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고 지쳐 낙망하고 넘어져 일어날 힘 전혀 없을 때에
조용히 다가와 손잡아 주시며 나에게 말씀하시네
나에게 실망하며 내 자신 연약해 고통 속에 눈물 흘릴 때에
못자국 난 그 손길 눈물 닦아 주시며 나에게 말씀하시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너는 내 아들이라 나의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
위의 시는 찬양사역자 이은수 목사(53)가 만들고 부른 그의 대표작 '너는 내 아들이라'(일명 '힘 들고 지쳐')의 가사이다. 미국 남침례회 소속 음악목회자인 그는 수많은 노래를 써서 불렀고, 찬양사역 25년차를 맞던 지난 2013년 펴낸 '약속'을 비롯한 다양한 앨범을 내기도 했다.
웹사이트(>)에 실린 소개 내용을 보면, 이 노래는 불치의 병으로 "천국으로 이사 간" 그의 동생 이재왕 형제의 가사에 붙인 것으로, 1990년대의 "대표적인 찬양곡"이 되어 "힘들고 지친 우리의 영혼에 힘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군대에서는 거의 '준군가'가 되다시피 했다고 한다. 작가 자신이(?) 지금까지 적어도 수 천 번은 불렀다며 지금도 부를 때마다 왠지 긴장이 되면서 감격의 감동이 밀려온다고 한다.
이 노래의 곡에 대하여는 문제 삼을 것이 별로 없고 하고픈 생각도 없다. 다만 가사 중간에서 중요한 문제점이 발견된다. 고인이나 작곡가/싱어에겐 좀 미안한 말이지만, '대표적인 찬양곡'과 '하나님의 메시지'라고 하기엔 많이 부족하다고 할 수밖에 없어 지적하고 나서게 되었다. 1
그러는 까닭은 '너는 내 아들이라 내가 너를 낳았도다'하는 부분 탓이다. 구약 성경의 시편 제 2편 7절에 있는 이 말씀은 메시아닠(Messianic) 성구로서 오직 메시아이신 예수 크리스토(그리스도)님께만 해당되고 쓰일 수 있는 구절이다. 이 성구는 메시아닠 시편(a messianic psalm) 2의 하나인 시 제 2편에서부터 시작하여, 신약 성경의 행전 13'33, 히브리서 1'5과 5'5 등 여러 다른 구절에서 인용되어 있다. 이 구절을 더 잘 이해하려면, 마르코스복음서(맑) 1'11, 루카복음(눅) 3'22 등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작시자는 한 술 더 떠 이 여타 구절까지도 의식하고 동원한 듯, "나의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라고 덧붙였다. 과연 이것이 성경적으로 타당한 가사일까?
이은수 작가는 "정체성을 잃고 살아가기 쉬운 이 때,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하나님께 사랑받는 아들임을 기억하며 살아갑시다. 크라이 아웃(=외치세요)!"이라고 하여, 성도가 하나님께 사랑 받는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밝히는 근거로 이 구절을 사용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 "언제나 변함없이 너는 내 아들이라 나의 십자가 고통 해산의 그 고통으로 내가 너를 낳았으니"라고 주를 달아놓아, (본래 성부님께서 성자님에게 하셨던 말씀이) 마치 예수님이 성도에게 하신 말씀처럼 주객전도의 형국이 되어 버렸다. 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사람들은 해당 가사 부분이 본래 메시아 예수님께 해당한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망각하거나 큰 혼동과 착각을 빚을 수도 있다.
이것은 중차대한 실수요 과오이다. 이 구절은 그런 용도로는 사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 다른 구절도 많은데, 하필 이 구절을 그런 용도로 쓴 것은 당초 작시자와 작곡가의 오해에서 온 잘못이다. 따라서 아무리 대중화 된 인기 높은 곡이라도 이 노래의 가사는 고쳐져야 한다! 우선은 작시자의 실수였는데, 신학 공부까지 한 목사인 작곡자가 이를 파악하거나 감안하지 않고 곡을 붙여 지금까지 계속 보급해온 것은 그의 양식(良識)과 상식에 대한 의혹까지 제기될 수 있는 문제이다.
