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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영화&드라마

'교회오빠'가 날 슬프게 한 것들


지난 6월  '교회 오빠'라는 다큐 영화를 보고 "엄청 감동 먹었다"는 담임목회자와 몇몇 교우들의 얘기를 듣고, 나도 감동 좀 받을 기대를 품고 딴 교우들과 함께 보러 갔다. 

결과는..적어도 나에겐 실망이었다. 아니 실망 정도가 아니라, 은근히 부아가 치밀기도 했다. 까닭은 이 글을 읽어 보면 안다. 
이 영화에 대한 호평은 인터넽에 차고 넘치고 있어서 나까지 부족한 표현으로 늘어놔 봤자 공해에 가까울 테니, 여기서 반복하진 않겠다. 

인간으로서는 정말 누구도 감당키 어렵게 겹쳐진 비운으로 어려움을 겪은 이관희-오은주 님 부부의 슬픔을 진심으로 공감하며, 그들의 신앙적인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또한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이관희 집사가 지고의 행복과 영광이 기다리는 천국에서 살아갈 것을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이 영화엔 중요한 약점 내지 결점이 있다. 

우선, 이 영화엔 딱히 신유의 복음 메시지라고 할 게 없다. 암 의학처럼 신유도 분명 중병과 결부된 것인데도, 이 점은 묘한 모순으로 작용한다. 복음서를 보면, 주님께서 하루가 멀다 하고 행하신 수많은 신유 사역으로 줄줄이 점철돼 있다. 주님께서는 자신에게 믿음으로 나아 온 환자들과 장애인들에게 "그대가 낫고자 하오?"라고 물으셨고, "그대의 믿음대로 되길!" 하고 치유 선언을 하셨다. 하인의 병이 낫길 바라던 로마군 백부장이 직접 방문이 아닌, 말씀으로만 치병 선언을 해 주시길 바랄 때, 주님은 그만한 믿음을 이스라엘에서 보지 못했노라 칭찬하셨다. 

그리 보건대, 정녕 신유를 위한 믿음은 정상적인 신앙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신유를 통하여 성도가 나을 때 큰 영광을 받으신다. 주님과 사도들을 통한 수많은 환자들의 치유를 보고, 유대 백성은 물론, 이방인들까지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대조적으로 이 영화의 앞 부분을 보면, 일찌감치 신유를 위한 기도를 '기복적'이라고 칭하고 있다. 미안하지만, 그 순간 신유의 이적은 물 건너 가 버렸다고 느껴진다. 그래선지 신유보다는 비신유적인 의술적, 과학적인 치유에 거의 전적으로 나머지를 맡기고 있다. 필자의 느낌엔, 이 영화에선 암과 의학이 거의 전능한 '신'들의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의사도, 의술도, 약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 힘으로도 안 될 때는 어찌할 것인가? 신유가 들어설 자리가 아닌가?  

하나님의 주권이 크게 적용되고 개재됐던 신정(神政) 시대였던 구약 때와는 사뭇 달리, 지금 하나님은 주로 신자의 의지만큼 행하신다. 신유를 믿으면, 신유를 행하신다. 인간의 의지로 신유를 믿지 않으면, 거기까지만 행하신다. 이건 내 주장이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진리이고, 필자도 겪어 온 경험대로이다. 

구약과 신약을 꿰뚫는 중요한 신유의 맥은 병 고침을 위한 믿음과 구원의 신앙이 과히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환자인 우리 대신 주님이 몸소 채찍에 맞아 주심으로 우리는 이미 나음을 입었다! 따라서 나도 나았다고 선언하고 믿고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 믿음 없는 사람에겐 이해하기 어렵고 실천하기는 더군다나 어려운 행동이다. 주님은 여러 중환자들에게 믿음으로 그 자리를 털고 당장 일어날 것을 명하셨다. 페트로와 요한도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던 중증 장애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성전 안을 겅중겅중 두루 뛰면서 하나님을 찬양했다. 필자의 지인인 한 사역자도 그런 이적을 행한 적이 있다. 휠체어를 타고 온 하체 장애인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하자, 처음엔 대롱대롱 매달리던 그가 잠시 후 함께 뜀박질을 하더라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믿는 이들에겐 이미 치유가 기정 사실이므로, 신유의 약속을 믿고, 의존하고, 이미 나은 사람으로서 행동하라는 것이다. '교회 오빠'란 제목이 아이러니인 것은, 사실 신유는 신약 교회에 주어진 선물이기 때문이다. 신유는 믿는 이들에게 응당 따르는 5대 표징들 중에 하나다(마르코스복음서=맑 16'18).  

알고 보면 구약 광야교회에서도 불신앙의 죄를 짓지 않는 이상, 하나님이 처음에 약속하시고 선언하신 '자동적'인 신유가 40년간 늘 따랐다. 죄벌을 받지 않은 이상 병에 걸려 죽지 않았고 심지어 옷과 신발도 닳지 않았다. 원망 죄를 짓고 집단으로 불뱀에 물려 죽는 사고가 났지만, 불뱀을 보는 사람마다 다 나았다. 

교회 오빠 역시 신유의 혜택 대상이며, 그를 위한 신유는 약속의 자녀로서 받을 선물이었다. 그러나 신유를 '기복적'으로 보는 이상은 어렵다. 


