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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의 지난 칼럼들/뉴하우스의 돌보며걸으며

동굴로부터 빛으로 (neuhaus / 뉴하우스)

credit: by dharma communication flickr.com


작년 여름에 남편의 전근으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리사를 처음 만났다.
아직 젊고 경험이 없어 남편의 파병을 겁내는 아내들을, 그리고 내성적이거나 소극적인 사람도 모두 두루두루 자연스럽게 품어 주는 모습이 참 신선했다. 그녀의 호탕한 웃음 속에 푸근하고 넉넉한 성품이 녹아 있다.

전직 교사답게 여자들 그룹을 잘 리드하는 그녀가 간간이 들려 주는 그녀의 경험담은 항상 솔직하다. 이런 리사는 장성한 세 딸의 어머니이고, 9명의 손자들의 할머니이며, 사역자의 아내다.

그녀가 뿜어 내는 에너지와 열정에 서서히 동화되어 갈 무렵, 얼마 전 어느 모임에서 나라면 나누기 어려울 것 같은 그녀의 간증을 듣게 되었다.

리사는 요즘 우리가 말하는 소위 결손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내와 딸에게 폭력을 일삼던 아버지와, 여동생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남자 형제들 사이에서 어린 리사는 꽃봉오리가 피기도 전에 꺾이고 이지러진 채, 한대로 내쫓긴 학대 받는 아동이었다.

그녀가 아는 삶은 어둠이 전부였고, 그 어둠의 세력은 어린 리사를 통채로 삼키고도 남았다.

리사가 사는 동굴의 삶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 분명했다. 동굴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어마어마한 돌을 천사라도 움직여 준다면 몰라도. 리사는 곧 이런 어둠 속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빛을 그리워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 엄청난 불행의 그림자가 점점 가까이 와 자신을 덮쳐도 속수무책이었다.


부모가 이혼하여 엄마와 함께 살던 리사는, 엄마가 재혼하게 되자, 그동안의 삶도 버거웠던 사춘기 소녀의 반항심에서, 새 집에 데려가고 싶어 하는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대신 아버지한테 가서 살기로 작정한다.

그녀의 흐려진 판단력과 반항심에 근거한 무모한 결정과 고집은 그녀를 더 깊은 암흑으로 몰아 넣었다. 어둠에 익숙해지다 보니 더 깊은 어둠에 대한 두려움마저 없어진 것일까?

다시 같이 살게 된 리사에게 아버지는 한 청년을 소개해 주었다. 청년은 리사에게 마약을 소개했고, 얼마 안 있어 마약은 리사를 거리로 내몰았다. 마약을 파는 딜러로 변신한 그녀를 둘러싼 어둠은 깊은 우물 같아 헤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리사를 이용하는 이 청년과 얽힌 삶이 어땠을는지는 상상에 맡긴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을 찾으러 온 엄마의 단호하고 강경한 손에 이끌려 엄마의 집으로 와 살게 된다. 그렇게 해서 리사의 불안한 타향 살이는 시작된다.

리사의 이야기 속에서 리사가 '할머니'라고 부르는 여성은 다름 아닌 엄마의 새 시어머니이시다. 서로 많이 서먹서먹하고 불편한 관계일 수 있지만, 한 집에 사시는 할머니는 리사에게 “I’m praying for you. Lisa.”라는 말을 수시로 하시곤 했다고 한다.

리사가 할머니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할머니 손에 이끌려 처음 교회에 가게 된다.


그렇게 리사가 살던 동굴 문 앞의 돌은 움직였고, 어둡기만 하던 그 동굴 안에 빛이 서서히 들어왔고, 리사는 주님의 품 안에서 쉼을 찾음으로 오랜 방황을 끝내게 된다.

40여 년 전 일을 들려 주는 그녀의 목소리는 간간이 떨리기도 했고, 감정을 주체하느라 잠시 멈추기도 했지만, 하나님이 길을 잃은 한 젊은 인생을 찾아오시고 만나 주시는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동은 40여 년 전이나 그 날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이 구원 받고 거듭나는 이야기는 언제고 감동을 준다.
 
우리가 잘 아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다 예수를 믿게 된 사도 바울의 극적인 구원의 이야기와 이에 버금가게 구원 받은 수많은 성도들의 믿기지 않을만치 극적인 이야기는 허다하다.

