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쏟아져' 뮤비 캪처. 켈트 족으로 분장한 어린이들 앞에서 주인공(스밑)이 전설의 검을 바위에서 뽑아내는(?) 시늉을 하고 있다.
마이클 스미스 비평(1)
-노래 '하늘이 쏟아져' 분석
김삼
마이클 W. 스미스 (이하 스밑)를 모르는 젊은 신자는 그리 많지 않을 듯 싶다.
그는 미국의 세계적인 '경배음악'(워슆 뮤짘) 연주자 또는 '복음성가사'로 한국을 비롯한 국제 교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난 2013년에는 한국에도 와서 연주를 했다. 그의 노래는 거의 누구에게나 환영받으면서 부담 없는(?) 감동을 준단다. 신교인으로 알려져 있건만, 심지어 천주교나 정교회 등 다른 교파 사람들도 그의 음악을 애호한다. 1한 마디로, 스밑은 현대 교회음악계의 최고 급 명사(名士, a celebrity)이다. 이것을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애호 대상이고 유명하다 해서 아무 문제가 없고, 그래서 분별이나 검증할 이유조차 없는 것인가? 문제가 있어도 저절로 용서돼야 하는가?
바로 이 점은 역으로 오늘날 젊은 교인들의 문제이다. 분별과 검증을 하지 않는다면, 교계가 부패해 썩어버리는데도 말이다. 스밑의 내한 공연도 그냥 무턱댄 대환영과 성황, 몰입과 갈채 속에 끝났다. 주요 문제인사인데도, 결국 그는 왔다가 챙길 것을 다 챙기고 유감 없이 돌아갔다.
이처럼 문제는 양쪽에 다 있는 것이다. 티가 별로 나지 않는 점잖은 문제 명사는 모든 것이 용서되는가? 그런 사람들은 더 구체적으로 조사해 볼 필요도 없는가?
이 노래의 원문 가사가 노래와 함께 나오는 다음 동영상을 참고하기 바란다 > (이하 붉은 화살표는 링크).
공식(?) 뮤비도 한 번 보기 바란다 >
'치유의 비(힐링 레인)', '비가 내리게 하소서'(Let It Rain) 등 스밑의 몇몇 다른 노래들처럼 이 노래 역시 비를 소재로 하고 있다. 그러나 '힐링 레인' 같은 치료의 빗물 개념이 성경엔 없다.
뮤비 분석
'하늘이 쏟아져' 뮤짘 비디오의 첫머리에서는, 주인공(스밑)이 안개 낀 숲속에서 무엇을 찾아 헤매다가 고대 켈트(Celtic) 원시부족처럼 분장한 아이들을 만나 둘러 싸이는 장면이 나온다. 아이들 손에는 무기 같은 막대기가 들려져 있고, 그들의 눈빛은 경계심 또는 적개심으로 차 있는 듯 보인다. 사실 노래 가사 내용에는 전혀 걸맞지 않다!
잠시 후 뜻밖에도 나무에 기대어 놓은 보검이 나타난다. 웬 보검?? 신사도 운동가들이 열렬히 애호하는 아터 왕의 전설의 마검, '엑스캘러버 3'가 연상된다. 더 놀라운 것은 잠시 후 아이들이 모여든 가운데 스밑이 땅에 꽂힌(?) 이 검을 뽑으려 하고 있다. 자신이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마왕이라도 된다는 의미인가? 알고 보면, 아까부터 그가 안개 속에서 찾아헤맸던 것은 바로 이 마검이었다.
다음 순간 쓰러져 죽은 전설의 괴물(?) 같은 검은 털짐승이 잠깐 나타나는데, 늑대 또는 멧돼지로 보인다. 그 칼로 괴물을 쳐죽였다는 말일까?
그리고는 검을 다시 땅에 꽂은(?) 듯한 주인공이 일어난다. 주위에서 검과 스밑을 바라보며 웃고 즐거워 하는 아이들의 볼에는 분장한 핏빛 무늬가 발려 있는데, 약간 끔찍한 생각이 든다.
