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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바울서신

[롬 8:33,34] 나는 의인인가, 죄인인가?

 

누가 감히 하나님의 피택자(被擇者)들을 고소하리요?!
의롭다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단죄할 사람, 누구리오?!
크리스토 예수님은 죽으신 분일 뿐더러 일으켜지신 분,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 분,
또 
우리를 위하여 중재하시는 분입니다!

(신약성경 로마서 8:33,34. 이하 성구들 사역)


[ 지난 주에 이어 이번 메시지도 매우 깁니다. 아마도 여탯 것들 중에 가장 긴 지도 모릅니다. 특히 자신이 의인인지 죄인인지 아직도 헷갈리는 분들은 참을 성 있게 읽어 주시길^^. ]

나는 의인인가, 죄인인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헷갈려 하는 이슈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기 전에야 우리는 다들 죄인이었지요. 주님께서는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신약 루카복음서/눅 5:32) 

의롭다 하신 분은 하나님!

그러나 예수님을 믿을 때-거듭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이마에다 예수의 이름과 의인의 도장을 찍어 주십니다(참조: 코린토B/고후 1:22, 에페소 1:13 비교: 요한계시록 7:3,4, 22:4). 또 우리를 영광스럽게 해 주십니다. (롬 8:30, 참고: 4:5,25, 코린토A 6:12). 주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롬 3:22,24)!

이런 의미에서..

의인(義認: 의롭다 인정해 주심. 칭의/稱義라고도 함)은
의인(義印)을 받아
의인(義人)되는 사건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의인(a righteous)이라고 확증해 주십니다.
예수 크리스토를 믿음으로써 지옥 갈 죄인 신세를 면한 의인은 이제부터 하늘나라 시민입니다(필리포 3:20). 의인은 세상/땅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요한복음서 17:14,16)!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순례자로 살아 가는 존재입니다(히브리서 11:13). 

그런데..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여전히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는 경우가 의인으로 고백하는 경우보다 불행히도 더 많습니다. 이미 거듭난, 많은 교우들이 이 문제로 혼동을 겪습니다. 일종의 정체성 혼란 또는 정체위기라고 할 수 있지요.

[ 여기서 "거듭났다" 함은..로마서 10:9,10에 따르면, 예수님이 유일한 구주/주님이심, 죽음에서 되살아나셨음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성령님을 모시게 된 감격과 확신 속에 살아 가는 참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을 확증하라는 교훈을 줍니다. 즉 우리가 거듭났음을 확증해야 한다는 뜻도 됩니다. ]

되뇌지만,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분명히, 예수 크리스토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선언을 받았다고 알려 줍니다.
오직 하나님이 선언해 주신 것이 참 신분이지요!
하나님은 성경 어디에서도 믿는 우리를 "의인 겸 죄인"이라고 헷갈림성 선언을 발표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 주장을 뒷받침할 성구도 단 한 곳도 없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사전엔 그런 이상한 낱말이 없습니다.

내 의가 아닌 크리스토의 의!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예수 크리스토로 말미암아 자신의 의로움을 스스로 나타내셔서, 당신께서도 의로우시고 또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의롭다 하시려는 것이지요(롬 3:25,26). 즉 우리가 의로움-의인임을 곧 하나님의 의로써 뒷받침 해 주고 보증해 준다는 뜻입니다. 내가 의인임을 하나님이 보장해 주십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바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므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롬 1:17, 3:28). 그래서 하나님과의 화해를 누리게 된 것이지요(롬 5:1).

그런데 그런 내가 다시 '죄인'이라니!
왜 갑자기 도로 죄인입니까?
언제, 어느 하나님이 그러시던가요??  
적어도 내 하나님은 그러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의인이 되고 나서도 '죄인'이라고 짐짓 말해도 하나님이 하신 선언은 결코 아닙니다. 내 느낌, 내 기분 대로 하는 '선언'은 거짓 선언, 가짜 선언이지요.
오직 성경이 말하고 성령께서 선언하신 내가 곧 참 나일 뿐입니다. 
그런 죄인의식은 하나님이 의롭다 해 주신 자신을 스스로 단죄함이고, 자기 뿐 아니라 남에게 죄인의식을 요구한다면 서로를 단죄함입니다! 스스로 붙여 놓는 딱지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더블 아이덴티티를 부여하신 적이 없습니다:

주 예수를 믿는 너는 이제부터 의인이다!
그러나 동시에 너는 죄인이다!
나머지는 알아서 하도록.

- 이런 황당한 이중선언을 하실 하나님이 아니시지요.
하나님은 이중적 가치관을 지니고 계시지 않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지대'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헷갈리우스'들의 창조자가 아닙니다. 예면 예, 아니면 아니오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의인이면 늘 의인입니다!
늘 의인일 뿐 다시 죄인이 아닙니다.
(주님을 배신하고 버리지 않는 한) 도로 죄인 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언만 참 선언일 뿐입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나 오직 하나님만 참되실 뿐입니다(롬 3:4). 
'신학' 이론들이야 뭐라고 한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신학'이 그런 선언을 한다면, 하나님을 바로 안다고 할 수 있겠나요.
우리는 성경대로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거듭난 우리는 의인입니다!

