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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음악

성가대, 지탱할 가치 있나?




성가대, 지탱할 가치 있나? 

-성가대 존폐론과 자질론



필자는 성가대에 관하여 티엘티(TLT) 블로그에 약간의 글을 쓰곤 해 왔다. [본래 한국 천주교 용어인 '성가대'라는 호칭 자체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어 왔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등장한 성가대의 호칭은 단순히 레빝(레위) 가수들 또는 '노래하는 레빝들'(Levite Singers)이었다. 필자도 '찬양대'라는 용어를 선호하지만, '찬양팀'과 혼동될 수도 있고 해서 여기서는 편의상 성가대로 통일한다.] 지금까지는 주로 음악적/실용적/예술적 면에서 써 왔는데, 앞으로는 보다 실질적인 면도 다루어 보고 싶다. 사실 필자는 전자뿐 아니라 후자 방면에서도 전에 수많은 강의를 해 왔으나 티엘티 글로 올린 적은 없었다. 



근래 성가대원들의 자질 문제에 관한 논란이 일 때가 잦다. 크고 작은 교회에 공통된 문제일 것이다. 요즈음 한국 교회 성가대의 비교적 젊은 나이층 대원들 가운데 훈련이 잘 되지 않은 듯한 사람들이 많다는 객관적인 평가이다. 겉으로는 성가대가 멀쩡해 보이는데, 그런 대원들이 내부적으로 숨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가 수시로 드러내곤 한다. 

단적인 사례를 든다면, 대원들 사이의 스캔들 문제로 성가대가 통째 폐지되어 버리는 예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일부 대원들이 스캔들을 일으킨다 하여 성가대 전체를 폐지한다는 것은 신본주의적이 아니라 인본주의적인 해결 방식이다. 평소 이제나저제나 "치워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 오다 "마침 잘 됐다. 요 기회에.."라고 단행해 버린 듯한 인상이 더 크다. 

생각해 보면, 결국 하나님이 찬양 받으실 기회가 그만큼 더 사라진 셈이다! 특히 창조주님이 내신 고유한 음역인 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 등 다양한 성부로 부를 수 있는 찬양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성가대 존폐론


여기 저기 평소 아는 교회에서 어느 사이엔가 성가대가 "사라졌다"는 소문이 들려오곤 한다. 성가대 운영상 또는 내부에서 모종의 문제점이 발견되어 새해 연초에 또는 어느 날 돌연 폐지되어 버린 것이다. 마치 '폐기 처리'처럼 들리는 이런 처사의 동기를 알아 보면, 시간적으로 교회내 다른 기관/부서와 서로 맞지 않아 인적 자원이 '활성화' 되지 않는다든가, 대원들이나 지원자의 숫자가 적어 유지하기 힘들다든가, 성악적 또는 음악적 재능과 자질을 지닌 사람이 너무 제한되어 있든지, 대원들 사이에 마찰 또는 스캔들이 있든지 하는 경우들이다. 


그런데 정작 그보다 더 주된 이유들이 더 있다. 

가장 먼저는, 현대에 새로 등장한 찬양경배팀 또는 '워싶팀'의 존재와 실용성 때문이고, 상대적으로 성가대를 낡고 지나간 세대의 "장식적 유물"로 보는 역사 감각(* 찬양팀은 어떤 경우에도 장식적일 리가 없는가?), 성가대는 비교적 고전적이고 경배찬양은 현대적이라는 잠재적인 생각*(사실 그렇지 않다. 수많은 경배찬양곡들이 음악의 성격상 고전적일 수 있고, 반대로 성가대 합창곡 다수가 현대적일 수 있다), 그리고 성가대의 긴 연습시간으로 인한 수십 명 대원들이라는 인적 자원의 '남용' 또는 '비효율성'과.. 그와 반대급부적으로 중시되는 각종 부서/소그뤂 등의 모임이나 봉사활동 등의 더 큰 "중요성", 지휘자/반주자/독창자 사역비(일명 '사례비'/봉급) 지급으로 인한 재정적 부담감 등 때문에 급기야 "성가대 불요론(不要論)" 같은 것이 대두되어 왔기 때문이다. 


좀 더 깊은 내적 원인이 있다면, 목회자 또는 지도자들 자신의 성경관, 사관(史觀) 내지 교회사관, 경배학(예배학)/교회음악관/목회학, 그밖에 교회행정과 인적인 다이내믹스 등에 관한 내적 의식의 문제일 수 있다. 예컨대 성가대 대원 간의 대인 갈등이나 스캔들에 대한 장로 등 교인들의 견해에 좌우된 목회자의 목회철학이나 행정방침에 의해 성가대 존폐 여부가 결정되는 수도 있다. 



