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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리뷰

기일? 성묘?


    "선친 기일이라, 형님네를 갔다가..이렇게 그냥 왔습니다."

마음 착한 집사님이 말끔히 양복을 차려 입고 교회 내 일터로 돌아오면서 건넨 말이었습니다.

추석은 성묘철이기도 하죠. 이 때를 기해 고인의 묘지에 다녀왔다는 말들을 듣곤 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맘이 약간 씁쓸하고 서글퍼지곤 합니다. 아니 당연한 일인데 무슨 말이냐 할 테지만, 기일이고 성묘철이라서 뭔가를 기념한다고, 돌아가신 선친이나 사랑하던 사람이 알아 주느냐는 것입니다.

고인은 그냥 고인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죠. 그런 기념 이벤트는 다만 살아있는 유족을 위한 위로에 그칠 뿐입니다. 그나마 짧게 1주기 정도로 족해야 합니다. 그 이상은 더구나 비성경적입니다.  

부모에게 잘 해 드리려면, 살아계실 때 그래야 합니다. 죽고 나면, 아무리 뭔가 잘 해 드려도 소용 없습니다. 고인이 아무 감흥도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죠.


요즘 흔해 빠진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에는 가끔, 고인의 무덤 앞에서 중얼거리거나 속삭이거나 심지어 장엄한 선언 같은 것을 하는 광경이 뜨곤 합니다. 무덤 앞에 절도 하고 무덤 위에다 술잔을 기울여 붓기도 합니다. 온갖 복잡한 격식을 따라 정성껏 차례상을 차려 바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관객/시청자들에게 고인과의 대화나 친교가 가능한 듯한 착각을 일으키곤 합니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의 소원을 들어줄 듯한 환각을 던져 줍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착각일 뿐, 실제로는 불가능합니다.

산 사람은 결코 죽은 사람과 실제 대화를 할 수 없습니다. 독백으로 그칩니다.
변화산상에서의 주님과 모쉐 및 엘리야의 대화처럼, 꼭 필요한 때 성령의 권능이 아니고선 생명과 죽음 사이에 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와 저 세계..서로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주님의 예화 속에 등장한 거지 라자로와 동네 부자의 이야기에서, 둘 다 이미 죽어 지상과는 딴 세계에 가 있기에 지상으로 어떤 대화도 걸 수가 없다고 가르쳐 줍니다.
저 세계와 '통화'할 수 있는 전화 장치 같은 것조차 전혀 없습니다. 이른 바 '텔레파시'로도 저 세계와는 통하질 않습니다.

뉴스를 보니, 요즘은 개인의 봉안묘까지도 몇 십 억 짜리 초호화판으로 승격(?)돼 간다고 합니다.
http://tvnews.media.daum.net/view.html?cateid=100000&newsid=20100923111807698&p=mbn

도대체 웬 일입니까? 아니 죽은 사람에게 이렇게 돈을 "처발라" 드리면 고인이 그 돈으로 저 세계에서 호사를 하기라도 한답디까, 아니면 고인의 죽음을 계기로 돈 자랑을 해 대는 겁니까?
이 사람들, 정말 돈을 벌 줄만 알지 쓸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돈을 쓰다 쓰다 쓸 데가 없어, 저축할 데가 없어 무덤 속에다 돈을 쓰고 저축하다니..그렇게 해서 효과가 있고 저축이 되나요? 그러면, 무덤에서 원금도 나오고 이자도 나오고 곱절로 상환되나 보죠? 참 한심한 현상입니다.

죽은 사자 열 마리도 산 개 한 마리만 못합니다.
돈으로 사치를 부린다고 해서 고인의 격이 높아지지 않습니다. 

제발 크리스천들은 이런 미련한 '사후 (대리) 사치'를 부리지 말기를~!


꼭 그렇게 잘 하고 싶으면, 살아 있을 때 잘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가장 잘 하는 것은 산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 영을 구원시켜서 천국 소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기일'을 맞아 제 때 그 장소로 산 사람을 만나러 돌아오지 못합니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만남'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만남이 있다면, 악령들과의 만남이죠.
그래서 소위 '교령'(交靈)이라는 작업도 불가능합니다. 악령들 외에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상들을 전혀 지지해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죽었던 사람이 슈넴 여인의 아들 소년, 야이로의 딸, 나인 성 과부의 아들, 라자로, 도르카(타비타), 유튀쿠스(유두고)처럼 되살아나는 특별한 경우 외에는 말입니다. 

이미 고인인 성모 마리아와도, 그밖의 어떤 신앙 선조와도 '교통'이란 게 되질 않습니다. 그런 친교는 오직 부활과 휴거 후에만 가능할 뿐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기도'를 하는 것도 허탄한 우상 숭배에 불과합니다.

다만, 우리 신자들의 몸은 크리스토의 영체처럼 영광스럽고 신비한 몸으로 변화되기만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비신자도 신자도 죽은 사람과는 교제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시도는 곧 악령들과의 대화 곧 '접령'의 시도가 될 뿐이라고 성경은 귀띔해 줍니다.

우리야 어떻게 생각하든, 죽은 사람과의 죽은 사람과의 만남이나 대화, 산 사람과 죽은 사람 사이에 '다리' 놓기, 죽은 사람에게의 기도와 소원 빌기 등은 모두 일종의 영적/정신적인 사기행각입니다.
죽은 선조를 위한 '명당' 찾기, 고인에 대한 거창한 제사가 산 사람들에게 복을 갖다 주지 못합니다. 착각일 뿐입니다.
결코 고인이 복의 전달자가 되지 않습니다. 불가능합니다.


복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주실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들의 하나님입니다.

다만 죽은 신자들에 대한 소망은, 휴거 때 되살아나 주님과 천사들, 온 성도와 함께 승천한다는 것 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