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설교'가 아닌 주간 메시지입니다. ]
자..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엔 자유가 있습니다.
(코린토B서 3:17 사역)
하나님은 우리에게 종교생활을 원하실까요..?
예수님을 믿은 지 한참 지나고도 일종의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종교적인 격식과 틀에 묶여 피동적으로 끌려 가는 교회 생활을 가리킵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들 지내지요.
대다수 신자들은 자신이 종교생활을 하면서도 모르는 경우가 아는 경우보다 더 많습니다. 종교생활을 신앙생활로 착각합니다. 종교와 신앙을 혼동하곤 햐지요. 아마도 한자어 사용권인 극동에선, '기독 교(敎)'라는 낱말이 붙어 더 그런지도 모릅니다.
저 자신..모태 속에 생겨 나면서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신학을 배움으로써 목회자 기초수업을 마치고도(?), 도미한 지 약 5년만에야 비로소 종교 생활을 면할 수 있었으니까요.
가령..대다수 교회의 주일 모임을 보면, 무슨 행사나 음악회의 순서처럼 미리 짜여진 '각본'인 주보(週報)의 순서에 따라 정확하게 행동하면서 하나님께 경배 드립니다. 물론 하나님도 그 순서에 따라 주시길 기대하고서. 그렇게 매 주일 '순서'라는 절대 원칙과 틀과 룰에 따라 쳇바퀴 돌리듯 의식이 반복됩니다.
천주교 미사를 보면, 종교성은 더욱 짙어집니다.
엄숙한 종교적 분위기로 잔뜩 꾸며진 성당 안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 아래 '감실'을 갖춘 제대 앞에서 제의를 갖춰 입은 사제가 일정한 순서에 따라 미사를 진행하고 음악 등 모든 주변 요소도 사제의 행동에 아울려 곁들여집니다. 십 수 세기 동안 해 온 전통대로.
천주교도들은 미사에 수시로 참석하고, 평소 가슴 앞에 성호를 긋거나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상이나 마리아 상을 중시하거나, 묵주알을 굴리며 '성모송' 등을 외우고 마리아/성인/천사들에게까지 '기도'란 것을 합니다. 죄를 지으면 사제들 앞에서 고백성사를 하곤 하지요. 또 온 세계 어디 사는 누구든지 개인의 이름에까지 반드시 이탈리아어 '영세명'이 붙고요. 영아세례부터 종부성사까지..바티칸이 정한 제도에 일생을 맡겨 생활합니다.
종교 전통에 묶인 그런 모습을 보노라면, 과연 구약시대에 사는지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지 무색해지지요. 그래서 리처드 베넽 같은 사람은 오래 천주교 사제 생활을 하다가 마음에 갈등을 느껴 마침내 신교로 개종해 버렸습니다.
반대로 편하고(?) 의례적인 종교 생활을 원하는 많은 신교 사람들이 거꾸로 구교로 개종하기도 하는 상황입니다. 뭐, 좋다는 걸 어쩌겠습니까만.
그런가 하면, 신/구교가 함께 사이좋게 나란히 매년 말 어김 없이 돌아오는 '성탄절'로부터 이듬해 성탄절에 이르기까지 일 년 동안 천주교가 정한 교회력에 따라 모든 주요 교회 명절들을 꼬박꼬박 지킵니다. 그렇게 톱니바퀴 돌듯 하는 연례 '신앙생활'을 해 나아갑니다.
사람은 그렇게 전통/형식/의식/의례/전례 등을 지켜 나가노라면 뭔가 종교적 성취감과 만족감을 느끼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도 파울은 그 옛날 아테네에서 지적했지요:
"아테네 시민 여러분. 제가 보니,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매우 종교적입니다."
근본적으로 생명이 없는 종교 생활은 필경, 겉과 속이 다른 모습과 가식과 위선을 초래합니다. 지도자급이라는 목회자/성직자/사제들이 더욱 그러기 쉽습니다. 옛 종교인들인 파리새인들의 모습은 오늘날도 버젓이 재현되곤 합니다. 예수님이 가장 싫어 하고 혐오하시던 모습이 오늘날 나의 모습, 우리의 모습일 수 있지요.
성령님 안에서 자유와 권능이 역사할 자리가 좁디 좁습니다.
성령께선 인간의 각본에 밀려 언제나 구석에서 외면 당하신 채로입니다.
말로는 "성령님, 오 성령님!" 하고 그 분의 이름을 빌리지만, 대개는 실제로 그 분을 환영하는 자리가 못 되기가 더 쉽습니다.
화려한 찬양노래와 춤으로 성령님을 반기고 환영하고 사모하고 기다리는 듯 하지만, 실은 인간들의 눈과 정서를 부추기는 유미주의(唯美主義) 차원의 쇼 내지 쇼옾(show-off)일 때가 더 많습니다. 왠지 꼭 그래야만 교회생활을 하는 듯한 만족감이 들지요.