교회음악 목회 및 도움 사역을 오래 해 온 필자도 이 문제에 관하여 깊은 생각과 고민을 많이 해 왔다. 특히 성경을 묵상해 볼 때, 유독 구약에 나타난 성전시대와 나중의 천주교회사 속에만 성가대가 등장하고, 신약 성경이나 교회 개혁사 직후에는 관련 언급이 없다는 점을 눈여겨 보곤 했다. 

다시 말하면, 다뷔드 당시 정립된 성막 제사 때와 슐로모 성전 경배, 바벨론 포로시대 후 제2성전(일명 제룹바벨 성전) 재건 전후 레빝들의 성악/기악 연주가 이어지다가 헬라(그리스)/로마 지배시대인 소위 중간기 이후에는 아예 성가대에 관한 언질이 사라지다시피 했다는 점이다. 신약에는 주로 회중이 화답하는 찬양 이외에 달리 음악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다. 


그러던 중 카톨맄 교회의 등장과 함께 고대 레빝 음악인 제도와 유사한 성가대 제도가 부활한다. 개혁 시대 초기엔 성가대나 기악 등이 거의 단죄를 받다가 점차 천주교 성가대와 방불한 찬양대가 신교권 안에도 등장하기 시작하여 교회음악과 이를 아우르는 '예배학' 범주가 함께 발달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러나 가장 현대에 발달하게 된 CCM(현대교회음악 또는 현대 기독교음악)과 함께 '찬양경배송(Praise and Worship Music)이라는 장르가 생겨 젊은이들을 주축으로 하는 찬양경배팀/워슆팀('찬양팀', '찬양단', 찬양선교단 등 다양한 명칭들이 있다)이라는 새로운 흐름이 교회음악의 주를 이루게 되면서 그 간소함과 실용성 때문에 전체적으로 성가대가 급속히 약화되어 왔다. 수많은 교회에서 이제 성가대는 "미운 오리새끼" 정도의 취급을 받고 있다. 또 (한국) 카톨맄교가 중세 이래로 '성가대'라는 용어와 함께 회중과 동떨어진 귀족적인 합창음악을 중시해 왔기 때문에, 신교에는 대신 찬양경배팀이 더 걸맞다는 사고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런데 사실 성가대 존폐론은 주로 목회자의 교회사관 및 목회/행정 철학, 그리고 교회음악관과 예배학적 사고에 의하여 크게 좌우된다. 쉽게 말하면, 목회자가 성가대를 유지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으면 그나마 유지되는 것이고, 목회자 마음에 딱히 성가대가 필요 없고 찬양경배팀으로 족하다 싶으면 성가대 폐지도 불사하게 된다. 특히 목회자가 다성부 합창음악에 대한 교양과 상식, 깊은 이해가 결여된 경우 그만큼 성가대 폐지 결단이 쉬워지게 된다. 



성가대의 불필요성?


그렇다면, 사라졌다가 생겼다가 하는 이런 성경적/역사적 흐름이 필연적으로 성가대 존재의 불필요성을 대두시켜 왔는가? 필자는 "아니다"고 답하련다. 그 이유 역시 몇 가지가 있다.



첫째로, 성가대가 기본적으로 갖춘 합창이라는 음악 연주 형태 특히 혼성 4부 합창은 하나님이 내신 남녀의 다양한 음역의 음악적 목소리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가능태(可能態)이다. 

이미 어린이들부터가, 비록 제한되긴 하나 비교적 다양한 음역을 갖고 최상성부 곧 가장 높은 음역인 소프라노, 다음으로 높은 음역인 제2(메조)소프라노, 알토 (이상을 흔히 SSA 또는 동성3부라고 한다) 등 다양한 성부로 노래할 수 있다. 여성들도 음역이 다양하여 소프라노/제2소프라노/알토/제2알토(콘트랄토) 등 최다 4성부의 합창이 가능하다. 물론 남성 합창 역시 그러하다. 남성의 제1, 2테너, 제1, 2 베이스 등의 성부 배치가 가능하며(*이 경우 2개씩의 상하 성부들 사이의 공간이 되도록 서로 넓어야 화려해진다). 

그밖에도 전통적인 성공회나 천주교의 성당 성가대 다수에서 소년들이 소프라노를, 카운터 테너가 알토를 대신해 왔다. 물론 혼성 6부, 8부 등도 가능하지만 사용도가 적다. 


그래서 위의 모두를 종합하고 조화시킨 연주 형태가 혼성 4부 합창 및 그 반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합창과 건반악 또는 현/관악 앙상블 등 클래싴 기악이 함께 협연할 수 있는 형태는 가장 고차원적이다. 간추리면, 창조주님이 내신 다양한 소리와 진동수의 종합/조화에 따른 배음(倍音), 다양한 음역, 화음 및 화성 등을 최대한 활용하고 조화시킬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연주 형태가 혼성 합창이고 성가대라는 것이다. 물론 어린이 성가대와 여성합창, 남성합창 등을 별도로 추가하여 더 조화시킨다면 정말 더 바랄 바가 없을 것이다. 물론 그만큼 자원과 규모, 음악적 소양이 따라주어야 하는 경우이다. 


