 인기와 명성 아래 깔려, 숨은 문제 요소들이 모두 덮여 버리기 일쑤이고, 그러다 보니 문제성 많은 노래들도 그냥 계속 부르게 되어 버립니다. 
과연 그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영광 돌려질지도 모르는 채로, 일단 내 정서에만 맞으면 그냥 넘어가기가 쉽다는 말이죠.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찬양곡들은 분별/검증의 '최취약지대'이기가 쉽습니다.


이런 차제에, 본 블로그의 글인 '보혈을 지나 촌평"에 대해, 노래 작사/작곡자인 김도훈 목사가 최근 직접 티엘티를 웹방하고 댓글을 올려, 본인의 입장과 창작 내력을 알리고 선처의 필요성을 제기했습니다. 
주로 반론 중심의 댓글이긴 하지만, 티엘티 독자들과 의외로 간접적인 친교 계기가 되었습니다(해당 글 아래 댓글들 참조). 또 이 노래와 작가의 인기를 실감하는 장이기도 하네요.

한 곡의 짧은 노래를 갖고 이렇게 복잡하고 장황한 생각과 댓글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처음이네요. 그만큼 시간낭비였다기보다는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고 봐집니다. 

김 작가의 댓글 내용은 상당 부분 일리가 있다고 느껴져, 평자가 수용하고 원글 일부를 수정했습니다. 서로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하는 퍽 유익하고 긍정적인 '세션'이었다고 생각되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분별력은 여전히, 변함없이 예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계기에 무뎌질 게 아니라, 오히려 쇠가 쇠를 벼리듯 성도가 성도를 통해 서로의 통찰이 예리해 질 수 있어야 합니다(잠언 27'17). 남 헐뜯기 내지 명사 긁어 내리기 차원이 아닌, 교회와 성도의 삶의 모든 분야에서 성경 진리를 극대화하기 위한 차원에서 말입니다.    


자, 그런데 김 작가는 "..좀 더 올바른 평을 하기 위해서라도 적어도 어떤 곡을 평할 때에는, 단순히 보도된 자료나 찬양의 단어만이 아니라, 그 곡을 쓴 작사 작곡가와의 충분한 교제와 인격적인 만남을 바탕으로 함이 어떨까.."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이상(理想)이 될 수 있다고는 봅니다. 그렇더라도 하나의 시나 음악을 평가함에 있어서 작사/작곡가와의 충분한 교제가 필수적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때로는 작품 자체가 핵심적이고 가장 많은 것을 말해 준다고 봅니다. 
역으로..작가와의 충분하고 무르익은 친교가 그 작품의 문제점을 되레 덮어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단, 작가 자신의 진짜 배경이 평자에게 노출되면, 보다 정확한 정보가 어떤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요. 


김 작가가 본 티엘티 블로그(원글 아래 김 작가가 쓴 최신 댓글들)에 밝힌 대로라면..'보혈을 지나'의 창작 배경은 최소한 세 가지입니다. 

   1. (2000년)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면서 예수님께 (축하?) 선물을 드리고 싶었던 마음
   2. 가사의 바탕이 되는(된?) 성구 (히브리서 10'19-22)에 대한 오랜 묵상
   3. 기도 가운데 본 십자가 환상

 
이런 작가의 순수한 열정을 존중합니다만, 첫째로, '보혈을 지나'가 '성탄절'에 땅에 오신 예수님께 축하(?) 선물을 드리고 싶은 순수한 마음에서 창작됐다면..분명히 초중세 천주교에서 유래된 과히 순수하지 못한 '크리스마스' 전통의 기원과 유래에 대한, 본 블로그의 다양한 관련 글들을 일단 참조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강요 사항이 아니라 권유 사항임을 다시 강조하면서요.
혹 썰렁한 제안이라고 느껴질지 모르지만, 알고 보면, 썰렁한 겨울철에 (고대 태양신 축전을 덮어 씌워) 크리스마스 전통을 억지 탄생시킨 천주교의 어젠다 자체가 썰렁하다고 느껴지는 쪽도 있지요. 


