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에 나타나는 고대의 코린토(고린도) 교회를 비판하다 못해 비난하는 사람들이 흔합니다. 비평 일변도이기 쉽습니다.
[ 코린토교회에 관해서는 신약전서 코린토A/B(고전/고후)서 참조 ]
그러나 코린토교회 비평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글에서 지적하는 코린토교회의 '문제점'을 그 필자도 기꺼이 고쳐 나가는가? 아니면 대중과 '아류'에 편승해서 그냥 고쳐 나가는 척 하는가?
역사 상 후대의 교회들 또는 현실 교회가 코린토교회보다 훨씬 더 추하고 모자랄진대, 코린토교회보다 기본적으로라도 더 나은 교회는 실로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코린토교회를 먼저 사랑하면서 긍정적/부정적으로 공정하게 보았던 사도 파울보다 더 나은 지도자도 거의 없다고 생각됩니다.
왜 그렇게 뵈는지 한 번 함께 살펴 볼까요?
흔히들 코린토교회에 관하여 저작(咀嚼)성 글을 쓰는 사람들은..코린토교회가 방언을 활용하는 교회였기에 현대 방언/은사에 대하여 무엇이든 반박하기 위하여 에둘러서 코린토교회 전체를 싸잡아 방언/은사까지 함께 비판합니다. 즉 핵심 비판 대상은 방언/은사이죠. 그러면서 코린토교회의 특정 명사 중심주의나 한 교우의 간음 사건을 대거 부각시키면서, 역시 방언/은사 비하와 폄하 쪽에 힘을 실으려고 저작(咀嚼)을 해댑니다.
결국..코린토교회는 사상 최악의 교회, 가장 지저분한 교회, 가장 저질적이고 수준 낮은, 서러운 교회로 격하되고 맙니다. 그러나 과연 사도 파울이 객관적으로 코린토교회를 그렇게 평가하고 폄훼할 뜻으로 코린토 서신을 썼을까요........?
사실, 위에서 뜬 물음들을 우리 자신들에게 적용/대입해 보면..우리네 현실교회는 코린토 교회 앞에 낯을 들 수가 없습니다.
기억하십니까..주님의 이런 역설적인 말씀들을?
화가 너에게-벹사이다!
만약 튀로(두로)와 시돈에서, 너희 가운데 행해진 그 권능(들)이 행해졌더라면 그들은 이미 베옷과 재 속에서 뉘우쳤을 터. 더구나 너희에게 말하지만, 심판 날 튀로와 시돈이 너희보다는 더 견딜 만할 것이다.
너, 카페르나움! 네가 하늘까지 높아질 거 같으냐? 지옥까지 낮아질 것이다!
네 가운데 행해진 그 권능(들)이 소돔에서 행해졌다면 그곳이 오늘까지 남아 있으리. 더구나 네게 말하지만 심판 날 소돔 땅이 너보다는 더 견딜 만할 것이다! (마태복음서 11:21-24. 사역)
자..코라진과 벹사이다, 카페르나움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주님께서 애쓰고 힘들여 가장 권능을 많이 베푸신 유다의 도시들이었건만, 강퍅하여 회개도 하지 않았기에 저주에 가까운 책망을 받은 곳입니다.
반면 튀로와 시돈은 어떤 곳입니까? 본래 우상을 섬기던 이웃의 이방나라였습니다.
튀로(Tyros, 한글 '두로', 히브리어 '쪼르')는 해양/무역 강국으로, 이교 신을 섬기는 이방나라였으나 한때나마 이스라엘과 친교했지요. 건축기술이 발달하고 백향목이 넘쳐 슐로모 당시 예루샬렘 성전/왕궁 건축에 이바지하기도 한 뒤, 오만하기 그지없는 나라로 대언자에 의해 싸탄에게 빗대이기까지 한 나라였지요(에제키엘=에스겔 28:15-17. 이 부분은 문맥 상 인간인 튀로 왕에게 해당되는 성구가 아님).
