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는 미국의 군인 아내들이 각 근무지 별로, 또는 직종 별로 갖는 모임이다. 돌아가며 한 달에 한 번씩 자신의 집 또는 식당에서, 아니면 공공 장소를 물색해 모이기도 한다.
연륜이 있는 부인들은 신참 군인 아내들이 군인이라는 독특한 삶의 형태에 적응하는 것을 돕는다. 특히 요즘 같이 군인들이 위험지대로 파병되는 때는 아내들 간의 친목과 정보교환, 일반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군인의 삶을 이해시키는 트레이닝, 아니면 그저 바람을 쐬는 정도의 나들이 등 다양한 목적과 해소를 위한 장교 아내들의 모임이다.
나는 두 종류의 '커피'에 참석한다. 하나는 남편이 속한 유닛의 장교 부인들이 모이는 '커피'이고, 다른 하나는 남편과 같은 직종의 군인 아내들과의 '커피'다.
지난 8월 마지막 주 수요일은 우리 집에서 '커피'가 열린 날이었다. 우리의 남편들은 계급이 다르고 속한 부대도 서로 다르지만 모두 같은 직종을 가졌다.
20여 명을 초대하기엔 우리 집이 그리 넓지 않아, 예상을 초과한 인원수 때문에 혼자 전전긍긍하면서 준비한 '커피'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뒤뜰에도 리빙룸 바닥에도 계단에도 앉아, 장소의 협소함을 마다 않고 담소하고 모두 다 좋은 시간을 보낸다.
이들의 대부분은 남편이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으로 파병돼 있다. 조만간의 파병을 기다리는 아내들도 있다. 그런가면 누군가는 얼마 전 파병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 군인들의 아내이기도 하다. 같은 배를 탄 심정이기에, '커피'에 모여 동병상련 하는 아내들의 이런저런 담소와 웃음소리가 집안을 가득 채운다.
크리스티는 작년에 조생아로 태어난 어린아기를 데리고 '커피'에 왔을 때 처음 만났다. 나는 그녀의 아기를 안아 주고, 그녀는 직전 근무지였던 오키나와에서의 삶을 들려 주면서 서로 가까워졌다. 나이와 배경, 또는 군인 생활의 연륜 차이에 상관 없이 우리는 남편들의 같은 직종과 직업이라는 이유만으로 얼마든지 공감대를 쉽게 형성한다.
아직 가 보지 않은 곳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항상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또 그녀에게는 누구보다 관심 있게 들어 줄 것 같은 나의 배경 때문인지 우리의 대화는 즐거웠다. 어느 엄마든 아이 이야기는 언제고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게 마련이다. 특히 아기를 데리고 온 크리스티여서, 아이 이야기도 너무 당연한 화제였다.
그러나, 최근의 '커피'에서 크리스티와의 대화는 오키나와도 아니고, 조생아인지 몰라 보게 그동안 훌쩍 커 버린 아기 이야기도 아니었다. 대신 오른쪽 팔을 가슴에 딱 붙인 채 겨우 손가락만 놀릴 수 밖에 없게 된 사연이 그녀가 들려 준 이야기다.
출타 중이던 크리스티가 허둥지둥 셀폰을 받자 전화가 이미 끊겼다. 남편에게서 온 전화일 텐데 놓쳤다는 생각을 하면서 집에 돌아와 문을 여는 데 이번엔 집 전화가 울린다. 부리나케 문을 따고 아이와 가방을 한 손으로 안고 허둥지둥 올라가다 팔 뒤꿈치를 가구의 모서리에 심하게 부딛친 것이다. 정작 받고 보니 안 받아도 될 전화였단다. 전화 받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해 오두방정을 떨었나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군인의 아내, 더구나 남편이 위험지역으로 파병된 아내에게 이 전화 한 통의 의미는 평소와는 다르다. 아프가니스탄에 가 있는 남편에게서 오는 전화를 놓치고 싶지 않은 심정과 남편에게서 오는 전화일 거라는 생각에 크리스티는 아마도 여느 때 같으면 그냥 벨이 마냥 울리게 놓아 둘 수도 있는 전화를 기를 쓰고 받으려고 했던 것임을 나는 잘 안다. 상대방이 하기 전 이쪽에서 걸 수 없는 곳에서 오는 전화이기에 만사 제쳐 놓고 받으려는 아내의 심정이 그녀의 행동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잠시 하는 전화 한 통만으로도 일단 남편이 무사하기에 아내는 맘을 놓는다. 그리고 서로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에 힘을 얻고 또 살아가기 때문이다.
