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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의 지난 칼럼들/등풀의 생각

예수님과 교제하시는지요? (들풀)

credit: by Chewy Hooye from flickr.com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전 1:9)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교제가)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요일 1:6).

 하나님/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며 교제를 나누고 계시는지요?

성경은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예수님과 교제를 나누기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만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결정/선택을 해야 하는 시점에서는 더더욱 이런 생각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만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해 주시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내게 계시해 주시기만 한다면,... 등의 생각을 하면서도 막상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는 못하고 그저 답답해 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또 어떤 성도들은 생각하기를, 성경 이외에는 아예 하나님의 음성은 들을 필요도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성경이면 충분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하지요.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 대해서 그리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가끔 하나님의 음성을 기도 중에나 말씀 묵상 중에 듣기도 하였지만 그것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로까지 확대하여 생각하지는 못했었습니다. 제가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을 그저 막연하게 생각했었고 심지어는 긴가민가 생각도 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절대적 명제를 부여하지도 못했습니다. 그저 설마라고도 생각했다가 아니지, 하나님의 음성이 확실한데...’ 라고도 하면서 갈팡질팡 우왕좌왕 했고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해 주시는 이유나 목적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 보지도 않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여러가지 일을 겪으면서 다양한 훈련을 받게 되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하나님/예수님과의 교제>를 나누는 훈련이었습니다.

 저는 이 훈련을 <하나님 음성에 응답하는 삶>이라는 책을 통해서 받았습니다. 헨리 블랙가비와 리처드 블랙가비가 공동으로 저술한 이 책을 통해서 하나님/예수님과 교제하는 삶이야말로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티엘티의 많은 형제자매님들께서는 잘 알고 계시겠습니다만 저는 이제서야...ㅠㅠ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전에도 어느 댓글을 통해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제 믿음에 대해서 다시 점검하면서 이제는 "계명을 지키려고 애쓰는 믿음"에서 "예수님과 교제하는 믿음"으로 나아가려 한다고요.

 계명을 지키는 믿음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여기엔 아직도 그 중심이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중심을 나 자신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옮기려면 예수님과의 교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책의 내용을 티엘티의 형제자매님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여기에 요약하여 옮기는 내용들은 모두 <하나님 음성에 응답하는 삶>에서 인용한 것들입니다. 이 요약본보다 더 자세하고 깊이있게 그리고 여러가지 실례들을 통해서 확실하게 <하나님 음성을 듣고 응답하는 삶>에 대해서 알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책을 읽어 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제가 반드시 덧붙이고자 하는 말씀은, 이 요약이나 책을 읽고 깨닫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소중하기는 하지만 깨달음을 삶에 적용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이 글이나 책을 읽고서 아 정말 그렇구나, 좋은 말이다하고 넘어가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잊지 마시기를 간절히 당부합니다.

......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또 그분의 뜻을 알고자 애를 쓴다. 그러나 기독교 지도자들이나 사역자들도 하나님 음성을 분별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고 솔직히 시인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기에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문제는 사람들의 귀가 그분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분께 순종할 수 있겠는가? 우리 삶에 하나님의 개별적 개입이 없다면 우리의 인생 경험은 불신자들의 그것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지켜야 할 규율이 더 많고 도덕 법규가 더 엄할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은 과연 오늘도 말씀하시는가? 이 주제에 대해서 네 가지로 살펴보았다.

 하나, 기록된 성경만이 그분의 유일한 말씀이라는 입장이다.

오늘날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거의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하나님, 구원, 그리스도인의 삶 등 사람들이 알아야 할 모든 것에 대해 성경에 완벽히 계시하셨다는 것이 이 견해 지지자들의 주장이다. 하나님은 오늘 새로운 말씀으로 그것을 보충하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 오늘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성경에 뭔가를 보태는일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덕적 뜻 안에서 내려진 모든 결정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것이다.’ 하나님은 매번 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자녀들을 훈계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책임감 있고 현명한 결정을 내리도록 가르치기 원하신다. 관건은 결정 내용이 아니라 결정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에는 두가지 가정이 필요하다. 첫째는, 하나님은 광대한 우주를 관리하시느라 너무 바빠서(?) 성도 각 개인의 생활과 그들의 소소한 이슈들에 대해서는 관여하시지 않는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으므로 우리는 마땅히 올바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러라고 우리에게 두뇌를 주셨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 그리스도인의 경험이야말로 궁극적인 지표라는 입장이다.

이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메시지나 환상을 직접 받았다고 주장하며 성경보다 더 권위를 부여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성경으로 확인하지 않고 하나님께 받은 주관적 말씀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람은 누구나 과오를 면할 수 없다.

