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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의 연구묵상/캪튼's 코너

비판 없는 교계?


어느 교계 모임에서의 느낌입니다.

짧은 연설을 한 어느 인사는 교계 미디어는 비판이 없어야 좋다고 강조하더군요. 
물론, 언뜻 틀린 말은 아닙니다. 부정적이기보다는 긍정적인 것이 더 낫겠지요.

그런데 그 말만 갖고는 뭔가 빠진 듯한 느낌입니다.

비판이 없어야 좋다고 해서, 비평이 아예 없어야 할까요?
언론의 기능이 좋다 좋다 좋다로 일관돼야 좋은 것입니까?
좋다 좋다 좋다,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로 일관하는 언론은 공기능으로서 제 구실을 못 하지요. 그래서는 사회가 썩기 마련입니다.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강간살인 전과범 김길태를 놓고 잘 한다 잘 한다 잘 한다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뭔 팬 클럽인가도 있고요. 정말 놀랐습니다. 사회가 이럴 수가 있나 하고.
그들은 김길태를 비판하긴커녕 마냥 긍정적으로 대해 줍니다요.

어떻게 김길태 따위와 교계를 비교하냐고 할지 모릅니다.
왜..비교 못합니까?

하나님은 우상숭배와 현대의 타락상을 영적 간음으로 보질 않나요?
오늘날 교계는 '강간' 당하듯, 타락한 영성들이 물밀 듯 침투해 들어오고 있는데..
이게 왜 영적 간음과 영적 성범죄가 아닐 수 있겠습니까?
순결을 앗기고 흐려지고 더럽혀지는데도 강간, 아니 더 나아가 통간이 아닌가요?

김길태는 마땅히 우리가 부정적으로 봐야 할 대상입니다.
긍정적인 유일한 요소라면,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그 영혼에 대한 온정 뿐이지요. 그것 빼 놓곤 다 비판 받아 마땅합니다.

교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교계를 향해 좋다 좋다 좋다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로 일관하니까, 명사들이 판 치고 성경과는 거리가 먼, 아니면 성경을 적당히 이용해서 나름 "주물럭거린" '영성'이란 걸 뿌리고 다닙니다. 미꾸라지처럼 교계 깊숙이 이리저리 침투하여 곳곳을 흐리고, 썩히고 다닙니다.

이게 왜 이렇습니까?
검증과 분별이 없기 떄문이지요.
오늘날 교계는 판단과 비판, 검증과 분별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아예 않는 시대가 됐습니다.
사실 비판이 너무 많아 잘 안되기 보다는, 비판 없어 안으로 곯아 썩어가기가 더 쉽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돼 가니까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지요.
교계라고 해서 다 참된 기독교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교계엔 분명히 알곡과 밀알도 있지만, 쭉정이와 가라지도 있다는 진실입니다.
후자들이 더 많기가 쉽지요.

예수님과 사도들은 분명히 교계나 사회를 긍정적으로 보지만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계 인사들처럼 비판을 전혀 하지 말고 긍정적으로만 봐야 옳은 것이라면,
침례/세례 요한이나 주님은 헤로드 왕을 경고하거나 비판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사제들이나 파리새(바리새인)들을 향해서도 않으셨을 터입니다.

사도 파울이 당대 교계를 긍정적으로만 봤다면, 아무 비평도 경고도 하지 않았을 터입니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은 무디어져 가고, 날카로운 것은 뭐든 싫어하며, 귀를 간질러 주고 보드랍게 긁어줄 말만 즐겨 듣습니다.

그러나 쇠가 쇠를 벼리듯, 참된 충언과 비평, 옳은 판단과 지적, 분별과 검증은 교계를 썩히지 않는 데 도움되며, 꼭 필요한 것들이지요.

이 점을 우리는 오판해선 안 됩니다.

좋은 말만 해 주는 친구는 아부성이 농후할 수 있지요.
그러나 잘못을 지적해 주고 바른 말을 해 주는 친구는 충심에서 그럴 것입니다.

비판을 위한 비판, 지나친 비판은 삼가야 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긍정시하기만을 바라는 교계나 사회의 현상은 썩어가는 징후입니다.

긍정과 부정, 양쪽의 균형을 맞춰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