이것은 단지 선언일 뿐 아니라 실제로 크리스토님의 의가 우리의 의의 옷으로 입혀져(페트로B서/벧후 1:1 참고: 구약 이사야서 61:10) 사실상 우리가 "진노의 자녀"들인 죄인의 신분으로부터 의인의 신분으로 완전/영구 신분교체가 이뤄졌음을 가리킵니다(에페소 2:1-8 참조). 이 점은 모든 사도들이 확실히 밝혀 주고 있는 바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거듭난 사람들은 아직도 여전히 자신이 '죄인'인 줄 알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잠재의식으로나 기도할 때나, 심지어 무의식 중에도 그렇게 고백하곤 합니다. 교인들의 열이면 거의 아홉은 자신이 의인이라고 고백하기보다 '죄인'이라고 자임하고 그렇게 고백한다는 것은 경험으로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더구나 전반적으로 수줍어 하고 내성적인 우리 한국인들은 유난히 그런 경향이 더 많지요.
우리네 찬송가부터가 "..죄인 오라 하실 때에..", "이 죄인을 완전케 하옵시고"와 "죄인들은 눈 어두워 볼 수 없겠네" 등으로, 헷갈리기도 합니다. 교인들은 헷갈리고도 그런 대로 잘 견딥(?)니다.

물론 교회는 죄인들이 모여 와 구원받는 곳이고 따라서 이미 구원 받은 사람들과 앞으로 구원 얻을 사람들의 혼합체이니만큼 신분의 섞임은 당연하겠지요.

문제는 아무 구분 없이 똑 같이 죄인으로 느끼고 대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겉으로는 공평하고 형평성 있게 뵈지만 실은 옳은 공평/형평이 아니지요.
아직 거듭나지 못한 죄인들에겐 지금이라도 성경 말씀을 통해 거듭나지 못했음을 환기시켜주고 거듭남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고 기도와 말씀으로 북돋아주어서 당장 의인되게 해 줘야 합니다!

그리고 의인들에겐 죄인의식이 아니라 하늘나라 시민인 의인으로서의 신분과 정체성, 의무와 권리와 혜택을 적극 알려 줘야 합니다. 의인은 혼과 몸이 약해 죄를 짓더라도 하나님께 죄를 뉘우치고 용서 받으면 되며, 다시 '죄인'일 수 없음을 밝혀 줘야 합니다. 

죄인의식의 심리적 원인

우리가 의인으로서 의인의식보다 죄인의식을 더 갖고 살아가는 데는 여러 가지 다양한 심리적 원인이 있다고 추정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칭의를 받아 의인이 된 후에도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자신의 모습 때문입니다. 자신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죄를 지어 왔다는 자의식 탓입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회개해야 하므로 아직 '죄인'이라는 의식입니다.

    둘째로는, 실제로 교인이지만 거듭나지 못한 경우입니다.
자신이 거듭났는지 못했는지조차 잘 모르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구원의 확신도, 확증도 없이. 제 자신이 신학대학 초기에 한동안 방황한 바 있습니다. 그 확신이 없이. 믿긴 믿어도 아직 채 성령충만하지 못한 탓이기도 합니다.

    셋째로는, 거의 매 번 마귀의 참소를 받아 들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신자가 언제나 무슨 죄를 짓든 "야, 니가 무슨 의인이야? 죄인이지! 그런 죄를 짓고서도. ㅉㅉㅉ..뻔뻔하긴." 식으로 공격해 옵니다. 마귀는 이처럼 늘 우리를 참소하는 존재입니다.

    넷째로는, 늘 겸손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탓입니다.
상대적으로, 의인으로 자임하면 교만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감히 '의인'이라고 자임하거나 고백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의인'이라기엔 여전히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 더 겸손스럽고, 현실로서도 안전하다는 포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에 따라 '의인'으로 자임하는 사람들을 향해 속으로 손가락질 하기도 합니다. "네 주제에 무슨..?" 식입니다. 알고 보면, 이것은 마귀와도 같은 참소입니다.
우리가 의인임은 내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크리스토의 의로 말미암았다는 진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다섯째로는, 교회엔 아직 채 거듭나지 못한 죄인들(비신자들)이 있기에 그들을 왕따시켜선 안 된다는, 더불어 함께 동질감 느껴주기 의식도 있지요.
"나도 여전히 죄를 짓는데 차이가 뭐 대수겠냐..니나 내나.."라는 생각이 바탕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한 겨레니까 다 같은 죄인이다라는 뿌리 중심 잠재의식입니다.

    여섯째로는 잘못된 가르침 탓입니다.
더욱이 많은 전통교회 지도자/설교자/신학자들이 거의 한결같이 '죄인'이라고 자임할 뿐더러 교인들에게도 신자/비신자 구분없이 아직 여전히 '죄인'이라고 은근히 가르치는 탓입니다.
특히 사도 파울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롬 7:24)라는 장탄식, "나는 죄인 중에 괴수로다"라는 고백을 들곤 합니다. 그런데 과연 사도 파울이 그런 뜻으로 썼을까요? 원문을 보면, 크리스토께서 구원하실 대상 속에 포함시켜 그렇게 자임한 것입니다(티모테A/딤전 1:15. 쉬운성경 참조). 파울은 옛 샤울로서 스테판을 살인교사(간접살인)하고 성도들을 모질게 박해한 죄책감 탓에 죄인의 우두머리 의식을 평생 품고 살아 간 사람이 아니지요(참고: 행전 7:54-59, 8:1,3, 9:1,2,13,14, 코A 15:8-10).
다만 자격지심이 있어도 은총에 감사 감격하며 묵묵히 할 일을 다한 것입니다. 