그런가 하면 호텔 방에서 성경을 읽다 예수님을 만나는, 예기치 않게 조용히 찾아 온 구원도 있다. 남들은 지루해 하던 성경공부시간 중에 영혼의 눈이 열리고 예수님을 믿게 된 나의 이야기 역시 극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의 구원은 모두 초자연적이다. 우리의 영혼의 눈이 열리고 보이고 믿어지는 이 변화의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인간이 아는 논리와 이성, 학문이 존재하지 않는다.


요즘은 불면증 약의 부작용이 흔한 자살의 원인이라고도 한다. 오래 전 우리 아이를 베이비 시팅을 하던 교회의 고등학생인 에리카는 불면증 환자도 아니고 이런 약을 복용한 적도 없다. 하지만, 아주 어린 초등학생 나이부터 자살을 시도한 적이 여러 번 있다. 정말로 사는 것보다 죽고 싶어하던 아이였다.

부모의 그치지 않는 불화. 수시로 몇 달씩 아니면 일 년도 좋고 마음 내키는 데로 바람 따라 가출하는 무책임한 아버지. 이런 상황에서 피폐해지고 생계를 위해 이리 뛰고 자리 뛰며 고생하는 엄마. 사랑을 받아도 부족한 시절에 부모에게 사랑을 받은 기억이 없는 이 어린 소녀는 차라리 이 세상에서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그 작고 어린 가슴에는 삶에 대한 회의와 절망이 가득하고, 한 마디로 사는 게 괴로운 아이였다.

수많은 성경 공부를 하고 가르쳤지만, 그 주일날 아침 예배 전 성경 공부 시간이 내가 유독 기억에 남는 이유는, 에리카가 덤덤하게 들려 주는 자신이 살아온 처절한 삶의 이야기에 놀라고 쇼크를 받은 까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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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젊은 아이들이 그러 듯이, 에리카도 친구 따라 교회에 나왔다. 잘 해 주는 언니 오빠들 속에서 위안을 받고 어느 새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다.

아직도 집세 내기도 벅찬 가난한 삶과 기쁨은커녕 희망도 다 잃은 채 어둠 속에서 그늘진 삶을 사는 엄마와 어린 동생들을 걱정하는 삶은 계속되어도, 에리카의 마음만은 빛으로 환했다. 교회에서도 활달하고 웃음이 넘쳤다. 더는 가슴 서늘한 일을 저지를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대학을 가고, 타주로 이사를 하고 엄마도 예수님을 믿고 아주 기쁘고 행복해 하신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마지막 들은 소식이다. 감사하게도 빛은 계속 어둠을 몰아냈다.


언젠가부터 교인들은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을 '하나님의 일’과 동일시하고, 직분과 체면에 매이는 풍토가 만연해지기 시작했다.

"교회 일을 열심히 하면, 아이들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줄 알았다.”라는 어느 장로님의 진솔한 그러나, 회한이 담긴 말이 내 뒤통수를 치던 그 날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나갔다. 하나님마저도 대신 살아 주시지는 않는 우리 각자의 삶을 살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사실 앞에 조심스럽던 세월이었다.

하지만, 교회는 영적으로 성숙함과 더불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개인의 삶 보다는 틀에 밖힌 집단의식과 행동의 은근한 강요는 여전하다. 가정을 소홀히 하는 것이 믿음의 척도로 둔갑한 지도 오래다. 가정의 필요를 챙기고 가정을 먼저 돌보는 것과 '하나님의 일’이라고 보는 모든 ‘교회 일’은, 가정과 하나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관계선상에 두고 어처구니 없는 갈등의 요소를 제공한다.

성경 말씀과는 달리, 돈을 빌리고 빚을 져 가며 크고 좋은 교회 짓기는 그 방법이 성경적이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무모함과 억지스러운 인간의 의지 내지는 신념이 믿음의 대명사가 되어 뿌리가 든든하지 못한 연약한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주님은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신다. 우리가 사는 삶의 질을 말씀하시고 계시다.
복음의 빛으로 어두움을 밝히고 구별된 소금의 삶에 충실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지 않던가?

사람이 영적 어둠에서 빛으로, 복음의 진리 가운데 나오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자 은혜다. 하지만 빛이신 주님께로 이끄시기 위해 미련하고 부족한 사람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신다는 아이러니가 또한 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이도 사람이요,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참여하는 것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몫이다.

