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육신의 신비
김삼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성육신 교리는 엄청나고 위대한 진리이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임마누엘이시기-위하여 꼭 필요한 사건이었다. 성육신(成肉身, The Incarnation, 일명 '화육'/化肉)이라는 용어 자체는 성경에 없다. 그러나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그 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었고 은혜와 진리가 가득하였다"(요한복음서 1'14 사역)는 한 구절만으로도 충분히 그 개념이 잡힌다.
하지만 이 짧은 글로 엄청난 성육신의 신비를 다 해설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고대 신화에도 '신'이 간혹 일시적으로 인간으로 변신했다든지 변장했다든지 하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그들은 인간과 다름없는 탐욕의 화신들로, 주로 자기네 욕심을 채우기 위해 그랬을 뿐이다. 진정으로 또는 영구적으로 인간이 되기 원해서가 아니었다. 여하간에 그들은 참 신이 아니다. 신 흉내를 내는 초자연적 존재 곧 악령일 뿐이다. 세상 사람들이야 그들을 어떻게 떠받들든지 말이다.
반면 성경이 말하는 성육신 사건은 참 하나님이신 성자(聖子)님이 죄중에 고생하는 우리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신 나머지 몸소 구원하시려고 완전한 인간이 되어 오신 사건이다. 그러므로 온 우주와 지구촌 역사상 이런 사건은 오직 한 번 있었던 일이며, 그 어느 신화적 사건도 절대로 이에 비견될 수도, 버금갈 수도 없다!
성육신 진리는 신앙의 대상이지, 인본적인 해석 대상이 아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의 신화적 사건으로 해석하거나 이해하는 학자는 실로 불행한 사람이다. 알고 보면 성육신 사건은 우선 그 학자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하나님 예호봐(=여호와/야웨)님은 성육신 사건 이전에 인간이 되어 보신 적이 없었다. 다만 구약 시대 때 늘 보좌에 계시는 성부님을 대리하는 하나님의 형상(콜로세 1'15, 창세기 1'27)이신 성자님께서 인간의 눈에 뵈는 모습으로 에덴에 나타나, 아담 또는 아담/하와와 함께 거니신다든지, 에놐과 동행하신다든지, 두 천사와 함께 아브라함에게 몸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식사를 하신다든지 하신 적이 있다(창 3'8; 5'22~24; 18'1,2). 그밖에도 구약 때 그 분이 나타나신 적이 매우 잦았다. 그럴 수 있을 만큼 전능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몸소 인간이 되신 적은 과거에 없었다는 말이다.
그랬다가 하나님은 죄악에 빠져 고통 당하는 인간을 그냥 버려두실 수 없어, 몸소 인간이 되시기로 작정하셨다. 구원자로 오시게 된 것이다. 하나님 밖에는 구원자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1
물론 이것은 하나님이 만세 전에 이미 계획하신 일이었다가 때가 되매 이루신 일이었다(코린토A서=고전 1'7, 티모테B서=딤후 1'9).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다는 말은 이젠 더 신이 아니시라는 뜻이 아니다. 성자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이시다(시편 90'2)! 또한 처음과 나중, 알퐈와 오메가이시다(요계 2'8; 21'6; 22'13). 원래 성자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품에서 독생하신 분이셨다(요복 1'18). 피조물이 아니라는 뜻이다(참고: 콜로새서=골 1'15). 그 분은 또 태초에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 때 성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곧 로고스로서 창조 사역에 참여하셨다(요복 1'1~3, 요한A서=요일 1'1, 창1장 참조). 한편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과 권능으로서 참여하셨다(창 1'2).
그런데 에덴에서 그 으뜸가는 피조물인 사람과 동행하셨던 그 성자님은 사람이 죄를 짓자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내다보신 대로 앞으로 친히 사람이 되시어 인류의 구원자로 오시게 될 것을 새삼 절감하시고, 비록 사람이 받을 저주를 예언하셨으나, 그 대신 여인의 후예로 오셔서 싸탄을 짓밟으실 것도 예언하시고, 에덴의 짐승 한 마리(양)를 잡아 피를 흘리고, 죄의 수치감 속에서 떨며 초라한 무화과 나뭇잎으로 앞을 가린 채 구석에 숨은 첫 사람들에게 손수 가죽 옷을 지어 입혀 주셨다(창세기 3장 참조).