이제 파울은 샤울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파울은 이젠 더 샤울이 아니지요. 
샤울은 어제의 샤울일 뿐입니다. 
의인은 이젠 더 죄인이 아니지요.

그런데 어떻게 된 게 신자로서 마땅한 의인 의식을 지닌 사람은 으레 파리새인처럼 목이 곧고 교만한 사람 내지 '또라이'(?)로 취급 받고, 죄인의식을 지닌 사람은 가슴 치며 회개한 세무관처럼 언제나 더 겸손한 사람으로 점수가 매겨집니다(루카복음서 16:13).
물론 파리새 같은 사람이 없을 수야 없지만 의인을 자임한다고 다 획일적으로 보면 안되지요. 겸손해지려면 누구나 다시 옛 죄인 신세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말인가요?! 

되뇌지만, 우리의 의는 우리 자신들의 의가 아닌, 크리스토의 의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관대 감히 의인인 형제의 의를 공박하고 비방하고 단죄한다는 말입니까?!

구약인들은 의인, 신약인들은 '덜 의인'..'죄인'?

저는 퍽 어린 시절부터 성경이야기 읽기를 즐겼습니다. 성경 자체는 어렵지만 부모님이 주일학교 교사로서 매년 연말 새로 받아 오시는, 삽화가 든 성경 공과책, 여름성경학교 교재 등을 동화 삼아 몇 번이고 독파하고 섭렵하곤 했습니다. 그 때 자주 발견하던 것 하나가 에놐/노아/아브라함/롵 같은 구약인들이 '의인'이었다는 표현이었지요. 어려운 개념이면서도 눈에 익었습니다.

사춘기를 거쳐 신약성경을 음미하기 시작하던 청소년 시절, 마음에 떠오르는 물음 한 가지는..구약인들은 의인이었는데 현재 교회 다니는 신약인들인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내게 결정적인 해답을 해 주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물론 당시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던 때이기도 했지만.

세속 문학에 탐닉하고 철학 정신을 즐기며 자랑 삼던 젊은 시절. 성경을 읽어 봐도 철학적 부분들이 더 어필해 오곤 했습니다. 인생이 더 허무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죠.
시인은 탄식합니다.

"..의인은 없구나, 단 하나도!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네.
모두 길을 벗어나 다 함께 쓸모 없어졌네.
선을 행하는 사람이 없네, 단 하나도!" (롬 3:10-12)

그래서 "맞다, 맞아! 우리는 역시 다 죄인일 뿐야. 내 꼴을 보면 알잖아.."식의 결론으로 생각을 매듭짓곤 합니다. 자칫 이같은 죄인의식으로 우리의 삶은 충일(充溢)해지곤 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이 단지 죄를 짓는다고 해서 다시 '죄인'이라면..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간이고 믿은 후에도 분명히 죄를 지은 노아나 욥, 아브라함이나 롵, 모쉐 등은 왜 '의인'으로 지칭 받았는지 의문스러워집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더 신령했기에 의인이고, 우리는 덜 신령하기에 죄인인지?
성경은 그들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 "그들은 (결국) 죄인이었더라"고 단죄한 게 아니라, 그들을 의인으로만 부른 점을 우리는 눈여겨 봐야 합니다.

거듭나고 구원의 확신을 갖고 나서도 죄를 짓는 자신의 모습에 우리는 "난 아직 죄인~"이라는, 의인도 죄인도 아닌 중간지대에 안주(?)하게 됨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언제나 더 '겸손'해 뵈고 여차하면 더 안전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겸손은 우리의 착각 내지 헛 겸손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의, 참된 의미의 죄인의식이 아니라..거듭나고 나서도 정체성을 잊어 버렸거나 혼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우리가 아직/여전히 '죄인'이라면, 주님이 나를 의인으로 인쳐 주신 그 공로는 어디로 갔나요?! 주님이 그 분의 의로써 나를 의인으로 만들어 주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공로는 어디 갔냐는 말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피와 물을 쏟아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날 여전히 죄인으로 머물게 하는..그런 쓸모 없고 빈약하고 헛된 공로였나요?
하나님의 의인(義認=칭의/稱義: 의롭다고 선언해 주심)과 주님의 의란, 우리를 여전히 죄인으로 놔 두실 정도로, 의인인지 죄인인지 잘 구분도 못할 정도로 얄팍했던 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구약인들보다 더 나은 게 뭔가요?! 아벨/에놐/노아/욥/아브라함/모쉐 등 구약인들은 의인들이고 우리는 죄인이라면, 새 언약 아래 사는 우리가 옛 언약인들보다 나을 게 뭡니까?
심지어 소돔/고모라에 제 발로 들어가 살다가 아브라함의 도움기도로 간신히 살아남고도, 아내를 소금기둥으로 잃고 취중/몽중에 두 딸과 동침해 모압/암몬 족의 선조가 된 롵조차도 의인인데(페트로B/벧후 2:7,8 참고: 창세기 19장 온 장 참조)..우리는 뭐냐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설령 죄를 짓더라도 의인이지, 죄인이 아닙니다!
의인됨은 한 번 죄를 지었다고 취소되고 다시 죄인 신세로 돌아가는 그런 호락호락하고 얄팍하고 가벼운 신분이 아닙니다. 의인 됨은 '종이호랑이'가 아닙니다.

