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예술비평/영화&드라마

'천로역정'(2019)을 보고

천로역정(2019) 애니메이션 예고편 캡처

 

'천로역정'(2019)을 보고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은 하늘이 노하여 역정을 낸 이야기가 아니라, 天路歷程, 즉 천국을 향해가는 나그네의 여정이라는 뜻이다. 영국 개혁시대의 청교도 작가인 존 버니언(John Bunyun, 1628~1688)이 성경의 구원론을 바탕으로 쓴 일종의 우화 극시로, 1, 2부로 구성돼 있다. 

이 글을 쓰는 동기는, 이 작품을 애니메이션(이하 애님: '애니'라는 한국식 줄임말도 있으나, 정식은 애님이 맞음)으로서는 최초로 만들어, 최근 한국에서도 개봉된 것을 계기로, 필자도 직접 한 번 봤기에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려는 뜻에서다. 원작 1편에 해당하는 내용이다(제 2부도 곧 개봉될 듯). 물론 독자 가운데는 필자와 다른 견해도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들어간다. 

'천로역정' 스토리는 (대다수가 그런지는 몰라도) 다수 교인들의 눈과 귀에 익을 것이다. 나도 초기의 번역서들로부터 한국의 유명 초기 부흥강사인 이성봉 목사가 육성 녹음한 '천로역정 강화', 현대무용가 아이리스 박 예술감독(알댄스시어터사운드 대표)이 구성과 안무를 한 총체드라마, '천로역정'(1, 2부) 등을 읽고, 듣고, 봐 왔다. 그리고 지금도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서도 뮤지컬, 영화 등 많은 작품들을 대할 수 있다. 

그런 나로서, 이번 애니메이션은 내 생애 후기의 한 구석에 또 어떤 괜찮은 감흥을 주겠는가고, 공식 예고편을 보면서 미리 생각해 봤다. '천로역정' 애님 예고편의 화려한 선전과, 실물 스펰(연예물)으로서의 스펰(요건)은 가히 한 마디로 휘황찬란(?)했다. 그래서 우선 크리스천 가정의 온 가족이 다 함께 즐길 만한 볼 거리로서 요즘말로 '킹왕짱'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정작 나의 예상은 상당량 빗나갔다. 우선 좀 길고 지루했다. 장장 두 시간 길이다. 물론 책 읽기만도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릴 테지만, 길고 지루하게 느껴진 주된 원인은 군데군데 원작에 비교적 충실한(?) 대사가 워낙 우의적(寓意的)인 데다, '익사이팅니스'를 늘리려고 거의 처음부터 마귀 팀의 출현과 작당 모의를 통해 자주 선악간의 대비를 극대화한 때문이다. 그것만도 거의 독립된 스토리로 구성해도 될 만큼 길었다. 

물론 드러매팈 효과를 위해선 좋았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원작에 없는 대사 부분들이 대폭 늘어났다. 마귀와 그의 팀을 워낙 강조하다보니, 원작 대사의 고전적 우의성과 원작에 없는 부분의 현대성이 계속 맞부딪치면서 불균형을 이룬다. '천로역정'의 우의적 대사는 어린이나 청소년, 심지어 성년이라도 이해하기가 과히 쉽지 않다. 이 점이 애님 진행과 극적 효과를 통해 상쇄되리라 생각했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번역을 통해 절감(節減)돼 버리는 반효과도 있을 것이다. 

그림과 동작은 더 바랄 수 없을 만큼 좋았다. 또 시각적 움직임과 흐름은 아이들이 충분히 흥분할 만 했다. 특히 절정 부분의 선과 악의 싸움은 그렇다. 문제는 그림이 눈에 다가오듯 그렇게, 내용 즉 우의적 대사의 의미가 쉽게 다가오지 않는 점이었다. 그리고 '예수 크리스토'라는 이름조차 한 번도 안 나타나고, 다만 '왕'과 '목자' 등으로 은유된다. 원본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알다시피 '천로역정' 원본에 '유혹'과 '거인 절망', 쇠줄로 묶인 세 마리 사자 등 여러가지 악마적 존재가 등장하지만, 결정적인 악마적 존재로는 아폴뤼온(Apollyon)이 있다. 요한계시록(9'11)에도 등장하며, 히브리어로는 '아바똔'이다. 사탄을 상징하는 한 존재이다.