그런데 알고 보면 그 대부분이 신약성경과는 거리가 먼 모양새들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이해하시고 은혜로우셔서 거듭난 사람들의 경배를 때로는 받아 주시기도 하지만..초기 교회 같은 참 권능의 역사는 일어나기 힘든 상황들이지요.
복음서 뒷 부분과 행전 초두를 보면, 성령님이 오신 뒤로 신자들의 경배와 신앙 생활의 면모는 혁명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 크리스토와 성령님 중심의, 살아 있고 생동하고 자유로운 모습으로!
그래서 격변적이었습니다!
성령님이 오시자,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예언 말씀 그대로 영(!)과 진리(!)로 경배하기가 시작된 것이지요(요한복음서 4:20-24). 성령과 말씀 안에서의 경배 말입니다. "영과 진리"의 이 새 경배 흐름은 결국 예루샬렘에서부터 사마리아로까지 건너 와 닿게 되고 그 너머 온 세상 끝까지 이뤄집니다.
성령님이 계신 곳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새 경배 흐름은..한편으로는 성경을 모방하면서도 신약 성경을 적당히 무시하고 종교 어젠다에 의해 구약 제도로 돌아간 천주교에 의해 금방 시들어 갑니다. 10여 세기를 거치도록 세계 교인들은 참 자유가 죽어 버린 캄캄한 암흑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고도 그런 종교생활이 참 신앙생활인 줄 착각하면서.
그만큼 종교생활은 끈질기고 압착력이 강합니다.
종교생활의 주된 힘은 성령님이 아니라.. 종교의 영(spirit of religion)이기가 더 쉽습니다. 진리와 참 자유의 영인 성령님은 우리를 속박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교의 영은 우리를 묶고 속박합니다. 좀처럼 놓아 주질 않지요.
우선 우리가 이해해야 할 사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도(道), 도리(道理)요 유일한 진리일 뿐, 더도 덜도 아닙니다.
기독교 외엔 참 생명이 없습니다!
성경 말씀에 밖엔 참 진리도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성경을 잘 모르는 (신자 아닌) 교인들이나 수많은 안티들은 기독교는 "배타적/독선적"이라고 험담과 비판에 나서는데, 위 말들은 제 말이 아닌 성경의 말입니다. 성경 자체가 그 어떤 다른 '진리'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름" 배타적인 요소가 있지요.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천주교든 유대교든 회교든 유/불/선이든 저마다 나름의 독선적/배타적 주장이 있습니다. 각각 자기네 종교원리나 전통에 맞지 않으면 인정하질 않지요. 예컨대 회교는 알라와 그 예언자인 무함마드를 믿지 않으면 "죽음과 지옥 뿐"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는 그들의 인정(認定)을 바랄 필요조차 없습니다. 다만 온 성도의 평화만 바랄 뿐. 성경은 예수 크리스토 외엔 아무런 구원의 길도, 아버지 하나님을 뵐 길도, 천국 길도 없다고 분명히 밝힙니다(요복 14:6, 행전 4:12).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미국에선 기독교를 싸잡아 아니 기독교계 자체 일각에서도 'religion'으로 자처합니다만, 기독교를 여러 종교들의 하나로 보이게끔 하는 다원종교 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선동 결과이지요. 대개의 경우 이런 현상은 교계 안에 깊숙이 스며든 프리메이슨들의 노작(勞作)의 결과입니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조차 기독교의 유일성을 인정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오늘날 천주교는 자기네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다른 종교와의 다리 놓기를 즐기고 에큐메니즘의 선두에 서 있는 해괴한 양다리 걸치기 작전을 쓰고 있으며 신교의 많은 명사들이 여기 응해 주고 있습니다. 어젠다에 따라 신교 안에서 구교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수많은 명사들도 마찬가지지요.
근래 미국에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WWJD: What would Jesus do?)라는 운동이 펼쳐져 왔습니다. 1890년대에도, 1세기 뒤인 1990년대에도 어린이/청소년들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바람입니다. 지금도 청소년들은 'WWJD'란 약자문구가 새겨진 팔찌를 끼고 다니곤 합니다.
구원복음보다 사회복음을 중시한 기독교 사회복음주의자, 찰즈 쉘던의 소설-'그 분의 발자취를 따라'(In His Steps, 1896년)의 부제목으로 붙여져 더욱 힘을 받은 운동이지요. 사회복음주의자 월터 로쉔부쉬는 쉘던의 소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시인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라면 종교생활을 하셨을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오늘날처럼 '전례'나 주보 순서에 따라, 또는 천주교 사제들처럼 제의를 갖춰 입고 미사를 이끄실까요? 예수님이라면 교회력에 따라 꼬박꼬박 교회명절을 지키고 '성모송'을 따라 기도하고 하셨을까요?
