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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리뷰

옥한흠 추모기사 관련 한 마디(아구르)


from joins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569461

위 기사와 관련하여, 옥한흠이란 성도/지도자를 전혀 모르는 배 아닌 필자도 몇 마디 참견할까 합니다. 우는 사람과 함께 울라는 성경 말씀처럼 고인의 죽음에 대한 슬픔은 누구나와 함께 나눔을 먼저 밝혀 두고요.

그러나 참 애도나 추모는 고인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 내지 "명사 만들어 영원히 추켜 드리기"가 아니길 바랍니다.
옥한흠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고 기억하기 바라는 사람들은 이 다음 하늘나라 가서도 그 분이 정녕 그런 특별한 분임을 기필코 확인할 수 있다는 확신 속에서 그러길 바랍니다.


우선, 언론 특유의 과장법은 좀 지양됐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누구보다 진정한 예수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자 몸부림쳤던 사람"...


가까이 했던 교인들이야 물론 나름 실감나겠지만, 이런 도토리 키재기 식 비교급 표현은 이젠 별 가치가 없다고 규정돼야 합니다. 성도마다 나름의 제자 되기 몸부림이 있기 마련인데, '누구보다'라니 과연 어느 누구보다인지요? 특히 고인 명사 만들기를 위한 언론의 상투성 차별적 표현은 이제 종식되고 배제돼야 합니다.

물론 고인이 한국교계에서 남달리 제자훈련에 먼저 눈을 뜨고, 신경 쓰고 힘썼다는 점은 시인합니다. 그러나 그 분의 제자훈련은 하나님 앞에서 처음/중간/나중이 제대로 평가돼야 합니다. 그 존중스런 제자훈련이 릭 워런 식 "목적에 내몰린" 영성 훈련으로 귀결됐다면, 그건 제대로 된 제자훈련이 아님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 제자훈련인가를 위해 문제영성으로 가득한 포스트-그래엄 식 '크리스채너티투데이'의 한글판을 만들어 뿌려 왔다면, 그 분의 제자훈련 감각은 심각한 것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래도 독자들이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다면 독자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이고요.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는 어떻게 되는가? 말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로 변화되어 우리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다."

고인의 말을 인용한 이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되기를 위한 일가견으로 들립니다. 물론 그 분의, 필요성 인식과 열정과 기타 바른 부분들은 시인하고 존중합니다.
그런데 다름 아닌 주님의 말씀으로는(사도행전 1:8), 주님의 제자를 기르려면 기르는 사람들 자신이 맨 먼저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제자훈련 테크닉이나 목적이 우위가 되거나 그런 것들만 갖고는 안 된다는 거지요. 옥한흠 식 제자훈련이 과연 처음부터 성령의 권능을 제대로 추구하냐면, 그 교회 사이트에 올려진 일부 제자훈련 교재 내용들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또 '우리 사회의 빛과 소금' 되기도 과연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지는 대목의 하나입니다. '세상 한 복판에서 빛이 되어라'...가 과연 어떤 뜻에선지요? 기자가 인용한 박성수 장로의 말에 따르면, "부패한 사회에서 진짜 소금" 되기란 곧 '진짜 헌신'으로서 "사회에 나아가 직업을 통해 사회를 바꿀 것"을 옥 목사가 요구했다고 합니다. 직업을 통한 사회 바꾸기라면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것이고 해 온 것들이지요.
 
문제는, 사회 바꾸기가 복음과 기독교의 목표이기도 한가 라는 점입니다.
초기 교인들이 성령 중심의 선행으로 사회에 깊은 인상을 심어 준 것은 사실입니다만, 과연 그들이 사회를 바꾸려고 노력했나요, 아니면 세상의 잃은 영혼들을 거듭나게 하려고 힘썼나요? 이 점에서 우리는 시시비비를 잘 가려 올바른 판단을 해야 합니다.


옥 목사는 제자훈련에 치심한 나머지 신학적/학문적 근거를 찾고 싶어 미국 유학을 떠났다고 합니다. 오늘날 성공에 필요한 절차인지는 모르나, 다른 게 아니라 제자훈련의 비결이라면 성경에 다 있지 않나 싶네요.

초기 교회 사도/집사들이나 목회자들과 은사자들, 초기 교인들이 제자훈련을 위해 모종의 유학 같은 절차나 과정이 필요했는지요? 그들의 제자훈련은 장기간 유학 같은 과정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으로써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12제자들도 3년씩이나 주님께 훈련받지 않았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그건 신학적/학문적 훈련이 아니지요. 더욱이 바울 등은 후기 사도로서 자신이 과거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학문조차 '똥'처럼 여기지 않았나요?
이것이, 성경적/초기적 가능성과 현대적/후기적 비가능성의 대조 같은 것인지요?

제가 지금 옥 목사의 미국 유학 여정을 탓하는 게 아니라, 기자의 객관적 평가 의식의 유무 여부를 따지고 있는 겁니다. 
 

