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
음악엔 협화음과 비협화음(불협화음)들이 있다.
아무리 고전적인 음악이라도 협화음과 비협화음이 서로 어울려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 바로크 기의 바흐나 핸델의 음악에서도 반음차의 날카로운 비협화음을 쉽게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물론 반드시 거의 직후에 해결된다. 사람들의 귀와 느낌이 그것을 예상/기대하고 원하기 때문이다.
윗성부(상성부)의 화성과 음이 아무리 계속 바뀌어도 아랫성부(하성부)에서 끄떡도 않고 아랑곳없이, 이음줄(ties)로 계속 길게 잇댄 하나의 음으로 꿋꿋이 줄곧 버티면서, 협화/비협화 사이를 오가다 상당시각 경과 후 완전 해결되곤 하는 예도 있다.
소위 '페달 포인트' 또는 지속저음(장저음)이라고도 불린다. 바로크 기 오르간 음악의 저음 페달 라인이나 기악곡의 통주저음(basso continuo)에서 많이 쓰였지만, 현대를 포함한 기타 시대에도 곡에 따라 흔히 쓰인다.
바흐 당대의 청중 다수는 바흐가 지나치게 비협화음을 많이 사용한다고 불평할 정도였다. 특히 교회음악은 협화음 중심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그랬다. 이래저래 바흐 음악은 당대에 환영받지 못했다. 사람들이 바흐 음악에 비로소 제대로 귀가 트인 것은 한 세대도 더 지난 멘델스존 때였다. 그러니 현대음악은 오죽하랴.
비협화음의 하나인 '계류화음'은 으레 으뜸화음(tonic)이나 딸림화음(속/屬화음) 등의 협화화음으로 진행되길 기다리는, 해소/해결 직전의 긴장되고 불안정한 화성이다.
소위 '재즈화음'으로 알려진 현대 화성학의 기타/키보드용 코드에서는 'sus'(sustained)로 표시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Dsus'는 D화음으로 해결되기 직전의 지속화음이다. 그런 화음은 으레 두 음이 1온음차로 포개진 '2도 음정'들이 들어 있다.
그런가 하면, 기본음계의 [솔/티(=시)/레/파]의 4음들로 형성된 '속(屬)7화음'(딸림7화음)은 (파/솔 사이가) 같은 '2도 음정'이 하나여서 긴장감이 덜한, 좀 더 부드러운 미해결 화성이다.
음을 들어 보고 고전 화성학을 시작해 보면 알지만, 음악이 이른 바 '주3화음'들 중심의 협화음들, 바탕음들만 점철돼 있으면 생각으로는 천사음악 내지 천상음악으로 아름다울 거 같아도, 정작 들어 보면 싱겁고 재미 없다. 이내 지루해진다. 그만큼 음악미가 경감된다.
그래서 부3화음도 필요하며, 더 나아가 계류화음, 7화음, 위로 더 쌓아 올린 9화음/12화음, 변화화음/채용화음, 다닥다닥 붙은 2도 음정들이 포도송이처럼 빽빽한 모습의 밀집/복합 화음군(톤 클러스터)를 요구하기도 한다.
아울러 잦은 조바꿈(전조)과 색다른 음계, 복잡한 도(음정) 병행, 다중음 쌓기 등으로도 비껴 나간다. 그러다 보면 조성(調聲)음악의 한계를 벗어나 '무조음악'이 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화음이 아니더라도 단순음인 비화성음('화음 밖 음'들도 있다. 앞섬(선취)음/미리걸림(전과)음/지남(경과)음/도움(보조)음/걸림음/뛰기(도약)음/ 등 다양한 비화성음들이 있는데, 음악을 아름답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의 하나다. 이 음들의 움직임은 가락으로서 자연스러울 때도 있고, 기악에서처럼 고의적으로 화음을 벗어나 인위성이 강할 때도 있다.
앞서 비쳤지만, 12음계 중심의 서구 전통음악에서, 비협화음, 비화성음 등에는 성격 상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비협화도(非協和度)가 온음차인 경우, 하나는 반음차인 경우다. 반음차일 경우는 각 음의 진동수가 서로 엇비슷하여, 많이/자주 사용할수록 긴장감과 비협화도, 더 나아가 소음도가 높아진다.