그 다음으로는, 이 곡의 창작 바탕이 된 성구인 히브리서 10:19-22에 관하여..
참고로, 노래 가사의 배경인 성구가 창작 이전/도중/이후에 적용되는 경우가 있는데, 작가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이 노래의 경우 분명히 창작 이전에 적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 이것을 짚고 넘어가는 이유는, 많은 성구들이 찬송가의 적당한 배경으로 인용되곤 하는데, 다른 평문에서도 지적했듯, 억지맞춤이 된 경우도 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더군다나 여기서 되풀이 거론하고 싶은 바는..(원글에서의 문법적 지적을 한 대로) 작가가 이미 대중화된 가사의 '보혈을 지나'를 평자에게 좀 더 적확하게 보이는 '보혈을 거쳐', (교계의 다른 주요 인사가 제안한) '보혈을 통해' 등으로 조만간 대체할 의사는 없지 않나 하는 점입니다. 감안 또는 고려해 보겠다는 답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지나'로 널리 보급된 대중성이나 인기도 때문에 감히 양보할 수 없을지, 가사를 뒤늦게 고침으로써 올 수 있는 혼동 탓일지, 또는 '지나'가 '거쳐', '통해'보다 훨씬 더 쉽고 부드럽고 감칠맛 나기에 그런지도 알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작가 자신이 '지나'가 더 옳다고 생각하는지도 (김 작가가 그 이상 아무 언급이 없어서) 현재로서는 모를 일입니다. 그밖에도 김 작가의 무언 반응들은 더 있습니다.  

'지나'라는 경과성 동사는 비록 발음이 부드러운 맛은 있더라도, 가령 소경이었던 명찬송가 작가, 패니 크로즈비가 "[각주:1]" 즉 "나를 지나지(=지나가지/지나치지) 마소서, 오 정다운 구주님!"이라고 절절이 외친 경우도 있기로, '지나'를 단순한 통과와는 구분하여서 좀 더 명확해야 좋지 않나란 뜻에섭니다.  

사실 '지나'는 약간 애매한 말입니다. 대강 통하는 말이기가 쉽습니다. 예를 들어 길목의 주유소를 지나쳐 달리는 것도 '지나'이지만,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넣고 가도 '지나'(거쳐)일 수 있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pass by'와 'through'라는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보혈 속을 지나', '보혈을 거쳐'라면, 비록 어감이나 발음은 어떨지 몰라도 문법적/성경적/신학적으로, 어의/뉘앙스 상의 모든 의문의 소지가 단번에 해결되어 버린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이와 관련, 김 작가는 어린이들도 '보혈을 지나'가 어떤 뜻인지를 안다는 답으로 대신했습니다. 그에 대해 본 평자는, 시간의 경과를 통한 관용(慣用)화로써 의미성을 이해하게 되는 결과가 곧 모든 의미의 정확성으로 귀속시켜 주지는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한 글자에 열 가지 의미가 담긴 추상적인 시가 아닌, 대중적인 노래 가사는 긴 설명 없이도 우선적으로 그것 자체가 진리를 충분히/확연히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건 그렇고..작품 자체에 대한 평가와 작가에 대한 평가는 우리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울러 찬송가/성가와 같은 작품은 영적 배경도 갖고 있기에, 배경과 배후, 뿌리가 특히 중시됩니다. 예컨대 찬송가의 일부 작가들은 실상 비밀집단 사람들이었다는 숨은 사실 같은 거 말입니다.

김 작가는 작가 본인이나 고형원, 스캇 브레너 같은 사역자들이 "굉장히 불쌍한 사역자들이 된 거 같아 마음이 쓸쓸해진다"고 했는데, 그보다 더 큰 쓸쓸함 내지 씁쓸함은 진리가 외면 당하는 요즘의 황량한 영성 현장에서 느껴지는 바가 아닐까요? 

더 나아가 정작 오늘날 가장 "불쌍"해져 가는 대상은 성경 진리 자체일 성 싶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어떤 목적이나 어젠다, 인기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성경 진리를 흐리고 가려 놓기 때문이죠. 인터넷에서나 기독교서점에서 쉽게 느낄 수 있는 현실입니다. 

이것은 김 작가가 굳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하든, 어떤 활동을 하든, 모든 면에서 성경 진리가 가장 우선적이어야 한다는 명제 앞에 우리는 자신을 엄숙히 다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고 실천할 때, 진정 오류와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완전무장(온몸갑옷=전신갑주)에서도 진리의 허리띠가 최우선이며 성령의 검 역시 진리와 직결됩니다. 