그 다음으로는 화면 한 가운데 피라미드 형 버팀대의 모닥불이 켜진 아래, 한 어린이가 주인공에게 고대 문서 같은 것을 한 장 내민다. 펼치니까 이상한 문자로 쓰인 글 곁에 거대한 멧돼지를 죽인 칼을 쳐 든 전사의 삽화가 들어 있다. 오랜 전설의 영웅이란 것인지? 4 그러자 어린이 켈팈들은 오래 기다려온 영웅을 확인하기라도 한 양, 주인공의 얼굴에 물감을 발라 분장을 해 준다. 아터 같은 기사 왕으로 모신다는 표시? 5
잠시 후 주인공이 언덕 위를 앞장서 올라가고 아이들은 두목을 따르는 부하들처럼 줄이어 뒤따른다. 다음 장면에서는 놀랍게도 주인공이 마검을 든 채 막대기를 든 한 남자 어린이를 상대로 결투 시늉을 하는데, 소년이 창으로 찌르듯 주인공의 옆구리를 내지르자, 그는 짐짓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검을 든 채 무릎을 꿇더니 이내 땅바닥에 쓰러진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 다시 일어나 검을 어깨에 맨 채로 이번엔 아이들을 뒤따르더니, 이번엔 자기가 앞장서서 오솔길을 따라 부하들과 함께 해가 져 가는 산으로 오른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스밑이 다양한 상징물에서 보여주었듯 그가 선호하는(?) 북구 신 튀르(Tyr)가 거대한 늑대 펜리르(Fenrir)에게 오른 팔을 주어 희생하여 당한 것과 같은 구원자의 '수난'과 '부활'이라는 뜻일까? >)
노래 가사와 대비시킬 때, 뮤비 내용 전체가 한 마디로 황당하다. 아이들과 벌인 한 마당 드라마는 기독교나 성경 내용과 전혀 무관한 스토리이다!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아이들에 대한 복음 마인드라곤 도무지 없어뵈는 이것은 순진한 아이들을 신화적인 전설 내레이션에 이용한 것이나 다름 없다.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설화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뮤비 중간중간 기타를 걸쳐 멘 채 그가 절창하는 노래 내용과도 거의 전혀 무관하다는 점에서도 상호이질적이다. 자신이 기사나 어떤 전설의 영웅무용담을 노래하는 중세의 음유시인(=미네쟁어/마이스터징어)이라는 말인가? 아무튼 뮤비와 가사 내용이 북구 신화나 켈팈 전설 노래 같이 느껴질 뿐이다.
과연 스밑은 이 뮤비 및 전혀 별개의 노래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인가? 자신이 선호하는(?) 튀르나 토르(Thor)의 신화, 또는 아터 왕의 전설을 노래했다는 것인가? 6
그리고, 이 뮤비 속의 한 편의 패러디 드라마 연출이 복음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 독자는 이해가 가는가? 이게 중세 기사도 전설이나 신화적 설정이지, 기독교 복음과 뭔 상관이란 말인지?
확실히 마이클 스밑은 오컬트적이라는 결론 밖에는 나오는 게 없다. 뮤비의 한 대목에서는 한 남자 어린이가 천막 밖으로 왼쪽 눈만 빼꼼히 내밀고 내다보는데 영락없는 외눈 상징 같다! 스밑의 CD 앨범 재킽 등이 이런 오컬트 상징물에 상당량 개입돼 있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또 그의 이 '비'가 과연 정확하게 어떤 비인 지를 놓고 구구한 설들이 있는데, CCM 팬들이 이해하는 그런 '성령의 비'보다는 신사도운동에서 강조하는 소위 '늦은 비'이거나 또는 뉴에이지적인 개념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런 이유로, 스밑을 올바른 크리스천으로 여기지 않는 교계 사람들이 퍽 많다.
물론 성경에 나타난 비(예: 시편 72'6, 호쉐아서 6'3, 요엘서 2'23)나 찬송가에 나오는 '성령의 단비'(새찬송가 183장)를 연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과연 스밑이 그런 컨셒트를 갖고 '비'로 은유할 만큼 성령충만한 사람인가? 아니면 성경에 나타난 비의 개념을 이용하는 사람일까? 바꿔 말하자면 나의 물음은, 여러 교파에서 환영받는 스밑 같은 에큐메니컬 인사가 성경 진리를 중시하겠으며, 또 성경이 그를 인정해 주겠느냐는 것이기도 하다.