한 음악에 반음차 비협화음, 비화성음이 많아질수록 정서/심리에 부정적 영향을 끼쳐, 스트레스와 초조/부담감/긴장감/불안감도 덩달아 높아지며, 심지어 신경질과 짜증도 난다. 진동수가 서로 타이트한 음들의 상호 '충돌'과 마찰이 그만큼 늘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의 취향과 익음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클래싴 명곡 라디오 청중이 대체로 쇤베르크의 '12음 기법' 중심의 현대파 음악을 좀체 선호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모든 것에 균형이 필요하듯, 음악에도 협화음/비협화음 사이의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 비발디나 모차르트 등의 음악에서 정서적/심리적으로 비교적 순수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비협화음 수가 협화음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고, 따라서 균형 수위도 강하기 때문이다. [ 그런가 하면, 베토벤의 음악은 더 복잡하고 '혼탁'해진다. 선배들보다 더 심각해 뵈는 그의 초상화 표정처럼. ]
현대음악일수록 이 균형을 무시하고 긴장과 불균형도를 높인다. 그래야 현대인들의 기분, 정서와 심리, 현대사회의 분위기/상황에 걸맞다는 생각에서다.
그래도 음악을 들어 보면 알지만, 늘/반드시 그렇진 않다. 현대인들의 마음도 때와 기분, 분위기, 경우와 장소에 따라 걸맞은 음악을 고르고 가려 듣게 된다. 옛 시대인들일수록 상대적으로 그럴 초이스가 적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당대인들에겐 당대음악이 가장 맞았다고 해야 옳다.
고대음악으로부터 중세, 르네상스기, 바로크기, 고전기를 거쳐 낭만파 음악, 인상파, 현대음악 등으로 흘러 내려올수록 협화음은 그만큼 줄어 들고 비협화음이 늘어간 진도와 과정으로 보면 맞다. 그러니까 현대로 올수록 사람들은 원시적 단순 차원을 넘어 문제/긴장/갈등/복잡성도 증강, 고조돼 왔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물론 협화/비협화만으로 시대 구분이 되는 건 아니다. 예컨대 음계/음색/병행음정/리듬..다루기도 시대마다 사뭇 다르다.
시간예술의 하나인 음악의 진행은 긴장과 해결, 진행과 휴지의 반복/연속이다. 인간 정서가 거기 자연스럽게 반응하게 돼 있다. 한 음악에 숨표나 쉼표가 없이 음표로만 계속 이어지면, 음악미가 없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사람들은 살면서 늘 평온하지만은 않고, 온갖 문제와 긴장, 갈등을 겪게 된다. 문제, 긴장과 밀도, 갈등은 해답/해소/해결과 이완, 평온을 지향하고 갈망한다. 그러나 묘하게도 사람은 해소와 평온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긴장, 재(再)갈등과 모험, 도전거리도 찾는다.
보다 종합적인 시간예술인 드라마를 찾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현상을 쉽게 발견한다. 연극/영화 등에서도 긴장/초조/갈등 국면 및 장면들과 아울러 해소/평온 장면들이 연속/반복된다. 긴장/갈등 국면이 길면 길수록 잦으면 잦을수록 트릴러(딴 표기: 스릴러)가 되고 더 지나칠 경우 공포물이 된다. 또 그런 국면에서마다 배경음악이 그런 정서를 더 부추긴다.
클래싴 음악을 보면, 현대로 올수록 비협화 화성과 불협화음을 남발하지만, 그런데도 나름의 해결은 늘 있다. 하지만 지속적인 불협화와 미해결을 고집하는 음악들도 없지는 않다. 그런 음악은 은연 중 또는 잠재적으로 불안과 불만을 낳거나 쌓여 간다.
현대인이라도 현대음악만 즐기진 않는다. 아무리 현대음악을 선호하는 사람이더라도 시시때때로 부드럽고 명상적인 고전음악도 듣게 된다. 인간 정서가 그렇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가령..결혼식의 신랑/신부 하객들이나 병원의 환자들에게 난데없이 반음차 비협화음이 주로 얽히고 설켜 금속성(金屬聲)이 불똥 튀는 듯한 현대음악을 들려줘 보라. 금새 "아니, 이..이건 뭔 상황?" 하고 묻게 되며, 금방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반발감이 일어 기분이 상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맘과 몸이 피곤해지게 된다.
물론 개인에 따라 선호도가 다를 수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대체로, 고전음악이나 협화성이 강한 음악일수록 정서순화도가 높다는 뜻이다.
반대로, 젊은 현대인들에게 마냥 고전적인 음악만 들려줘 보라. 어느새 몸을 배배 꼬고 뒤틀며 지루해 할 것이다.
안 그래도 현대인들은 정도껏 현대성 음악을 갈구하게 돼 있다. 이런 성향은 전술했듯, 드라마의 배경음악 등에 미묘하게 반영되어 청중의 심리와 정서를 조절하며..더 나아가 조종하기도 한다.
