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에페소 4:10-16, 개역개정)
오늘날 사도나 대언자, 전도자, 목사와 교사로 자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시대 착오적인 '사제'들, '수사'들도 있습니다.
특히 사도와 대언자, 사제들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영적 권위를 내세워서 문제가 많지요.
그러나 위 에페소 서신의 필자/기자인 사도 파울은 교회의 올바른 직임을 세우신 분이 곧 그분 즉 예수 크리스토님이라고 밝혀 줍니다. Make no mistake about it..우리가 자임해서 되는 게 아니라 그분이 세우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처와 자임..이게 문제입니다. 그것이 자긍도 가져옵니다. 바른 긍지가 아닌 스스로의 긍지 말이지요.
사도/대언자/전도자/목회자/교사는 왜 존재합니까?
기자는 그 목적도 덩달아 분명히 밝혀 줍니다.
1. 성도를 온전케 하고
2.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3. 크리스토의 몸을 세우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직분들은 성도를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소위 신사도운동권 명사들의 '영성'이란 것들을 훑어 보면 '신사도', '신대언자'들은 섬기긴커녕 여실히 섬김을 받으려는 모습들임을 우리는 대뜸 느끼지 않습니까? 그들은 스스로 자임/자처하면서도 온갖 성구를 때려 맞추고 '은사'란 것을 들이대며 엉터리 예언으로 공갈을 치고 상대방을 '개들'이라고 부르며, 직/간접으로 자신들을 노골적으로 또는 은근히 신격화 시킵니다.
그들의 그런 열매가 곧, 주님이 그들을 세우시지 않았음을 자증-스스로 입증-하는 셈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높임을 받으려 듭니다. 늘 명사가 되길 원합니다. 명사 이하를 원치 않습니다. 즉 사람 위에 사람이 있음을 증명하겠다는 거지요. 알고 보면 다들 모종의 자기 어젠다와 목표, 뜻을 이루기 위해섭니다.
그들은 누가 좀 알아 달라는 양 스스로 사도 연(然), 대언자 연 제스처를 부립니다.
그들은 서로를 높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서가 아니라 서로 같이 높여줌으로써 같이 함께 높아지자는 시너지 효과를 노리는 것이지요. 즉 낮아지길 원치 않는다는 표시입니다.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거짓 예언과 거짓 이적 등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신사도운동권의 거짓 예언과 이적..어제 오늘 일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현상은 파울 당대의 거짓 사도들, 거짓 대언자들과 별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린 역사의 악순환을 보게 되는 겁니다.
교회의 사역자들은 섬김이들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다웁니다.
섬김을 받으려 들어선 안 됩니다.
주님 당신께서 섬기려 오시지 않았습니까?
3년간 줄곧 밤낮 하나님을 섬기고 백성들을 섬기며 사시지 않았습니까?
제자들의 먼지 묻고 때가 낀 냄새나는 발까지 씻겨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른 바 '세족 목요일'(Maundy Thursday)이라는 절기만 지키고 '세족식'이라는 이벤트만 벌이면 무슨 소용입니까? 지배계급 연해서는 결코 참 섬김이일 수가 없지요.
교회 안에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습니다.
누구나 섬겨야 합니다. 섬김을 받으려 해선 안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고 섬김의 일을 하게 하고 결과적으로 크리스토의 몸 즉 참 교회를 세우는 데 기여하게 됩니다.
이 세 가지 목표를 이룬 대표적인 섬김이로서 우리는 파울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
그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려고 때마다 일마다 힘썼습니다. 때로는 덕스럽게 칭찬과 격려도 해 주고 때로는 유순하고 사랑스럽게 눈물로 타이르기도 하고 때로는 무서울 정도로 강하고 엄하게 질책하고 징계하기도 했던 그였습니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데 자신의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파울은 또 성도로 하여금 섬김의 일을 하도록 만들었지요.
그런데도 결코 강압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스스로 섬기도록 만들었습니다.
파울 자신이 주위에 섬김이들이 많았습니다. 의사/기자인 루카가 그 대표적인 예이죠.
