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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의 지난 칼럼들/뉴하우스의 돌보며걸으며

어둠과 빛의 교훈 (뉴하우스)






리모컨에 손을 대자마자 차고 문이 열리면서 켜지는 차고 안의 환한 불빛이 오늘처럼 반갑고 고마울 수가 있을까!

이 환한 불빛이 차고 밖의 어둠 뿐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뚫고 달려온 어두운 길과 사방에 깔린 칠흑 같은 공포의 밤을 거두어 가고, 어둠 속에서 헤매느라 놀란 내 가슴 속까지 순식간에 파고 들어 불빛 특유의 따스함으로 나를 진정시킨다.

차의 시동을 끄자, 내가 내쉬는 유난히 길고 큰 안도의 숨소리와 그 여운이 차 안에 한참을 머문다. 그리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차 안에 앉아 있다. 환한 불빛 아래 보이는 나의 주거 공간이 주는 이 친근감과 비로소 더는 헤매지 않아도 된다는 이 안도감이, 차문을 열고 나가면 행여나 공기 속으로 증발이라도 할까 봐, 차 안에 가둔 채, 이 기분을 오래오래 만끽하고 싶어진다.

이 곳에 이사온 지 얼마 안 되어 부인들의 모임에 참석한 저녁이다. 모임이 있는 부대에서 집까지는 적어도 30분은 족히 걸리는 거리지만, 여러 차례 남편이랑 낮에 왔다갔다 했기에, 비록 아직 길을 익히지 못했을지라도,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만큼은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을 만치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나의 근거 없는 자신감은 오래 가지 못했고, 나는 밤 귀가 길에 길을 잃고 헤매는 봉변을 당한 것이다.

나는 우회전 하려다 일방통행임을 알고 멈칫한다. 

     어…여기가 어디지? 
     이상하다. 왜 일방통행이지? 
     지나쳤나?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우회전하는 길이 없었는데…”

하지만 이미 못 보고 지나친지 한참이라, 낯선 거리를 보면서 내 가슴은 콩닥거리기 시작한다. 이 동네는 공사 중이라 쉽게 돌아가는 길이 안 보인다. 설상가상 내가 집에 가는 길을 분명히 안다는 확신이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내 사고마저 자유롭지가 않다.

아는 길도 물어서 가라 했건만, 나는 안다는 지나친 확신으로 차에 멀쩡히 붙어 있는 내비게이션도 안 켜고 운전을 시작했을 뿐더러 이미 우회전해야 하는 길을 지나쳤다는 사실도 빨리 수긍하지 못한다.

계속 가 봤자 생소하기 이를 데 없는 길에 있음을 아는 나는, 집에 가는 길을 친절히 가르쳐 주는 내비게이션을 활용하지 않은 어리석음을 탓하며, 그제야 내비게이션을 튼다.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낯선 길을 돌고 돌면서도 못 미덥다. 가라는 데로 가면서도 나는 안절부절못한다. 생소한 동네를 보며 어쩔 줄 모르는 안절부절이 서서히 두려움으로 바뀌어 가고, 나의 18번인 "하나님 도와 주세요."가 내 숨소리처럼 들린다.

한참을 이 길 저 길을 돌고 돈 다음, 내 눈에 익숙한 길이 겨우 나오고 나서야 마음이 약간 진정이 된다. 일단은 내가 집으로  가는 길 선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느 정도 마음의 평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지역의 밤길이 마음 놓고 편하게 운전하기에는 많이 어둡다. 가로등 하나 없는 깜깜한 길을 지나며 내 눈이 더 침침해진 까닭인지, 아니면 유난히 어두운 길 때문인지 모르지만, 나는 이미 자신감을 상실한 지 오래다.
이렇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어둡고 잘 안 보이는 밤길을 더듬듯 겨우 집까지 무사히 온 것이다.