근래는 서양음악이 먼저 발달했던 서구의 교회들부터가 전반적으로 쇠락해 가면서 일부 중대형교회를 제외하고는 점차 소형 교회가 절대 다수를 차지해 가다 보니, 혼성 4부 합창도 혼성 3부 또는 2부 등 소규모로 줄여 가고, 합창 편곡 또한 거기 맞게 축소돼 가는 현실이다. 반면 교회성장 운동 덕분에 규모가 커진 교회들은 성가대와 곁달린 기악을 더 발달시켜 가고 있다. 이런 현상들은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창조주님은 수평의 선으로 된 노랫가락만 내시지 않았다. 음의 수직 관계인 배음도 내시고, 음정과 화음도 내셨고, 어린이들의 천사 같은 소리도 내셨으며, 변성기 이후의 성숙한 음성, 태어날 때부터 옥타브 이상 차이가 나는 여성(女聲)과 남성(男聲)이라는 서로 다른 소리와 화려하거나 중후한 고/중/저음의 다양한 음역도 내셨다! 

심지어 하나님은 젖먹이와 어린이들의 찬양도 기뻐하신다. 그들의 찬양을 막으면 "돌들의 노래"로도 찬양받으실 수 있다. 사도 파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서로 다른 소리에 관한 음향론/음악론을 성령님께 감화 받은 계시로서 펼친 바 있다(코린토A서=고전 14'7~11). 


자, 그렇다면 하나님이 유독 찬양경배팀이 이끄는 온 회중의 일률화된 멜로디 제창만 좋아하시고 그것만으로 영광을 받으신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단지 (구약성경과 달리) 신약 성경에 합창이나 성가대에 관한 언질이 없어선가? 그렇다면 찬양경배팀에 관한 언질도 없다고 봐야 한다. 

하나님은 가락 중심의 찬양경배팀만 기뻐하신다는 유의 신념은 '짧은 생각'에 불과하며, 그런 발상은 교회의 무한대에 가까운 음악사역적 능력을 제한시키는 사고가 아닐 수 없다. 



둘째로, 성가대는 하늘 찬양대의 그림자이다! 그 반영체이다. 

천군 천사들은 단순한 멜로디가 아닌 화음으로 찬양을 한다고 필자는 믿는다. 그들이 연주하는 악기가 내는 소리만 해도 다양한 배음 관계 위에 구축되어 있다. 지상의 바이올린이나 기타 등 현악기와 나팔 등 관악기는 하늘나라 악기들의 그림자이다! 모든 현악기는 멜로디만 내지 않고 화음도 낸다. 하늘나라의 영적인 나팔들도 지상의 나팔과 달리 각각 단음만이 아닌 화음을 낼 수 있다고 필자는 상상한다. 

물론 하늘나라 음악은 지상의 어떤 화려하고 고상한 음악으로도 견줄 수 없이, 완전완벽하고 형용불가할 정도로 무한히 아름답고 황홀한 음악이라는 전제 아래서 하는 말이다. 



아무튼 화음은 가락과 함께 창조주 하나님이 내신 것이다. 그런데 찬양경배팀이 주도하는 찬양은 회중의 제창을 이끈다. 개혁가들이 강조했듯 회중이 참여하는 음악은 이상적인 것이지만, 그렇다고 성가대가 없는 형태가 초기교회 음악을 더 반영하는 것도 아니다. 


잠깐 딴 얘기로, 초기 교회의 주된 음악은 시와 찬미와 영적인 노래(옛 번역: 신령한 노래)였는데, 현대 교회 대다수는 그런 음악이 어떤 형태와 성격의 것인지조차 모르고 있다. 초기 교회가 모임 때 하던 영적 노래(원어=그리스어 ᾠδαῖς πνευματικαῖς 곧 '오다이스 프뉴마티카이스')는 문자 그대로 영언송(방언노래)으로 서로 화답하는 노래였기 때문이다.[ 참고: 코린토A서 14'15b. 파울은 여기서 분명히 이성으로 해독 가능한 노래와 영적인 노래 곧 영언송의 두 가지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현대 교회 대다수는 소위 '종식론'=cessationism이라는 인위적인 사상 아래 영언을 금하는 탓에 이 두 가지 노래의 구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분명히 그 누구보다 영언을 많이 하고 있던 파울(코A 14'18)이 말한 계시를 순전히 이성적으로 이해하여 영적인 노래를 '흑인영가' 등 어떤 정신적 차원의 노래로 정의하는 것은 알고 보면 영적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언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금지하거나 심지어 이단시하는 현대교회는 파울이 계시로 말하는 영적 노래에 관해 억측을 하는 대신 그냥 언급을 삼가야 정상일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함께 노래하는 것은 물론 이상적이지만, 찬양경배팀이 하는 노래가 성가대보다 더 영적이라는 판박이 식 이해는 올바른 생각이 아니다. 