아마도 작가는, 성도도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중생한 성도에게도 분명히 "너는 내 아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는 말씀이 적용된다고 주장할 지 모른다. 일리가 없지는 않으나 이 성구가 얼추 그렇게 맞아 들어간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그렇게 적용되는 말씀은 아니다. 성령이 기록하신 뜻대로라면, 성부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어도 성도 개인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기록이 성경엔 없다.
이하에, 필자의 이런 비평적 판단을 성경상으로 증명해 보려고 한다.
우선 시 2편을 살펴 보면, 2, 6절에서 예호봐 하나님께 특별한 기름부음을 받은 분, 곧 메시아와 왕을 말하고 있다. 메시아의 히브리어, '모쉬앟'/'마쉬앟'은 그리스어 '크리스토스'와 같은 말로, 특별한 기름부음을 받은 특정 대상을 의미하며, 거의 고유명사에 가깝다. 비록 수양뿔에 담은 기름으로 상징된 성령의 기름부음이 과거 구약 때 장로들과 지도자들, 사제(제사장)와 판관(사사)들, 왕/대언자(선지자)/레빝(레위) 성전음악인 등에게 적용되기도 했고,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성령님의 기름부음이 적용되긴 하지만.
시 2편의 일부는 기자인 다뷔드(다윗) 자신을 가리킨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성령님이 쓰신 동기를 생각할 때 그 무엇보다 예언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인 미래의 메시아 곧 예수 크리스토님을 말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것은 8, 9, 12절로 보아 분명해진다. 이방 나라를 유업으로 얻어 그 소유가 땅끝까지 이를 사람은 다뷔드일 수가 없다! 또한 철장으로 적대자들(적 크리스토를 말한다)을 산산히 깨부술 분도 왕들의 왕, 주들의 주님이신 메시아 곧 예수님 밖에 없다. 그 반면에 12절에서 보듯, 다뷔드에게 키스를 하지 않아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길에서 망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므로 시 2편은 메시아이신 예수 크리스토님께만 걸맞으며, 그밖에 그 누구에게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시 2편이 메시아의 것으로 진행돼다가 갑자기 7절에서 뭇 성도에 해당한다고 상상해 보라. 문맥상 맞겠는가? 전혀 엉뚱한 상황이 돼버릴 것이다.
이런 진리는 함께 인용한 다른 구절들도 입 모아 지원해 준다.
행전 13'33을 보자:
"하나님은 예수님을 일으키셔서 그들(선조)의 후손인 우리들에게 (바로 이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시편 둘째 편에서도 "너는 내 아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고 하신 그대로입니다."(이하 성구는 사역)
여기서 페트로(베드로)는 분명히 시 2'7 말씀을 죽음에서 되살아나신 예수님께 적용하고 있다. 행전 13'27~37의 앞뒤 문맥을 봐도 이것은 확실해진다. 특히 페트로는 이 시편이 다뷔드가 미래에 되살아나실 메시아를 가리켜 한 말이라는 사실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36절과 37절 비교). 그러므로 이 문맥을 봐서, 왕인 다뷔드 자신에게도 해당되지 않는 말씀을 성도 개인에게 적용할 수가 없다. 만약 이 구절이 다뷔드에게도 적용된다면 구약인인 다뷔드보다 더 나은 언약의 혜택을 받은 신약 성도에게도 적용될 여지가 있다고도 볼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메시아와 다뷔드의 확연한 구분은 본 시 2편은 물론, 시 16'8~11, 110'1에서처럼 우선 다뷔드 자신이 하고 있다.
또 예수님과 다뷔드의 이같은 확실한 구분은 주님 자신도 직접 하신 바 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서 22'42~46(참고: 맑 12'35-37)에서 시 110'1을 인용하여 파리세(바리새인)들에게 물으신 내용으로도 드러난다는 말이다.
흥미롭게도 이 말씀도 페트로가 같은 목적 아래 인용하고 있다(행 2'34). 즉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이 성구들을 오직 죽으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인 메시아에게만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히브리서 1'5로 가보자.
"하나님이 아무개 천사에게 '너는 내 아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고 하신 적이 있나요? 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까?"
이 말씀은 하늘의 천사에게라도 적용되는 말씀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은 이어지는 6, 7절과 앞뒤 문맥(참고: 히 1'2~4)에서도 분명해진다. 모든 천사들보다도 더 높이, 가장 드높여지신 분에게 해당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혹시 작가가 "천사에겐 적용이 안 돼도 성도에겐 해당된다"고 주장한다면, 어느 성도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며, 또 어느 성도에게 시 110'1 말씀을 적용한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이재왕 형제인가?