가사 분석
제목과 원문에 계속 나타나는 '스카이'는 하늘은 하늘이로되 하나님이 계신 heaven과는 다른, 좀 차원 낮은 하늘이다. 대기가 있는, 우리 눈에 보이는 저 상공이다. 성경에 따르면, 이것은 공중 또는 첫째 하늘에 해당한다. 그런데 스밑은 스카이를 더 큰 하늘인 헤븐을 은유하는 데 쓰고 있다. 즉 성경의 수많은 구절처럼, 물리적 개념을 영적 개념에다 껴 맞추고 있는 것이다. 7
그런데 이 노래는 여느 요소들보다 우레(thunder)가 소재로 되어 있다. 또 rain이라는 어휘는 단 한 번 나오지만, 제목을 비롯한 가사에서 'spill'이 주를 이룰 정도로 잦다. Spill이란 낱말은 본래 전반적인 어감이 과히 좋지가 않다. Pour도 한 번 썼지만, spill의 어의를 한 번 살펴 보면: ① 유출 ② 쏟다 ③ 엎질러지다 ④ 흘리다/뿌리다 ⑤ 누설하다, 내동댕이치다.. 등이다.
좋은 느낌이 드는가? 왠지 뭔가 약간 꺼림칙한 뉘앙스이다. 그런데도 왜 그는 overflow, pour 등 딴 동사는 제쳐놓고 spill이라는 동사를 계속 고집할까? Spills over가 현대 구어에서 많이 쓰이고, '넘친다'는 의미도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또한 heaven도 아니고, 계속 sky라고 하여 짐짓 위엣하늘을 회피하는 느낌만 든다. 다시 말하지만, 보통 sky라고 하면 눈에 보이는 상공 또는 air처럼 공중이라는 뜻이 있고, '공중 권세를 잡은' 악령들이 주로 진치고 있는 '둘째 하늘'에 더 가까운 느낌도 든다. 8
가다가 지적하겠지만, 스밑의 가사 일부는 찬송가에서 대강 이것저것 따다 짜깁기한 느낌도 든다. 기독교성을 조금이라도 더 가미하려는 어젠다가 아닐까?
첫째 연을 보자.
광야에 한 송이 장미 있어
메마름 속에도 빨갛게 피네
목마름 축여주는 비도 있네
몰려드는 구름 날개 속
위의 두 줄과 그 아래 두 줄은 서로 연결이 잘 되지 않는다. 다만 광야와 메마름이 목마름을 축여주는 비와 서로 대조된다는 것 뿐이다. 이 가사의 서두에 나온 광야의 장미 개념은 플로렌스 홀턴의 찬송시,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새찬송가 242장)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영국의 세속 가수 '스팅'의 히트 곡, '사막 장미(Desert Rose)' 같은 경우, 스밑과도 같이 비와 불, 약속 등의 어휘가 나열된다.
왜 하필 붉은 장미일까? 사막의 붉은 모래처럼 빛깔이 강렬해서인가? 붉음은 피를 상징하는 게 아닐까? 왜 한 송이 붉은 장미일까? 중세 카톨맄 설화처럼 크리스토님을 장미로 비유한 것인가? 그렇다면, 여기서 스밑은 예수 크리스토의 수난을 상징하려고 이 개념을 채택한 것일까? 그러나 저 가사만 갖고는 그의 속을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크리스토님은 장미로 비유한 개념은 카톨맄교에서 유래된 캐럴에 있을지언정, 애당초 성경에 있지 않다. 이것은 성경에 대한 오해에서 생겨난 개념이다.