 , 기독교 교리를 통한 비인격적인 접근으로 교리를 강조하고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하나님은 자기 사람들과 꾸준히 대화하시며 그리스도인은 그분과의 역동적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점을 반박한다. 그들은 신학에서 안전을 찾는다.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를 누리기보다는 그분에 관한 교의와 사실에 매달린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격적 인도 가능성을 싸잡아 거부하면서 생명없는 교리 체계를 선택한다.

 그러나 신학이란 그리스도인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서 알려 주는 것이어야지 절대로 그 관계를 대치해서는 안 된다. 생명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것은 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다. 삶을 구체적으로 인도하는 것은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이다.

 많은 신학자들의 비극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한 채 그분에 관한 연구에만 빠지는 것이다. 그들은 평생을 바쳐 교리를 연구하고 가르치지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함으로써 얻는 비할 데 없는 기쁨은 놓치고 만다.

 ,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으로 인격적인 접근이라는 입장이다. (저자들은 이 입장을 주장한다.) 그런데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해야 한다는 점에서 때로 고뇌한다. 그분의 음성은 육성으로 들리지 않으며 물리적 손길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관계는 성경의 계명과 교훈에 부지런히 순종하는 데 있다고 결론짓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결국 그들은 삶을 다 바쳐서 성경에 나타난 규율과 권고를 열심히 따르려 하는데, 이것은 의식주의적, 율법주의적 종교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정체된 예배 방식은 우상숭배 못지 않게 생명이 없다.

 기독교의 근본 특성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다. 양방 간에 전혀 커뮤니케이션이 없는 관계가 오래 지속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 관계는 사람들이 자기 입맛에 맞게 만들어 내거나 뜯어고치는 관계가 아니라 진리의 성경에 규정된 관계다. 우리의 관계 대상은 하나님, 즉 성경에 자신을 계시하신 참 하나님이지 인간이 만들어낸 신이 아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우리가 그분 말씀을 들을 준비가 돼야 한다. 내게 들려 주시는 하나님 음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거기에 적절히 반응하는 법을 아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도 중요하다. 따라서 문제는 하나님이 자기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떻게 말씀하시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살펴 보자.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피조세계 ( 19:1~2, 9:11~17), 천사들 ( 16:7, 19:1~13, 5:13~18, 6:12, 왕하 1:3, 9:20~23, 10:10~21 등등), 선지자들 (너무 많아서...), ( 37:5~11, 2:1~45), 환상 ( 15:1, 6:1~13, 1:1, 7), 제비뽑기 ( 16:8, 7:14), 우림과 둠밈 ( 28:30, 8:8, 33:8), 세미한 음성 (삼상 3:4), ( 4:33, 6:17~21, 왕상 18:37~39, 대하 7:1~2), 불붙은 떨기나무 ( 3:1~4), 설교 ( 3:4), 심판 (대하 6:24~31, 7:13~14), 상징적 행위 ( 20, 32:6~15, 1:2), 표적들, 기적들, 벽에 새겨진 글씨 ( 5), 나귀 ( 22:21~35), 나팔소리 ( 19:16, 19), 우뢰와 번개와 연기와 폭풍 ( 19:16, 20:18, 삼상 12:17~18), 양털 ( 6:36~40), 나무 꼭대기의 걸음소리 (삼하 5:22~25, 대상 14:14~17), 친밀하게 대면함 ( 33:11), 개인적 인도 ( 2:12, 7:5), 그리고 기타 다양한 방법으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주의 말씀이 임하니라등등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이 있다.

 또한 신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통해 말씀하셨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말씀하셨으며, 자연 ( 1:18~20), 천사 ( 1:24, 2:24, 20:12, 5:19, 8:26, 10:30~33, 27:23~25), ( 2:12~13), 환상 ( 9:10~12, 10:9~17, 18:9~10), 기도 (22:17~21), 선지자들 ( 11:28, 21:10~11), 제비뽑기 ( 1:23~26), 표적과 기적, 전도자 ( 10:14~15), 성경, 불신자 ( 11:49~53), 교회 ( 4:31),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 ( 3:22, 9:33), 성령 ( 10:19~20, 14:26, 16:7~13, 8:26, 고전 2:9~16), 그리고 밝혀지지 않은 다양한 방법으로 행 8:29 처럼 성령께서 빌립에게 이르시되하고 기록되어 있으나 어떻게 이르셨는지는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과 특히 하나님의 종들에게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하신 방법에는 하나님만의 패턴과 취지가 있다는 것을 또한 알려주셨는데, 이것은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패턴들이 있다.

 하나,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 맞게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다소의 사울에게 말씀하셨을 때에는 휘황찬란한 방법으로 말씀하셨었으나 어린 사무엘에게는 고요하고 세미한 음성을 통해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둘 다 자기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는 마찬가지였다.

