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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교회력과 교회명절

'성탄절'의 슬픔 (김삼)


    누구나 이 아름다운 계절의 무드에 젖어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글에 대한 개인 견해차가 있을 수 있음을 인지합니다.]

로고스채플 개원 세미나 강의를 준비하면서 '성탄절' 전통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현재의 크리스마스가 결코 '성탄절'일 수 없는 사연을 정작 성육신 사건의 주인공이신 주님이 어떻게 보실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경제사정이나 날씨나 다 썰렁한 계절에 왜 이렇게 썰렁한 토핔을 다루냐고 할지 모를지만, 사실 주님도 고개를 갸우뚱하실 만한(?) 엉뚱한 날짜를 전통절기로 지키는 것은 더 썰렁하고 황당한 얘기가 아닐까요? 주님은, 아무 날이나 "골라 잡아 꽝" 식으로 그분의 탄신일로 지켜도 되실 그런 분입니까? "아니, 내 생일이 왜 그 날이야?" 물으시지 않겠습니까?

이번 세미나에서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교회들 특히 대형교회들이 진짜 성탄절도 아닌 매년 이 계절의 이벤트에 얼마나 많은 물력과 인력, 정신력을 쏟아 붓느냐고. 예수님 그분 보다는 진짜 성탄절도 아닌 크리스마스라는 카톨맄의 시즌 브랜드 네임과 특정일을 장식하는 데 몰두하면서 막대한 돈을 투입해 이 날을 빛냅니다. 

자..단적인 예를 들어 보죠.

뉴스에 따르면, 며칠 전인 지난 12월 17일 신시내티의 크로스로드커뮤니티교회라는 대형교회에서 '기다림'(Awaited)이라는 거창한 현대 뮤지컬이 공연되고 있었지요. 그런데 동방박사들이 큰 별을 따라가는 모습을 효과적으로 그리기 위해 세(?) 박사로 분한 연기자들이 줄타기를 하듯 높은 밧줄 위를 걸어 가면서 발랄하고 화려하게 노래하던 도중..그만 그중 한 명이 추락하고 맙니다.

조명발 아래 그 광경을 생생히 지켜 본 청중은 경악과 충격에 휩싸였고 희생자는 즉각 병원으로 실려 갔고, 뮤지컬 나머지는 당연히 모두 취소됐습니다. 사고 몇 시간만인 이튿날 아침, 이 연기자는 어이 없이 숨졌습니다. 약 30 피트(9 미터) 높이에서 거꾸로 떨어진 그 연기자는 케리 슈리오크 양(23). 경찰이 밝혀 낸 추락원인은 사고 당시 밧줄이 달린 'D링'이라는 등산장비를 썼는데 밧줄 이음매가 링에서 그만 빠져나와 버린 것입니다.

누구나처럼 앞날이 창창하던 슈리오크 양은 인근 주립대를 졸업한 뒤 카톨맄 계열인 재비어대학교 교육학석사 과정 중에 있었습니다. 평소 기계체조를 즐겼기에 자진해서 고도의 운동신경과 테크닠이 필요한 이 뮤지컬의 연기에 참여했습니다. 이 교회는 올해 초부터 다니기 시작했답니다.

전문가에 따르면, 문제의 'D링'은 수직으로 사용하면 단단하지만, 무게가 쏠리면서 위치가 뒤틀릴 경우 이음매가 링 밖으로 이탈하기 쉬웁니다. 평소 목숨을 맡기고 안심했던 'D링'이 그녀에겐 죽음의 굴레('Death Ring')인 D링이 되고 말았던 거죠.

경찰은 장비 결함으로 인한 과실사로 결론을 내렸지만..과연 이 대형교회는 아무 책임도 없을까요? "아니 성도가 죽은 이 판국에 누구 책임을 따질 때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여러 가지 물음이 떠오르는 것을 어쩔 수가 없네요.

이 뮤지컬은 지난 해에 이어 두번째로 공연되는 것이랍니다. 루카복음서에 기초한 내용으로 워낙 현대화를 추구하다 보니 박사들의 공중곡예 비슷한 연기도 곁들인 모양입니다. 현재까지 모두 약2만명이 관람했답니다.

