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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박의 개혁가 시리즈

스티븐 박-개혁가 시리즈2

 

보엄스 회의에서의 루터 (Anton von Werner 작)

스티븐 박-개혁가 시리즈 2

루터 (2) 

인간 루터

시리즈 첫 회에서 비친 대로 루터(1483-1546)는 내성적인 기질에다 약간의 우울증도 가진 사람으로, 어거스틴 수도회 소속인 수사 겸 비텐베르크Wittenberg(현재의 Lutherstadt Wittenberg) 대학교의 신약학 교수였다. 수사 겸 교수였기 때문에, 하루 3시간 이상씩의 기도와 묵상은 그의 일상의 일부였고, 라틴어와 헬라어에 대한 깊은 조예는 학문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힘을 제공했다.

그는 수사로 입문한 지 2년만인 그해 청빈·순결·순명의 3대 서약을 주교와 추기경 앞에 무릎 꿇고 엄숙하게 마친 후, 사제 서품을 받았다. 부제에서 사제서품까지 불과 두 달만이어서 다른 수사들의 시샘을 사기도 했다. 하느님께 바쳐진 삶, 카톨릭 교회 직제에 대한 충성, 독신 수사로서의 경건과 청빈, (나중) 신약학 교수로서 학문에의 정진...이것이 삶의 전부였다고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죄성으로 인한 그의 내적 갈등은 끝없었다. 선배 겸 스승이자 그의 고해신부였던 요한 폰 슈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z)는 신앙적으로 그를 달래면서 신비주의 서적과 성경을 권했고, 루터는 궁극적으로 바울 서신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애당초 루터는 에어푸르트(Erfurt)를 떠나기 싫었지만, 슈타우피츠가 작센(Saxony)의 선제후인 '현공(賢公) 프리드리히(Der sächsische Kurfürst Friedrich III., der Weise (1486–1525)의 요청에 따라 비텐베르크 교수로 가게 되자 자신도 덩달아 신학과정을 밟기 시작했고, 1508년엔 강사로 임용되어 강의를 시작했다. 에어푸르트 대학 시절 수사학·라틴어·그리스어 등의 학문적 기초를 인정받은 때문이었다. 

비텐베르크 대학은 경건한 카톨릭 신자로 독일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영주인 프리드리히가 최근 설립한 대학이었다. 1509년부터는 루터가 성서학박사 과정을 이수해, 1512년 가을 박사학위를 받았다. 루터는 시 교회(City Church)에서 설교자로, 또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중세 유럽에서 경건한 신자나 수사, 신부들의 가장 큰 열망은 걸어서 로마 바티칸 대성당을 방문하는 순례의 길을 떠나는 것이다. 그 길이 험하고 위험할수록 순례자에게 내리는 주님의 은혜는 더욱 클 것이라고 믿었다. 루터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수의 열성 수사들은 심지어 맨발로 알프스 너머 로마까지 걸어가는 고행을 할 정도였다. 

로마 순례와 계단 오르기

루터의 경우, 여느 수사들과는 또 다른 이유로 로마 순례를 결심했다. 일반적으로 수사들에게 로마 바티칸 순례는 저들 일생에서 반드시 해내야 할 하나의 종교적 의무 사항이었지만, 루터는 여러 해 고통스럽게 번민해온 구원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는 절박함이 있었다. 

독일 북부인 비텐베르크에서 로마까지의 거리는 1,600km이다.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걸어서 넘어야 하는 고난의 여정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고행은 루터에게 아무런 문제거리가 되지 않았다. 그만큼 열성적 수사들에게 자신의 공덕을 쌓는 최고로 가치 있는 일이기도 했지만, 루터에게는 영적 생사가 갈리는 구원 문제라는 절박감이 그를 로마로 향하게 했다. 

1510년 말, 그는 수도회의 업무 처리를 위해 6개월 여행하던 와중에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로마 바티칸에 도착했다. 눈물이 앞을 가려 대성당(Archibasilica Sanctissimi Salvatoris et Sanctorum Iohannes Baptista et Evangelista in Laterano)을 올려다 볼 수가 없었다. 그는 혼자서 바티칸 광장에 서서 중얼거렸다. “오 거룩한 로마여, 내가 그대에게 문안하노라. 그대가 진정 거룩한 것은 순교자들의 신성한 피가 여기 쏟아졌기 때문이니라.”

물론, 여기에서 순교자의 피라 함은 그 누구보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는 베드로의 피를 의미할 것이다. 그는 대성당에서 거행되는 미사에 참석했고, 바티칸 신부 앞에서 감격적인 고해성사도 했다. 미사 후, 그는 그토록 열망했던 이 대성당의 대리석 계단('본디오 빌라도의 계단'이라고 불리는 28 계단)을 맨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주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는 속으로 현재 '연옥'에서 머물러 있을 자신의 조부의 영혼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구원의 확신을 위해 울면서 맨 무릎으로 돌계단을 기어올랐다. 이런 순례 행위는 그 당시 수사들이나 사제들에게서 보편적인 행위였다.