식구들이 걱정할까 봐 그곳의 일을 전혀 말하지 않는 남편, 아니면 사고가 생기고 난 다음에야 말해 주기도 하는 남편 등등 저마다 각양각색이다.
크리스티의 이야기는, 남편을 위험지역에 보내 놓고 아이 셋을 데리고 용감하게 살아가나 어쩔 수 없이 힘겹기도, 또 연약하기도 한 한 아내의 모습이자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그렇게 그녀의 적응기를 들으며, 손님 치른 후유증을 겪으며 주말을 보내고, 나는 새로운 한 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은 어느 새 금요일이자 크리스티네 집에 가야 하는 날이다.
'커피'를 치른 후 주초의 생기 넘치던 나의 모습과는 달리,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내 마음의 착잡하기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내 심령 깊은 곳에서 주님을 찾는 외마디 외침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고장 난 혼의 소유자 같다.
그녀의 집에 들어선 나는 사람들 속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나를 보고 살포시 웃는다. 그러나 나는 진작 크게 웃어 주지 못하는 대신 눈웃음을 보낸다. 그것도 어금니를 꽉 문 채,
내게 다가온 그녀를 부둥켜 안고 있으려니 그녀의 아픈 가슴이나 내 가슴이 하나가 되어, 사람이 할 말을 잃는다는 것이 이럴 때구나!...처음 알아진다.
나의 가슴앓이는 실은 지난 월요일 저녁부터 시작되었다. 그 날 온종일, 우리의 주거 지역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파병된 미군 5명이 전사했다는 뉴스가 라디오에서 흘러 나왔다. 그리고 우리 아내들 그룹을 대표하는 제니에게서 온 이메일이 그 중 한 명이 크리스티의 남편임을 알려 주었다.
전주 수요일 '커피'에서 그녀와의 대화와 그녀의 모습이 아직 내 눈에 아른거리건만 이젠 남편을 잃은 슬픔과 충격 속에 빠져 있을 그녀를 상상한다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그뿐인가? 크리스티의 남편이 겪은 위험은 바로 현재 내 남편의 위험이기도 하다. 그의 예상치 않은 죽음은 내 남편과 나의 '커피'에 참석한 아내들의 남편들 모두의 죽음이기도 하다.
이 세상 그 모든 죽음이 나의 가슴을 치지는 않는다. 세상 모든 죽음 때문에 아파 하고 슬퍼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모든 죽음의 소식을 가슴 가까이 맞이할 수도 없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가족과 이웃은 있게 마련이다. 나의 이웃인 크리스티의 엄청난 아픔과 충격은 내 가슴에 저절로 가까이 다가와 아리게 한다.
월요일 이후 이미 며칠 동안 눈물과 슬픔을 삭힌지라, 정작 그녀를 만나는 오늘은 많이 담담해진 심정이다.
그녀도 마찬가지. 강한 엄마의 모습답게 아들 셋을 혼자 키울 생각을 하면서 자신을 추스른다. 그동안 남편과의 사이에 즐거웠던 결혼생활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지만 동시에 감사하다.
그녀가 남편의 전사 소식을 접한 처음 이틀 간, 사람의 영과 혼의 구분이 그리 분명할 수 있나 싶게 그녀의 영혼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남편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를 바라고 주님을 바라보나, 한편으로는 살면서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아픔에 절여져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혼과 육의 모습이 그녀의 영과 공존했다.