"당시에는 '평신도도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이야기는 너무도 충격적이고 생소한 것이었다."

상당히 의아스러워지는데, 신약 성경을 제대로 바로 이해하는 사람은 성도라면 누구나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모를까요? 1970-80년대 당시엔 모든 성도가 아닌 지도자만 제자라는 의식이 팽배했던 것이라면, 한국 교회의 의식에 참 문제가 컸었네요. 아니면 옥 목사를 높이려다 보니 측근들이 하게 된 과장된 표현인지요?
 

"... 겉으로 맴도는 신앙이 아니라 나의 상처와 아픔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하나님과 만나는 제자훈련을 통해 성도들은 매일매일이 눈물이 폭포수같이 쏟아지는 은혜의 날들을 경험했다."

상처와 아픔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도 제자훈련의 과정이라는 얘기일까요? 이른 바 '내적치유' 같은 것이 당대에 이미 훈련과정에 개재돼 있었나 하는 생각이 얼핏 듭니다. 이것도 옥 목사의 유학 결과인지와 함께.

그리고 내친 김에, 아직도 일부 전통 교회에 남아 있는 ('성직자'와 구분하는 카톨릭 식) '평신도'나 '평신도훈련' 따위의 용어는 이젠 좀 교계에서 사라져 주면 좋겠습니다. 목회자가 성직이라면, 소위 '평신도'라는 장로/집사/교사는 어디 성직이 아니던가요? 교회 관리인도 세속직이고 성직은 아닌가요? 모든 성도가 왕족 같은 제사장/사제가 아니던가요(벧전 2:9)?
우리의 용어 개념과 의식부터 좀 성경적으로 바꿔 가야 할 거 같습니다. 주님의 몸인 한 교회, 같은 교회 안에서 왜 일부는 성직이어야 하고, 일부는 세속직(???)이어야 하는지? 

제가 지금 말장난이라도 하는 줄 아는 독자는 자신이 성경 밖 말놀이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판해 보시길 바랍니다. 
 

"설교를 하기 전에 먼저 말씀에 자기 자신을 비춰보고 순종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말씀을 전했던 옥한흠 목사의 설교에는 진정성이 있었다. 만약 스스로 순종할 자신이 없다고 생각될 때는 먼저 성도들에게 양해를 구하기도 했고, 한 시간 동안 찬양만 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기도 했다."
 
물론 존중심이 갑니다만, 사랑의교회 토양에 맄 워런, 크리스채너티투데이 등의 이상영성을 받아 들이기 전 맨 먼저 옥/오 목사가 했어야 할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러기 전 먼저 성경 진리 앞에 비춰 보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 이상, 과거의 '진정성'이 아무리 진정했어도 별 의미가 없는 겁니다.


“거룩하신 주여, 이 놈이 죄인입니다. 이 놈이 입만 살았다고 떠들고 행위가 죽어 버린, 한국교회를 만든 장본인입니다. 아버지..겉 모양은 요란하지만 내면은 죄악이 쌓여 있는 이 한국교회를 주여 불쌍히 여기시고, 성령을 부어 주시되 통회하고 자복하는 영을 부어 주셔서 이 한국교회를 깨끗하게 하옵소서! 깨끗하게 하옵소서!"

놀랍군요. 이런 기도 이후의 결과가 오늘날의 사랑의교회의 모습이라니요. 과연 사랑의교회의 현재/현실과 같은 영성이 이 분이 이처럼 절규하신 그 '깨끗하게 하옵소서'의 결과인지요?

또 오늘날 이미 관상영성/떠오름영성/목적영성/에니어그램영성, 심지어 일부 메이슨영성 등에 빠져 들어간 합동측을 비롯한 보수파의 영성이 옥 목사가 창설해 이끌어온 교갱목협이 해온 '자정 능력 회복'의 결과인지요? 자정이 뭡니까? 분별을 스스로 포기한 자정(自停)인가요? 교회가 이상 영성으로 온통 썩어 들어 가는 마당에 '사회를 향한 올곧은 목소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지?

요즘 정년퇴직 내지 조기퇴직을 아름다운 내려놓음, 비움으로 찬양하는 성향들이 짙어가는데, 정말 아름다운지 모든 상황이 객관적으로 잘 판단돼야 합니다. 순교 또는 자연사를 하는 순간까지 평생 사역을 하다 갔던 초기 교회 사도/사역자들은 모두 '추한 세대교체'로 끝난 것인지요?

그리고 '아름다운 세대교체'라는 대목이 정말 아름다웠는지 여부는 사랑의교회 사람들 스스로도 분별력만 있다면 곧 판단할 수 있는 문제라고 봅니다. 아름다운 세대 교체의 결과가 "좀 더 대형화"와 "대형 건물 짓기"와 목적 영성과 크리스채너티 류의 영성을 향한 달음질이라면, 이건 하나님 앞에서 추악한 세대 교체일 수도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건 정녕 고인이 바라던 행복이 아닌 불행일 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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