자, 바로 이 하나님이 사람 곧, 예수 크리스토의 모습을 입고 오신 사건이 성육신이다.
사도 요한이 말한 바 로고스 곧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개념은 유대인 헬라계 철학자 퓔로나 그리스 철학에서 온 사상이 아니다! 태초에 성부님의 입에서 나온 그 말씀으로 온 우주만물을 지으신 그 분이 몸소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우주나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예호봐 하나님만의 진리이고 계시이다. 그러므로 요한이 퓔로의 그리스 철학을 빌렸고 어쩌고 하는 발상 자체가 저급하고 어리석은 것이다. 제 아무리 고명한 신학자가 말했다고 해도 말이다. 그리스 철학은 죄다 신화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존중하는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 자신이 미동을 둔 동성애자였다는 유력한 설이 있다.
신이 완전한 사람이 되신 성육신은 그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사건이었다.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힌두교나 불교 또한 중세의 영지주의나 헤르메틱스, 현대의 뉴에이지 종교 따위에서는 사람이 윤회하면서 동물 등 다른 존재로 바뀔 수 있다는 환생(reincarnation) 설화를 믿지만, 그것은 신화이고 공상이지 결코 진리일 수가 없다. 그렇게 해서 '환생'된 존재는 모두 악령에 조종받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신이 사람이 될 수 있는가? 그야 전능하시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능하지 않으면 애당초 신일 수도 없다 2. 고대 신화 속의 그 어떤 신도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몸소 완전한 사람이 된 적이 없고, 그럴 수도 없었다. 다 거짓 신들이었기 때문이다 3. 미쯔라임 출국(출애굽) 당시 예호봐 하나님은 미쯔라임(아이귚트=이집트)의 모든 '신'들을 심판하셨다(참고: 미쯔라임출국기=출 12'12).
다시 말하지만, 성육신은 온 우주에 유일무이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예호봐 하나님이 유일하신 참 신이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4
성육신 사건에는 여러 가지 준비와 과정이 필요했다. 우선 성자님은 순수한 사람이 되시기 위해 하늘에서 누리고 계셨던 자신의 모든 신적인 영광과 전능한 권능을 하늘에 비우고 오셔야 했다(필리포서 2'5~8). 오직 '신분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위치와 이름을 유지하셨다. 그렇지 않다면, 그 분은 성령을 기름붓듯 충만히 받으실 필요가 없었다(루카복음서=눅 4'18, 행전 10'38). 메시아/크리스토 곧 기름부음 받은 분이셔야 할 필요성도 이 때문이다. 5
전능하신 하나님은 물론 스스로 직접 사람으로 변신하여 오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분은 철저히 온전한 인간이 되시려고 처녀의 몸을 빌어 태어나셨다(마태복음서 1'24. 참고: 예샤야후=이사야 7'14). 그 분의 영이시고 권능이신 성령으로 동정녀의 몸에 사람의 첫 생명으로 잉태되게 하신 것이다.
하늘에서의 이 비움 6 사건 역시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오직 하나님이신 성자님만이 가능했다. 인간이 제 아무리 비우고 비워 봐야 그 때뿐, 다시 채우기가 일쑤다. 사람이란 주일 아침에 비운 것을 오후에 다시 채우게 돼 버린다. 또 인간이 아무리 비우고 비워도 신적 경지에 이를 수 없다. 그런 발상 자체가 이단사설적인 것이고 악령적인 것이다. 그런 '경지'를 하나님이 제공하시지 않고 악령이 속여 제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경지'가 모두 악령들의 속임수에 불과하다.
반면 성자님은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받으시던 하늘에서의 그 높임과 영광을 비우셨다. 인자 곧 온전한 사람이 되시기 위해서였다. 인간으로서는 결코 있을 수 없고 할 수 없는 하나님만의 거룩한 결단이셨고, 지극한 겸허/낮추심이요 희생이었다(참고: 필리포서 2'8). 아버지께서는 독생하신 아들을 잠시 희생하시는 셈이었고, 아들로서는 성부님의 거룩한 구원 사역을 위해 자신을 바치시는 일이었다.