우리가 날마다 짓기 쉬운 죄는 뉘우치고 용서 받으면 되는 겁니다(요A 1:9).
그리고는 의인답게 담대해지는 겁니다(히 4:16, 엪 3:12). 

그러나 현재의 죄 때문에 죄인이 도로 되다뇨?!
죄인을 자임하다뇨?! 의인은 그런 헛 죄인의식에서 해방돼야 합니다.

죄 짓기가 핵심 이슈가 아니라..'죄인'으로서의 자임과 고백과 자기선언이 이슈이고 문제입니다. 거듭난 우리의 신분의식은 여전히 의인임을 알고 고백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여전히 옛 죄인으로 알면서 살아 가면 곤란하지요.

믿는 우리는 성도입니다.
성도가 누군가요? 거룩한 사람들 곧 죄악 세상과 구별된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여전히 죄인이라면, 그래서 아직도/날마다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산다면, 세상과 똑 같지, 세상과 구별된 게 도대체 뭡니까?

의인들의 이같은 죄인의식, 헛 겸손(콜로세 2:18,23)은 심각한 정체성 혼란을 가져 오며..무엇보다도 성경이 의인들에게 약속해 주는 제 몫의 혜택을 찾아 먹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거지인가, 왕자인가?  

우리가 자주 듣던 것 한 가지가..'거지왕자' 이야기나 그 비슷한 얘기들입니다.
진짜 거지소년-가짜 왕자-을 왕실에 데려다 하루아침에 부자/왕자로 만들어 주지만, 꿈 같이 황홀한 마음 뿐 내적 의식과 행동은 여전히 걸인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진짜 왕자-가짜 거지소년-은 어쩌다 호기심에서 빈민굴 같은 세상으로 새어 나와 구르며 살아가지만, 자신은 이 나라 나랏님인 아버지의 아들이요 왕족으로서 왕궁에서 떵떵거리며 살던 몸임을 꿈에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누더기옷을 걸치고 굶지 못해 깡통을 들고 다니긴 하지만 그의 행동거지와 말투는 사람들을 놀라게, 웃음 나게 할 정도로 뭔가 모르게 귀티가 나고 의젓하고 당당합니다.
"내 아버지는 우리나라 왕이야! 진짜야..참말이라니깐! 두고 봐. 다 알게 될 거야" 하는 부르짖음이 속에 차고 넘칩니다. 비록 주위 사람의 비웃음과 조롱을 받지만.

바로 이것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하늘나라 왕자/공주들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죄악세상에서 천민/거지로 뒹굴던 시절 탓에 진짜 왕자의 티를 내기보다는 진짜 거지-가짜 왕자의 삶을 재연하며 살아가기가 일쑤입니다.
그래서 왕이신 하나님이 하늘 왕실의 온갖 좋은 복과 넘치는 것들을 베풀어 주셨건만, 정작 왕자/공주들인 우리가 여전히 걸인의식 속에 갇혀 은총을 제대로 맛보거나 누리고 살아 가지 못합니다. 내가 왕의 아들됨, 딸됨을 선언하고 누리기 보다는 제대로 인식조차 못해 정체성/신분을 혼동하며 살아 간다는 말입니다. 

    "아이고, 임금님. 저를 데려 오셔서 여기 살게 해 주신 것만도 고맙습니다! 전 여전히 죄인이고 아직도 거지예요. 그저 내쫓지 마시고 왕궁 안에 살게만 해 주셔요. 딴 건 다 괜찮습니다. 여기 있는 것조차 황송해요. 저는 아직 거지소년이라서..ㅠㅠ"

우린 아직도 흔히 이런 태도라는 겁니다. 생각과 마음 속으로는 아직도 별 변함 없는 죄나라, 거지나라 출신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자주 죄를 지어도-옷에 때가 묻고 심지어 누더기를 걸치게 될 망정-의인입니다! 왕의 아들딸-하늘 나라의 왕자와 공주-입니다! 실수와 과오를 범한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딸이고 왕자왕녀이며 따라서 의인들입니다. 설령 우리가 죄인나라/거지나라에 살다 입양돼 온 양자/양녀이더라도 이 의식과 신분을 단 하루라도 한 순간이라도 잊어선 안 됩니다.

의인이 됐으니 죄를 안 짓는다는 게 아니지요. 하지만  "난 아직 죄를 짓네"와 "난 여전히 죄인이다"라는 말과는 전혀 다릅니다!

내가 왕자다, 의인이다라는 의식이 없으면, 당연히 거지소년처럼 굽신굽신거리게 되고 왕자로서 당당함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물며 왕궁 안의 좋은 것들을 대할 때마다 왕실의 일원으로 떳떳이/당당히 누릴 것으로 여기지 않고 왠지 어렵고 뭔가 죄스럽고 마냥 황공하고 거북살/부자연스럽고 불편한 마음을 갖기가 쉽습니다. 

