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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박의 개혁가 시리즈

스티븐 박-개혁가 시리즈 1

 

16세기의 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10여 세기 동안의 구교의 암흑으로부터 벗어나 세계 신교의 지평을 연 사람이다. 

 

개혁가 시리즈

마르틴 루터 1 

스티븐 박(박시경)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 11 10~1546 2 18)의 이름이 '마르틴'Martin인 것은 그의 출생일이 마침 성 마르틴 축일St. Martinstag, Martin's Day이어서 이를 기념하려고 부모가 그렇게 지어 주었음을 먼저 밝혀 둔다.

루터의 성장 배경은 특별한 것 없이 평범했다. 그는 독일 아이슬레벤Eisleben에서 한스Hans와 마르가레테Margarette 루터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경건한 카톨릭 신자들이어서, 가정은 사랑과 엄격한 규율로 지탱되었다. 어머니 마르가레테는 어린 루터가 식탁에서 허락 없이 호두를 먹었다고 손에 피가 나도록 때리기도 했다. 구리 광산의 간부였던 아버지는 그 지역의 평균 소득보다 높은 수입을 받고 일했다. 그럼에도 어머니 마르가레테는 근검절약 하느라 숲속에서 땔감을 마련하곤 했다고 루터는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루터는 이러한 가정의 기도와 엄격한 도덕율, 그리고 카톨릭 교회 전승에 대한 존중심 속에 성장했다.

루터는 어린 시절,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를 "사로잡은"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죄인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그가 법학 공부를 위해 에르푸르트(Erfurt) 대학에서 공부할 때도 예민한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정립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죄인으로서 자각하고 있었다.

1505년 7월 2일, 루터는 학우 알렉시스와 함께 대학으로 돌아가는 시골길을 걸어가다가 천둥을 동반한 거센 폭우를 만났는데, 알렉시스는 우레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고목나무 아래서 천둥 번개를 피해 있던 루터는 공포에 질려, "성 안나님! 저를 살려주시면, 수사가 되겠나이다"라고 울부짖었다.

이런 내적 경험을 거치는 통에 루터는 부친의 뜻을 거역하고 에르푸르트 법대를 중퇴한 채, 아우구스티네(=어거스틴)수도원Augustinerkloster으로 들어갔다. 학업은 법학·철학에서 이제 신학으로 바뀌었다. 그는 수도원에서 기도와 명상으로 자신의 우울증과 멜랑콜릭melancholic한 성격에 대한 고민을 계속했다.

 

수도원에서의 삶

수도원에서 명상과 기도로 일관된 생활을 할 동안, 구원에 이르는 길이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았다. 수사들은 연옥Fegefeuer에 관하여, 그곳은 지옥에 갈 만큼 악하지도, 천국에 갈 만큼 선하지도 않은 영혼들이 머무는 곳이라고 배웠다.

그래서 누구나 교회의 전통과 가르침을 잘 따르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배워 알았다. 특히 임종을 앞둔 사람은 '신모'Mutter Gottes인 마리아에게 기도하여, 하느님의 은혜가 마리아를 통해 그 사람에게 임하게 해야 이른 바 '종부성사'Sterbesakramente가 완성된다고 배웠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심판에 대해 늘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고 살았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가진 모든 공덕Verdienste을 자신도 갖게 되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리스도의 공덕 없이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믿었지만, 동시에 그 공덕을 얻는 것은 자신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고 배우고 믿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최선껏 노력을 다하고 바쳐 그리스도의 은혜에 도달하는 것뿐이었다.

다른 수사들과 마찬가지로 루터도, 수사들은 평신도들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데 더 유리하고 우선적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수련의 과정이 혹독할수록 하나님의 은혜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었다.

한편 아버지 한스는 아들 루터가 수사가 되는 것이 매우 못마땅했다. 물론 나중에 아들과 화해하긴 했으나 여전히, 루터가 법대를 나와 법관으로서 높은 급여와 보장된 생활로 가족을 부양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루터에게는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실하는 것이 육신의 아버지를 기쁘게 함보다 더 중요했다. 돈을 버는 것은 고통 중에 있는 자신의 영혼을 구하는 것에 비하면, 매우 하찮은 일이었다.