파울이 정말 어렵게 지내던 마지막 무렵엔 대다수 섬김이들이 다 떠났는데 오직 루카만은 그 곁을 지키며 충성을 다했습니다.
섬김이라는 것, 정말 쉽지 않지요.
섬김을 할 때는 때로는 성도가 목회자를 이끌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존심을 부릴 게 아니지요.
프리스카(프리스킬라)/아퀼라 부부는 파울의 부탁을 받고 아폴로 목사를 데려다 예수 크리스토와 성령님에 관해 자세히 가르쳤습니다. 한 편-그럴 동안, 파울은 아폴로 목사가 돌봐 온 에페소교회로 가서 교우들을 안수하여 모두 성령을 받게 하고 방언을 하게 해 줍니다. 이것이 섬김의 모습입니다.
소위 '임파테이션'을 한다 어쩐다 요란을 떨며 대단한 권능의 보유자인 양 권위와 주권을 내세우는 게 섬김은 아니죠. 안수가 무슨 대단한 권세인 양 자랑할 게 아니죠.
모든 것은 섬김에 불과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파울과 페트로 등 사도들이 때로는 뭇 성도의 병을 고치고 때로는 위엄 있게 악령들을 내쫓았던 것은 스스로 그런 권위를 가졌다고 '자임'해서가 아니라 성도를 섬기는 섬김이였기에, 섬김이로서 기꺼이 한 것입니다. Make no mistake about it.
그리고 그들은 섬김의 대상인 그 성도들 역시 섬김이이길 바랐던 것입니다. 봉사의 일을 하게 한다는 게 바로 본질적으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는 비로소 크리스토의 몸을 세울(to establish)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서는 원리는 자임이 아니라 섬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은 스스로 CEO가 되어 섬김을 받는 게 보통입니다.
대형교회 목회자일수록 '당근'인 양 엄청난 액수의 봉급을 받습니다. 겸손히 낮추는 게 아니라 "격에 맞게 많이 받아야 한다"는 의식이 그들에겐 있는 듯 합니다. 이건 섬김이 아니죠. 섬김받음입니다.
대형교회 개념 자체가 비성경적이지요.
성경적인 제도교회의 개념은 바벨탑처럼 모여서 쌓아 올리는 유형이 아니라 오히려 흩어져 섬기는, 디아스포라의 교회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형교회들은 바벨탑처럼 위로 위로 점점 쌓아 올려만 갑니다. 축성(築城)하고 축재(蓄財)하고 축적(蓄積)하는 게 교회들입니다. 양(量)을 나누고 뿌리는 게 아니라 양을 점점 늘려가는 게 교회의 모습입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를 기억하십니까?
그들이 120명, 3천명, 1만여명 등으로 자꾸만 모여 들고 힘을 기르고 물질을 쌓으려 할 때, 순교 상황이 벌어져 모두들 뿔뿔이 흩어졌고, 흩어지자 비로소 타 지역에도 복음이 전파됩니다. 흩어진 성도들을 통해 해외에도-소아시아와 유렆에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집니다. 여기저기 복음을 전하고 구원을 얻게 함으로써 크리스토의 몸을 세워 나아간 것입니다.
누가 뭐라든, 목회자는 CEO여선 안 됩니다. 그런 것이 지배적 '목회전략'인지는 몰라도 섬김의 전략은 결코 못 됩니다. 목회자는 '명령 하달자'가 아니라 섬김의 표본이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계질서를 흐트리거나 마땅한 경고/훈계/치리(治理)/감독을 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섬김 마인드를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 자신이 CEO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특히 재정 문제에 있어 한결 같이 슬기롭게 처신했습니다.
성령과 슬기가 충만한 사람들이 맡아 깨끗하게 처리한 것입니다.
간혹 이스카리옽 유다나 아나니아/사피라 같은 사람이 있기도 했지만 하나님 집안의 사환으로서 섬김의 역할을 다할 때 성령께서 직접 처리하십니다.
우리가 섬기지 않을 때 성령께서도 일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처럼 섬길 때, 주님을 증언하러 오선 성령께서는 우리를 적극 도우셔서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할렐루야.
