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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교회력과 교회명절

2020 크리스마스 스토리

 

2020 크리스마스 스토리

스티븐 박

 

프롤로그

성탄절 만큼 신/불신을 막론하고 전 세계인이 함께 참여하는 축제는 없을 것이다. 올해는 더구나 역병 코로나(COVID)19 탓에 온 세계인들이 고통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구세주가 나신 성탄절의 기쁨을 더욱 향수처럼 그리워해왔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인류 역사상 신이 인간으로 태어난 성육신(Incarnation) 사건으로 인류사상 초유의 사건이며, 죄 가운데 살아온 인류에게 이만큼 기쁜 구원의 소식도 없다.

그러나 성탄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느꼈던 공포와 끔찍한 살해 현장 등을 우리는 만나게 된다. 아기 예수의 탄생 자체가 어떤 이들에게는 삶의 위협이 될 수 있을 만큼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권력의 기반을 흔들어 놓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배경 1

신약성경의 복음서, 특히 예수님의 탄생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신약 전체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의 탄생을 중심으로 전후 50년의 팔레스타인은 한 마디로 풍전등화의 상황이라는 표현도 무색할 만큼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경제적으로 극도로 궁핍했으며, 종교적으로 생명력이 없이 종교의 정치화만 있었던 암울한 시대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먼저, 그 당시 지중해를 중심으로 패권을 잡은 로마 제국은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은 교통, 교역, 군사적 측면에서 반드시 속주로 복속시켜야만 했던,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로마 왕실의 입장에서 보면, 초승달 모양의 팔레스타인 땅은 척박하고, 경제적 실속은 빈약했으며, 주변의 다신교를 믿는 잡다한 유목민들에 비해 유일신을 믿는 속주의 시민, 유대인들을 다루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타협이나 양보가 없고, 주변 환경에 적응하기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만을 고집하는 유대인들은 자기 신앙을 타협하거나 포기하기보다는 차라리 자결하는 쪽을 택하는 유일무이한 족속이었다.

주변 열강들의 팔레스타인 지배는 기원전 16세기부터 기원전 6년까지 1500년 이상 순서를 외우기도 숨이 찰 정도로 다양한 강대국의 지배를 받으며 지속되었다. 그런 기나긴 인고의 세월을 산 민족이 바로 유대인들이었다. 물론, 포로시대를 이은 중간시대에 들어서서, 예수님 탄생 200여년 전부터는 셀루키드 왕조 20년, 하스모니아 왕조가 100년 이상 지속되었으나, 그것도 로마 제국에 종속된 왕국으로, 실제로는 속국이나 다름없었다.

팔레스타인이 정식으로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 편입된 것은 기원전 63년이었다. 그 이전에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왕을 두고 있었지만, 국내 정치의 실질적인 권한은 로마가 파견한 총독(예수님 당시는 Pontius Pilatus였다)이 장악하고 있었다. 로마 황제의 재가 없이는, 유대인 왕이 스스로 왕권을 유지할 수 없었다. 우리는 마태복음 27장의 기록을 근거로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을 사면시키려고 노력한 선한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은 그와는 매우 다르다. 

성경의 빌라도와 많이 다른 빌라도

역사가 요세푸스 (Titus Flavius Josephus)는 빌라도를 “완강하며, 고집 세고, 잔인한 인물(a man of inflexible, stubborn and cruel)”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빌라도 총독은 식수가 부족한 예루살렘에 외곽으로부터 물을 끌어 들여오는 수로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주후 29년). 그러나 수로 건설 비용은 예루살렘 성전의 재정으로 충당하기로 결정하면서 유대인들의 극심한 분노를 샀다. 하나님을 모르는, 돼지고기를 먹는 더러운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바쳐진 신성한 금고에 손을 댄다는 것 자체가 유대인들로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 이었다. 그들은 빌라도를 향해 수로 건설을 당장 취소하라고 압박했다.

마침 예루살렘 시내 거리에 나선 빌라도 총독을 향해 일단의 유대인 무리들은 일제히 목소리를 높여 수로 건설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자신들이 집단으로 목소리를 내면, 범인 색출이 어려울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의 병사들을 예루살렘을 성지순례하는 유대인 농민들로 변장시켜 유대인 군중들 속에 끼여놓았다. 성난 군중들이 빌라도 총독 관저를 향해 몰려들고 있을 때, 변장한 빌라도의 병사들은 옷 속에 숨겨두었던 단검과 몽둥이로 군중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그는 살아남은 군중들을 체포해,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 이르는 중앙 도로(약150킬로미터) 양변에 나무 십자가를 세우고 거의 5천명 정도를 사형시켜 유대인들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심어줌으로써, 다시는 로마 통치에 저항하지 못하게 한, 잔인한 통치자였다(Killing Jesus, O’Reilly & Dugard. P. 168).