김 작가는 더 나아가 가사 바꾸기에 관해 언급했는데, 가사 바꾸기는 저작권 침해 문제도 없지 않지만, 그에 선행돼야 할 점은 독자/사용자가 문제시하고 (개작이 아닌) 개사를 할 정도의 빈 틈이 보이지 않도록 작가가 사전에 관련 성경 진리를 올바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비근한 예로, 성탄절에 흔히 불리는 일부 찬송가들은 근거 없이 황당하게도 아기 예수님을 한 겨울에 핀 장미로서 노래한다든지, 외경에서나 볼 수 있는 '3명' 동방박사설을 태연하게 용인한다든지, 메시아가 이미 오셨는데 아직도 구약시대에 머물러 "강림하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대림절을 노래한다든지 하는 경우가 발견됩니다. 
법적으로 어떻든, 가사 내용이 성경 진리와 다르거나 위배될 때, 독자/사용자들에게 특정 환경에서만 적용하기 위해 임시 개사할 자유가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예컨대, 찬양대 지휘자들이 합창연습을 하다가 필요에 따라 즉석 개사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김 작가는 개사를 미술작품을 일방적으로/임의로 바꾸는 데다 비유했는데, 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 미술작품은 중시되고 그 테마로 사용된 성경 스토리가 성경대로가 아닐 경우, 그것은 예술작품일망정 진리의 대변물일 수는 없습니다. 

김 목사는 "중세 시대에 그려진 수많은 미술가들의 미술작품들은 실제로 그들의 깊은 신앙과 성경말씀을 바탕으로 그려졌기 때문입니다."이라고 했는데, 저는 크게 생각을 달리합니다. 기본적으로 천주교도들이었던 중세 화가들 다수는 거듭난 경건한 사람들이 아니라 동시에 세속적/신화적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기도 했고, 동성애 흔적 등 사생활에 있어 많은 문제점을 보인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그린 천주교의 미술작품들이 김 작가 눈에는 경건한 신앙 예술로 보일는지 모르나, 실제로 대다수의 경우, 비진리 위에 구축된 예술인 점을 우리가 천주교 작품들을 대하면서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김 작가의 말에서, 그들이 성경 진리에서 벗어난 점은 중시하지 않고 작가의 예술정신을 더 존중해야 한다는 느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김 작가는 또 예배인도자로 마음에 거리낌이 생기는 곡을 만나면, 가사를 바꿔 부를 게 아니라 작시/작곡자와 개인적인 교제를 하려고 노력하고 그러고도 충분히 공감이 되지 않을 때 그 곡을 사용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는데, 먼저 실제로 그런 예를 알고 싶군요. 

그보다 이상적인 것은 없겠지만, 찬송가공회 같은 데서 선곡할 때, 그런 이상을 모두 구현하고 그런 과정을 매번 거치냐면 그건 아닙니다. 우선적으로 눈에 보이는 작품 자체가 말해 주는 바가 많기 때문이죠. 작품에 문제가 발견되면 자연스럽게 작가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더 나아가 작품 자체는 훌륭해 봬도 작가의 배경이 좋지 않은 경우, 으레 선곡을 재고하게 됩니다. 물론 이 역시 매번 그렇지는 못합니다만, 가령 찬송가 곡과 가사가 아무리 훌륭해 보여도 몰몬이나 안식일교인의 작품인 경우, 받아들일 수가 없겠지요.

김 작가가 이곳 글들이 "좀 더 따스한 비평과 질책"을 바탕으로 한다면 더 좋겠다는 표현은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이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친절한 글"과 "인격적 표현"이 바탕이 되기를 상대방에게 요구하기 훨씬 이전에, 자신들의 작품과 글, 입장 자체가 성경 진리에 좀 더 충실하고 절대/최종 권위로서 존중하는 표현이 바탕이 되어 문제가 최소화 되어야 한다고도 생각됩니다. 

이와 연관된 이슈 한 가지가 위의 3.처럼 노래의 배경으로서의 환상/비전 등의 신비체험과 그에 대한 간증/고백입니다. 이런 것은 개인성이 강한 탓에 계시로서 객관화하기가 어렵지요. 그런데 그런 개인 경험이 찬송가나 복음송 등의 가사가 될 경우, 자칫 성경에 가까운 '기록계시'가 되기 쉽습니다. 