튀로와 쌍둥이 격인 도시국가 시돈은 온갖 우상으로 유명했지만 슐로모가 연혼한 대상이었고..튀로와 함께 당대 최고급 목재인 백향목(= 레바논 삼나무)으로도 유명했지요. (삼나무는 때로 목이 곧은 교만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주님 당대에나 사도시대 때 복음이 전해졌고 신실한 신자들도 있었습니다(맑 3:8, 7:24-31, 행 21:3-7, 27:3).
주님이 당대 도시들로부터 바라신 것은 겸허와 뉘우침, 그리고 믿음이었지요.
소돔은 어떤 곳입니까..우리가 너무나 잘 알지 않습니까. 자매도시 고모라와 함께 온갖 윤리적 타락상을 보이다 결국 유황불로 잿더미가 됐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심판날에 소돔이 오히려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하십니다. -- 두렵지 않나요, 이 말씀?
주님의 역설적인 말씀은 이 뿐만 아닙니다.
심판날 남쪽나라 여왕(= 쉐바)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그(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봐라, 슐로모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마태 12:41,42)
니네베가 어떤 도시였습니까? 당대 아씨리아 최대/최악의 도시국가로 달신을 비롯한 온갖 우상을 섬기다가 요나의 전도를 받았지요. 그들이 망해 버리길 간곡히 희구했던 요나의 기대와는 달리 금식/회개하여 멸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멸망을 거두신 니네베를 당대 이스라엘이 감히 단죄할 수 없었습니다.
그 니네베가 이 세대를 단죄할 것입니다. 그 쉐바가 이 세대를 단죄할 것입니다.
그런데..현대교회가 코린토교회를 감히 단죄할 수나 있나요?
단죄할 수 없다면, 왜 거의 한결같은 일방적 비판을 가하는 겁니까?
주님은 요한계시록 앞 부분에서 7교회를 단죄하는 대신 책망과 격려와 칭찬을 해 주십니다. 뉘우치고 고치라고 사랑으로 경고해 주십니다.
현실 교회를 향한 주님의 태도도 대동소이할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 교회가 코린토교회의 결점과 약점을 안다면, 스스로 돌아보며 조용히 고칠 일이지 왜 나서서 심판하러 드는 겝니까?
주님께서는 혹 나중에라도 "심판 날 코린토교회가 일어나 현대 교회를 단죄하리니.." 하실 순 없을까요...........?
충분히 있음직 합니다. 코린토교회 보다 더 윤리적 타락상을 보이는 현대 교회로서 코린토교회가 한 만큼도 안 하는 면모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 점에서 현대 교회는 코린토교회보다 훨씬 더 못했으면 못했지 더 낫지 않습니다!
과연 이 세대 교회가 코린토교회보다 뭐가 그리 잘났기에 이다지도 옛 교회를 비판만 한다는 말입니까? 현대 교회가 코린토교회에 비해 뭐가 그리도 잘났습니까!
더욱이 코린토교회는 사도 파울이 진정 사랑한 교회였습니다! 코린토 A/B서를 모두 읽고 내리는 결론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사랑하신 한 교회임을 시사한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성경은 도대체 누가 쓰신 겁니까! 파울은 코린토교회를 책망할 부분이 있어 책망은 했어도 단죄하기 위해 서신서를 쓰지 않았습니다. 주님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도 파울보다 더 잘 나고 위대한 듯한(?) 현대 교회 특히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걸핏하면 코린토교회를 단죄하고 있으니, 참으로 적반하장 격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코린토교회가 잘못한 점은 우리가 길이 교훈으로 받아 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코린토교회가 방언/은사에 관해 크게/굉장히/이단적으로 잘못했다고요..?????
한 가지 묻죠: 현대 교회 특히 한국교회가 코린토교회만큼이나 파울의 말을 순종하고 있는지요.......? 만약 그게 아니라면 코린토교회는, 심심하면 두들겨 패도 되는 동네 북이라는 겁니까?