의인으로서의 특권과 혜택

죄인의식을 지니고 살면, 우선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의 자원, 나의 복, 내 것을 챙기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성경에 약속되고 보장하는 무한한 자원이요 보고(寶庫)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고귀한 이름을 우리-신자들 곧 교회-에게 주시면서 "무엇이든지 구해라"라는 단서를 붙이셨습니다. 왕으로서 입양하신 우리 왕자들과 공주들, 왕족들에게 주신 신분증이고 신실한 약속이고 (큰 죄가 없는 이상) 언제나 보장된 권리입니다. 
당좌수표와 같아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날인하여 사용하면 자동 '결재'됩니다.

만약 거듭난 사람이 여전히 '죄인'이라면, 그리고 여전히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한다면..그는 많은 츠러블을 안고 살게 됩니다.

의인의 신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기기 쉽게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의인이 혀와 입술로 하는 믿음의 고백과 선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인'으로서 늘 자임한다면..다만 죄인으로서의 고백인 회개만 있을 뿐입니다.
담대한 믿음의 고백과 선언을 할 수 없거나 어렵게 됩니다.

우리의 혀와 입술엔 긍정적/부정적인 강력한 힘과 권세가 있습니다.
여기에 관한 말씀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몇 가지만 들지요.

성경 말씀에 따르면, 사람은 실상 혀와 입술의 열매를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성경 진리에 대한 긍정적인 고백은 긍정적 열매를, 부정적인 고백은 부정적인 열매를 낳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맨날 의인 아닌 '죄인'으로서 자임하고 고백한다면 자연히 성경 말씀을 긍정적으로 강력히 고백하고 선언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우선적으로 부정적/소극적인 고백부터 하게 됩니다. 따라서 죄인의식이 앞서면 앞서는 만큼, 가지면 갖는 만큼 할 수 있는 것보다는 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아집니다.

한 번 볼까요?

"또 그대들이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내가 이뤄 줄 테니, 이는 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오. 만약 그대들이 내 이름으로 어떤 것이든 내게 구하면, 내가 이루겠소." (요한복음서 14:13,14)

"그대들이 내 속에 머물고 내 말이 그대들 속에 머물면, 그대들이 바라는 무엇이나 구하오. 그대들에게 그대로 될 테니." (요복 15:7)

"..그래서 무엇이든 그대들이 아버지께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그 분이 그대들에게 주실 것이요." (15:16끝)

"내가 참으로 참으로 그대들에게 말하오! 무엇이든 그대들이 아버지께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그 분이 그대들에게 주실 것이오. 여태까지는 그대들이 아무 것도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소. 구하오! 그대들이 받을 테니 그대들의 기쁨이 가득할 거요." (16:23,24)

"그 날에는 그대들이 내 이름으로 구할 테니, 내가 아버지께 그대들을 위하여 구하겠다고 그대들에게 말하지는 않소." (16:26)

놀랍게도 주님의 이 말씀들은 마르코스 요한의 어머니의 다락방에서 마지막 만찬을 하신 뒤 장시간 계속하신 교훈들 속에서 거듭거듭 되뇌신 것입니다(요한복음서 14-16장. 17장은 기도).

물론 이런 약속들은 우리가 그 분의 제자 노릇을 제대로 하고 열매를 맺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린다는 궁극적인 단서가 붙어 있지요.

그 뿐인가요. 주님은 부활하시고 나서도 그 분의 이름으로 중대한 약속/예언들을 하십니다.

"또한 믿는 사람들에겐 이런 표징들이 따를 것이오: 내 이름으로, 그들이 악령들을 내 쫓고 새 방언을 말할 것이오. 그들이 뱀을 집어 올리고 치명적인 독물을 마셔도 그것이 그들을 해치지 못할 것이며 환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것이오." (마르코스복음서 16:17,18)        

그런데 내가 죄인의식을 갖고 있으면 이런 것을 할 엄두나 날까요? "나야 죄인인데 뭘.." 하고 한 발짝 물러서고 말 겁니다. "주님, 저는 죄인인데 그런 용기 안 나네요. 죄인이나까 죄인으로 그냥 있겠습니다. 죄인으로서 그저 그렇게..조용히 살아 가겠습니다."
- 이렇게 되기가 십상일 겁니다. 죄인의식이란 게 그렇게 무섭습니다. 의인을 무력하게, 무능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영적 싸움에서 무력감을 갖게 됨

의인들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일곱 가지 완전무장(온몸갑옷)은 또 어떨까요?

    진리의 허리띠, 의의 가슴판(호심경), 평화의 복음으로 예비된 군화, 믿음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 매일 기도와 간구, 성령님 안의 기도.

죄인의식을 갖고 있으면, 위의 무기를 활용할 수 있을까요? 의의 가슴판 부터가 죄인의식과는 정반대 개념입니다! 내가 현재 죄인의식을 지니고 사는데 어떻게 이런 무기를 담대히 쓸 수 있다는 겁니까!? 그러므로 죄인의식을 갖는 한, 영적 싸움판에서 승리하기 보다는 무력해지기가 더 쉬울 터입니다.

이런 것들은 죄인의식이 가로막는 무수한 것들 중 적은 사례일 뿐입니다.