썰렁하다면 이게 정말 썰렁한 얘기가 아닐까요.
과연 교회가 '성탄절'이라는 시즌을 거창하게 장식하며 보내기 위해 30 피트 높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까지 시켜가며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잡혀서야 되겠습니까?
"아기 예수님, 이 아슬아슬한 연기를 보시면서 즐기십시오"입니까?
이건 '크리스마스'라는 무드에 젖고 청중의 기분과 분위기를 살리기 위함이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작업이라기엔 너무나 "생뚱" 맞습니다.

뻔한 얘기겠지만, 이 행사를 위해 얼마나 막대한 물력과 인력과 시간이 투입됐을까요? 과감한 투자 끝에 사람의 생명까지 그만 '투입'되고 말았습니다.

과연 이런 게 하나님의 뜻일까요?
누구는 그런 말을 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왜 주님을 위해 열연한 그녀를 위험에서 지켜 주시지 않았을까..?" 그런 물음은 온당한 질문이기보다는 영적 분별 결핍의 문제이지요.
과연 교회 안에서 위험까지 무릅 쓴 그런 만용적인 연기가 하나님 나라에 얼마만큼 보탬이 될까요?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 가며 줄타기를 한다고 해서 뭇 심령이 더 감화 받아 영이 거듭나는 역사가 벌어질까요?
양들의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교회라면, 마땅히 그런 위험한 상황과 연기는 처음부터 차단했어야죠!
왜 그런 위험 상황을 자초하는 것이란 말입니까?

그리고..소형교회이든 중대형교회이든 일년에 한 번 크리스마스 계절 행사를 위해 전체 교회가 쏟아붓는 막대한 인력과 물력과 시간을 상상해 보십시오. 세속적으로도 일 년 한 계절에 한 번 쓸 크리스마스 추리를 세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소비를 합니까?
물론 그 결과로 얻는 새 신자들도 있겠지요. 그러나 대개의 경우 교인들의 눈과 귀와 기분을 즐겁게 해 주려는 의도가 대부분입니다. 즉 크리스마스 행사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영광,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한 것보다는 자체 엔터테인먼트 적 요소가 더 강하다는 것이지요. 

언제 주님께서 "다들 나의 생일을 축하하여라! 12월 25일..오호, 즐겁도다! 풍악을 울리고 춤들을 춰라! 흥겨운지고, 맘껏 먹고 마실지어다!" 하실까요? 정말 한시라도 주님이 그러신다면 가히 신화 같은 얘기가 아닐까요? 사실 크리스마스 전통 일부의 전형인 고대 농신제(사투르날리아), 동짓날 축제 따위는 그랬습니다. (관련 글 참고:)

흔히들 이 계절을 자선 행위의 호기로 삼는 긍지를 찾으려 들지 모릅니다.
그러나 구호사역이란 것은 이런 절기 때를 틈 타 할 게 아니라 교회가 매주, 매일 늘 수시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초기 예루샬렘교회가 그러지 않았나요? 초기교회가 언제 특정일을 명절로 잡아서 그날 푸짐한 자선 선물을 베풀었나요? 구호는 모일 때 마다 늘 하는 전담사역이었습니다. 

'성탄절'이라고 해서 엄청난 물량과 인력을 써 가며 거나한 눈과 귀와 기분을 위한 분위기를 조장하는 것, 세상이나 교회나 과연 어느 정도나 차이가 있을까..깊이 생각해 봅니다. 그런 에너지를 평소 하나님 왕국을 위한 일에 사용하면 얼마나 더 효과적일까요?
교회 안에서 곡예 따위를 하면서 아까운 목숨을 잃는 일이 더 발생하지 않도록 검소한 신앙생활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더 썰렁한 얘기를 해 볼까요?
유럽, 특히 영국은 여느 타국보다 기독교가 강한 나라였습니다. 영국도 여러 세기에 걸쳐 '성탄절' 전통을 각별히 지켜 왔습니다. 누가 봐도 모범적인 성탄절지키미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영국 젊은이 16-24세들의 78%는 성탄의 역사적 신빙성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여러 세기 동안 꿈 같은 성탄절 전통을 지켜오더니 이젠 성탄 사실 자체를 의심하게 된 겁니다.  세인트 헬렌 성당에서 브리티쉬 마케팅 리서치 뷰로에 의뢰한 이 조사에서 70%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아기 예수가 구유에 뉘었던 사실을 의혹시한다고 답했다는군요.