우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붉은 장미는 프리메이슨리에 지대한 영향을 준 비밀집단의 하나인 장미십자단의 핵심 상징물의 하나라는 진실이다.> 연금술적/비학적/신지학적인 이 붉은 장미 개념은 '다트 로사 멜 아피부스(장미는 벌에게 꿀을 준다)'는 문구와 함께 요아힘 프리지우스의 '수뭄 보눔'에서 처음 쓰였고, 그 다음엔 역시 비학자인 로버트 플러드의 '클라비스'에서 쓰였으며, 그후 프리메이슨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러시아의 여성 신지학자, 헬레나 블라바츠키에 의해 더욱 활성화된다(헬레나 블라바츠키에 관해 BR 블로그를 검색해 보라: 9 >). 그런데 [장미+십자가] 개념은 우습게도 장미십자단 창설자였던 중세 독일의 연금술사/기사,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장미십자란 뜻)의 이름에서 왔다.
붉은 장미는 아울러 천주교에서 순교를 상징해왔다. 4대 카톨맄 '교회박사'의 한 명인 암브로시우스는 장미가 땅의 꽃이 되기 전 하늘에서는 가시 없이 자랐다가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영적인 것을 물질 차원으로 끌어내리면서 장미는 인간의 죄를 상기시켜 주려고 가시가 돋혔다고 주장했다. 물론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는 황당한 주장이다. 그래서 천주교의 '성모' 마리아는 원죄가 없다(?)는 의미로 '가시 없는 장미'로 불리기도 한다. 10
또한 [장미+십자가] 개념은 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기사이자 장미십자단 단원이었던 프리드리히 3세 잨센 선제후)로부터 영향을 받아(?) 채택, 예수 크리스토의 다섯 상처(두 손발과 옆구리)를 은유한 5개 꽃잎의 장미가 십자가 및 하트(심장)와 오벌랲되어 오늘날 루터교의 상징물이 되었다. 11>
1616년의 문서 자료에 따르면, 장미십자단의 제3 헌장인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의 화학결혼'에 루터의 5개 장미꽃잎 인장이 찍혀 있다. 이 루터가 그 루터가 "아니다"는 설도 있지만 링크된 문서를 보면, Frater Rosae Crucis(장미십자단)의 약자 F.R.C를 루터는 '푸투레 레포름 카톨'(Future Reform Cathol 즉 미래의 구교개혁)의 약자로 겸하여 쓰고 있다 > 따라서 그 루터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봐르트부르크 성은 루터가 '싸탄'에게 잉크병을 내던졌다는 그 유명한 사건의 장소이기도 하며(> 역시 장미십자단 단원이었던 프랜시스 베이컨 경이 전설의 아틀란티스 대륙 개념을 신대륙과 접합한 '뉴 어틀랜티스'를 쓰기도 했고, 1777년 시인/단원이었던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루터를 흉내내어 독일어 성경 번역을 한 곳이기도 하다. 히틀러는 이 성을 애호하여 '가장 독일적인 성'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12
이처럼 본래 '붉은 장미' 개념은 오컬트적이거나 구교적이지, 성경적이거나 신교의 것은 아니다. 물론 스밑이 이런 오컬트 관념이나 별 생각이 없이 초장부터 광야의 붉은 장미를 썼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은 뭐란 말인가? ->
첫 연 끝 부분에는 '구름 날개'라는 특이한 문구가 있다. 원문은 "몰려드는 구름의 날개들"(In the wings of the gathering clouds)로 되어 있다. 얼핏 평범하게 들릴지 몰라도 영어로는 상당히 독특한 표현이다. 스밑은 어디서 이 표현을 얻었을까? 순전히 창작일까? 성경엔 이런 표현이 없다. 바람 날개는 있어도 13. 구름은 날개가 아니라 하나님의 수레로 표현된다. 실제로 성자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르셨고, 다시 오신다. 14
스밑 앞서 쓰인 비슷한 표현으로는 작가 베티 벤슨의 '몰려드는 구름떼'(2010년)라는 역사 드라마 소설이 있었고, 헤비메털 밴드 '조용한 폭동'(Quiet Riot 15>)의 실패작의 하나로 손꼽히는 8번 째 앨범인 '뼛속까지'(Down to the Bone, 1995년 >)의 5번 트랰 곡이 '구름 날개'(Wings of A Cloud)였다. 스밑은 이 후자의 컨셒트를 본뜨지 않았을까. 물론 아닐 수도 있다. 구름 날개라는 개념은 또 이런 그림( 16>)을 연상시키는데, 이것은 고대 신화 속의 상징(>)과도 관련이 없지 않다.
