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께서는 모든 것들, 곧 하나님의 깊은 것들까지도 통찰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속을 그 사람의 영이 아니면 누가 알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것들은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합니다.
그러나 숨결에 의존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을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그에겐 어리석음일 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영적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들을 판단하나
그 자신은 아무의 판단 아래 있지도 않습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았기에 그 분을 가르치리오?"
그러나 우리는 크리스토의 마음을 지녔습니다.
(코린토A 2:10-16 일부 중략/사역)
사람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무한하지 않습니다. 무한해 질 수도 없습니다.
만약 사람이 무한한 존재였다면, 첫 사람 아담/하와도 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테지요.
사람의 이런 유한성은 특히 언행에서 여지 없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사도 야코보는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했지요(야코보서 3:2b).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실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실수와 과오를 저지르기에 사람 답습니다.
거듭난 사람도 여전히 유한합니다.
그러나 세속인들과는 몇 가지 현저한 차이가 있지요. 이 짧은 시공간에다 그 모두를 말할 순 없겠고..한 가지만 말한다면, 오늘 본문에서 보듯 은밀한 하나님의 영적 슬기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본문 이전 부분 코린토A 2:1-5 참조).
그러나 이 영적인 슬기는 결코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도, 우리 자신의 것도 아닙니다! 오직 성령님으로부터 왔고 성령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거리가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깊은 것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는, 오직 성령님의 슬기요 지식입니다.
세상은 겉으로 드러나 있는 세상의 것들을 알지언정 한 개인의 속사정도 알지 못합니다.
자, 우리 한 번 솔직히 말해 봅시다.
사람이 사람의 속을 알 수 있습니까?
물 속처럼 멀겋게 들여다 볼 수 있나요?
그럴 수가 없지요. 속담조차도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귀띔해 줍니다. 심지어 아기 엄마조차도 아기의 속 생각을 일일이 다 알아 맞출 순 없습니다.
사람이란,그렇게 유한한 것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유한합니다.
결코 무한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현대는 칼 융과 직문트 프로이트 등이 계발한 심리학이 고도로 진전되어, 그 수법을 적극 써 먹는 시대가 됐습니다.
심리학은 교계에도 깊이 침투해 있습니다.
문제는 이 심리학이 마치 영적인 학문인 양, 영적인 것들도 통달한 양 설쳐 댄다는 점입니다. 사람의 심리를 요리조리 떠 보고 대강 간파하여 그 사람을 모두 아는 양 행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독심술'(讀心術)까지로도 발전합니다.
또 수피교의 신비학을 터득한 그루지 구르지예프의 '에네아그람'(에니아그램)을 빌려, 개인 성격 유형을 분류하고 파악하려는 노력까지도 합니다.
그러나 심리학은 결코 영적인 슬기가 아니지요.
영적 차원의 것이 아니요, 못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엔 "숨결에 의존하는 사람"이라고 옮긴 말이 있습니다. 원문엔 '프쉬코스'인데 일부 성경 역본들은 '자연인', '육에 속한 사람' 등으로 옮겨졌습니다만, 좀 더 정확한 뜻은 "숨결/목숨/호흡에 의존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프쉬코스는 프쉬케(psyche) 즉 심리/심성과도 직결됩니다. 정신/심리에 관한 모든 낱말들이 이 그리스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사람은 기껏 타인을 알아 봐야 심리 정도이지 영적이진 못합니다.
심리 파악에도 너무나 한계가 뚜렷합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심리학은 마치 무한대의 권능인 양 행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는 사람을 의지하지 마라. 그의 숨결은 (두) 콧구멍에 있을 따름. 뭐가 그리 대수이겠느냐?" (이사야 2:22)
심리적인 사람-프쉬케(psyche)-는 목숨이 두 콧구멍에 달린 프쉬코스에 불과하므로 스스로 유한함을 깨달아야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심지어 '관상기도'라고 불리는 심리적인 기도로 영적인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는 양 가르치기도 하지요.