죄인의식을 갖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지만..구태여 본인이 갖겠다는 거야 어쩌겠습니까. 그야 문화시민의 자유이겠지요. 그러나 남에게까지 죄인 의식이 당연한 양 도시락 챙겨 다니면서까지 거듭난 남에게 죄인의식을 열심히 불어 넣어 주고, 더불어 함께 죄인의식을 나누고 갖기를 강요하는 것은 우습습니다.
마귀가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한 방법이기 떄문이지요. 
본인만 아니라 거듭난 신자인 남들에게까지 죄인의식을 강조/강요하는 것은 곧 남을 단죄함과도 같습니다.  

돼지들에게 먹이를 줄 때 마다 매 번 막대기로 머리통을 후려쳐 보십시오. 언뜻 미련해 뵈는 돼지들이지만 속을 만큼 속은 다음 언젠가부터는 먹이를 찾아 들지 않게 됩니다. 먹으러 가 봐야 또 얻어 맞는다는 정도의 지각이 생기기 때문이지요.

주일예배 때마다 또는 기회 있는 대로 강단에서 교인들에게 죄인의식을 심어 보십시오.
어느 정도 지나면 찾아 들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죄인의식을 주는 곳이요, 교회에 가 봐야 다들 똑 같은 죄인이니 교회나 세상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지요. 그렇지 않더라도 의인으로 살려는 의식 없는 무력한 죄인들의 집단으로 머물게 돼 버립니다. 

죄인의식을 갖게 되면 교인이 그만큼 할 수 있는 것들이 줄어 드는 대신 할 수 없는 것들은 늘어 갑니다.
영적 구심점을 잃게 되거나 약해집니다. 자신이 진정 의인인지 죄인인지 헷갈리기 때문이지요. 자신이 세운 집이 바위 위에 굳게 선 집인지, 모래성인지 늘 영적 자신감이 없는 탓이지요. 닻줄로 튼튼히 묶인 배인지, 떠돌며 표류하는 배인지 감이 잘 안 잡힙니다. 

예수 이름은 어떤 이름?

우리가 의인으로서 갖게 된 그 분의 이름이 어떤 이름입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분을 드높이 올리셔서 모든 이름 위의 이름을 그 분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라는 이름에다 하늘 존재들과 땅의 존재들, 그리고 땅 아래 존재들의 무릎마다 꿇고 혀마다 고백하기를 '예수 크리스토는 주님이시다'라고 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 것입니다." (필리포 2:9-11)

예수님의 이름이 그런 이름입니다!
그래서 신자-믿는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기만 하면 악령들도 벌벌 떨며 복종하게 돼 있습니다(맑 16:17), 믿거나 말거나. 천사들도 예수님의 이름 아래 우리의 수종을 들게 됩니다(히브리서 1:14). 마치 키가 작아 보이는 경찰관이 손만 쳐들거나 조그만 경찰차가 뒤에서 '뽁! 뽁!' 경적음만 울려도 질주하던 거대한 트레일러 트렄들이라도 일시에 서야 하듯 예수님의 이름 앞에 복종해야만 하고 복종하게 돼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루 헤아리기가 어려울 만큼 수많은 약속들이 있습니다. 그 모든 약속들이 믿음과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의 것으로 주어져 있다는 게 성경의 언약입니다. 농담이나 장담 차원이 아닌 절대 보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의인이 아닌 죄인의식을 갖고 이 전능한 이름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까요? 예수의 이름에 담긴 무한한 자원을 의인의식을 갖고서도 제대로 미처 챙겨 사용하지 못하기 일쑤인데, 하물며 죄인의식을 갖고 그것을 사용할 생각이나 나겠냐는 말입니다. 힘들지요.     

우리가 의인의식 아닌 죄인의식을 갖고 있으면, 이런 권리와 특혜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누리긴커녕 "아고~ 예수님 믿고 구원 받은 것만도 감사한데 무슨 그런 것 씩이나..? 그리고 그런 거 바라면 다 기복주의, 번영신학이니까..모른 체 하고 살 거야" 하게 됩니다.

죄인의식은 종교생활로부터

그러므로 성경의 무한한 약속과 은총들은 자연히 활용되지 못한 채 오직 의인의식을 지니고 활용할 소수의 신자들만을 위해 묵혀지게 되고..의인이면서 죄인의식을 지닌 사람은 "저는 모르니까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다 하소서!"라고 방임주의로 머물게 되지요.

나머지는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적당히 살면서 막연히 완성과 완전이 오는 하늘나라만 기다리고 산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살든지 일찍 죽든지 다 좋은 거야"가 됩니다. 알고 보면 예수님을 믿는다 뿐 세속인들이 갖는 '퀘 세라 세라' 내지 '될 대로 되라'주의와 과히 다르지 않지요. 그것은 종교생활이지 신앙생활이 아니지요.

아닌 게 아니라 종교생활은 우리에게 늘 죄인의식을 요구합니다.
제도 중심 교회가 교인들/신도들에게 추종을 요구하는 주된 방법 중 한 가지가 그겁니다. 날마다 또는 주일아침이면 죄인의식을 갖고 어둡고 구슬픈 얼굴로 미사에 참여해야 하고 사제가 하는 고백성사나 사제가 주는 성체가 아니면 왠지 께름칙하고 떨떠름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성경 말씀보다는 눈에 보이는 제도 중심 교회와 모범스러워 뵈는 인간들을 더 의지하게 만듭니다.