차 안에 마냥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 집안으로 들어선다. 심신이 피곤해 의자나 소파, 아니면 아무 데고 철퍼덕 주저 앉을 만도 하지만, 어디 한 군데 가만히 앉아 있기에는 이미 무지하게 분비됐을 아드레날린이 근육마다 긴장을 시킨 상태라, 대신 불이라는 불은 다 켜고 다니며 집안을 배회한다. 쩍쩍 달라붙는 목을 축이면서, 밤이 없고 낮만 있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푸념에도 빠져 본다. 

그렇게도 콩닥콩닥 뛰던 가슴은 진정이 되었지만, 내가 이 밤에 겪은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려면 시간이 걸리려나 보다. 


조금 후, 출타 중인 남편에게서 전화가 온다. 그 날 밤 모임이 있어 나의 밤 외출을 아는 남편도 내가 무사히 귀가한 것을 확인하고 나서 마음이 놓이나 보다. 평소 같으면, 내가 그 날 밤, 길을 잃고 방황하다 겨우 내비게이션 덕에 집에 온 사실을 장황하게 그리고 소상하게 늘어놨겠지만, 이실직고했다간 두 주나 되는 훈련 기간 중 나의 일거일동을 불안해 할 남편 때문에, 더 많은 말을 하다 탄로가 나기 전에 적당히 얼버무리고 만다.
놀란 가슴은 나 하나로 충분한 이 밤이기에, 대신 스칼렛 오하라의 독백처럼 내일 또 어차피 떠오를 태양을 기대하며, 한 편으론 나의 어리석음을 자책하는 마음을 부여잡고, 스트레스로 지친 몸을 누이며 잠을 청하기로 한다.


마치 심한 근육 운동이라도 한 양, 온 몸이 쑤셔 수시로 자다 깨다 하다 보니, 어느 새 먼동이 트면서 희끄무레 변하는 새벽 빛이 창문에 내려진 커튼 사이로 보이기 시작하자 나도 모르게 또 다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드디어 어둠이 쫓겨 간다. 어제 밤 어둠에 묻혀 전혀 길잡이 노릇을 못하던 산도 그 자태를 드러낸다. 내가 학수고대하는, 모든 게 다 잘 보이는 밝은 낮이 오고 있다.

새벽 빛이 주는 에너지에 힘 입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며, 빛으로 온 세상을 비추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한 이른 새벽이다. 나는 밤은 없고 낮만 있으면 좋겠다는 부질 없는 상념을 하지만, 어제와 같은 밤이 갖다 주는 제약과 한계를 알기에, 새벽에 동을 트며 다가오는 이 밝은 빛이 주는 활보의 자유함와 생동감이 내게는 더 고마운지 모른다.
낮과 밤, 밤과 낮. 이  둘의 상호관계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절대적이고 필수적인 자연계의 질서이다. 그리고 사람의 생물학적 생태가 밤과 낮의 주기와 맞추어 돌아가도록 우리는 창조되었다. 

수많은 이들이 밤을 지새고, 아름다운 밤 하늘을 노래하고, 또 밤을 예찬한다. 
나도 유난히 맑은 밤 하늘이 총총히 빛나는 모습에 눈을 하늘을 향하고 걷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다. 꽁무니에 파아란 불을 달고 날아다니는 벌레-반딧불-를 쫓아 이리저리로 뛰며 황홀해 하던 시절의 길고 긴 여름날 밤, 밖에서 놀던 아련한 추억은 칠흑 같이 검은 밤하늘과 사방에 깔린 어둠 속에서만 가능했던 자연 속의 아름다움이다. 
그런가 하면, 좀 더 커서는, 엄마 따라 밤에 시장에 가 보면, 노란 백열등 불빛 아래 장사하는 사람들의, 힘이 부쳐 보이나 모질게 사는 모습은 어린 나의 뇌리에 각인된 밤의 단상이기도 하다.


세월이 흘러 흘러, 어른이 된 다음 알게 된 밤의 이면은 밤의 또 다른 단면이다.