이 영화를 볼 때, 주인공이 고난을 이기는 믿음과 구원을 위한 믿음 외에 달리 이렇다 할 믿음의 고백과 행동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주인공 부부의 믿음을 폄하하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치유를 위한 믿음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미 신유를 위한 기도를 '기복적'이라고 지칭하여, 암시적 선언을 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판단해 놓고 신유를 위한 기도나 기대를 경원시하면서, 혹 한편으로 행여나 하고 신유에 기대를 건다면 그건 더 기복적일 것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것만큼, 의지로 고백하고 행동하는 만큼 행하시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적어도 병과 치유 문제에서만큼은, 신유의 하나님이신 예호봐 로페(=여호와 라파)보다는 과학과 의학의 신이 더 위에 군림해 있다. 발암과 재발암을 선언하는 의사의 말은 곧 사형선고요, 그 앞에선 충격과 시인과 절망과 순응이라는 세상에서 흔히 보는 수순의 반응들만 주로 보인다. 신유를 위한 기대는 있었을지 몰라도 고침 받으려는 믿음과 간절한 열망과 치유의 고백과 선언과 행동이 따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더군다나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다. 그러나 주인공은 하나님을 끝내 원망하지 않는 욥과 같은 승리를 이루었다. 

둘째로, 이 영화에서 묻어나는 메시지의 성격은 신약적이기보다 구약적이다. 
암으로 죽어가는 '교회 오빠'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던 욥으로 비유된다. 욥은 초기엔 여러 모로 끈끈하게 하나님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지만, 일시적이나마 하나님께 대하여 느끼는 일종의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폭풍우 가운데 음성으로 몸소 자신을 나타내실 때, 떨면서 감격하여 "전에는 제가 귀로만 들었더랬는데 이제 눈으로 봅니다".라고 고백했다. 일시적이나마 논증적이고 철학적이었던 마음과 생각이 은총을 입어 모두 정돈되고 나자, 하나님은 신유와 함께 회복과, 배가된 복을 주셨다. 상황과 흐름이 퍽 신정적(神政的)이고 주권적이다.  

알고 보면, 욥의 '겹치기' 고난과 회복은 하나님에 의한, 일종의 실험의 산물이다. 교회 오빠의 병고도 실험 결과일까? 그건 필자도 잘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실험을 거친 뒤 욥은 치유됐고, 모든 것이 완전히 회복됐으며, 거의 배가의 복을 받고서 장수했다는 사실이다. 욥이 달리 치유를 위한 간구를 했다거나 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신정 시대다운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였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정신은 적지아니 주권주의적이다.

몸에 40여 가지 질병을 지고 살아서 '걸어가는 병동'으로 불렸던 장 칼뱅은 절대주권주의자였고, 그래서 병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다. 치유가 아닌 병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 만큼 마귀는 이런저런 질병들을 더 가져다 준다. 

그런데 신약 시대의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치유와 회복을 위하여 믿음과 의지로써 간구하고 행동해야 한다. 주님은 치료의 광선을 발하시는 의의 태양이시므로, 우리는 그 빛으로 치유를 받아 외양간 송아지처럼 방방 뛰어야 한다. 주님의 아우였던 사도 야코보는 병든 성도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올리브 유로 기름 부음도 받고, 치유 안수와 용서의 선언을 받으라고 했다(신약성경 야코보서 5'14-16). 지금도 그렇게 하면 병이 낫게 돼 있다. 나으려는 믿음과 의지가 그만큼 중요하다.  

아마도 교회 오빠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재발한 암은 응당 불치병이요 죽을 병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굳게 믿을지 모르겠다. 그럼, 신유의 복음은 뭔가? 분명히 성경에 명시된 그 진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교회 오빠의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아름답고 용감한 떠남이었다고 평가되지만,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더 긴 수(壽)를 누리지 못한 채, 의문스럽고 아쉽게도 떠났다고 느껴질 것이다. 그 의문에 구태여 대답하자면, 적어도 질병 문제에 있어 신유가 아닌 의학의 도움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필자의 어머니는 암의학도 과히 발전하지 못했던 1970년대에 '사형선고'를 받은 말기암 환자였다가, 오직 믿음의 기도로 완치된 바 있다. 성경에 나타난 신유의 모습 그대로이지 않은가. 
이건 기복 차원이 아니다. 성도들에게 믿음의 대가로 거저 주어진 약속과 성취의 차원이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니만큼,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그 분이 살아계심과, 그 분을 찾는 이들에겐 미스타포도테스(보상자)이심을 믿어야 한다. 

그 다음으로, 이 영화는 매우 감성적이다. 
오늘날 대다수의 문화 작품들은 주로 감성에 호소한다. 이 영상물은 핔션도 아니고 분명히 사실 나열에 철저한 다큐인데도, 전반적으로 감성적 흐름이 관객들을 지배한다. 애당초 그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을 텐데도, 결과적으로는 소위 '감성팔이' 무비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이해된다. 관객들을 포함한 오늘날 사람들 대다수는 감정의 상처를 비롯한 많은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면서 거기 상응하는 위로를 받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성주의는 성령의 도우심과 권능에 입각하고 귀결되기보다, 이른 바 '상처'와 '뒷풀이' 같은 위로로 이어지고 끝나는 '뉴에이지 복음'으로 흐르기 쉽다. 

저윽 놀란 점은 영화 제작진 가운데 아무도 신자가 없다는 사실이다. PD 자신이 신자가 아니라고 했다. 그는 비슷한 기록물을 여러 편 만들었다고 했다. 그가 애당초 겨냥했던 것은 중병 환자가 말기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극복하냐..였단다. 그는 세속 프로덕션 정신에 입각해서 이 작품이 되도록 종교성을 띠지 않기를 바라면서 전전긍긍했다. 그런데.. 신앙을 통한 주인공의 인간승리를 본 것이다. 

나는 주인공 부부의 고귀하고 드높은 믿음의 투쟁과 승리를 의심치 않는다. 다만 신유의 승리는 없었다고 필자는 가름한다. 그 점이 아쉽고, 영화를 보던 나를 슬프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