그대는 죄인이니라. 죄인은 죄인답게 죄를 고백하고, 날마다 죄인으로서 죄스럽게 살아가야 죄인답느니라. 그렇게 죄인다운 죄인으로 살면서 날마다 참회하고 바지런히 성체를 받아 먹으면서 (우리) 교회와 사제들을 의지하다 보면 언젠가는 의인 비슷해질 날도 있음이야.
착한 일 많이 하고 이름을 떨치다 보면, 언젠가 그대가 복자가 되고 성인이 되고 더 나아가 수호성인도 될지 누가 알리오? 그러니 날마다 죄인으로 살아 가게나. 그렇지, 그렇지! 겸손하게 더 낮아져서 날로날로 늘, 더욱 죄인의식 속에 살아가오. 그게 마땅한 종교생활이고 교회생활이거니. 암, 그렇고 말고!.

이런 식입니다. 죽고 나서야 비로소..그것도 정말 '착한' 일 많이 하고 동네방네 이름을 떨쳐야.. 그것도 모자라 수많은 고인 후보자들 중 찾고 뽑고 추리고 골라 잡아 '성자'나 '복자'로 승격시켜 주는 겁니다. 그것도 한낱 인간에 불과한 교황의 선임으로 말입니다.
천주교회는 성도 즉 "거룩한 사람" 되기가 그렇게 어렵습니다! [반면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성인(聖人)/성자(聖者)/성도(聖徒)라고 말하지요.]

그러니까, 땅에 사는 동안은 늘 죄인으로 있으란 얘깁니다. 그렇게 해서 성당과 천주교와 사제 곁을 떠나가면 영영 '구원' 받지 못할 듯한 두려움의 영을 지닌 존재로 묶여 살아야 하는 게 제도 중심 교회 신도입니다. 천주교회는 의인과 죄인, 속인과 진짜 성인(=세상과 구별된 사람)의 구분이 가장 박약하고 막연한 곳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다 죄인이다.
죄인을 철저히 죄인이게 하라!
그러나 예수님만 믿으면 의인이 된다.

이것은 성경교훈이지만..

"너나 나나 다 죄인이다.
믿거나 안 믿거나 다 죄인이니 철저히 죄인이게 하라.
영영 죄인 의식 속에 머물게 하라.
계속 죄인으로 살다가 죽고 나서 '운'이 좋으면(?) 성인도 되게 하라."

이게 제도 중심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제도 중심 교회 교인들이 보기엔 앞에 나서서 미사를 집전하고 고백을 받고 '성체'를 주고 성사를 베풀고 이마 한 가운데 종려재를 발라 주는 사제들이나 그 대표인 교황만 은연 중 의인으로 보입니다. 제도 중심 교회 지배세력은 은근히 그런 절대 유일의(唯一義)적 전시력을 거머쥐고 과시합니다. 심지어 '면죄부'까지 발행합니다. 
제가 상상으로 꾸며내는 말이 아니라 실제 현실입니다. 

그러나..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의인으로서, 순교가 강요되는 상황이 오지 않는 한 지상에서 되도록 오래 살면서, 말씀과 믿음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상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온갖 은총과 혜택과 복, 곧 받을 것을 받고 챙길 것을 챙기고 누릴 것을 누리면서 교회와 주님 나라, 복음전파에 최대한 기여하다가 주님 오실 때 맞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할렐루야.

많은 교인들의 오해와는 달리, 이건 통속적인 세속의 향락을 누리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건 단순히 성공주의/번영주의/세속주의가 아니지요.

우리가 의인으로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믿음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은 무한합니다. 한 마디로, 모든 것(all things & eveything)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성령 안에서 말합니다.

"믿음 없이 그 분을 기쁘게 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심과, 그 분은, 그 분을 찾는 사람들의 보상자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히 11:6)

제가 자주 드리는 귀띔이지만, 여기서 '보상자'(報償者)에 해당하는 원어 '미스타포도테스'는 신약 성경 전체에서 유일하게 여기만 나온 낱말로, 포상해 주는 '시상자'(施賞者)가 아니라, 일꾼이 마땅히 받을 대가를 치러주는 고용주를 가리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그 분께 나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 믿음에 대한 대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가 맨날 죄인의식을 갖고 죄스럽게 살아 간다면, 이런 대가를 꿈이나 꿀까요? 쉽지 않지요. 

시인은 뭐라고 선언합니까?

"동이 서에서 멀 듯 그 분은 우리 죄악을 우리에게서 멀리 치워 버리셨다네!" (시 103:12)

그렇다면 동이 서에서 멀듯 의인의식도 죄인의식으로부터 먼 것입니다.
의인의식과 죄인의식을 서로 교체할 수 있는 비슷한 것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지킬 박사 겸 하이드 씨처럼 내가 의인인 동시에 죄인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우리가 맨날 죄인의식을 지니고 살면, 그런 하나님의 자녀, 하늘 왕족으로서 당당한 권리와 특혜, 복과 은총을 누리고 살게 될까요? 의인의식을 갖고도 쉽지가 않은데 죄인의식으로선 그렇게 잘 되지가 않지요. 힘듭니다.  

의인의 위치는 하늘!

우리의 위치, 의인의 위치가 어떤 것인가요?
먼저 우리의 의이신 예수님의 위치를 한 번 볼까요?