아무러나 노래 가사를 계속 살펴보기로 하자.
네 눈을 들어
지평선을 보라 지금
우리겐 아직 소망 하나 있네
흙먼지에서도 (팔을) 뻗쳐
그것(소망)을 간구하라
'네 눈을 들어'(넷째 연 '나의 눈을 들어' 참조)까지는 시편 121'1을 연상시키면서, 그럭저럭 성경적인 냄새를 풍기려는 부분이다. 그런데 그 다음은 산을 보라, 또는 하나님을 바라보라가 아니고 지평선을 바라보라고 한다. 지평선에 우리의 소망이 하나 있다고? 그게 대체 뭔 소망이기에?
들을 수 있나
들을 수 있나 저 우렛소리
그(분)의 이름을 노래하라
저 하늘이 넘쳐 쏟아지도록
이 연까지 연결시켜 보면, 결국 지평선에서 바라봐야 할 그 유일한 소망은 우렛소리이다. 우렛소리(또는 비)가 유일한 희망이라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여기까지 보면, 마치 북국 신화(Norse myth)의 주신인 우레 신 '토르'(Thor)를 찬미하는 것 같은 느낌까지도 든다. 사실 스밑 주변의 상징물들과 연계되어 자주 회자되는 룬의 신, '튀르'(Tyr)는 바로 토르와 함께 북국 신화의 쌍벽을 이루는 주신의 하나이다.>
토르는 하늘의 신격이고, 튀르 역시 그렇다. 토르는 목요일(Thursday)이라는 영어명의 기원이고, 튀르는 화요일(Tuesday)이라는 영어명의 기원이다. 그런 데다 그리스의 주신인 제우스 곧 로마의 주신인 유피테르(주피터)는 바로 하늘과 비의 신이다! 참고로, 바티칸 산 피에트로 바실리카에 있는 페트로의 상은 본디 유피테르 상에서 따 왔다는 설이 있어 왔다.
이 노래에서 스밑은 무려 5번이나 그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우레를 노래하고 있다. 스밑은 왜 이다지도 우레를 좋아하는 것이며, 왜 그렇게 우레가 중시돼야 하는 걸까? 그리고 일부는 찬송가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의 가사를 슬며시 끌어당겨 썼다. 'I hear the rolling thunder'가 그 부분이다. 그러나 이 찬송가는 우레와 비를 연결하진 않았다.
물론 많은 젊은 신자들은 이것이 예언된 성령의 단비 또는 윌리엄 브래넘의 '늦은 비'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지 모른다. 그래서 여기서 유일한 희망은 성령을 가리킨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다음을 보자.
나는 단지 마른 뼈 뿐일 수 있어
힘줄과 살가죽이 벗겨진 채로
하지만 그(분)의 영의 바람이
나를 일으키(시)리
노래의 이 부분은 틀림없이 에제키엘 37'1~14에 나타난 골짜기 뼈의 환상을 다룬 것으로 보일 것이다. 특히 6~8절은 그렇다. 그래서 성령님을 말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내 눈을 들어
지금 수평선을 바라본다네
오, 아직도 부를 노래 하나 있네
무릎 꿇고 크게 외쳐
이 화자는 여전히 수평선을 바라보며 아직 부를 노래가 하나 있는데 그 노래를 무릎을 꿇고 외쳐라고 하면서..
들을 수 있나
들을 수 있나 저 우렛소리
그(분)의 이름을 노래하라
저 하늘이 쏟아지도록
우렛소리를 듣냐고 묻고 있다. 엉? 왜 또 다시 우렛소리인가? 계속 우렛소리를 듣고 그의 이름을 노래하라니, 우레와 하늘을 찬양하라는 얘기인가? 그리고 하늘이 쏟아질 때까지 우레의 이름(?)을 노래를 하란다. 지금 기우제라도 치르는 것인가?
난 우르릉대는 우렛소리 듣네
쏟아지는 비를 느끼네
내 마음은 경이로움으로 채워졌네
오직 님만 남아있네
나는 새 수평선을 보네
내 쪽으로 오고 있는..