 , 알아듣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일부러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신다. 따라서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방법이 아니라 그분 자체다. 단지 그분이 진짜인지 증명하기 위해 관계도 맺기 전에 그 음성을 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때 그분 음성은 들려오게 돼 있다 ( 4:8).

 , 점진적으로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개인을 대하실 때에도 점진적 방식을 쓰신다. 성경 인물들과 하나님의 만남을 보면, 대부분 첫 만남이 이후의 만남들보다 더 극적이다 (바울, 모세, 에스겔 등). 그러나 그들과의 관계가 자라가면서, 하나님은 매번 그런 극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주목을 끌고 뜻을 전하실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은 자기 사람들과의 관계가 역동적으로 점점 자라가기 원하시며, 그래서 각 개인에게 점진적으로 말씀하신다. 그분은 이미 말씀하셨던 내용 위에 새 말씀을 하나씩 더하시며 우리를 날마다 한 걸음씩 인도하신다.

 , 일관성 있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절대 자신의 성품에 어긋나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따라서 그분은 사람들에게 거룩하지 않은 방식으로 말씀하시지 않는다 ( 60:6, 65:5).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래서 그분 말씀에는 언제나 온전한 사랑이 배어 있다 (요일 4:7~8).

 다섯, 신실하게 말씀하신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의 신빙성을 시종일관 보여 준다. 하나님은 약속하시면 반드시 지키신다 ( 55:10~11).

 여섯, 확실히 말씀하신다. 아담과 하와로부터 유배지의 요한에 이르기까지 문제는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에 나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였다. 많은 경우,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모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알면서도 종종 그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일곱, 반응을 구하며 말씀하신다. 창세 이래로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에 두 가지 태도 중에 하나로 반응해 왔다. 어떤 이들은 그분의 메시지를 거부했고 어떤 이들은 받아들였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 반응은 불가피하며, 우리의 마음 상태는 우리의 반응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취지는 무엇인가?

 하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품을 계시하시려 말씀하신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많이 나온다. 각 이름마다 개인적 만남을 통해 사람들에게 계시하신 그분의 다양한 성품이 반영돼 있다. 예컨대 여호와 이레.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영생하시는 하나님 ( 21:33)’ 임을 배웠다. 그는 하나님이 공급자요 영생하시는 분임을 머리로만 알고 있었는데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그분의 성품을 훨씬 깊이 체득했다. 체험적 지식을 얻은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머리로 아는 지식에서 나오지 않는다. 거기서 시작될 수는 있지만 개인적 체험을 통해 비로소 생명력을 갖는다.

 ,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려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할 때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단순히 내 요구를 들어주시는 그분의 응답인가? 내 봉사와 섬김에 대한 칭찬인가? 내가 짠 계획이 잘 이루어지도록 하는 그분의 도움인가?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뜻과 다르다. 그분은 우리를 변화시키기 원하신다. 그분의 뜻은 우리를 당신께 이끌어 점점 그 아들을 닮아가게 하시는 것이다. 그분 마음에 합한 인도를 구하고 그분 계획에 내 삶을 맞추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분명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 자신의 길을 계시하시려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며 범사에 그분의 길로 걷는 법을 가르치신다. 하나님의 길은 완전하다. 그분은 무슨 일이든 사람들에게 거룩하지 않은 길로 걸을 것을 절대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자신의 이름이 더럽혀지게 그냥 두시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가 따를 수 있도록 길을 분명히 보이신다.

 또한 하나님께서 상기한 패턴과 취지로 말씀하실 때에 특별히 뭔가에 초점을 두고 말씀하신다. 그냥 대충 말씀하시면서 사람이 능력껏 알아들으라는 식으로 말씀하시지 않는다.

 하나,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보여 주신다.

구약성경 어디를 펴든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구체적 지침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제작 방식도 아주 구체적을 꼼꼼하게 일러 주셨다. 또한 성막은 어떤가?

하나님의 세밀한 인도는 구약에만 국한되지 않고 신약에도 계속된다. 전도자 빌립이 광야에서 이디오피아 내관에게 복음 전해야 했을 때, 아나니아가 다소의 사울을 만나러 가야 했을 때,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했을 때 등을 살펴보라.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얼마나 명백하고 구체적인지 의심할래야 할 수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전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방식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며,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식을 담은 지침서이기도 하다. 주님께 강하게 쓰임받은 사람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반드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던 이들이다.

 , 또한 하나님은 믿음을 요구하신다.

예수님을 진정 사랑하는지 판별하는 기준은 하나님 말씀을 받는 자세에 있다. 주님 말씀을 귀담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자들은 틀림없이 그분을 사랑한다. 하나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려는 의지는 하나님 음성을 듣는 데 필수요소이다.