그녀의 친정 엄마도, 아들을 잃은 크리스티의 시어머니도, 동생을 잃은 누나들도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모두 신자인 그들은 역시 죽음 앞에서 강하고 담대했다. 이들의 슬픔 가운데 주님께서 같이 하신다는 믿음으로 오히려 위로하는 이들을 위로했다. 아무도 슬픔을 쓰고 드러누운 사람은 없다.
이 가정에 산 자들 중 가장 나이 어린 아기는 13개월짜리다. 적어도 이 아이의 삶에는 죽음이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무슨 일이 일어난 지 전혀 모르는 이 아기 때문에 죽음 대신 생명에 눈을 돌리게 되나 보다.
"나는 아이 셋을 키워야 해요." 하며 크리스티는 강한 의지를 보인다.
"하지만, 많이 힘들 거예요." 라며 크리스티는 내게 눈물을 보인다.
"그래요. 둘이서 키워도 힘들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도와 주셔요."
우리 둘만의 대화는 그러다 흐지부지 중단된다. 해야 할 많은 일이 그녀을 내버려 두질 않기 때문이다. 웬지 모르게 그녀가 혼자 걸어가야 할 긴 여정을 혼자 쓸쓸히 걷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식구와 친지가 도움을 주겠지만, 간혹 그 아무의 손도 그녀에게 미처 못 미칠 때, 잠시라도 그 빈 자리를 채울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크리스티도 그리고 그녀의 가족들도 모두 아픔을 가슴에 묻고 그들이 믿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모습 때문이다.
각자 도울 수 있는 것을 돕는 우리 '커피' 그룹의 아내들을 보면서도 그렇다. 아무도 크리스티의 짐과 고통을 대신 할 수도 없고 대신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위해 기도하고 같이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음식을 해오고 청소를 해 주고 아이를 봐 주며 끊이지 않고 울리는 전화를 받고, 부고 쓰기를 돕고 이런저런 장례 절차 준비를 도우면서 크리스티의 짐을 같이 나누는 믿음의 자매들이다.
크리스티의 영과 혼 그리고 그녀의 가냘픈 몸에 힘과 용기를, 그리고 진정한 평안을 주시는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살아계시고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사람의 어설픈 위로와는 달리 친히 그녀의 아픈 가슴을 달래어 쓰다듬어 주시고 그녀와 남겨진 아이들 셋을 도우실 하나님의 손길 때문이다.
전쟁은 전쟁터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남편과 아들들이 전쟁터로 나가는 순간 전쟁은 이들의 가정에도 찾아온다. 청천벽력 같은 죽음의 소식이 그동안 많은 가정에 임했듯이, 앞으로도 많은 가정을 놀라게 하고 고통에 빠지게 할 것이다.
그래서 나와 내 남편이 오늘 살아 있음은 내게는 기뻐하고 감사할 최고의 조건이다.
우리의 생명을 연장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그 두려움도, 실망과 낙심도, 삶의 괴로움도 다 잊게 하는 묘략이다.
사실 살아 있다는 사실만도 내가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와 동기이며, 살아가는 원동력이다. 처음부터 내게 주신 선물이기에 그렇다. 생명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내가 산다는 사실에 엄청난 위안이 있다. 살아 있어 숨 쉬는 많은 날 동안 나를 도우신 하나님의 인자하신 손길 하나하나가 뼛속 깊이 감사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사건 가운데서도 인생이 주님의 선하심을 바라보게 하는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의 어김 없는 사랑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다.
그래서 설사 너무도 이른 죽음이 남편과 아내를 갈라 놓고, 아빠를 모르고 자라나야 하는 어린 자식이 생겨났어도, 주님의 선하심을 기대하고 앞을 바라보고 온 힘을 다하리라 맘 먹는 연약한 한 여인을 돌보실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우신 이름을 불러보며 큰 위안을 받는다.
사람이 줄 수 없고 해 줄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도우시리라는 믿음으로 놀란 가슴을 재우고 나 역시 소망과 희망으로 앞을 바라본다.
날마다 같이 하시는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오늘도 기대하며 그동안 내 가슴을 짓누르던 슬픔을 거두어 내고 평안을 되찾는다.
이것이 우리 가정에 아직도 머무르고 있는 전쟁에 임하는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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