현대인의 밤 문화는 말 그대로 어둠의 은밀함 가운데서만 가능한 밤의 방탕세계다. 한국에 거주하는 어느 미국인 남성이 한국의 밤 문화를 소개받고는, 한국 남성들은 왜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는지 모르겠다는 밤문화를 비판하는 기사가 한국의 고도로 발달한 밤 문화의 유혹과 어두운 면을 짐작게 한다.

그런데 한국의 밤뿐이랴. 어둠은 세상 어디를 가리지 않고 사람의 악한 행위를 감춘다. 그리고 어둠의 행위는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항상 되풀이되는 법이다. 사람은 어둠과 밤의 세계에 끌리는 이유를, 어둠 속에서 누린다고 믿는 '자유로움'의 실체가 환상에 불과함을, 그리고 그 어둠의 종국을 알지 못한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어두운 행위의 뿌리는 실은 영적 어둠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 영적 어둠의 심각성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사실과 그가 누구이신지를 빼 놓고는 논할 수 없는 사람의 생사가 달린 중요한 사안이다.

성경의 골자를 간략하게 표현하자면, 스스로가 빛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그의 독생자 예수를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보내셨다는 것이다. 이미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그가 누구인지를 말해 주듯이, 그의 성품과 하나님의 속성이 담긴 이 놀라운 이름은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는 자’요, 우리를 어둠에서 ‘건져내시는 자’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이 이름을 믿는 자는, 진리를 따르는 자로, 빛으로 나오는 자로,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을 받은 자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로, 영에 속한 자로, 그리고 의인이자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이 같이 하시는 자로 묘사되고 있다. 
반면에 이 이름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고 믿지 못하는 자는 진리를 모르는 자로, 세상에 속한 자로, 어둠을 사랑하는 자로, 악을 행하는 자로, 빛을 미워하는 자로, 결국엔 영원히 멸망을 받을 자로 구분한다. 이들의 신분은 법적으로도 판결이 난 죄인이다. 그리고 심판자는 하나님이시다. 

이 두 부류의 사람은 밤과 낮처럼 현저히 상반되는 소속과 정체성이 주어질 만큼, 예수의 이름은 능력과 권세가 있는 놀라운 이름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이름을 믿지 않는 사람이 모르는 진리는 무엇이기에, 이렇게 부정적이고 회의적으로 불공평하게 이들의 상태를 성경은 단정한단 말인가. 

사람이 어둠 가운데 있게 된 원인은 이렇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돌보심을 신뢰하는 대신,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고 순종 대신 말씀과 권위에 도전하는 어리석은 인생이 자초한 죄의 대가로 우리는 이런 어둠에 갇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인간의 불의와 불신앙과 불순종의 죄가 우리를 마치 기름과 물이 겉돌 듯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상태로, 그리고 남북한이 나누어지듯 교류가 차단된 관계에 놓이게 한 것이다. 

이렇게 빛이신 하나님과는 무관하게 살면서, 어둠과 세상을 더 사랑하며 사는,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이 된 것이다.

하나님이 내 속에 계시지 않는 육에 속한 삶이 전부인 줄 아는 사람, 이렇게 하늘의 것을 모르고 사는 모든 인생, 어둠에 끌리는 병을 가진 사람 모두가 어둠 가운데 있는 자이다. 위로부터 비치는 하나님이 빛이 그 어둠 자체를 몰아내기 전에는, 이 어둠의 병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인간은 끊임 없이 영적인 삶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만나려고 노력한다. 이 영적 어둠에서 헤어나려 부단히 노력한다.

하지만, 창조물이자 타락한 인간이 제시하는 그 어느 최상의 거룩한 삶도, 고귀한 노력도, 인간을 사뭇 감동시키는 인류애, 그리고, 누구의 고귀한 헌신과 희생도,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은 관심도 없으시다는 사실에 우리는 절망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그 어떤 노력과 선한 행위도, 죄로 분리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다는 이 엄연하고 냉정한 사실에 우리는 놀라고 좌절해야 한다. 