현대 교회가 충분히 코린토교회를 두고두고 심심할 때마다 '저작'할 수 있을 만큼 코린토교회보다 모든 면에서 더 나은지요? 더 바람직하게 성숙한지요? 혹 숫자 면에서 더 낫다는 겁니까? 현대 교회 지도자들이 감히 코린토교회를 통째로 "씹어대고" 단죄할 수 있을 만큼 잘 나고 또 잘 하는지요?
현대 교회 특히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파울도 단죄하지 않은 코린토교회를 손가락질 하고 판단하고 단죄할 만큼 파울보다 위대합니까? 나머지 손가락들은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나요?
말세지말, 심판날에 코린토교회가 일어나 현대 한국교회를 향해 단죄하고 심판해도 거뜬히 견딜 수 있을 만큼, 현대 한국교회의 직조가--날줄로나 씨줄로나 우수하고 질긴지요?
현대 교회나 지도자들이 특히 코린토교회의 면모들 중 가장 겨냥하고 문제 삼아 "씹는" 핵심 이슈인 방언/은사 면에서 좀 살펴 보죠.
우선 코린토교회는 예루샬렘교회로부터 당대의 모든 교회에서 공통된(예!!!) 현상일 방언에 관하여 파울이 받은 특별계시를 서신으로 직접 전달 받는 역사적 영광을 누린 교회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마치 코린토교회가 방언/은사를 활용했기에 가장 추하고 저질스런 교회인 것으로 규정하곤 합니다. 이 방면에서 현대 교회는 코린토교회의 절반이라도 따라가느냐..? 혹 발톱만큼도 못한 건 아닌지요.
코린토서에 관해선 가장 객관적이고 공정해야 할 성경 번역자들까지도 우를 범하곤 합니다. 즉 남도 아닌 구주/주님 예수 크리스토님 및 사도들의 예언과 명령대로 거듭나서 성령침례를 받아 바로 초기 교회처럼 응당 방언부터 실천하면서 영감으로 해야 하는 것과는 달리, 자신의 신학적 선입견과 판단에 따라 사실무근한 무체험적 오역들을 서슴찮고 하기 때문입니다. 당장이라도 여러 오역들을 원문에 근거해 지적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체험은 거듭남부터 초자연적인 체험입니다! 그런데 초자연적 체험이라면 (다 마귀의 것인 양) 무섭다며 겁내는 신학자/신학도들이 더 많다는 게 우리가 아는 대다수 신학교의 현실입니다. 하나님과 그 말씀을 바로 아는 신(神) 학교라기보다 정작 몰라서 고심하는 신(呻) 학교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참고로..저는 신학이나 신학교 반대주의자는 결코 아닙니다. ]
쉬운 예로..주님과 사도들이 행했고 마땅히 행해야 할 것으로 교훈된 악령축출 사역은, 하나님을 가장 잘(?) 아는 현대 신학자/신학도/사역자/지도자들이 얼마나 하고들 있는지요? 악령 내쫓기는 무조건 (베뢰아적) '귀신론'으로 치부되는 현실은 아닌가요.
예수님께서 (안 믿는 사람들 빼고) 믿는 사람들에게 "따르는 표징"(!)이라고 하신 악령 내쫓기와 새 방언, 해독(解毒)과 치병 안수를 현대 교회 지도자들은 얼마나 합니까? 그런 건 무조건 다 요상한 것, "이단"스런 것입니까? 아니면 다 "중단됐다"는 절대 확신에섭니까..그 절대 확신의 바탕 성구는요? 그 절대확신이란 게 단지 신학계 선인/선배들로부터 물려 받은 편견이나 오해일 가능성은 없나요? 그런 가능성을 배제한 것이 신학인가요? 자신들이 안 하고 있거나 "못 한다"고 착각하기에 그냥 여우의 신 포도로 고사하든가 미뤄 두면서 다만 신 포도를 뒤에서 "씹기"만 하는 건 아닌지요.
자, 아무러나..코린토교회를 향해 파울은 뭐라고 합니까?
지금 파울이.."형제님들. 영적인 것들에 관해서는 여러분이 알지 마.시.길. - 모른 체 하시길 바랍니다." -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알기를 바란다고 했습니까? 아마도 현대의 방언을 반대/질시하는 현대교회는 파울이 전자처럼 말했기를 바랄지도 모르지요.