이에 곁들일 말은, 성가대는 성도들과 동떨어져 '귀족화'되어선 안 되며, 자주 전체 회중과 함께 노래해야 이상적이라는 것이다. 그 방법을 예로 든다면, 특별 찬양이나 음악예배, 칸타타 연주회 등에 회중이 제창으로 참여하거나, 회중의 찬송가 제창에 성가대가 데스칸토/오블리가토(가락과 화성 위에 올린 별도의 대칭적/대위법적인 가락. 주로 높은 음역의 것이 많다)로 참여하거나, 성가대와 회중이 서로 교창(交唱)/교송(交誦) 형식으로 부르거나 하는 것 등이 있다. 그럼으로써 회중과 성가대는 일체감을 더 느낄 수 있다. 


또한 찬양경배팀과 성가대는 늘 피차 '경쟁관계'이거나 심지어 적대관계여야 할 필요가 전혀 없으며, 서로 마음을 열고 함께 화음으로 부르든지, 협연 또는 교창을 하든지, 전자가 멜로디를 부를 동안 성가대가 허밍으로 배경음악을 넣는다든지 데스칸트 등 대위법적인 가락을 넣는다든지 하여 서로 조화를 꾀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물론 함께 협력하고 연습할 시간이 필요하고 부담도 생길 수 있지만 피차 노력하면 시간을 절약할 방법도 생기고 친밀감까지 생길 수 있다. 

칸타타나 오라토리오도 성가대만 해야 한다는 법은 없고, 찬양경배팀이 동참할 방법도 얼마든지 구상할 수 있다. 관건은 그러려는 의지와 노력의 여부인 것이다. 음악의 장르가 좀 다르다고 해서 서로를 이질스럽게 차별화 한다면, 영원히 화합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하늘나라의 음악계도 그럴까?



셋째로, 성가대는 음악적 표현과 다이내믹스의 총화(總和)라고 해야 한다. 

찬양경배팀은 주로 소수의 싱어/아티스트들이 단성 가락을 중심으로 제창(유니슨)을 하면서 육성이 아닌 마이크로폰과 이퀄라이저 등 확성 시스템을 더 의존하기 때문에 솔리스트 그뤂처럼 개인 개인의 음색과 가창력이 더 중시되면서 상대적으로 표현과 다이내믹스가 위축되어 있기 쉬운, 단조로운 형태이다. 

반면 성가대는 기본적으로 합창이기 때문에 여러 성부의 음량을 작고 여리게는 ppp-pp-p-mp에서 크고 세게는 mf-f-ff-fff까지 함께 또는 부분/입체적으로 성량을 키우고 줄여가면서 셈여림을 조절하고, 수가 많아서 표현 조절의 폭도 그만큼 더 넓다. 

또한 더 많은 사람들이 같은 성부 안에서, 또 서로 다른 성부끼리 호흡을 맞춰야 하고 공동 조화의 협력을 하다 보니 인간 다이내믹스도 강화되기 마련이다.  

성가대를 폐지하면, 이런 것들을 거의 잃게 된다. 


하나님은 왜 구약 성전에서 무려 4000 명 되는 레빝 음악인들이 가문별로 조를 짜서 교대로 사역하게 다뷔드/슐로모 등을 감화하셨을까? 왜 슈무엘(사무엘)을 통해 그런 거대 음악사역제도의 싹을 키우게 하셨을까? 물론 그들의 노래는 합창보다 제창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지만, 현악 중심의 기악에서 화음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끼면서 연주했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늘나라에는 마이크로폰이나 앰프, 이퀄라이저..이런 전기/전자기기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거기 가서까지 마이크를 찾지 말기를 바란다. 인간이 만든 형태의 피아노도 없을 것이다. 휴거된 성도는 그곳에서 노래를 하되 영적인 육성으로 하기가 더 쉽다. 천사들과 함께. 피곤하지 않고 늘 생생한 소리 말이다. 



넷째로, 성가대는 역사적으로 교회음악의 주류를 이루어온 장르 지탱 수단이다.  