이런 현상에 대해 찰리 스크라인 성공회 신부는 의미 있는 평가를 했습니다.   
"영국인 대다수는 예수의 탄생 해설이 좋은 역사가 못 된다고 믿습니다."
케임즈리지대학교의 사이먼 개터콜 교수(신약학)는 말합니다.
"그들은 기독교의 기원이 실제 역사 속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기에 의심하는 겁니다."

이건 영국이 한국보다 점점 신앙이 약해져서 이젠 '성탄절'을 우습게 보게 되는 겁니까? 부모들은 5분의1꼴로 자녀들에게  크리스마스와 성육신 사건을 결부시켜 가르치지 않는다고 답했다는 군요. 이게 잘못입니까? 카톨맄적 '성탄절'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다 '무신론'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성탄절은 교회에 필수적인 날이 아닙니다. 절기 준수는 모두 구약적인 관행입니다.
카톨맄에서 비롯된 '크리스마스'는 우리 주님과 실제로 무관한 날입니다.  
성탄절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 주님이 섭섭해 하시거나 하나님이 슬퍼 하시진 않습니다.
그것은 일부 순진한 교인들, 또는 어젠다를 가진 카톨맄 사람들의 오해요 착각일 뿐입니다.

다행히도 로고스 채플 모임에서, 일부 목회자들을 비롯한 몇몇 벗들이 이제부터라도 성탄절 등 절기는 지키지 않고 주님 앞에서 검소하고 차분한 연말을 보내며 성찰하겠다는 개혁 의지를 보이는 모습을 볼 때 마음 한 구석 흐뭇해 집니다.

물론 독자들의 아름다운 성탄절 추억거리들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닙니다.
저는 '크리스마스 킬러'도, 성탄절 추억 킬러도 아닙니다. 
누구나 나름으로 맘 깊이 추억을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겠지요.
제 자신도 그런 추억거리들이 하고 많습니다. 과거에 써 본 저의 습작, 첫 단편소설도 그런 배경이었습니다. 

또..성탄절을 통해 교회에 근접하게 되고 그 결과 교인이 된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탄절 전통 자체가 올바르다는 합리화가 되지 못합니다.
빌리 그래엄의 전도대회에서 거듭난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래엄이 올바른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소위 '성탄절'은 참 성탄절이 아닙니다.
12월 25일 성탄설과 거기 얽힌 전통들은 '카톨맄 신화'에 가깝습니다.
초기 교회는 그런 전통을 갖거나 지킨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평소 늘 되뇌는 말이지만, 교회의 뿌리는 로마가 아니라 하늘 예루샬렘입니다!

흰눈과 썰매와 징글(jingle)대는 캐럴, 상록수 장식과 현란한 오색 불빛, 샌터클로즈 등이 성탄절에 구태여 결부된 것은 정서에 호소하는 세속적/감각적 근접에 불과합니다. 결코 거룩한 전통이 아니지요. 그런 세속적 정서에 아이들이 좌우돼 평생 '크리스마스' 전통과 산타를 진리로 여기고 무드만 찾게 됨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고난 받으시고 살아 계신 우리 삶 속의 주님의 현존보다는 귀여운 아기 탄생 스토리의 꿈에만 젖어있기 쉽습니다.
 
물론 우리는 얼마든지 가정적, 개인적으로 이 계절의 무드를 살리고 기분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까지도 카톨맄적인 '성탄절' 축제를 받아 주시고 그 무드와 분위기에 젖으시는 건 아닙니다. 이 점을 우리는 올곧게 가려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임마누엘 되셔서 땅에 내려 오신 주님의 성육신 사건은 "나를 기념하라"신 주님의 만찬을 통하여 우리가 얼마든지 기념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탄생과 삶, 고난과 죽음, 부활 전체를..
그리고 다시 오실 그분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