루터는, 입으로는 주기도문을 기계적으로 외우면서도 마음으로는 주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구원의 은혜를 갈구하고 있었다. 수 백번이나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의 은총을 내려주소서"라고 울부짖으며 소리없이 기도하고 있었다. 대리석 돌계단을 반쯤 기어올랐을 때 무릎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주여, 이 죄인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옵소서!”
그렇게 그는 마지막 돌계단까지 맨 무릎으로 올라갔다. 주님께서는 그런 루터를 내려다 보고 계셨다. 그의 마음 속에 밀려오는 성취감과 희열, 북부 독일에서 알프스 산을 넘어 여기까지 1천6백 킬로미터를 걸어서 온 보람이 느껴졌다. 속이 후련했다.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튿날 잠자고 일어나 보니, 마음 속의 허전함은 여전했다. 주님께 죄를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없었다. 다시 괴로움과 번민이 시작되었다. 독일에서 겪었던 것과 같은 괴로움과 번민이었다. 그는 이것이 사탄의 장난이라고 믿었다. 이 괴로움과 번민을 몰아내고, 마음의 평안을 위해 온종일 기도했다. 그러나 그 '사탄의 장난'인 번민은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성전 대리석 계단을 다시 맨 무릎으로 오를 수도 없었다. 번민은 더 커져만 갔다.

그는 로마 시내를 거닐다 수사와 사제들이 로마 시민들에게 면죄부를 판매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죄의 용서와 구원의 확신을 돈과 바꿀 수 있는 현장이었다. 물론 그는 과거 독일에서도 면죄부 판매 현장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거룩한 도시 로마에서, 자신이 독일에서부터 1,600km나 걸어서 온 이 로마에서도 구원의 확신을 돈과 맞바꾸다니…!

더군다나 자신은 바로 어제 그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 피흘려가면서 라테란 대성당의 돌 계단을 맨무릎으로 오르면서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구원의 확신은 여전히 없는 상태가 아닌가.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되자 그는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바티칸으로 향한 순례여행이 실패였다는 데 대한 충격에다가 로마 시내에서 백주에 행해지는 면죄부 판매 현장을 보고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믿음으로 살게 되다

이제 그에게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써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확신은 더 멀어진 것 같아 괴로웠고, 구원을 돈으로 살 수 있는 현실은 더욱 그를 괴롭혔다. 천신만고 끝에 독일로 돌아온 루터는 한동안 영적으로 탈진한 상태로 살았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기도조차 나오지를 않았다. 죽음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교수로서의 임무를 완수해야 했기에 로마서 강의 준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로마서라면 그가 누구보다도 더 자신 있게 강의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는 평소에 늘 그랬던 것처럼, 로마서 1장을 1절부터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그 날 따라 그의 시선이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에 꽂혔다. 평소에도 수 십번 읽었던 말씀인데, 그날 밤 그의 시선은 17절을 넘어가질 못했다.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다가 인용된 구약성경 하박국 2:4절을 로마서 1장 17절과 대조하면서 수 십번 읽고 또 읽었다. 두 구절의 말씀이 마치 소용돌이처럼 자신의 뇌리 속에 맴돌고 있었다.
 
그러다 한 줄기 섬광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그렇다! 죄인이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은 자신의 선행이나 고행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 간결한 진리인데도, 루터는 수 년간 고뇌하다 순례 길에서 자신을 학대하면서까지 피나는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카톨릭 교회의 구원관이 루터를 무서운 심연 속으로 몰아넣어 두었던 것이다.

독일 신학자 뵈머(Boehmer)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루터는 수도원 망루에 있는 그의 작은 방에서 격정에 쌓여 있었다. 상처받고 혼돈된 마음으로, 사도 바울의 로마서를 읽었다. 사도 바울이 본문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한 갈망으로 본문을 원문인 헬라어로 읽고 또 읽었다. 여러 밤낮을 고민하는 가운데, 본문의 문맥을 자세하게 분석하고 싶은 생각이 났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루터는 드디어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의는 사법적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라기보다,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의와 자비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이다.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Heinrich Boehmer. Road to Reformation. J. Doberstein & T. Tappert translations. Philadelphia: Muhlenberg Press, 1946. p.110)

루터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그날 밤 그 경험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경험은 내가 천국의 열린 문으로 들어가고, 내가 새롭게 거듭나는 것과 같았다. 성경 전체가 갑자기 새롭게 다가왔다. 나는 기억나는 대로 성경 전체를 살펴 비슷한 표현들을 모두 찾아 모으기 시작했다….지금까지 그토록 증오했던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가, 이제는 내게 너무도 귀하고 감미롭게 느껴졌다. 사도 바울의 로마서 말씀이 내게 천국 문으로 들어가는 참된 진리가 되었다. (Pierson 302)

루터는 이렇게 하나님의 의에 대한 신학적 이해에 있어서 철저한 변화를 경험하였다. 어떤 학자는 그것은 신학에 있어서 ‘코레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하였다. 루터의 기본 초점이 인간 주도적 신학에서 하나님 중심의 신학으로 변한 것이다. 즉, 우리가 공로,혹은 공덕을 세우지 않아도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재발견하였다.