이러한 독생자님의 순종은 아버지 하나님께 무한한 기쁨이 되었다.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라는 아버지의 찬탄을 자아내었다(마르코스복음서=맑 1'11). 성부님은 또한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이렇게 선언하셨다: "너는 내 아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시 2'7. 참고: 행전 13'13' 히브리서 1'5).
그리하여..가장 높으시고 전능하신 성자님이 죄 많은 낮고 천한 사람-처녀의 몸 속에 성령으로 잉태되신 것이다.
성자님이 오시기 위해 필요했던 준비 과정 하나는 예언과 그 성취였다. 그 분은 아브라함의 후예들이 오래 고대해 온 구주-메시아로 오시기 위해 처음부터 성령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예언의 계시를 주셨다. 다가올 메시아의 도래/초림을 예언한 사람은 수많이 있지만, 대표적으로 에놐, 아브라함, 야콥, 요브(욥), 모쉐와 다뷔드(다윗) 등 시편 기자들, 대/소 예언서를 쓴 대언자들 등이 있다. 이들이 모두 한결같이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했으며, 심지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즉 임마누엘로서 오실 아기가 동정녀에게서 베틀레헴에 태어나실 것까지 정확하게 예언했다(예: 예샤야후=이 7'14→마태 1'23; 미카서 5'2→마 2'6).
말하자면 하나님은 스스로 오실 길을 사람들을 통해 예비해 놓으신 것이다. 실로 예호봐 이레-곧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시다(창 22'14)!
알고 보면, 사실 구약의 성막/성전을 비롯한 모든 '제사의 집' 역사는 다가올 메시아의 도래를 그림자로 알려 준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짜크를 제단에 바치려고 한 모리아 산은 정확하게 미래의 성전 자리였고, 나뭇가지에 뿔이 걸린 수양도 크리스토님의 희생을 상징했다(참고: 창 22'2→연대기B=역대하 3'1. 창 22'13). 모리아에 지어질 이 성전은 크리스토님의 몸의 그림자였던 것이다(요복 2'21)!
그러나 이런 것을 깨닫는 유대인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오직 이스라엘/유다의 "남은 무리" 즉 초기 교인들과 이방인들을 포함한 참 크리스천들만이 이 진리를 제대로 깨달아왔다 7.
아무튼 성자님이 성육신하여 오시기 전, 성령께서 사람을 감화하여 내리신 예언과 계시는 모두 낱낱이 성취되었다. 구약 성경에 담긴 모든 주요 내용이 그래서 신약 속에서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신약을 믿지 않고 무시한다. 그들은 정치욕과 물욕에 눈이 먼 나머지, 성경 예언대로의 메시아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예언의 말씀과 그대로의 성취를 믿는 사람은 복되다!
성자님이 성육신 하기 위해서는 죄와 상관 없이 오셔야 했다(히브리서 4'15' 요한A서=요일 3'5). 그래야 흠 없는 어린 양 8, 참 구주가 되실 수 있기 때문이다(페트로A서=벧전 1'19). 아담 이후 대대로 죄를 대물림한 인간 부친의 부정한 씨로써가 아니라 오직 남자와 전혀 상관없는 숫처녀의 몸에 성령의 권능으로 잉태되셔야만 했다. 이것이 말라키서 2:15(특히 개역한글 성경)가 암시해 주는 한 진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두 가지 이적이 이루어졌다: 첫째, 숫처녀의 태중에, 둘째로 남자의 씨 아닌 성령의 권능으로 잉태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성자님은 무죄무흠한 어린 양이 되실 수 있었다.
하나님의 성육신은 연약한 인간의 몸의 형태로서였다. 인류를 죄에서 구출하실 크리스토님께서는 '슈퍼맨'처럼 초인적이고 완벽하고 다부진 근육질의 성인으로 온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도 연약한 처녀에게서 힘 없고 초라한, 자칫 위험 앞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는, vulnerable한 어린아기로서 태어나셨다. 둘을 인간적으로 돌볼 수 있는 지원세력이라고는 처녀와 정혼을 한 청년 요셒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분의 원대하신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빈 틈 없는 만반의 준비를 해 오셨고, 아기와 어머니와 그 약혼남을 지키고 돌볼 천군 천사들을 대비시켜 놓으셨다. 심지어 먼 동방에서 현인(박사)들을 동원하여 메시아이자 아기 왕을 모시게 된 이 가난한 가정에 예물로써 선물을 주신 것이다.