따라서 성가대를 폐지한다는 것은 교회음악의 기둥과 같은 중요한 부분을 잃는다는 뜻이다. 바꿔 말해, 경배찬양음악만으로 버틴다는 것은 뒤늦게 생긴 교회음악의 한 쪽 부분만을 붙들고 전부인 양 밀고 나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합창용이 아닌 가락 중심인 경배찬양음악의 특징은 전반적으로 남성적이기보다 여성적이고, 강박보다는 거의 늘 약박 중심이며, 16분음으로 점철된 까다롭고 복잡한 음열과 싱코페이션이 넘쳐 일반 회중이 따라하기가 곤혹스럽다. 또 화성학적으로는 센티멘털한 감정을 부추기기 쉬운 단3화음이나 후(後)해결성 서스테인드 불협화음(sus)을 자주 쓰는데, 그러다 보면 너무 정서에 호소하게 되고, 재즈화성으로 연주하다 보니 때로는 정상 해결 되지 않은 코드로 한동안 일관할 경우도 없지 않다. 가사도 때로는 성경적인 것이 없지는 않아도 전반적으로 개인정서를 유난히 표출한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지/정/의 가운데 단연코 정에 치우친다. 


성가대의 합창 음악은 대체로 여성적이기보다 남성적일 경우가 많고, 강박과 약박 중심의 곡이 고루 분포되어 있고, 화성진행이 정격적이고 분명하며, 정서에 치우치기보다는 지/정/의에 고루 호소하는 가사 내용들이 더 많다. 무엇보다도 혼성 4부이기 때문에 소리가 조화롭게 종합된 중후한 안정감과 입체감도 있으며 특히 바로크 기(期) 합창곡처럼 고도로 대위법적인 다성부(polyphonic) 곡을 연주할 경우*핸델의 오라토리오중 ) 그 장려(莊麗)함은 필설로 이루 표현키 어렵다. 


그러나 물론 경배찬양 음악의 장점도 많다는 것은 말할 나위 없겠다. 가락 중심이어서 간편하고 연습도 성가대만큼 장시간이 소요되지 않으며(?) 지휘자가 따로 필요 없다. 서정적/정서적인 내용의 가사가 많고 늘 대중과 함께 노래하기에 대중에 대한 호소력도 더 강한 편이다. 하지만 평소 키보드나 일렠/베이스 기타, 드럼 키트 등 다양한 현대적 악기를 소화할 일꾼과 연습이 늘 필요하다. 반면 성가대는 반주자 한 명만으로 족한 경우가 더 많다.   

성가대는 대체로 인원을 많이 기용한다는 점에서 중소형 교회의 부담이 되고, "미운 털"이 박히기 쉽다. 


성가대 합창은 또 여유가 있을 경우 (그랜드)피아노 외에도 (파이프/전기)오르간,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 등 클래식 기악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면서 협연하게 되는 장르이다. 


따라서 성가대를 폐지하면 이런 것을 다 상실하게 됨을 의미한다. 

교회가 너무 인적 자원이 부족하거나 클래싴을 각별히 혐오하는 성향이나 상황이 아니라면 이런 것을 굳이 마다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필자의 사적인 주견으로는 하늘나라 음악이 오늘날의 경배찬양에 쓰이는 전자 키보드-전기 기타, 베이스키타, 드럼킽 등의 기악 바디보다는 클래싴 기악에 더 가까울 것으로 생각된다.    


다섯 째로, 전통적인 합창 성가대를 폐지한다는 것은 해외에서 훈련받고 돌아온 클래싴 음악인들을 수용하여 합창단과 악단 등 고전적 앙상블을 구성하는 도시가 급증하는 등 세속 클래싴 음악이 점점 발달하여 전성기를 이루어 가고 있는 한국의 전반적인 현실에 역행함을 뜻한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클래싴 음악인들을 교회가 폭넓게 수용하지 못하면, 그들은 자연히 세속음악에 시종 천착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뭘 뜻하겠는가?

과거엔 중세 때 교회음악이 서구음악을 지배하던 시절에 이어 개혁기와 겹치던 바로크기 때만 해도 교회음악의 발달상이 세속음악을 압도하는 듯 했으나, 그후 고전기-낭만주의기-인상주의기-현대주의기를 거치는 동안 교회음악은 상대적으로 약화돼 온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하늘나라는 천사들의 교향악이 늘 메아리치고 넘치건만, 왜 우리네 교회는 신앙적인 교향곡 따위는 훨훨 연주하지 못하는가? 수준이 너무 낮아서인가? 뭔가 아쉽다. 

 

더구나 특히 고전기 이후의 클래싴 세속 음악 발달사의 거울과도 같이 한국의 경제력 제고로 인한 클래싴 음악의 고도의 발달에 반비례해 교회음악이 약화되는 성향이 우려되기도 한다.  