중세 사상은 그랬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영원한 형벌에서 면해주셨지만, 이 지상에서 저지르는 죄의 댓가는 선행이나 공덕을 쌓음으로써 조금씩 감형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아니면 죽은 후 연옥의 불 속에서 수 천년을 보내야 하는 형벌을 받아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렇게 감형받는 방법 중 하나는 성자들의 유품을 몸에 지니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가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젖병, 근거없는 십자가 조각, 전 유럽에 걸쳐 판매되고 있던 '예수의 성의', 성자들의 뼈… 등은 대표적으로 고가에 팔려나가는 성물들이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사용했다는 신성한 젖병을 사면, 연옥에서 2만년 감형 받는다고 전해졌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젖병이 독일에서도, 이탈리아에서도,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팔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루터가 살고 있던 중세 유럽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교회 입구에 놓인 게시판에 95개 조항의 질의서를 내 건 것이다.

보엄스(Worms) 회의

제 217대 교황이었던 레오 10세(Leo X, 1475-1521, 재위기간: 1513-1521)는 정치적 야욕이 매우 컸다. 유럽 명문의 하나였던 이탈리아 로렌조 메디치 가(家) 출신으로 메디치 가의 수장이 됨과 동시에 율리우스 2세 교황의 뒤를 이어 교황 자리를 차지했다. 1512년 3월 15일에 사제 서품, 17일에 주교 서품을 받았으며, 19일에 교황으로 선출된 초고속 승진의 대표주자였다. 

마르틴 루터를 파문한 교황 칙령, ‘오 주여 일어나소서, 당신 자신을 위해 심판 하소서'(Exsurge, Domine, et judica causam tuam, memor esto improperiorum tuorum...)로 시작되는 파문장으로 유명한 교황이었다. 
1521년 루터는 보엄스 종교회의(Reichstag zu Worms)에 출두 명령을 받았다. 그는 찰스 5세 신성 로마 황제 앞에 섰다. 그가 여기에 오기까지 전 유럽은 물 끓듯 동요되었고, 각 나라마다 루터에 대한 논쟁과 정치적 소요가 계속되었다. 이러한 국가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루터는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저택에 은둔하면서 세 가지 중요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독일 크리스천 귀족들에게 보내는 글', '교회의 바벨론 유배', '크리스천의 자유’ 등이었다.  

보엄스 국회의사당 광장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유럽의 귀족들, 카톨릭 고위 성직자들, 영주와 제후들, 그리고 만약의 소요를 대비해서 배치된 무장 군인들….이 중에서는 루터를 지지하기 위해 모여든 독일 군중들과 귀족들도 있었다. 한 마디로 독일인들의 뜨거운 민족주의 정신이 그들을 이 광장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이 종교재판에 교황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인물은 마인쯔Mainz 대교구의 알브레히트 대주교Archbishop Albrecht였다. 알브레히트는 교황 레오 10세의 칙령을 라틴어로 대독했다. 대주교가 루터에게 최후 진술을 허락하자 루터는 단호하게 말했다. "성경과 명백한 이성에 의해 확신되지 않는 한, 나는 교황들과 종교회의들의 권위를 수락하지 않겠습니다. 양심을 거스리는 것은 옳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아요. 이어서 그는 그 유명한 말을 큰 소리로 외쳤다. "사탄이 보엄스 의사당 지붕의 기왓장 수보다 많다고 해도, 오 주님, 내가 여기 섰사오니 나를 도와주소서." 

로마 교황청에서 하찮게 여기던 독일, 그것도 북부 소도시 비텐베르크 대학의 젊은 무명의 수사…..정치적으로 보면, 이것은 애당초 어불성설의 싸움이었다. 전 유럽의 나라와 군대를 호령할 능력이 있는 신의 대리자인 교황과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무명의 수사와의 싸움은 그렇게 진행되었다. 

교황 레오 10세의 용병들은 교황의 적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걸어 승리를 거둔 만큼 전 유럽에서 레오 10세의 권위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런 교황이 그의 표현대로 ‘주의 포도원을 허무는 작은 여우'를 상대로 파문장을 발송한 것이다. 

그 당시 한 유럽인이 교회로부터 파문/출교excommunication를 당하면, 시민권 및 재산권의 박탈과 사회에서의 추방을 의미했다.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었다. 시민권이 박탈되기에 누가 그에게 상해를 가해도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했다. 그런 파문이 루터에게 내려졌다. 그리고 이전의 다른 개혁자들처럼 이단으로 정죄되어 곧 화형에 처해질 운명이었다.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를 그렇게 처단했다. 그리고 그것은 교황청의 승리인 것처럼 보였다.

필자: 스티븐 박(Stephen Park). 그레이스 신대원(GTS) 국제문화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