일례로, "주여 지난 밤 내 꿈에 뵈었으니.."라는 가사는 작시자 J.B. 파운즈의 고백일 테지만, 그 꿈이 어떤 꿈인지, 간밤 꿈에 주님을 뵈었다면 어떤 주님을 뵌 것인지, 사실 알 길이 없습니다. 신자마다 날마다 꾸는 "좋은" 꿈마다 그런 식으로 객관화할 수는 없기 떄문이죠. 그리고 그런 노래를 부르는 기분이 좋다고 해서 다 "은혜 받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꿈을 다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언자 요엘이 전한 말씀(행전 2'17)을 중시해야겠지요. 
다만 대중이 부르는 노래 가사처럼 객관화하려고 할 때 반드시 검증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객관화의 근거는 오직 성경 말씀일 뿐이고요. 

 
김 작가는 해당 평에 대한 품평을 한 동기 가운데, 가사도 정확하게 모르면서 무슨 평을 한다고 하느냐는 기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해당 가사인 후렴 부분은 이렇습니다. 

   잘못된 가사: "존귀한 보혈이"
   고침 가사: "존귀한보혈이"

이것은 단순히 원글 쓴이의 실수인데, 물론 글자 하나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고, 특히 작시 당사자에겐 그렇기도 하여 댓글에서 사과를 하고도 여기서 다시 정중하게 사과합니다마는..
사실 '존귀한 그 보혈'과 '존귀한 주 보혈'의 차이가 대단히 큰 것은 아닙니다. 
요즘 크리스천 영어 노래 중에는 주님인지 누군지 정체도 모를 'You'(귀에는 그냥 'you'로 들리기도 함)가 돌출하는 판국인데, "존귀한 그 보혈"이 예수님 아닌 그 누구 딴 존재의 '존귀한' 피일 순 없기에..

 
그 다음으로는, (티엘티의) 들풀님도 지적했듯, 좋은 노래의 가사 한 부분 또는 몇몇 부분들이 문제시 되어 고치는 또는 개사하는 문제는 댓글에서 제시된 성경적/신학적/문학적 객관성 여부 말고도 퍽 다양한 이슈가 개재될 수 있습니다. 가령 핸델의 '메시아'의 경우, 애당초 작곡가가 영국인이 아니었기에 음/리듬과 잘 맞아들지 않는 경우가 잦습니다. 그런 부분들은 연주가들이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는 것으로, 또 실제로 많이들 그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 갖고 작가를 폄하했다거나 모독했다고 할 수 없을 터입니다. 또 그것 때문에 '메시아'를 차라리 연주하지 않겠다는 말은 어불성설일 터입니다.  
 
그런데 작시자의 원 의도를 존중하는 문제와 객관적으로 검증하여 보는 문제의 상관 관계는 음악적 이슈보다 한 차원 높은 것입니다.  
수많은 성경 역본/번역판들이 시대를 지나면서 후대 학자팀에 의하여 고쳐지고 새롭게 다듬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찬송가들도 신정찬숑가, 신편찬송가, (합동)찬송가, 새찬송가, (개편)찬송가, (통합)찬송가, 21세기 찬송가, (개정)새찬송가 등으로 계속 변천해 왔습니다. 그러는 동안 수많은 찬송가 가사들이 개사/개선돼 왔습니다. 
단지 인쇄매체로 출판돼 나오기까지는 찬송가공회나 위원회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 뿐입니다. 공회원들이나 그 위원들이 유일한 편시/개사 절대 권한을 갖고 있다..? 글쎄요, 이것도 어불성설이죠. 다만 판권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찬양대가 좋은 성가/찬양곡이 있어 연습하던 도중, 일부 가사의 문제점이 발견됐는데, 그것 때문에 그 곡을 연주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큽니다!
그러나 대중매제를 통해 인기가 높아진 파퓰러한 연주자의 경우, 대중의 눈과 귀에 이내 발견되기에 개사가 더 문제시될 수는 있겠지요.    
 
 
평자는 솔직히, 작가 김 목사가 더불어 함께 쓸쓸해진듯한 (?) 고형원 선교사, 브레너 목사가 요즘 한국 교계에 판치는 여러 외래 영성들과 함께 일종의 유행 현상이다시피 한 '신사도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이곳 독자들의 댓글에서도 지적돼 왔듯 이에 대한 분별이 거의 없어뵈기 때문입니다. 