 , 하나님은 단계적으로 인도하신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 경주다. 어떻게 시작하는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끝내느냐가 더 중요하다. 하나님이 내게 어떤 일을 원하시는지도 분명 중요하지만 그분이 원하시는 수행 방식도 중요하다. 완주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를 받을 때까지 좀 더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저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 12:1)’고 명하셨다. 처음부터 자세한 설명이 주어지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자기와 자기 후손에게 하나님이 주시려는 땅이 정확히 어딘지도 몰랐다.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을 25년이나 기다려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매걸음마다 자신에게 요구되는 바가 무엇인지는 분명하게 알았다.

 , 하나님은 우리가 주의깊게 듣고 행하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 말씀을 진지하게 대하기 원하신다. 그분이 일부러 세부사항까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실 때에는 우리더러 그대로 하라는 뜻이다.

 사울 왕의 중대한 실수는, 그가 하나님의 세부적 지시사항을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사무엘이 길갈에 와서 제사드리기 전에는 블레셋과 전투를 벌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사무엘은 때가 지나도 오지 않고, 블레셋 군대의 병력은 날로 늘어나 이스라엘 병사들의 사기는 갈수록 떨어졌다. 며칠을 기다리던 사울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자기가 직접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틀림없이 사울은, 중요한 것은 전투 개시를 위해 제사를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 이치에 맞게 행동한 것이다. 이 참을성 없는 행동 때문에 사울은 왕위를 잃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빈말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지침서요 하나님이 사람들과 어떻게 동행하시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는 증거가 성경에는 얼마든지 많다. 우리는 그분 말씀에 순종으로 반응해야 한다.

 당신이 지금 현재 하나님 음성을 듣고 있지 못하다면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갖기 바란다. 당신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실히 구하며 살고 있는가? 깨어 있어 그분이 주실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분의 최근 인도하심에 순종했는가?

 

하나님 말씀은 곧 당신의 삶이다.

......

 

제가 이 책을 통한 훈련을 받으면서 제 기도와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귀를 기울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해 주셨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셨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들었던 음성에 대한 예화를 하나 나누어 보겠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에 집에서 혼자 조용하게 기도하는 습관을 가져 왔습니다. 어떤 아침에는 너무도 졸려서 기도하다가 그만 잠들어 버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만 아침이면 무조건 일어나서 하나님께 먼저 나아가는 생활을 하려고 그런 습관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제 마음 속에 한가지 부담이 생겼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교회에 나가서 새벽기도를 교회에서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부담이 들었지만 교회에 나가는 게 번거롭게만 느껴져서 차일피일 하다가 결국 새벽기도 모임에 나가야겠다고 생각을 굳히고 몇 주 전에 처음으로 교회에 나가서 새벽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어느 자매님이 큰 소리로 기도를 하시는데 여간 방해를 받는 게 아니더군요. 한국어, 영어, 방언, 찬송 등을 번갈아 가면서 큰 소리로 기도를 하시는데 제가 도저히 제 기도에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한 10 분 정도 기도하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좀 더 기도드렸습니다.

 그 다음 주에는 제 기도가 너무 방해를 받는다는 생각에 제 임의대로 교회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혼자 조용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래도 제 마음 속에는 여전히 동일한 부담이 있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교회에 나가서 새벽기도를 드려야 하는데... 하는 부담이 계속해서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담이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하나님, 새벽에 교회에 나가서 기도드리는 건 제 기도가 너무도 방해를 받는데 그래도 나가야 하는지요?’ 하고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이놈아, 누가 네 기도를 하라고 새벽에 교회에 나가라고 하더냐? 그들을 위한 기도를 해라. 그들을 위로하라고 널 보내는 것이 아니냐?’ 여기에서 이놈아하셨던 것은 일종의 책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제 새벽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새벽 기도 시간 내내 교회에 모인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드렸습니다. 눈물로 기도하며 부르짖는 분들을 위해 저도 그들의 마음에 동참하여 함께 눈물로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어제 오늘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제 마음엔 평안이 넘치고 기쁨이 넘치며 찬양이 저절로 터져 나옵니다. ‘할렐루야를 외치고 싶어서 근질근질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상들과 같지 않습니다. 귀가 있어서 들으시고 입이 있어서 말씀을 해 주십니다.

(다만 한가지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께서는 이번 경우처럼 저에게 말씀하셨을 때 반드시 성경말씀을 그대로 반복해서 말씀하지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또 어떤 경우에는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성경말씀을 그대로 생각나게 하시고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적용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혹시나 어느 분께서 제가 들었던 하나님 음성이 성경말씀이 아니므로 자의적인 것이나 잘못 들은 것이라고 생각하시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티엘티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예수님과 교제하는 즐거움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