단지 교회의 실용성을 추구하는 관계로 한국의 전반적인 클래싴 발전 경향을 도외시할 것인가? 공동체/집단인 교회가 날로 늘어나는 세속 클래싴 음악인들을 전적으로 외면할 텐가 ? 그래도 되는가, 아니면 그래야 하는가? 그들을 교회로도 흡수해야 교회 합창 음악이나 기악이 더 발전하지 않을까? 발전하지 않아도 상관 없는가? 세속 음악인들 가운데 크리스천들은 그대로 교회가 임용할 수 있지만, 비신자라도 전도 차원에서 교회가 수용할 수는 없는가? 



여하간에 하늘나라 천군천사 찬양대라는 엄연한 실체의 '거울' 내지 그림자 격인 지상의 성가대가 "불필요하다"는 존폐론은 짧은 생각 탓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그렇다면 신약상의 교회에 성가대가 없다는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신약 초기교회는 갓 태어난 교회이므로 이렇다 할 교회당도 없고 거기 성가대가 없었다는 사실만으로 성가대 불요론을 입증한 것은 아니다. 물론 신약 초기 교회의 음악은 주로 가락 중심이었겠지만 시대가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화음도 생기고 화성도 활성화되었다. 

아니 시와 찬미, 영적인 노래로 서로 화답한다는 자체가 배음/화음/화성/대위법 등의 자연적 발생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성경이 입증해 주는 이러한 성가대의 존재론에 대한 목회자를 비롯한 지도자와 사역자들의 성경관과 인식이다. 

성가대 주위에서 느끼는 다양한 문제들은 기도하는 가운데 해결할 길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성가대가 문제가 있다 하여 

 


성가대원의 자질


성가대 대원 명단은 대체로 연초에 당회가 결정하여 당회장인 목회자가 임명/발표하는 것이 교회헌법상으로 규정되어 있거나 또는 상례이거나 관례화되어 있다. 또 연중 수시로, 음악적 재능이 있고 신앙적/영적인 자질로도 적격인 대원이 (당회의 인허와 이해 아래) 성가대장 및 지휘자의 선택과 재량으로 임의 추가되기도 한다. 


요즘은 성가대원 및 충당인원, 지원자 등의 '(교회간) 수평이동'이 많다 보니 성가대 임명 및 보충 규준이 과거보다 많이 느슨해진 느낌이다. 또 자질 부족으로 한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킨 다음 딴 교회에 옮겨가서 거기서도 쉽게 성가대원으로 "재정착"한 뒤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또 다시 같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성가대원은 단지 노래를 잘 한다고 해서 무조건 세울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살아계시는, 실존하시는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을 힘입어 그 분의 대속을 통하여 속죄받고 매일 용서 받아 크리스토(그리스도)님의 의의 옷을 입고 서서, 오직 그 분의 이름과 꼭 필요한(!) 믿음으로 찬양함으로써 자신이나 어느 누구 인간이 아니라 오직 그 분께 영광을 돌린다는 기본 신앙이 있어야 하고, 이러한 신앙과 영적인 자질이 부족하면 그냥 "잘라"버릴 게 아니라 적절한 훈련과정을 통하여 그만큼 길러주어야 한다. 



그 다음으로, 성가대는 온 성도의 회중을 대표하는 존재이므로 영적인 성결은 물론, 도덕윤리적 차원의 순결이 요구된다. 그런데 성가대 대부분이 기본적으로 혼성(混聲)이고 늘 남녀가 함께 어울리다 보니 '이성간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 내지 위험성이 상존한다. 더구나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지금 추세대로 나간다면, 먼 미래엔 차세대 성가대 안의 '동성간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도 없다. 있어선 안 될 일인데도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필자가 존중하는 어느 목회자의 말이 생각난다. 교회에서 혹 두 이성끼리 친한 경우라도 서로 독점하는 인상을 주면, 다른 교인들과의 관계가 어색해지거나 아예 단절되어 버린다고 말했다. 그런 경우를 많이 봤다는 것이다. 남녀 사이는 대개 본인들 밖엔 아무도 모르는 사안이므로 성경을 삶에 적용하기를 바랄 뿐 누가 감히 뭐라고 하기가 어렵지만, 드러나게 서로를 독점할 경우 여실히 표가 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추문이 발달하게 된다.  

성가대원끼리의 추문은 성가대가 교인들 앞에 두드러지게 활동하는 사역인 만큼 드러나게 되면 그만큼 타격도 커지게 된다. 


그러나 일부 대원들의 추문 때문에 성가대를 폐지하는 것은 적어도 긍정적이기보다 부정적인 처단이라는 점에서 성경적이지 못하다.  



하나님은 "예호봐 메카데쉬" 즉 성결케 하시는 주님이시다. 그 분은 늘 신자의 성결을 요구하시므로 더구나 회중의 찬양을 대표하는 영적 레빝 성가대도 성결해야 할 대상으로서 예외가 아니다. 늘 형식적이 아닌 진정한 회개와 간구를 통하여 속죄와 용서를 구해야 한다. 성가대원들은 소리와 함께 얼굴을 내미는 존재이므로 웃는 얼굴과 표정으로 속의 죄악과 내적인 더러움을 감추면서 자칫 외식/가식을 하기 쉽다. 물론 그것은 위선이다.  