파울은 성령님으로 통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입바르게"가 아니라 올곧게) 시인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코A 12:3a). 그렇다면 그 성령님은 누구십니까? 파울이 이어서 나열한 영적 은사 아홉(9) 가지를 오가는 세대의 모든(!!!) 교회에 주신 성령님이 아니시던가요? (이 영적인 것들이 초기교회만 위한 것일 뿐 현대교회와 '무관'하다는 사람들은 요엘이 예언한 '말세'가 어떤 말세인지를 상고해 볼 것. 행전 2:16-21)
파울은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영적인 것들을 알고 적극 추구하라고 코린토 교우들에게 촉구합니다(12:1,31, 14:1). 다수 현대 교회와 교계 인사들이 "그런 건 몰라도 됩니다. 안 하면 더 안전하고 편하고 좋아요! 안 하는 게 더 신학적이고 성경적입니다"(?)라고 무장려 차원을 넘어 거의 쌍수로 말리다시피 하는 수준과는 사뭇 다르지요. 그래서 원문의 뜻과는 달리 되도록 덜(?) 영적으로 보이게 번역/해석 등 다양한 방편으로 요리조리 뒤틀기도 합니다.
독자들에게 묻습니다:
성경은 방언 행위를 권하던가요, 말리던가요?
성경은 코린토교회(및 당대의 모든 교회)가 방언하는 것을 적극 장려하고 바로 하기를 촉구하나요 아니면 비판하고 금지했나요?
전자가 아닌 후자 쪽인 독자들의 견해는 '들은 것'이 있는 신학적 편견 내지 선입견 탓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정반대로 매 번 전자이기 떄문이죠!
어떤 이들은 코린토A 13장에 근거해 "사랑이 젤이야! 사랑이면 다야. 더는 필요 없어! 사랑, 사랑.."하면서 사랑예찬론을 펼칩니다. 심지어 코린토교회는 사랑이 없는 대신 방언과 은사만 있었다고 매도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파울이 말하는 '사랑'이란 과연 어떤 사랑인가요? 진리에 의거한, 진리 없이 안 되는, 오직 진리와 함께라야 기뻐하는 아가페 사랑이 아닌가요(코A 13:6b)?
그 사랑은 영적인 은사를 추구하라는 코린토A 12, 14장 사이에 끼어 있음을 인식하는지요? 그렇다면 파울이 은사를 강조한 코린토A서 12, 14장 역시 계시된 진리가 아닌가요?
파울은, "예, 사랑이면 다예요, 나머지는 알아서 하도록." 또는 "사랑이 최고이니 은사들은 뭐,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우리 누구나 황홀한 사랑지고예찬론에 빠져 어리얼싸 덩실덩실 사랑 도래춤이라도 출 수 있을 터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파울의 사랑의 시와도 같은 이 13장에서 다음 구절을 특히 "열불나게" 강조합니다.
혹자들은 위 말씀에 기초해 사랑은 다 남고 은사들은 "이제 다 사라졌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물을 말은, 지식은 어떠냐는 것입니다. 예언들과 방언이 사라졌다면 지식도 다 함께 사라줘져야 하지 않나요? 지식이 그런데 과연 사라졌나요??
지금 파울이 말하는 사라짐과 그침은 당대에 그렇다는 겁니까, 먼 미래에 그렇다는 겁니까? 그 먼 미래가 언제입니까? 요엘서의 '말세' 더구나 심판을 앞둔 말세까지가 아니던가요? 온전한 것이 올 때라면-(신학적 특히 '중단설'(Cessationism)로라면) 단지 계시의 집대성 내지 구/신약 성경 완간 때까지인가요? 역사의 어느 한 시점-계시의 집대성 내지 성경전서 완간 순간- 휙! 내지 팍! 또는 피융~ 하고 예언/방언/지식이 모두 일시에 사라졌습니까? 언제 그랬다는 겁니까..?