내 눈을 들어
지금 수평선을 바라보네
오 아직도 부를 노래 있네
무릎 꿇고 크게 소리 질러
들을 수 있나
들을 수 있나 저 우렛소리
님의 이름을 노래하리, 크게 노래하리
저 하늘이 쏟아져 내릴 때까지
오, 난 들을 수 있네 (들을 수 있어)
들을 수 있네 저 우렛소리
난 님의 이름을 노래하리 노래해
저 하늘이 넘쳐 쏟아질 때까지
이상에서 보는 대로 스밑은 시종일관 우렛소리를 찬양하다시피 하고 있다. 그래서 여러 하늘 신들-토르와 튀르, 하늘과 비의 신 유피테르 등을 찬양하는 것인가 하는 의혹을 자칫 갖게 되기도 한다.
처음을 되돌아 보더라도, 광야의 한 송이 붉은 장미? 무슨 의미인가? 그 한 송이가 예수님이란 말인가? 그런 말도 없고..그것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적당히 성경 비슷한 문구를 끼어 맞춘 듯하다. 사실 스밑의 노래들은 거의 한결같이 예수님, 주님에 대한 언급이 매우 인색하다. 그 점이 자못 수상쩍다.
예를 들자. 스밑의 '비가 오게 하소서'(Let It Rain)이라는 노래도 계속 "하늘 수문을 열어 비가 내리게 해 달라"고 울부짖지만, 신화적(?) 또는 구약적으로 들리고, 단 한 번도 예수 크리스토나 하나님이라는 말이 없다.
이 노래도 그렇다. 주님, 예수님 또는 심지어 하나님이란 칭호가 전혀 없고 단지 (쓰인 가사에서만 알아볼 수 있게) '님'(You)이라고 대문자로 표시돼 있다. 그래서 그냥 귀로 들어서는 누굴 뜻하는지조차 알아내기 힘들다. 그냥 짐작만 할 뿐.
심각할 정도로 그렇다. 비신자도 아니고 거듭났다는(?) 사람이 그토록 사랑이신 주님을 부르고 시인하고 고백하는 데 이토록 인색하다면, 주님께서도 언젠가 그를 인색하게 대하실 수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상의 가사를 다 이해한다 하더라도 저 괴이한 뮤비는 뭐란 말인가?
가사가 문학적이어서 그렇다고? 문학은 신앙을 앞서가지 못한다. 단언컨대 참된 크리스천 문학 작품의 진정성은 예술성이 아닌 작가의 신앙이 좌우한다! 딴 말 할 것도 없이 그렇다.
왜 스밑의 노래는 자주 이 모양일까?
첫째로 그는 매우 에큐메니칼적이고, 둘째로는 그의 다양한 앨범 재킽의 그래핔들이나 그가 설립한 '롸킽타운(Rocketown 한국식: 로켓타운) >'의 주변에서 보듯, 다양한 오컬트 상징물 또는 오컬트 자체에 연루된 의혹과도 연계된다. 17스밑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롸킽타운은 굉장히 문제가 많은 존재다. 롸킽타운의 무대를 장식해온, 다양한 싸탄적인(!) 뢐 메털 그뤂이 줄줄이 있어 왔기 때문이다! 이 오컬트 상징물들과 뢐 그뤂의 포스터 등도 다른 기회에 상세히 분석해 보고 싶다.
그런데도 스밑은 롸킽타운의 이 심각한 문제점에 대해 아직까지 아무런 해명을 하지 않고 있다. 스밑은 과연 이 싸탄적인 밴드그뤂에 대하여 긍정적일까? 아니면, 스밑 자신 그들이나 싸탄주의에 무관한 것일까? 그런 의혹까지 일게 된다.
왜냐고? 스밑 자신 저런 이상한 오컬트 상징물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스밑의 이 노래는 광야에 내리는 빗줄기처럼 메마른 세상 속에서 거룩한 성령의 은혜를 갈구하는 노래라는 감동보다는 왠지 거리에 두루 쏟아지는 빗줄기처럼 젊은이들을 휘어잡으려는 하리망당한 신화적 호소 같은 느낌이 더 든다.