그러므로 성가대 찬양 전에 참된 회개와 정화는 불가결의 요소이다. 주님은, 겉만 하얀 회를 발라 포장하고 속은 썩은 송장 같은 유대교 종교인들과 지도자, 파리세들의 이중적인 모습과 가증한 위선을 가장 싫어하시고 혐오하셨다! 

성가대뿐 아니라 우리 누구나 위선하기 쉽지만 그럼으로써 주님께 자주 책망과 징계를 받게 되는 습관을 면해야 한다. 한 주 내내 언행심사를 통틀어 온갖 죄를 짓고서도 상투적으로 입에 발린 형식적인 '회개 쇼'만 하거나,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얼굴과 표정/제스처만으로 천연덕스럽게 미소 지으며 노래하는, 그런 '불도장'(火印) 찍힌 양심과 겉모습만의 찬양이 되는 화를 자초하지 말아야 한다. 



성가대는 무엇보다도 하나님만 받으셔야 하는 그 분의 고유 영역물(領域物)인 영광을 마땅히 그 분께만 돌려드리고, 결코 일부라도 우리가 가로채지 말아야 한다. 늘 회중 앞에 나서기 마련인 지휘자/반주자/독창자 그리고 대원 개인에게 영광이 돌아가선 안 된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외친다: 


   "오 예호봐님, 우리가 아닌 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소서! 

    님의 사랑! 님의 진리 때문입니다."(시 115'1 사역) 


무슨 뜻인가? 우리가 자칫 실족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챌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알고 보면, 매우 위험한 상황이다. 헤로드 왕을 기억하는가? *(헤로드 아그리파 왕). 그는 마땅히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가로챘다가 천사의 형 집행으로 벌레 먹어 죽었다(행전 12'13). *(아그리파는 통치 7년차인 서기 44년, 나이 53세로 죽었다.) 두렵지 않은가?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도중 연주자나 기타 인사에게 박수갈채를 하는 것도 합당하지 않다고 본다. 그것은 일부라도 영예를 사람에게 돌리는 행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손뼉을 치기 전 다시 한 번 곰곰히 생각해 볼 일이다.  

그렇게 '예배 중 박수'를 하다 보면, 누구나 뭔가를 잘 했을 때 으레 박수를 기대하기가 쉽게 될 것이며, 그것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위험한 처경에 빠져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과시 틀리지 않을 것이다. 시 115'1 말씀이 오늘날도 늘 우리의 기도와 잣대가 되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다름 아닌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인하여 그 분에게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 우리의 사랑과 진리는 땅에서는 상찬거리가 못 된다. 땅에서 상찬을 받다간 자칫 하늘나라에 그나마 간신히 약간이나마 남아있던(?) 우리의 낮은 상급의 '상아탑'이 무너지고 허물어져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잔소리지만, 성가대원들은 특별한 경우 외에는 지각을 결석을 해선 안 된다. 누구나 정시 출석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중대형교회에서는 인원에 여유가 있어 누가 잠시 빠져도 어렵지 않게 보충이 된다지만, 소형교회에서는 어느 누가 빠지거나 늦으면 딱한 어려움을 겪거나 특정 파트가 다 함께 연습할 수 있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경우까지 발생한다. 그런데도 아랑곳없이 상투적으로 지각/결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 하나쯤이야 오늘 하루 뭐.."란 식으로. 그렇게 자꾸만 습관성 지각/결석을 하다보면 나중엔 일종의 면역 내지 중독에 걸리고 마침내 양심까지 무뎌져 버린다. 아뿔싸, 성가대원을 하다가 불도장 찍힌 양심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그런데 중대형교회에서 대원들을 율법적으로 지나치게 엄격히 관리하는 경우도 있는데, 몇 번 지각이나 결석을 한다고 해서 성가대 임원이 그 대원을 일방 해임해 버리면, 교회답지 못한 해결이다. 대원이 잘 해량하고 견뎌내면 모르되, 그렇지 못할 경우 자칫 상처 받아 교회를 떠나버리거나 두고두고 원망/증오하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대원 개인의 임명/해임 건은 당회의 결의와 허가를 받아 정당하게 처리해야 바람직하다. 되도록 억울하다는 마음을 먹지 않게 하는 쪽이 더 낫다는 말이기도 하다. 해임은 문제 대원을 아무리 권고하고 여러 번 경고를 해도 개전의 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거나 정말 고치기 어려운 상황일 때 하는 마지막 수단이어야 한다. 그것도 잘 다독이고 달래면서 개전의 정이 보이면 나중 재임용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해야지 "칼로 무우 자르듯" 잘라버리면 교회적인 처리 방식이 못 된다.  