파울은 또 코린토 교우들에게..
"거 쓸데없는 방언일랑 당장 멈추시오. 그런 건 죄다 걷어치우란 말요. 방언은 꼴찌 은사-젤 하치랍니다! 교회서는 모두 방언을 삼가고 잠잠하오." 라고 말했다면 아마 더(?) 건전하고 신학적일지 모릅니다 .
그러나 정작 진짜 파울은 뭐라고 말합니까?
[ 대다수의 성경 오역과는 달리, 위 구절은 이렇게 밖엔 옮겨지지 않습니다. 까닭은 자명합니다. 이 구절은 방언 사례에 관한 다른 모든 성구들과 맥락을 같이하기 때문입니다(맑 16:17a, 행 2:4, 8:18,19, 9:17, 10:46, 19:6). ]
그뿐인가요..?
"..여러분이 모일 때..방언도 있고.." (14:26 중간)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마오." (14:39b)
지금 파울이 방언을 부정하나요, 긍정하고 있나요?
그런데도 성경이 마치 방언과 은사를 부정시하고 거부한 양 한사코 반대로만 생각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결국 불행하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사실은 과거 저도 불행했었지요. 뒤늦게나마 행복한 길을 깨달았지만요).
우리는 온갖 선입견/편견으로 무장한 채 성경 말씀을 접할 것이 아니라 고대 베레아 신자들처럼 "이게 과연/정말 그런가?" 하고 진솔하게 대해 봐야 합니다. 페트로의 말처럼, 마음에 '샛별'이 뜰 때까지 계속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같은 진리에 대해 아예 담을 막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 기분과 정서에 안 맞는다고 해서 방언/은사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은 신학적으로 '건전'하다는 빌미 아래 어떤 관련 성구라도 으레 부정적으로 해석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야 다소 안심과 자위가 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게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는 진실을 저도 인생 중엽에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코린토교회를 "짓씹는" 사람들은 으레, 방언은 어느 신자나 할 수 있다는 진리를 부정하고 조소합니다. 역으로, 부정하고 조소하니까 다 짓씹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믿는 사람들에게 으레 따르는 표징의 하나라고 명언하셨고, 바로 그대로(exactly) 성령께서 강림하시자마자 120명 신자들이 모두 그렇게들 했고..사마리아 신자들도 그랬고, 사도 파울도 그랬고, 코르넬리우스 일가 사람들도 그랬고, 에페소 교우들도 그랬으며 코린토 교우들도 그랬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나 방언/은사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은 이 뻔한 역사적 사실을 갖고도 "언제 그랬냐? 어디 그랬냐? 예외도 있지 않냐?"라고 줄이어 반문하니 아연실색할 노릇이 아닐 수 없지요. '예외'라면 어디서 어디까지를 예외로 봐야 합니까? 예외라면, 왜 파울은 "난 여러분 모두가 다 방언하길 바라오.."라고 명언합니까? 왜 주님은 새 방언이 (이 진리를 안 믿는 사람들 말고) 믿는 사람들에게 따르는 '표징'(='당근' 싸인!)이라고 하십니까?
성경이 방언이 있다고 하면 있는 겁니다.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면, 그런 겁니다.
하라면 하는 겁니다.
추구하라면 추구하면 됩니다.
우리는 성경 진리와 약속에 대하여 늘 "예/예스/아멘!"이라고 답해야지 "노/아니오~"로 답하다 보면 그만큼 삶이 복잡해지고 불행해집니다. 스스로 속아 불행해지지 맙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필자는, 티엘티 애독자들을 포함해 개인이 방언을 진정 원하면서 방언을 안 하는 (거듭난) 신자는 단 한 명도 여태 보질 못했습니다. 다만 안타깝게도 딱 한 명- (과거의 저 같은) 신학도를 본 적은 있습니다.
할렐루야!
모든 신자에게 방언을 말하게 하시는 성삼위일체 주 하나님께 영원히 영광!
코린토 서신과 코린토 교회의 범례를 통해 은사와 방언을 추구하게 하시는 성령님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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