물론..우리 기독교의 창시자/완성자이신 예수 크리스토님은 직접 우리의 찬양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시기에 오늘날 그러실 리도 없겠습니다만..아무튼 생각해 보면 저으기 궁금한 사안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구러 종교생활을 하다 역사의 뒤안길로 떠나 갔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관상기도'는 두드러진 종교생활적 면모입니다.
초중세로부터 중세 말기까지의 수많은 수사/수녀들은 종교생활과 함께 신비주의적인 관상기도란 것을 하다 갔는데, 현대에 와서 사람들이 그것을 본받다 못해 이젠 신교계에서 공히 대세가 될 정도로 애호하고 있습니다.
관상 물결이 신교계에 넘실거립니다. 물론 카톨맄 측에서야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반길 일이지요. "이제야 신교가 조만간 형님 교회인 우리들에게로 돌아오겠구나..!" 하고.
그러나 과연 이게 바람직한 물결일까요?
예수님이라면 관상기도란 것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이라면 카톨맄 수사들처럼 향심기도를 하고, 고행과 금욕, '청빈' 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구걸을 하면서 사셨을까요?
예수님이라면 이리저리 '성지순례'를 하고 묵주를 굴리며 이콘(icon, 성화상) 앞에서 '성화상 기도'를 하면서?
아니지요! 영과 진리의 경배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물론 초기 교회 예배에도 일정한 요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이끄시고 거기 순복하는 자유로운 흐름이었지요.
그들이 모일 때 찬송시도 있고 영의 노래도 있었고 가르치는 말씀도 있었고 계시도 있었고 방언도 있었고 방언 통역도 있었고 신유 등 다양한 은사의 나타남도 있었습니다.
물론 거기 성령님의 기름부음이 있었을 터입니다.
그리고 모일 때마다 주님을 기념하는 빵과 포도주 나누기와 애찬과 친교, 가난한 성도를 위한 구호도 있었고. 그런 자유 속에서 그들은 진정 행복했습니다. 평화로웠습니다. 때로는 외부 세력의 모진 박해를 견디며 숨어서라도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그러다 박해가 심해지면 순교하곤 했지요.
물론 그때는 그때, 지금은 지금이니 현대에는 현대에 적합한 경배를 하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할 수 있겠지요. 현대 문화의 도구와 편의성들을 제가 구태여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저의 물음은..과연 현재 우리의 삶이 주님이 바라시는 그 영과 진리의 경배이냐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참 자유의 부여자이신 성령님께서 정말 바라시고 이끄시는 경배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경배, 우리의 경배엔 영적인 자유가 있습니까?
과연 주님이 예언하신 영과 진리의 경배일까요..아니면 격식과 틀에 묶인 종교적입니까?
우리는 참된 경배자들인가요, 아니면 종교인인가요?
겉으로 각본에 따라 "굴러 가는" 교회의 화려한 모습 뒤에 종교의 영이 도사려 있진 않은지요? 오늘날 우리 교회의 흐름이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일까요?
우리는 기존 제도 교회를 좀처럼 탈피할 순 없을 겁니다.
아마 주님 오시기까지 이런저런 전통적, 종교적 제도 교회에 속해 있을 겁니다.
행전적, 파울이 코린토A서 14장에서 말한 이상적(理想的)인 교회는 만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 양심과 의식은 살아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이 살아 숨 쉬고 생동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대중 속에서 나 혼자만이라도 종교생활을 탈피해 주님이 원하시는 참된 경배자로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대로 성령 채우심을 받고 방언을 하고 은사를 활용하며 그 분을 영과 진리로써 섬길 수 있어야 정상입니다.
영적인 자유를 누려야 옳습니다.
성경의 모든 약속들을 고루 성취 받고 그 기쁨을 맛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과 은총, 풍요와 권능, 기도의 응답을 받고 누려야 바람직합니다.
가난한 성도를 돕고, 악령에 시달리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놓아 주는 참된 금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양대 성품인 진리와 (아가페) 사랑에 굳게 서야 합니다.
무슨 영적/혼적/육적/물적인 유혹이 다가와도 흔들림 없이 주님을 기다려야 옳습니다.
주님이 요한계시록 앞 부분에서 7교회를 경고/훈계하신 대로 우리도 조심하며 살아가야 올바릅니다.
여러분이나 저나..흠이든 티든 주름 잡힌 것이든 없이 살도록 힘써야 할 터입니다.
우리는 종교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믿음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게 물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 예수 크리스토의 은총과
하나님 아버지의 가없고 값없는 사랑과
성령님의 이끄심과 친교가
티엘티 독자 모두에게 있기를!
전능한 주 예수 크리스토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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