싸탄은 처음부터 성육신을 방해해 왔었다. 창세기에 예언된 대로 그는 땅에 오실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발꿈치를 물어뜯을 태세를 하고 있다가, 드디어 탄생하시자 아기를 암살해 버리려고 동방박사를 이용하려다 천사의 경고로 실패하자, 간악한 헤로드 왕의 칼로 다른 무고한 수많은 아기들과 함께 죽이려 들었다(마태복음 2장 참조). 그의 훼방 행각은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 자라나신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 분이 30세쯤 성령의 권능을 받으신 뒤 광야에 나타나시자, 싸탄은 못 먹을 호박, 찔러나 본다고 자기 딴에는 최강의 무기인 강렬한 유혹으로 접근했다가 늘 말씀의 무기로 방어하신 그 분께 보기좋게 첫 판에 패했다(마 4'1~11).
그러나 그는 결국 이스카리옽 유다를 사로잡아 라삐를 배반하게 만드는 등, 성자님의 발뒤꿈치를 물 준비를 하나하나 착실히 해 나아갔다. 모든 제자들이 주님을 버리게 만들고 페트로까지 주님을 부인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낭패감을 느낀 유다를 자살하게 하여 지옥으로 보내기도 했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참 인간이 되실 뿐더러 대속을 위한 수난(受難)을 하려면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연약한 인간의 몸을 지니지 않는 신으로의 수난은 아무 의미가 없다. 신적인 권능으로써 수난한다면 어떻게 인간의 아픔을 느낄 수 있겠는가? 또한 그러기 위해 먼저 어릴 적부터 철저히 인간의 모든 어려움과 아픔과 유혹을 경험하고 견뎌내야 하셨다. 혹 그 아픔과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구원자로서의 실패를 뜻한다. 또한 인간이 지키기에 실패한 사실상 준수 불가능의 율법을 참 인간으로서 철저히 준수준행해야 했다(히브리서 5'9).
그러나 주님의 성육신은 아울러 부활과 승천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영원히 성육신되셨다! 지상에 계실 동안인 30여년만 '반짝변신'하신 게 아니었다. 비록 부활/승천하셨으나 영원한 어린양으로서 수난의 상흔을 간직하신 채 성도들과 모든 천사들의 기념및 기림을 받으며, 모든 성도와 함께 영원히 하늘나라에서 통치하실 것이다. 영원히 인간 겸 신으로서 살아계신다.
- 예수의 히브리명인 '예슈아'는 구원자라는 뜻으로, 하나님 밖에는 구원자가 없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참고: 예샤야후(이) 43'11, 호쉐아 13'4, [본문으로]
- 하나님의 전능성에 관한 수많은 성구가 있지만 대표적인 몇 성구만 소개한다: 창 17'1; 35'11, 예슈아(수) 22'22, 요한계시록 1'8b [본문으로]
- 슈무엘A서(삼상) 12'10, 시편 31'6; 40'4 참고. [본문으로]
- 예호봐 하나님의 신적인 유일무이성에 관하여는 다음 성구들을 참조하라: 슈무엘B서(삼하) 7'22, 연대기A(역대상) 17'20, 예샤야후(이사야) 44'6b; 45'5,21; 62'4. [본문으로]
- 바로 이 점을 수많은 신학자들이 깨닫지 못한다. [본문으로]
- 케노시스=emptying himself. 그리스어 동사 '케노오'에서 비롯했다. [본문으로]
- '남은 무리'(the Remnant) 사상은 구약 성경 후반 이하에 맥맥히 흐르고 있다. 예: 예샤야후(이) 10'20,21. 예렘 23'3, 50'20, 요계 12'17.. [본문으로]
- 참고: 민수기 6'1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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