성도가 온전하게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13절이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의 아들-주 예수 크리스토님(!)-을 믿는 것, 아는 것에 하나가 되고 크리스토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아는 데 하나가 돼야 합니다.
이 말을 좀 더 풀이하면, 예수님 안에서의 신앙과 지식에 일치(unity)를 이뤄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버지 하나님도, 주님도 한 분, 성령님도 한 분, 교회도 하나, 믿음도 하나, 참된 전체 회중도 하나입니다. 이런저런-딴 것들이 섞여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단/교파가 생긴 원인은 일치를 이루지 못한 탓입니다.
교단/교파는 하나님의 허용적 뜻인지는 몰라도 온전한 뜻은 아니지요. 하늘나라엔 교단/교파가 갈리거나 따로 없습니다! 장로교/감리교/침례교/성결교/오순절교 등의 팻말이나 표지판 또는 교파별 타운이 천국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주로 서로 엇갈린 성경해석으로부터 옵니다. 특정 성구에 있어서 교단/교파마다 미묘한 해석 차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그분의 조명과 영감을 받아 슬기롭게 올바로, 올곧게 성경해석을 하도록 최선을 기울여야 합니다.
특히 어떤 특정 인사들이나 명사들의 해석을 전제를 삼거나 중심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교파인들을 보면, 대체로 창설자의 주견을 절대화 하여 따르기가 일쑤이죠.
자, 장로교나 기타 몇몇 개혁 교파/교단들은 칼뱅의 사상을 따릅니다.
루터교는 주로 루터의 사상을 따릅니다.
감리교는 주로 아르미니우스나 웨즐리의 사상을 따릅니다.
침례교는 침례 선조들의 사상을 따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사상에 따라 서로 정반대 성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칼뱅과 아르미니우스가 그렇지요.
그렇다면 둘 중에 도대체 누가 옳은 것입니까?
성도들은 자연히 당혹스러워 갈등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명사들의 사상을 따를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직접 성령의 영감과 조명으로 적나라하게 성경을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칼뱅과 아르미니우스, 웨즐리 등이 성경을 적나라하게 대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시도 또는 노력을 했는데도, 어쩌다 보니-somewhere along the line- 성령님을 의지하기보다 자신의 두뇌를 더 의지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똑 같은 성경을 갖고 둘이 서로 정반대 성향과 입장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 잘못입니다.
우리는 명사 중심의 성경해석, 명사중심 신앙을 탈피해야 합니다.
이미 고대에 파울파, 아폴로파, 케파파, 크리스토파가 있어 서로 각각 따로 노는 성향이 있었습니다. 예루샬렘 파, 안티옼 파가 따로 놀 뻔 했습니다.
이건 분명히 명사중심 영성입니다.
그래서 파울은 그런 명사주의를 적극 경계한 것이지요.
우리는 오직 성경 진리 안에서 믿음의 일치를 이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일치라는 게 교단/교파 사이의 합치로 이뤄지긴 어려울 전망입니다.
그동안 여러 연합운동이 있어왔지만, 오히려 신/구교 간의 '일치운동'이라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이것은 잘못된 일치입니다!
왜냐 하면 성경 진리 중심의 일치운동이 아니라 '로마 중심'의 흡수통일형 일치인 탓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옛 격언을 바티칸이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뿌리는 로마가 아닙니다. 바티칸이 우리의 종주세력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일치라면, 오직 예수 크리스토의 말씀인 성경 진리 중심으로만 가능할 뿐입니다.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려면, 온전함을 이루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크리스토를 바로 믿고 바로 아는 진리 안에서 일치를 이뤄야만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로마교회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들은 온갖 비진리 속에 빠져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온전한 사람을 이루다 보면 크리스토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에 이를 수 있게 됩니다. 얼핏 어려운 말 같지만, 크리스토처럼 완전과 성숙, 충만의 경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크리스토를 바라보고 그분을 본받으려 애쓴다면, 그 같은 온전과 성숙, 충만의 차원으로 점차 근접해 갈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하길(to be whole, perfect) 바라십니다.