이런 정서 차이는 교회음악 내지 기독교음악에서 세대차로 나타나기도 한다. 기성세대일수록 비협화음 위주의 음악을 싫어 한다. 청중이 현대적이거나 젊을수록 비협화음이 귀에 익어 있다. 예를 들면, 찬송가 반주도 젊은이들은 현저히 비협화적인 지속음(sus)이나 화음밖 음들을 즐겨 사용한다.
그런데 알고 보면 비교적 기성세대가 즐기는 편인 오르간이나 현악에서도 비협화음은 얼마든지 발견되지만, 부드러운 악기의 음색 때문에 다소 경감된다. 물론 현대로 올수록 오르간 음악도 더 비협화적이다.
그러므로, 교회음악의 세대차는 이해와 관용, 사랑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다. 내가 싫다고 해서 다 싫은 것은 아니며, 내가 좋아한다고 다들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아주 싫던 것들도 듣다 보면 좋아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극복에도 한계가 있다. 작곡가나 연주가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음악은 영감과 감동을 주긴커녕 거부감과 불쾌감을 낳는다. 기교나 인위성이 지나친 음악들이 그렇다. 인위적으로 불협화음을 과다 삽입할 경우, 청중은 자연히 부자연감과 부담감,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더욱이 빠른 리듬이 겹칠 때 그러기가 쉽다.
그렇다고 '천상의 음악'처럼 한없이 평온하고 아름답고 느리거나 고운 협화화음 중심의 순수 조성음악만 연주하거나 그런 화성/반주의 노래를 부르면, 현대인들은 답답하거나 지루하게 느끼게 된다. 젊은 교우들은 속으로 딴전을 피거나 급기야 자리를 뜨기가 쉽다.
그러므로 교회음악에도 조화와 타협이 아무래도 필요하다.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의 음악을 이해할 줄도 알고 때로는 참고 들어줄 줄 아는 관용과 인내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젊은이들은 기성세대가 굳혀 온 음악경력과 바탕을 경시하고 좌시할 게 아니라 중시해 줄 줄도 알고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마치 음악회에서 르네상스/바로크/고전주의기/낭만주의기/인상주의기/현대주의 음악을 고루 선곡하여 레퍼토리로 배정하듯, 교회음악도 그렇게 귀와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 현대음악이라고 해서 쉽게 단죄할 필요는 없다.
한 하나님, 한 크리스토, 한 성령님 안에서 하나인 교회가 음악 때문에 마음이 둘.셋.넷.. 등으로 쪼개지는 건 슬픈 일이다. 서로 이견을 지닌 남남 사이이던 남녀가 결혼으로 한 몸과 한 맘인 부부를 이루듯 교회도 그렇게 돼야 한다.
사람은 지/정/의의 인격적 존재다. 여느 동물처럼 감정만의 존재가 아니다. 정서에 주로 매여 거기 지배받고 쉽게 좌우돼선 안 된다.
협화/비협화를 갖고 음악 탓에 세대차를 느껴 갈등과 분열을 겪는 것은 주로 감정에 지배 받기 때문이다. 지/정/의를 고루 작동시키고 활용하여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분별이 필요하다.
자신의 경험/경력에 의존해 도식적이고 고루한 스타일, 지나친 일방주의로 버티거나, 일방적인 현대주의에 치우치거나, 세속적인 성향만 고집하거나 뉴에이지 성향을 좇는 것 등은 교회음악이 적극 피해야 할 길이다.
그럴 때 사랑으로 타이르고 교훈하고 사랑으로 들어 주고 공감할 줄 아는..말하자면 교회음악도 겸허와 양보, 복종의 장이어야 한다.
세속 음악회에 참석하면 개인 취향에 상관없이 무대 위에서 들려주는 다양한 시대/악파차 레퍼토리를 끝까지 조용하고 정중히 연주/경청할 줄 알면서도, 유독 교회들만 음악 '개싸움판' 내지 세대차 전장(戰場)이 돼 버린다면, 그건 수치와 오욕, 불행이다.
젊은이들도 정통 찬송가를 가사를 음미하며 자주 부르고, 기성세대도 젊은이들의 교회음악에 귀 기울이고 참여하는 껏 참여해야 좋다. 한 음악 안에 협화와 비협화가 공존하듯, 한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세대가 평화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가사와 음악, 연주 태도 등에 모종의 무리나 지나친 문제가 발견된다면, 그건 분별하고 가려 낼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음악이 종합된 현대라고 해서 모든 것을 적당히 눈 감아 주는 것은 교회의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음악도 성경 진리로써 검증 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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