그만큼 성도 개인의 삶은 예배이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쓰이는 보물과도 같은 귀한 도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전도’하는 전략이나 ‘교회생활’이 성도의 지혜와 삶의 질보다 더 강조된다.

하루는 부대 안의 마트에서 줄 서 있는 내게 한국인 여자 분이 다가와 인사를 한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 나는 왜 내게 다가오는 줄을 너무 잘 안다. 아니다 다를까 내 짐작대로 내게 교회에 다니느냐고 묻는다. 어느 교회에 다니냐고 물은 후에도 내게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전단을 주고, 내게 연방 이 말 저 말 시킨다. 그러다 그 여자 분은 내게 이름과 주소와 전화 번호까지 거침 없이 묻는다.

그 분은 나 같은 사람은 지금까지 만나 본 적이 없는지, 싫다는 나의 대답에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하지만,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전도도 아닌 자기 교회에 데려가려고 개인정보까지 달라고 하는, 상식을 깨는 자신의 결례는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미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내 말을 건성으로 듣고 물러날 줄을 모르는 그 분과의 만남이 씁쓸했다.
전략과 방법에만 매여 앞에 서 있는 사람에 대한 배려와 존중은 없는 기계처럼 움직이는 교인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빛이 되라고 하셨다. 빛은 언제고 환하고 눈부시다. 어둠 속에서는 길을 안내한다. 그리고 따뜻하고 에너지를 준다.

내가 빛이라면. 그것도 내 영혼이 거듭나게 한 복음의 특별한 은총의 빛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 빛은 내 속에서 꺼지지 않는 빛이다. 이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어두운 심령을 비추고, 얼어 붙은 심령을 녹이고, 낙심하고 절망하는 심령에 희망의 등불이기도 하다. 설사 내가 있는 자리에서 가만히 있다 해도 빛은 얼마든지 발할 수 있다.

자그마한 친절이 마음을 눈 녹듯 녹이고 사람에게 두려움 대신 용기를 준다. 친절은 계속 다른 친절을 만들어 가고, 사람 사이에서 돌고 돈다. 나의 친절이 누구를 어떻게 언제 어디서 참된 빛으로 나오게 하는 필요한 도구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거칠고 날카로운 말에는 사람이 찔리고 상처나 돌아서지만, 부드럽고 순한 말은 화를 가라 앉힌다. 감정을 표현하고 의사를 소통하는 우리의 언어는 양날이 서 있는 위험한 도구이기도 하다. 하지만, 잘만 사용하면 천냥 빚만 갚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다.

빛이 있는 삶의 태도와 살아가는 자세에는 진정성이 있다. 허세와 허례, 겉에 나타나 보이는 것과 멋에 치중하는 삶이 아니기에 세상 것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평안하다. 이 평안은 같이 있는 사람에게 전달이 되는 전염성도 있다.

세상 일의 중심에는 언제고 사람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람의 심령과 삶 일부분에 이런 빛의 사람으로 다가가는 것은 우리의 몫인 것이다. 사람을 배려하고 존중하지 않는 그 어느 전략과 수단은 잠시 사람을 모을 수는 있어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한다.

리사도 에리카를 위해서도, 하나님은 소금과 빛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성도의 삶과 진심으로 다가서는 순수한 믿음의 사람들을 사용하셨다. 모든 게 적시적소에서 싱크로나이즈되는, 마치 예술과도 같은 작업이 이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무조건 들이대고 끌어가려는 전략에 넘어간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소금도 되라고 하시고, 짠맛을 잃으면 소용이 없다고도 하셨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소금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세상과는 다르고 구별된다는 의미는 아닐까? 라는 나만의 생각을 해본다. 적당한 소금의 양으로 음식의 맛이 살고 향상되듯이, 소금 된 성도의 삶도 예수의 맛을 내는, 보기에도 좋고 흉내 내고 싶은 삶이 아닐까?

이런 성도의 사는 모습이 다르다. 세상을 사는 방법이 다르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고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다르다.


리사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길을 잃고 죄 가운데 방황하던 그녀가 예수 믿고 거듭난 이야기를 통해 듣는 이들 역시 하나님을 만난다. 그렇다. 리사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듣는 이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듣고 본다. 소금 같은 성도의 삶 중심에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보인다.