루터와 동료 수사들은 수도원 경내에 있는 요한네스 자카리에이Johanness Zacharieae 무덤의 돌 계단을 맨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누군가가 "자네들은 무엇을 구하는가?"라고 물으면,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나이다."라고 대답했다. 당시 수도원 생활을 축약해 보자면, '자신의 자유의지를 포기할 것, 거친 음식을 아주 조금 먹을 것(소금과 물, 그리고 흑빵 몇 조각이 전부), 밤엔 철야기도, 낮엔 고된 노동, 육체의 정욕 죽이기, 청빈과 구걸...등"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수도원의 제대 아래 안장된 자카리에이는 콘스탄츠 공의회Konstazer Konzil(1414~1418) 당시, 모라비아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Jan Hus를 이단으로 정죄하여 화형시킨 장본인이었다. 더 큰 아이러니는 바로 그 제단에서 유럽을 뒤흔들 제2의 후스인 마르틴 루터가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수도원의 공동기도는 하루 일곱 차례 있었다. 새벽 한 시에 종이 울리면, 모든 수사들이 일어나 수도복을 입고, 성수를 손에 적셔 성호를 긋고, 기도실에 모여 기도에 집중했다. 기도와 영창Sprechgesang을 한 후에는, "오 모후님, 우리를 구원하소서! 자비의 어머니, 우리의 생명이시며, 우리의 소망과 기쁨이십니다. 우리의 대변자이신, 오 존귀하신 마리아님, 우리 위해 기도해 주소서. 님은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십니다."라는 라틴어 영창으로 끝맺었다.

루터는 이러한 수도원 분위기 속에 자신이 성자가 되어 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수사로서 엄격한 계율을 지킬수록, 내적 갈등이 커져만 갔다. 그는 여전히 태생적인 죄의식을 떨쳐버리지 못해 괴로워했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기에는 너무나 자격 없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첫 미사를 집전하다

루터의 부모인 한스와 마르가레테. 본래의 성씨는 루더(Luder)였다.

수사 루터가 사제 서품을 받고 나서 첫 미사를 집전하면서,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가 신도들의 몸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것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된다는 교리(화체설)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괴로웠다. 물론 그는 이런 성체성사는 오직 사제들만 행할 수 있는 것으로 알았다. 사제(베드로의 수제자인 교황의 후예)라는 신분은 하느님으로부터 안수받아 얻는 신분이기에 아무리 평범한 빵과 포도주라도 일단 사제의 손에 들려지면 그것은 곧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하는 놀라운 기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루터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러나 당시 카톨릭 교회는 사제의 손에 들린 빵과 포도주는 '하느님의 골수'라고 가르쳤다.

루터는 이 첫 번째 미사 집전을 미루면서, 아버지 한스를 참석시키려고 했다. 에르푸르트 대학 시절부터 여태까지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수도원에 들어간 탓에 생긴 부자간 갈등은 겉으로나마 해소된 듯했다. 아들이 사제가 되어 첫 미사를 집전한다는 전갈에, 아버지 한스는 아들을 격려하느라 스무 명의 마부가 끄는 말 20필을 앞세우고 수도원에 나타났다.

미사가 끝나고 식사하는 자리에서 루터는 아버지 한스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제가 수사가 되는 것을 왜 그렇게 반대하셨습니까?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십니다. 보시다시피 여기서 저는 매우 조용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루터의 이 말에 한스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참석한 신학자들과 수도원장, 수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당신들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성경 말씀도 읽지 못했습니까? 제 아들이 여기 수도원에 들어온 탓에 우리 부부는 노년에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루터는 "아버지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아들이 변호사로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위해 더 많이 기도하는 것입니다."라고 항변했다. 루터가 아버지에게 하나님께서 천둥 번개를 통해 자신을 종으로 부르셨다는 말을 하자, 한스는 "그것이 유령의 목소리가 아니길 빈다."고 대꾸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