그 다음으로 이 성구가 또 다시 인용된 히브리서 5'5을 보면, 이 구절의 앞뒤 문맥을 봐도 분명히 멜키쩨뎈(멜기세덱)을 승계한 하늘 대사제(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만 적용하고 있다.
이상 여러 구절에서 보듯, 시 2'7은 다만 메시아, 예수님께 관련하여서만 인용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성구-시 2'7-는 오로지 참 메시아이신 예수님께만 적용될 수 있는 구절이다. 어떤 성도든 누구이든 사람에게 적용해선 안 된다!
어느 성경학자도 필자의 이런 견해와 뜻을 달리 하는 사람들이 없다.
따라서 동생의 잘못된 노래 가사를 이런 명곡(?)으로 만든 작가에게 중대한 과오와 책임이 있다고 보여진다. 필자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작곡자가 이 노래를 만든 후 지난 수십 년간 단 한 번도 이 노래의 문제점을 파악하지 못(?) 했을 수 있었냐는 것이다. 원문 주해 등 성경신학까지 포함된 신학교의 모든 과목을 공부하면서까지 말이다. 이 노래 가사 타당성 여부에 의문을 품고 신학교 동료나 교수들에게 물어 본 적조차 없는가? 아니면 단지 이 노래의 대중성이 아까워 여태 함구하고 있었던 것인가?
물론, 찬송가는 맨날 선곡하고 검증하면서도, 이 노래를 비롯한 수많은 대중성가와 성가 등을 거의 전혀 분별/검증하지 않아온 한국 교계 기관이나 음악인들, 지도자들, 필자를 비롯한 비평가들의 잘못도 전혀 없다고 할 수도 없겠지만 말이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노래 '너는 내 아들이라'를 만들어 불러왔을 뿐더러 여전히 아무 생각 없이(? 무시하고?) 계속 교계에 보급하고 있는 작가에게 묻는다:
시 2'7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한 작시자, 이재왕 형제는 죽었다가 되살아났는가? 다뷔드가 이재왕 형제에게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이재왕 형제가 하늘 대사제인가, 기름부음 받은 메시아인가?
"무슨 뚱딴지 같은 물음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성경을 통틀어 시 2'7을 적용할 수 있는 대상은 메시아/크리스토님이신 예수님 한 분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 노래처럼 시 2'7을 교인/성도 아무한데나 적용할 수 있다면, 이단 교주들도 얼마든지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다는 얘기가 돼 버린다!
이 노래 가사의 심각성이 그 정도로 크다는 것이다. 작곡가만도 수 천 번 불렀고 군대에서 준 군가 정도로 되었다니 그 잘못된 영향이 얼마나 클 것이며, 그밖에도 수많은 다른 싱어들이 불러왔고 현재도 부르고 있으니, 부르는 그들이나 듣는 이들이 얼마나 혼동을 겪고 있겠는가를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노래를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라고 단언한 이 목사의 주장도 애당초 삼갔어야 할 표현이다. 성령께서 손수 쓰신 성경에서 메시아에게만 해당되는 그 구절을 잘못 적용한 이런 노래 가사를 그 분의 메시지로 보내실 리가 있겠는가?
이은수 목사에게 촉구한다:
이 노래가 지금 대중화됐다고 해서 그냥 방치하고 놔 둘 게 아니라, 이 가사가 교계와 성도들이 (오직 메시아에게만 해당되는) 시 2'7 말씀을 "내게도 적용되는 구절"로 알 정도로 엄청난 혼동을 자아내고 있는 상황을 지금이라도 깨닫고, 문제의 부분을 당장 고치거나 보급을 중지하기 바란다.
그러지 않는다면, 이은수 목사는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알든 모르든, 작시한 이재왕 형제나 이를 부르고 듣는 성도들을 여전히 계속 (왕인 다뷔드조차도 감히 넘보지 않았던) 메시아의 위치에 올려놓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만약 하늘나라로 이사 간 동생이, 사후에 형이 이 잘못된 가사에다 곡을 붙여 보급해온 사실을 알고 있다면, 거기서 두고 두고 마음 아파 하며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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