그러나 영적인 하나님께 내 영이 비밀을 아뢸 수 있는 참 영적 차원의 기도는 관상기도가 아닌 방언기도라고 사도 파울은 가르쳐 준 바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들, 영적인 사람들, 거듭나서 성령님 안에서 걷는 사람들은 사람의 속은 물론 하나님의 깊은 속도 통찰하시는 성령님에 의하여 비밀의 드러남-계시-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바로 성령의 은사와 권능에 의해서지요!
본문 이전 성구들, 코린토A 2:4에서 사도 파울이 밝혀 주는 바입니다. 파울은 아테네를 거쳐서 코린토 사람들에게 나아가 복음을 전할 때, 자신의 꾸민 말과 슬기로 하지 않고 오직 크리스토의 복음과 성령의 슬기, 계시와 권능으로 하길 원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파울은 아테네에서 온갖 우상들을 보고 카르멜 정상의 엘리야처럼 흥분하여, 자신의 변증과 말로 당대의 세계적인 철인들과 한 바탕 격론을 벌이려고 했지만, 별 전도 효과는 얻지 못했기 때문이지요(행전 17:15-34). 그래서 다음 행선지인 코린토에 올 때는 그 마음이 낮아질 대로 낮아져 성령님만 의존하려 했습니다.
우리는 방언기도를 통해 내 속 사정을 하나님께 아뢸 뿐더러 성령님의 슬기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을 알기 위함입니다(12절, 코린토A 14:2 참조).
프쉬코스, 프쉬케의 사람들은 비록 심리학을 한다곤 하나, 한 길 사람 속을 능히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무리하게 사람의 마음을 읽으려고 -독심(讀心)하려고- 들 때, 자연스럽게 악령을 만나게 되고 그들의 힘을 빌게 됩니다.
영적인 사람들, 성령의 사람들은 오직 모든 것을 통찰하시는 성령님의 슬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며 모든 것을 영적으로 판단합니다.
프쉬코스 즉 자연인,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님의 일을 좀체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에겐 아무리 방언기도를 강조해 봐야 먹혀 들지 않습니다. 그들에겐 관상기도가 더 영적,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성령님의 것은 그들에게 미련하게만 보입니다.
관상가들에겐 방언기도가 미련하게 보입니다.
비록 거듭났다고 해도 관상기도에 머무는 사람은 스스로 프쉬코스로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오직 영적인 사람들만 성령님의 것을 받아들이게 돼 있습니다.
우리는 방언기도로 하나님께 영의 비밀을 아룁니다(코A 14:2,14).
또한 방언과 은사들로써 하나님의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코A 12:8-11).
우리는 성령님을 통하여 크리스토의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심리학이나 관상기도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길이 아닌 탓입니다.
영적인 사람들 즉 성령님의 슬기 안에서 걷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영적으로 판단하지만, 그 누구의 판단 아래 속하지 않습니다. 비록 겉으로는 세상의 비판을 받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이나 비신자들, 육적/자연적인 프쉬코스에게 비판을 받는다 해도 결코 두려워 할 일이 못됩니다. 그들은 영적인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서 방언과 은사를 활용하는 사람은 성령 안에서 예수 크리스토의 마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것들에 의해 영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루샬렘과 코린토 교회 등의 초기 교인들이 모두 그러했습니다.
심리적 헤아림이 충일한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나 자신의 독심적 잔 재주가 아닌 하나님의 슬기와 성령의 권능으로 크리스토의 마음으로 영적 판단을 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이 내세울 것, 자랑할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세속적 제도교회인 교계를 분별하고 판단하고 검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검증을 초월할 대상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 오시기까지 우리의 작업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래선 안 됩니다.
소위 '건강한 교회'란, 따로 없습니다!
심리적인 명사-프쉬코스(!)-가 점수를 매기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아니지요.
그런 개념은 사람이 지어낸 인위적인 그럴 듯한 환각에 불과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의 하신 칭찬과 경고에 순응하는 교회, 곧 말씀에 순종하는 영적인 교회가 바람직하고 참될 뿐입니다(요한계시록 2:1-3:22 참조).
우리가 성령님을 통해 영적인 판단을 지속할 때 우리는 주님의 뜻에 걸맞는 교회로 남을 수 있습니다.
티엘티 독자들은
성령님의 슬기와 권능으로
끊임없이 영적인 통찰과 판단을 하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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