대신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아들을 어둠을 비추는 빛으로 세상에 보내셨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둠에서 건져 내시려는 하나님의 구조작업은 오래 전부터 진행돼 왔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자 생명줄인 예수 그리스도만이 어둠을 내어쫓음을 거듭 거듭 말씀하고 계신다. 

이 생명줄을 붙들기를 애타게 기다리시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에게만 희망이 있다.  이 생명줄을 붙드는 믿음은 내 영혼을 살리는 위력이 있기에 그렇다! 우리는 믿음으로 어둠에서 건짐을 받고 빛으로 들리운다. 우리의 사람됨 속속이, 영혼 깊숙이 파고 들며 비취는 빛이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한다.

어둠의 어느 구석도 빛의 위력이 관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 더 이상은 어둠 가운데 허적거리지 않고, 이제는 빛이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한다. 

내가 나 스스로를 구조한 것이 아니요, 나 스스로 어둠을 헤치고 빛으로 걸어 들어 온 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생명줄이신 예수를 바라봄으로, 그가 나를 어둠의 병에서 치료하실 유일한 의사임를 신뢰함으로, 빛으로 나오는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의 이름대로 그는 건지시는 자요, 구조하시고 구원하시는 빛이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깨어지고 분리되고 차단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는 유일한 길이다. 

이제는 하나님과 하나 되는 새로운 존재감과 정체성을 소유하고, 방황하는 대신 목적이 있는 삶을 살고, 어둠에 끌리고 어둠을 사랑하는 죄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은혜의 밝은 빛 가운데서 새롭게 태어나는 엄청난 복을 누린다. 

나에게는 더는 정죄함이 없다! 죄인과 죄수의 꼬리표는 떼고 대신 예수님의 의의 갑옷을 입고 빛 가운데 있는 자이다. 이전에는 나만을 위해 사는 무의미하던 이 땅만 바라보는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귀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의 본분을 찾게 된 것이다.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면서 차에 붙은 내비게이션을 꺼 놓고, 밤길을 헤매던 나의 어리석음은 두 번 다시 되풀이할 바가 못 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고집하는 인생과 영원한 사망이 기다리고 있음을 모르는 어둠을 더 사랑하는 인생이 아니겠나. 
구원의 손길을 사양하고 거부하는 어리석음의 결국은 사망이자, 영원한 사망이다.


태국의 해변을 덮친 쓰나미에 희생된 밴쿠버 출신의 닐 부부와 관련된 이야기가 의미심장하다. 

    2004년 12월 26일. 아침 8시 26분.
관광지로 유명한 태국의 리조트인 코추 락의 해변 수평선 끝에서 거센 파도가 서서히 밀려오나, 전혀 이 죽음의 그림자를 의식하지 못하는 몇 명의 사람들이 '유연자적'히 해변을 거닐고 있었다. 

    8시 28분. 2분 후에 찍은 사진은 그제야 이 죽음의 파도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도피하는 관광객의 모습이 파도의 어마어마한 높이와 무척 대조적이다.

    8시 32분. 쓰나미가 해변에 순식간에 다다른다. 이 파도 아래 모든 것이 정지되는 절망과 죽음의 순간이다.

피하지 않고 사진을 계속 찍은 닐 부부는 실종됐고, 이 사진들이 담긴 디지털 카메라만 망가진 채 발견이 되어, 그들의 안타까운 마지막 순간을 대신 전해준다.

“왜 우리 부모님이 대피하지 않았는지 몰라요.” 닐 부부의 아들 크리스천이 말한다. "아마 이미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았거나, 파도의 위력을 몰랐는지도 몰라요.” 

이 닐 부부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삼킬 어둠의 위력을 모르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금은 놀고 즐겁게 지낼 때라, 죽음의 쓰나미가 들이닥칠 때는 이미 늦어 피할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있는 ‘빛’으로 나오는 자가 누리는 이 자유함과 안도감, 그리고 이 풍요감과 행복감은, 밤에 길 잃고 헤매다 무사히 귀가한 그 심정에 비할 바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