대원들도 물론이지만, 지휘자나 반주자, 성가대 임원 등은 모든 면에서 모범이어야 마땅할 것이다. 지휘자는 되도록 성가대 행정에 깊이 관여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사료된다. 서로 적극 협력은 하되, 계획이나 실무는 임원들이 하도록 일임하는 것이 더 낫다. 지휘자가 행정까지 만사를 일일이 두루 참견하다간 모양새도 좋지 않을 뿐더러 '더블 듀티(이중 책임)' 탓에 "빼도 박도 못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이제 끝으로 성가대와 다른 부서/활동과의 시간적 상충 문제는 어떻게 하느냐는 물음을 다뤄 본다. 특히 친교 시간에 주방 봉사요원으로 일하는 경우가 잦다. 


다른 부서/활동과의 갈등 문제


내가 아는 N 도시의 중대형교회인 B모 교회는 성가대원수가 비교적 많아서도 별로 큰 문제가 없으나, 몇 부 예배를 드리기에 예배 사이에 연습을 할 수 있다. 그 교회는 오전 11시에 시작한 예배가 끝난 뒤 일단 전체 교우들과 함께 친교식사를 한 후 연습하는 경우였는데, 성가대원들에게는 따로 빨리 식사를 제공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특별한 배려를 하고 있었다. 이 시스템을 맡은 사람들 자신이 바로 성가대원일 경우가 잦다. 

사랑의 심정으로 머리를 쓰면, 성가대 인력자원 활용 부족난을 만회할 수가 있다. 더 작은 교회는 어떡할까? 주마다 교대로 한 명씩 봉사요원으로 일하게 하면 큰 불만 없이 할 수 있을 터이다.


다른 중요한 부서나 이벤트와 시간이 중첩되는 경우는 서로 잘 타협을 하여 그 부서를 위해 성가대가 그 다음 주에만 하루 평일에 연습한다든지, 그 날 오후 연습을 생략하고 다른 주일에 보충한다든지, 해당 부서가 더 중요해서 연습에 불참한 대원만을 데리고 따로 연습 시간을 갖는다든지 하는 아량을 너그럽게 베풀 수 있다. 모두 본 필자의 체험에서 나온 제언이다. 관건은 사랑과 관용이다.  


성가대와 모 부서가 서로 어느 쪽이 더 중요하냐 따위의 우월 논쟁을 펼칠 필요가 없다. 서로 먼저 양보하면 된다. 이런 갈등을 해소하지 못해 '성가대 폐지론'이 나와선 안 된다! 졸렬한 처사이다. 


친교 시간이 부족한 점


대학시절 나의 교회음악학 은사는 성가대 지휘를 하시던 교회에서 일단 예배가 끝나기 무섭게 교회 입구문에 서서 교인이나 외부 방문객들과 잠시 만남과 담소의 시간을 갖다가 정해진(또는 적절한?) 시간에 이내 돌아와 성가대 연습에 임하곤 하셨다. 한 마디로 산뜻했다. 현재 필자가 사역하는 교회에서도 반주자나 성가대 임원 등이 예배 후 잠깐 입구로 가서 친교를 나누고 돌아오기도 한다. 재량인 것이다. 문제는 친교하러 갔던 대원이 (이성 친구라도 만났는지) 성가대 연습을 무시하고 아예 방문객과 같이 나가버리는 것 등의 '증발사태'가 발생하는 경우다. 비유컨대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 포기 행위와도 같다. 인격적인 태도가 아니다. 


결론으로서, 여하튼 부탁이다: 

혼성 4부 말고도 간소화시킨 혼성 3부, 하다 못해 동성 2, 3, 4부 합창도 가능하므로, 어떤 교회라도 제발 성가대 폐지만은 하지 말아주기를 바란다!  


성가대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거룩한 사역의 일부이며, 대원들은 그 사역자들이다. 사역자들은 늘 경건하게 근신해야 옳다. 요즘의 성가대원들 특히 중소 교회의 성가대원들은 자신이 자칫 잘못하다가는 전체 성가대의 존폐 여부가 판가름 날 만큼, 책임이 크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각별히 '몸조심'을 해야 좋으리라 생각된다. 그렇다고 겁을 먹거나 부담감을 갖고 사역할 것이 아니라 늘 믿음/소망/사랑을 품고 각각 겸손히 자기 자리에 임해야 할 것이다. 


성가대원들을 포함한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그 분께 헌신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늘 그 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오늘도 말이다. 성가대를 위해 간구할지언정 '폐지'를 주장하지 말기를..



필자 소개: TLT 블로거. 음악목회자/지휘자/작곡·편곡가/합창클리니션/음악비평가/언론인/웹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