하기야 어떤 학자는 스밑이 노래하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는 곧 '타락한 천사들'을 가리킨다는 주장도 하고, 그래서 스밑은 프리메이슨인지를 묻기도 한다.
만약 스밑이 이 노래에서 하늘 신과 싸탄을 거룩한 성령님과 희석하여 노래한 것이라면, 그는 코린토B서(고후) 6'14~17이 경고한 대로 영원히 저주받아 마땅할 것이다.
오늘날은 파울의 시대나 다름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고 있는 시대이다(코린토B 2'17a). 하나님의 이름 대신 우레를 높이고 있는 스밑도 그런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튀르' 신을 신뢰하는(?) 듯한 스밑이든, 누구이든 다음 말씀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비록 소위 신들이라는 존재가 하늘에나 땅에 더러 있고, (그런) '신들'과 '주들'이 많다고는 합니다만, 우리에게는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 뿐이십니다! 그 분에게서 모든 것들이 비롯했고, 우리는 그 분을 위하여 있지요. 또한 주님은 예수 크리스토님, 그 분에 의하여 만물이 있고 우리도 그 분을 통하여 있습니다."(코린토A 8'5,6 사역)
전술했듯 스밑은 에큐메니컬 인사이며, 그런 인사답게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를 선호하는 관상영성가로 알려져 있다. 관상기도는 모든 주요 뉴에이지 종교의 총아인 명상기도/호흡기도와도 일맥을 이룬다. 20세기 관상기도/향심기도(centering prayer)의 선구자였던 토머스 멀튼은 온갖 잡종교 인사들과 교류했던 매우 다원종교적인 인물이었다.
이런 영성의 사람이 이런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과연 성령충만할 수 있을까? 자못 의혹스럽다.
- 그가 교파간 경계선이 없는 에큐메니컬임을 짐작하게 한다. [본문으로]
- 단, 시리즈라고 해서 본 블로그의 'New Posts'난이 스밑 관련 글로만 연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본문으로]
- 대체로 '성령의 검' 개념과 오벌랲시켜 가며 은근히 아터의 검을 부각시킨다. 예를 들면 신사도 더취 쉬츠가 그렇다. [본문으로]
- 고대 켈트어? 룬(Rune)어? [본문으로]
- 용을 쳐 죽였다는 중세 카톨맄 영웅, 조지(또는 게오르그)가 연상되기도 한다. [본문으로]
- 북구 신화의 주신. 천둥/번개/벼락 등의 천신이란다. [본문으로]
- 성경은 흔히 하늘을 복수로 말하고 있으며, 사도 파울은 코린토B서(고후) 12'2에서 '셋째 하늘'을 언급했다. [본문으로]
- 셋째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이다 . 그렇다면 우리가 숨쉬는 대기와 별이 있는 첫째 하늘, 마귀를 비롯한 악령들의 본부 격인 둘째 하늘도 있을 터라는 게 논리적인 자연귀결이다. 참고: 에페소서 2'2 [본문으로]
- 지고의 선이라는 뜻 [본문으로]
-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의 스승이었다. [본문으로]
- '현자 프리드리히'. 훗날의 프리드리히 대제. 루터를 자신의 영지의 일부인 아이제나흐의 봐르트부르크 성에 숨겨주었다 [본문으로]
- 루터가 썼던 가구와, 당시 그가 턱수염을 기른 채 (비밀집단 단원처럼) 손 신호를 하고 있는 초상 참고. 당시 루터는 (프리드리히를 상징하는) 기사의 종졸로서 자임했다. [본문으로]
- 시 18'10; 104'3, 호세아 4'19 등. [본문으로]
- 시 104'3 [본문으로]
- Gathering Clouds [본문으로]
- 우연(?)인지는 모르나, 이 노래에서 '구름 날개'라는 문구가 모두 13번 나온다. 8번째 앨범의 제5번곡이니 역시 오컬트 수 '13'으로 풀이되고. [본문으로]
- 롸킽타운의 로고인 웃화살표 자체가 오컬트적인 룬 문자의 'T'로 '튀르'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청소년들이 맨날 대할 수밖에 없는 주차장의 낙서그림들도 매우 오컬트적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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