세상에서는 인생이 무상함을 깨닫고 철학을 논하는 것으로 그치지만, 성도는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소망을 나눈다. 세상에 속해 있을 때는 건느지 못하는 강을 하나님의 도움심으로 건넜다. 그리고 보이지 않던 영원한 나라까지 보게 되었다.

그래서, 어느 이야기 속에서도 자신이 우뚝 서 있지 않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귀하고 값진 것이기에, 예수 외에는 자랑할 만한 것이 없기에 그렇다.

죄인 중 죄인이요, 땅의 티끌만도 못하다는 사도 바울의 자신에 대한 고백을 통해, 이미 죽은 영적 시체에 불과하던 시절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자녀를 박해하던 자신의 무지한 행동과 죄를 통탄하는 심정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의 죽은 영혼에 생명을 불어 넣으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시게 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삶 곳곳에 스며 든다. 그래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른 것이다.

소금 같은 삶은 자신의 가난과 배고픔, 절망과 좌절을 통해서도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가 도움이 되기를 원한다. 그 사람만의 독특한 짠맛으로 사람의 가슴 속에 진정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그 무엇인가를 주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그리고 가장 필요하고 적절한 것을 줄 수 있는 분의 손길을 알기에, 기다리고 인내하는 데도 익숙하다. 다그치고 초조해 하지 않는 여유도 있다.

세상이 수시로 던져 주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서 변질된 가치관과 사람 사는 방법에 쉽게 현혹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가장 기본적이고 우선인 사람의 본분에 충실하기에 짠맛을 잃지 않는다.

이렇게 자신의 가치와 필요성을 절감하는 삶은 책임과 의무에 철두철미하다.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자유분방하고 무책임한 이기적인 삶이 아니다. 나 자신만이 유일한 수혜자인 꿈과 나만의 일에 매달리지도 않는다.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는 줄 알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 많은 것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리고 참 공정하시다. 우리의 선한 일을 기억하시고 갚아 주신다는 약속이 성경에는 수두룩하다.

주고 받고가 분명하면 할수록 덜 손해 볼 것 같지만, 실은 이해타산 없이 내 가족을 돌보고 헌신하는 먼저 주는 삶을 통해 내게 돌아오는 행복감은 계산하는 것을 부끄럽게 하고도 남을 만큼 우리의 영혼 깊이까지 만족하고 충족하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돌보고 베풀고 섬기는 관계로 행복을 누리게 하시고, 자녀를 양육하면서 조건 없는 사랑으로 돌보는 기본적인 가족 관계를 주셨다. 이 가정이라는 작은 삶의 터전에서 사랑을 하고 헌신하는 삶의 과정과 학습을 통해 우리는 서로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로 우리의 자리와 역할이 확고해져 간다. 둘이 하나가 되고 서로 섬기는 법칙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이 만드신 인생 법칙이다.

이런 주는 삶에 익숙해진 사람은 가족의 범위를 넘어서서 이웃에게도 교회 안에서도 필요한 존재로 영향력이 있게 된다. 남을 섬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진정한 이웃 사랑과 전도는 결실을 맺을 확률이 높다.


우리 주위에 리사와 에리카는 상상 외로 많다.
마트에서 이미 예수 믿고 교회에 간다는 사람을 붙들고 이름과 연락처를 받아 내려고 애쓰지 말고, 자기 발로 우리의 삶에 걸어 들어오는 리사와 에리카를 놓치지 않는, 사람에 대한 순수한 관심과 사랑이 이런 전략을 대신 했으면 좋겠다.

삶을 귀하게 여기자!
삶은 항상 준비되어 있어, 언제고 어디서나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 귀한 도구다. 그러나 전략과 수단 방법은 삶이 아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예수의 향기가 잘 나지를 않는다. 하나님을 보기는 더 어렵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작전에 말려 들고 낚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삶과 사람 자체에서 풍기는 좋은 냄새에는 민감하다. 각자의 믿음과 창의력으로 이웃에게 소금과 빛이 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나의 이웃은 언젠가는 이 좋은 냄새가 예수의 향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말 한 마디 안 해도 빛은 감추지 못한다. 소금의 독특한 맛을 모르는 이는 또 어디에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