또 환상을 우리가 하나의 노래의 배경 내지 바탕 경험으로써 중시할 수 있다면, 멜 깁슨의 영화 '크리스토의 수난'의 실제적 바탕이 된 에머리히 수녀의 환상적 '계시'나 거기서 특수 효과로 커다랗게 확대/낙하된 '하나님의 (거대한) 눈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과연 성경적인지? 물론 상상적인 개념상으로야 감동적이고 멋있는 장면일지 모르지만, 성경적으로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 어떤 이들은 이런 것을 일일이 성경적으로 따져 나가니까 "너무 비판적"이라거나 "좋다면 좋은 것이지 웬 잔말이 많으냐" 식 짜증을 내기도 하는데, 과연 그런 태도가 온당한 것인지요? 또 비평에 대한 비판은 비판이 아닌지요? 그런 비판은 (논리적으로) 비판으로 성립되지 않는지요? ]

김 목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천주교황이나 지도자들도 낯이 뜨뜻해져 덮거나 가필할 정도로 노골적인 나체를 포함한 다양한 문제를 지닌) 중세 천주교 미술작품들도 "실제로 깊은 신앙과 성경말씀을 바탕으로 그려졌다"고 단순히 받아들이는 정도와 수준의 인식을 갖고 있는 님이, 성경적인 오순절운동과 요즘의 비성경적인 신사도운동은 어느 정도 구분하고 있는지요?

그리고 블로그 애독자 Back At One님의 적확한(!) 지적처럼, 고형원의 '부흥'이나 기타 여러 노래에서 발견되는 점들은, 지금 많은 사람들이 소위 신국론적(theocratic)인 주권주의운동이나 신사도운동에 이리저리 얽히고 엮여서, 예수님 재림 이전에 굉장한 영적 대부흥이 있을 것처럼 사전홍보를 하거나, (성도의 심령들이 아닌) 땅 위에, 세상 속에 지상왕국이 이루어진다는 환상적인 개념에 들떠 있는데, 김작가는 이를 성경 진리와 구분하고 있는지요? 

주님과 사도들은 분명히 세상은 세상 임금/신인 마귀 싸탄-그 자가 한시적으로 다스리고 있다고 명시하셨고 사도 요한은 현재 이 세상 시스템과 거기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다 아버지께로부터가 아닌 세상에서 온 것이라고 했는데(요한1서 2'15,16), 일부인들의 주장과 비전처럼 그 가운데 대부흥과 하나님의 지상왕국이 과연 '땅밟기'(땅따먹기?), '성시화운동' 식으로 이뤄질 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이미 고대 아브라함 때의 소돔/고모라나 멜키쩨뎈의 샬렘이나 다빋/슐로모(솔로몬) 시대의 예루샬렘이나 요나시대의 니네베나 로마 바티칸이나 칼뱅의 제네바나 카이퍼의 암스테르담이나 "언덕 위의 빛난 도시"라는 미국의 워싱턴DC에 거룩한 하나님의 왕국이 이루어져 있어야 하지 않겠나요..?  

김 작가는 이런 "위대한" 착각들로부터 자유로운지 묻습니다. 그리고 성경 진리에 비추어 이런 지적을 하는 것이 작가나 연주가, 선교사 등의 인격을 폄하 또는 모독하는 행위인지, 그렇다면 성경 진리가 모독 받는 경우는 어찌 되는지도 함께 묻습니다.  

(BackAtOne님의 지적처럼) 마이크 비클의 IHOP 출신인 브레너가 '연속예배'를 환상을 통한 '계시'로 몰아가는 식의 홍보는 확실히 문제시됩니다. 

그 다음으로..
김 작가는 (뉴스기자들의 보도상 태도의 문제점을 감안하더라도) 10년 후 온 지구가 '성전'이 되도록 기도/찬양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했는데, 예수님의 재림 및 천년평화통치 이전에도 그것이 가능한지 묻습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온 '찌온(시온)주의' 운동권이 몰고 가는 '제3 성전' 건립운동과 (숨은) '제2 메시아' 대림(待臨)/숭상 운동이 그런 바람에 대한 일종의 '해답'이기 십상이기 때문이죠. 현재 유대인들의 95% 이상이 예수님을 절대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실상은 알고 있는지요..? 세계적 전도자라는 빌리 그래엄은 "유대인들은 이미 구원받았다"며 이스라엘에서 단 한 번도 '(십자군)전도대회'를 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은요?