그런데 이 애님에서는, '매스터'라 불리는 아폴뤼온이 거의 처음부터 공식 등장하는데, 모습은 (오컬티스트인 엘리파스 레뷔가 그린) 바포멭과, 거대한 숫양 뿔의 ('판의 미로'의) 판(Pan) 신을 합성한 것 같은 형태다. 또 드라큘라나 기생 오라비 같이 생긴 그의 여러 '똘마니'들이 그의 명령을 받들어 아부하고 공작활동을 하는 장면들이 흔하다. 꽤 거창한 규모의 귀신 군대가 주인공(크리스천)과 동료 나그네를 공격하기도 한다. 

물론 진짜 마귀는 그 이상이고 훨씬 더 겁 주겠지만, 작가가 마귀와 그의 파워에 과도히 관심을 쏟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을 상대하는 수많은 천사들은 어디 있고, 어떻게 된 것인가? 다니엘서를 보면 악령들과 그들을 적대하는 천사들의 대규모 전쟁은 장난이 아니다. 피 나게 싸우지만, 영들이어서 피도 안 나온다. 

전체적으로 원작자는 신화적 영향을 받았고, 그 영향을 응용했고, 그래서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했다는 생각이 든다. [17세기 당시는 개혁 초기여서 여전히 신화나 오컬트, 비밀결사단 등의 영향이 많았다. 예를 들어, 1611년판 제임스왕 판 성경 속표지와 삽화엔 장미십자단(RC) 등과 관련된 다양한 오컬트 상징물이 나온다.] 물론 성경에 바탕을 둔 부분들도 많겠다. 그런데 하물며 그런 영향 면에서는 이 현대작도 마찬가지 아닐까? 특히 선과 악의 싸움이 신화적으로 묘사됐다는 느낌이다. 심지어 버니언은 연금술에 영향을 받았다는 일설도 있다. 

애님 역시 영화이다 보니까 그동안 나온 영화들의 성향이 자주 엿뵌다. '나니아 연대기', '반지의 제왕' 같은 유의 풍이 느껴지곤 한다. 처음에 나타나는 파괴시(옛 번역: 장망성)의 비참한 쳇바퀴 식 노예 같은 중노동 모습은 언뜻 '반지의 제왕-두 탑'의 악마적 존재인 사우론의 오크론 노예들의 노동 광경을 연상시키는데, 그렇더라도 건전한 근로와의 구분이 필요했다고 생각된다. 노동을 한다고 해서 다 말기적인 징조인 것은 아니다. 


나는 버니언의 이 극시가 성경이 아니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아는 성경 대신, 버니언의 '천로역정'이 성경이었다면, 이 애님 현대판은 더군다나 얼마나 성경에서 벗어난 '나이롱 뽕짝'이었겠는가! 

버니언은 그의 오리지널 서문에서, 솔직히 이 책이 그렇게 대 히트작이 될 줄은 몰랐고, "혼자 즐기면서 재미로 썼다"고 했다. 놀랍게도 이 책은 촬스 디킨즈, 마크 트웨인 같은 프리메이슨 작가, 신화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C.S. 루이스, 그밖에 E. E. 커밍즈, 좐 스타인벸, 에니드 블라이턴 같은 세속 작가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이 애님은 어떨까? 신앙 주입보다는 대중이 즐기도록 하기 위해 '마귀 극대 강조판'을 만들었을까? 

나머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 참고로 이 글에 덧보탤 가능성도 있고, 시리즈로 2부를 쓸 생각도 없진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