크리스토께서 온전하심처럼 우리도 그러길 바라십니다.
크리스토께선 어떻게 온전해지셨습니까? 바로 섬김과 순종을 통해섭니다!
크리스토님은 섬기되 끝까지 섬기셨고 순종하시되 끝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래서 완전해지셨습니다.
우리는 또 점차 성숙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5:12-6:2에 기술된 대로, 초보적 교리 차원을 벗어나 점차 완숙하고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기가 맨날 어린아기의 경지로 남아 있게 되면, 부모가 염려하듯 여러분과 저도 영구적인 미완숙 상태로 남아 성령님을 우려하게 만들어선 안될 것입니다.
히6:1-2절에 나열된 사항들은 기독교교리의 초보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행실의 관행적 회개, 하나님의 실존/실재에 대한 믿음, 물침례/성령침례/전체교회침례 등 여러 침례(세례)들에 대한 신앙, 안수, 죽은 사람들의 부활, 영원한 심판 등의 교리는 기본적으로 믿고, 그 이상의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 사역자/직분자/지도자라는 사람들 중에 이런 기본적인 교리조차 믿지 않는 사람들이 수두룩 합니다. 명색과 명의만의 신자이지 사실은 어린아기보다 못한 초보교인도 못 됩니다. 요즘의 어떤 목회자/사제들은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 없다"고, "딴 건 몰라도 부활은 못 믿겠다"고 실토하는 예가 잦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지도자로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런 터무니 없는 교회는 떠나야 마땅합니다! 거기 머물러 봐야 맨날 "고 모양 고 꼴"로 남기 때문이죠.
우리는 날마다 성숙해야 합니다. 완숙해져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크리스토의 충만(fullness)을 이뤄가야 합니다. 그것은 impossible mission이 아니라 가능합니다. 가능한 미션입니다. 나폴레옹이 아닌, 주님의 사전엔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내게 무슨 능치 못할 일이 있겠냐?"고 물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 안에 있을 때, 그 주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머물 때, 우리는 "내게 권능 주시는 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온전과 성숙과 충만..이것은 우리 성도가 이뤄야 할 세 가지 경지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젖먹는 어린아이의 수준으로부터 탈출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속임수, 간교한 유혹과 간계에 빠지거나
온갖 괴이한 영성과 교훈에 밀려 이리저리 요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에 몰수히 입수된 온갖 영성들은 거의 하나도 온전히 성경적인 것이 없습니다. 부분적으로 본받을 점이 있는지는 모르나 대개는 명사추앙으로 끝납니다. 자연히 누구누구 책 팔아 주고 돈 벌어 주는 일에 초점이 맞춰지게 됩니다. 내 규모를 키우려고 누구 높여 주기, 나 높아지기에만 주로 신경 쓰다 보니 이단적인 신격화에까지 나아갑니다. 우린 그런 영성들을 마땅히 경계해야 합니다.
이곳 티엘티에서 성경 이외의 대상을 모두 아웉사이더의 입장에서 보자고 강조하는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바람직하고 타당한 검증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영성'의 흐름에 마구 부대끼고 휘둘리고 까불리고 뒤흔들리다 보면, 정작 자라고 성숙해야 할 내 영이 맨날 어린아이 경지를 탈피할 수 없음을 조만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뒤늦게 후회하게 됩니다.
관상영성, 떠오름(Emergent, Emerging)영성, 뉴에이지영성, 신사도영성..이런 영성들을 우리는 철저히 경계해야만 제대로 성숙할 수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비진리적 요소들은 진리 안에서의 완숙을 막을 뿐이지 도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또 오직 사랑과 진리 가운데 범사에 교회의 머리이신 크리스토께까지 자라야 합니다. 우리가 자라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범사가 아니지요. 책망과 징계를 통해서라도 그런 부분은 밝히고 깨닫고 고치고 싸매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서
온몸 마디마디가
서로 도움 받고
이어지고
껴 맞춰(결합)지고
각 지체의 분량대로 일하여
주님의 몸을 자라게 하면서
사랑 안에서 교회를 세워 나아가야 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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