김 작가는 본 블로그에서 왜 이런 비평을 하게 되는지, 이런 말을 하면 어떤 영적인 판단이나 검증/분별 분위기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지도 함께 묻습니다. 
그냥 '존귀한 그 보혈'이 '존귀한 주 보혈'로, 가사의 글자 하나가 고쳐지는 것만으로 "본전을 뽑았다"고 생각하고 만족하시려는지..? 이것도 따스하지 않고 "차가운 비평"으로만 끝나고 마는지?

김 작가는 본 블로그의 단평이나 비평들이 좀 더 따스하고 부드럽고 긍정적이면 더 나을 것이라는 주문을 해 왔는데, 이를 십분 수용하면서 거기 대한 응례(應禮)랄까, 본 블로그 쪽에서도 김 작가에 바라고 싶은 바는 교계 현실을 놓고 자타에 대한 분별/검증을 하면서 작품의 진리성에 깊이를 더해 간다면, 좀 더 객관적으로 훨씬 좋은 곡들-성경 진리와 신학까지 만족시키고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고 영광 받으실 곡이 나오지 않겠는가라는 주문을 해 봅니다. 


다음으로는..노래와는 직접 무관하지만, 작가가 뉴스와의 대담에서 자신의 미래계획과 관련, 숫자 1000을 반복 강조했다는 점입니다. 
1000이란 수가 어떤 성경성/간증성 또는 모종의 계시성(?)까지도 지닐 수 있을지요(일천번제?). 

이에 대해, 김 목사는 본 티엘티 독자들에게 이렇게 밝힙니다. 

   "제가 1000곡의 새 노래, 1000장의 찬양 음반, 1000일 간의 멈추지 않는 예배를 꿈꾸게 된 이유는 성경을 읽던 중 보았던, 예배자들의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이러면서 그는 다음 성구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열왕기상서 3:4)

   "저가(솔로몬) 잠언 삼천을 말하였고 그 노래는 일천 다섯이며" (왕상 4:32) 

이에 대해서는 작가 나름의 착상이고 개인의 자유이니 어떻다고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구태여 언급하자면, 영적인 깊은 의미성보다 성경의 숫자에 더 눈길이 간 차원의 아이디어이기가 더 쉽다고 봅니다. 또 왕상 3'4은 그렇더라도 4'32까지 예배자의 열정에서였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세 겹 1000이라면, 3000개의 잠언보다는 오히려 역대상 29'21, 에스겔 47'4,5이 더 걸맞지 않을까란 생각도 듭니다. 

또 1000이란 수가 신약성경에서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보니, 다분히 구약적으로 그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네요. 구약의 십일조 정신이 신약시대에도 유효하니까 '1000 번제' 정신이 신약시대에도 유효하다는 것인지. 요즘에도 슐로모 같은 열정으로 1000회나 번제를 바치고 '치성'(?)을 드리니, 하나님을 감격하시게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나, 이에 대한 어떤 성경적/신학적 검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김 작가의 이 세 겹 1000 내지 3000 아이디어에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1000일간의 멈추지 않는 예배를 꿈꾸게" 됐다는 고백입니다. '멈추지 않는 예배'라는 말은 얼핏, Back At One님도 언급한 바 있는 IHOP의 24/7/365형 기도 개념을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1000일간의 '멈추지 않는 예배'라는 개념이 과연 성경적일까요? 예배를 시간적으로 한시라도 멈추면, 비성경적이고 죄악인지요..?

물론 개인 나름의 소원인 데다 슈무엘(사무엘)은 "기도를 쉬는 범과를 하지 않겠소", 사도 파울(바울)은 "쉬지 않고 기도하시오"라고 말하긴 하지만, 1000일의 부단한 예배보다도, 순간마다 되도록 하고 싶어지고 때에 따라-심지어 꿈에서도-그러게 되는 영언(기도)과 영언 노래는 어떤지 묻고 싶습니다. 영언은 괄시 받을 은사일 뿐,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의 일부는 아닐지요? 

1000일간의 멈추지 않는 예배는 신약적이기보다 구약적이라는 제 생각은 틀린 것일까요? 
아무튼 김 작가 개인의 열정의 발로이니, 이것을 구태여 막아 보려는 생각은 아닙니다. 


이번 토론을 통하여 우리는, 한 노래가 끼치는 영향과 의미성이 얼마나 큰 지를 느끼고 깨달았다고 생각합니다. 모쪼록 김 작가는 티엘티보다는 성경 자체로부터 주마가편 격의 교훈과 건실한 영감, 아이디어를 얻어, 그 어느 쪽보다 영적으로 더 깊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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