"그런 대사제(=대제사장)야 말로 우리에게 걸맞습니다! 거룩하시고 무죄하며 흠이 없고 죄인들과 구별되시며 하늘보다 더 높여지신 분입니다." (히 7:26)

분명히 주님은 죄인들과 구별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존재들인가요?

"그리고 크리스토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 분과 함께 일으키셨고 그 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에페소 2:6)

예수 믿는 우리가 어떤 존재라고요?
예수님과 함께 이미 하늘에 앉혀진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죄인들과 구별되신 분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면 어떻게 그 분과 함께 하늘에 앉힌 바 될까요? 어림 없는 일이지요. 오직 의인이라야 가능한 일입니다.
죄인은 교회 안에는 앉을 수 있고 교회는 죄인들이 와서 의인으로 변화받는 곳이지만 죄인 그대로는 하늘나라에 앉히울 신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과 함께 하늘에 앉혀진 우리가 어떻게 죄인의식을 갖고 살 수 있을까요?
왜 그래야만 하는 겁니까?

그렇게 볼 때 의인 된 우리가 죄인의식을 지님은 곧 참 생명을 지닌 의식이라기엔 순전히 신학적 이론이나 종교심에서라고 결론 짓게 됩니다.

이런 깨달음조차도 죄인의식을 갖고 있으면, 참 어렵습니다.

나의 참 실존인 영

새삼 되풀이합니다만..알고 보면, 성경은 어디에도 우리가 의인 겸 죄인이라고 선언했거나 시사한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음을 우리는 유의해야 합니다!

더욱이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누구든 죄를 짓는 사람은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죄는 불법이지요..그 분 안에 사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누구든 죄를 짓는 사람은 그 분을 본 적도 없고 안 적도 없는 사람입니다..죄를 짓는 사람은 마귀에게 속해 있습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짓기 때문이지요..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누구든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의 속에는 하나님의 씨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났기에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요한서신A/요일 3:4-9)

그런데..한 편으로는 요한이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들을 속이는 것이고 진리가 우리 속에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들을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이니 그 분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않습니다." (요서A 1:8-10)

그렇다면 요한은 자체 모순된 것일까요? 그게 아니지요.
위 말씀을 우리가 곰곰히 묵상해 보면 전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핵심은 우리는 영/혼/몸의 3차원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과의 친교가 끊어져 있는 상태로 영이 사실상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거듭나 영이 되살아난 사람은 혼과 몸이 약하여 죄를 지을 뿐입니다.
내 본체이며 본연의 존재인 영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참 존재는 영이지, 혼이나 몸이 아닙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참 내가 아닙니다. 거듭나서 영이 살아 있는 사람은 더구나 그렇습니다. 

거듭난 영은 성령님이 지배하시므로 [ 예수 크리스토를 부인하기까지는(!!) ] 죄를 지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거듭난 사람의 영은 죄를 짓지 못하기에 요한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나의 참 자아는 영입니다. 내 속사람이 참 나입니다.
나는 혼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몸 속에 살아 갑니다. 몸은 나의 장막/집이지요.

그렇다고 의인이 절대적인 존재는 아닙니다. 절대무죄할 수 있다면 사람이 아닌 신이겠지요.
의인도 그야말로 죄인으로 타락하는 길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크리스토를 부인하고 부정하는 것. 성령을 훼방하면서 현저히 주님을 욕 보이는 것입니다. 좋은 씨를 받고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사람들이지요(히 6:4-8 참조). 또한 마태복음서 7:22,23의 주인공들처럼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좋은 것들을 활용하면서 뒤로 호박씨를 까듯 슬슬 딴전을 피우고 하나님 아닌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늘의 온갖 좋은 것을 맛보고 타락하지요. 그런 사람은 마침내 예수님을 '저주할 대상'으로 여기는 대신 싸탄을 섬기게 됩니다.

그리고..

거듭난 사람의 영이 어떻게 절대로 죄를 안 지을 수 있냐고 하는데..
거듭난 영이 절대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절대자이신 성령님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잊어선 안되지요!
거듭난 영이 주님을 배신하지 않는 이상은 성령님은 머물러 계십니다.
성령님이 영을 지배하는 한, 거듭난 영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이 하는 말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거듭남은 별 의미가 없고 성령님도 그 분의 다스림도 무력하시다는 얘기 밖에 안되지요.
 
물론 거듭난 후에 타락하는 사람들의 예를 우리는 봅니다.
바로 파울과 동역하다 세상에 좋아 이리저리 떠나간 데마스와 같은 사람들이지요.

만약 그런 사람들 때문에 거듭난 사람들도 성령님이 계시건 안 계시건 '죄인'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역으로..절대자이신 하나님이 정성껏 빚어 지으신 태초의 순수무구한 아담/하와가 어떻게 죄인이 될 수 있냐고, 그럼 아담/하와가 처음부터 죄인이었냐고 물을 수밖에 없지요.

거듭난 우리는 의인입니다.
죄인이 아닙니다.
짓는 죄는 하나님께 뉘우치고
용서받아
돌이키면 되는 겁니다.
죄를 짓는다고 해서
다시 죄인으로 돌아가는 게 아닙니다.
의인이란 게 그렇게 가벼운 신분이 아닙니다.

티엘티 독자들은 모두
거듭나서 의인들로
세상의 하늘 나그네로서
주님 오실 때까지
의인의 신분과 혜택을 맘껏 누리며
살아가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