배경 2

팔레스타인은 북부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한 지방을 제외하고는 척박한 땅이 대부분이어서 농사가 빈약했으며, 준 사막 지역에서 자라는 야생 목초를 중심으로 소규모 목축이 가능한 나라였다. 그나마 농사가 발달된 갈릴리 지방도 경작 가능한 농지의 대부분을 유대 귀족 세 가문에서 독점하고 있었고, 전체 유대인들은 소작농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소작농은 소출의 절반을 지주에게 바쳤고, 나머지 절반으로 고액의 관세, 지방세, 종교세, 인두세, 심지어는 도로 통행료까지 유대 정부와 로마 정부에 바쳤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면, 소작농, 지주, 채무 같은 주제의 비유가 많이 등장함을 알 수 있다. 무거운 중과세에 짓눌린 유대인 소작농들은 해마다 빚이 늘어가는 궁핍함을 피할 수 없었다.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채무 불이행은 매우 엄격하게 다스려졌는데, 빌린 돈을 계약서 대로 갚지 못하는 경우, 재산 몰수 혹은 자녀를 종으로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비참한 현실이 비일비재했다. 재산을 몰수 당하고, 가족까지 해체된 유대인 남자들이 살아갈 유일한 길은 광야의 토굴 같은 데서 (실제로 유대 광야에는 바위 굴이 많이 있다.) 떼를 지어 살면서 강도 행각으로 목숨을 연명하는 길이었다.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일상적인 소재였다.

이런 가난에 찌들린 유대인 청중들을 향해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1-33).” 예수님 당시 그 어떤 제사장들이나 바리세인들로 부터 결코 들을 수 없는 말씀이어서, 가난한 유대인 서민들을 이 설교 말씀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제 눈을 돌려, 헤롯 대왕의 사망 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는지 살펴보자. 헤롯 대왕이 죽은 후, 그가 남긴 수많은 극빈자들, 채무자들, 계속된 흉년으로 소작농으로 일자리를 잃은 일용직 노동자들과, 쌓여가는 채무의 빚 독촉에 시달리다 못해 재산을 잃고 떼강도로 연명하던 무리들은 무법 천지가 된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어, 헤롯 주변에서 권력과 돈을 갈취하던 종교 권력자들을 살해하는 피의 혁명이 일기 시작했다.

특별히 갈릴리 지방을 중심으로 한 떼강도들은 단순한 강도 행위를 넘어선 정치적인 돌풍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갈릴리의 유다'(행 5:37)로 알려진 인물은 스스로 유대인을 위한 구원자로 자처하며 추종자들을 몰고 다녔는데, 전승에 의하면, 유다는 그 당시 강도로 명성을 떨쳤던 히스기야의 아들이라고 전해진다. '메시아'로 자처했던 히스기야는 헤롯 왕에 의해 체포되어,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그 아들 유다도 로마 정부에 세금 바치는것을 거부하라고 선동하다가 체포되어, 잔인하게 참수형을 당했다.

사도행전 5장에 나타난 드다(Theudas)와 이집트 출신인 가말라의 유다(Judas of Gamala)도 로마 정부의 부당한 세금 징수에 반대해, 스스로 메시아로 자처하며 돌풍을 일으킨 거짓 선지자들이었다. 이 가말라(또는 갈릴리)의 유다는 바리새인 중 신비주의 계열의 사독(Zaddok)과 결탁하여 새로운 독자적인 운동을 시작했는데, 1세기의 유대인 역사학자인 요세푸스는 이것을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에 이어, ‘제 4의 철학The Fourth Philosophy’이라고 명명했다.

이들과 다른 세 집단이 서로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이들은 여호와의 나라, 이스라엘을 하나님을 모르는 외세(로마제국)로부터 구출하는 데 목숨을 건 사람들이었다. 저들은 ‘시카리’라고 불리우는 단검을 품에 숨기고는 예루살렘에서 대형 종교행사가 치루어질 때 인파 속에 숨어들어가 번개 같이 로마 병정들이나 부패한 제사장들의 가슴을 찌르고 감쪽같이 인파 속으로 사라져, 로마 당국과 예루살렘 지도부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Zealot: Reza Aslan p. 40)

그 당시 로마는 고대 제국들 중 가장 행정제도가 발달된 제국이었다. 심지어 현대의 유럽과 미국의 법제도는 로마법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고 할 만큼, 로마 제국은 법 제도의 기반이 강했다. 세제(tax law)도 철저하고 엄격해서, 각 속주로부터 거두어들인 막대한 세금으로 제국의 번영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 실례로, 예수님 탄생시 로마 황제였던 가이사 아구스도(Caesar Augustus 재위: 주전 27년~주후 14년)는 팔레스타인의 징수제도를 개편하고 확충하기 위해, 인두세 징수를 목적으로 한 호적 등록을 갱신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모든 유대인들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 등록을 갱신해야만 했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2장에 의하면, 이때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도 고향인 베들레헴 (다윗왕의 고향)으로 올라가 호적에 재등록했다. 이 과정에서 아기 예수가 탄생한 것이다(눅 2:1-20).

 

배경 3

구약성경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 이후 세례 요한에 이르기까지 약 400년 동안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단절되었다. 한 마디로 영적인 암흑기였다. 오직 남아있었던 것은 유대교의 죽은 전통과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과 같은 종교인들의 빈 껍데기만 남은 종교행위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팔레스타인에는 이미 수백 년 전부터 들어온 아랍인들의 다신 종교, 현재의 이란으로부터 들어온 조로아스터교(배화교), 그밖에 사막의 유목민들이 섬기던 여러가지 미신들이 혼재해 있었다. 한 마디로 영적인 생명력을 상실한 유대교와 지역 다신교의 혼합된 사회가 예수님 탄생 때의 유대지방이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이 그 믿음을 칭찬한 여인은 수로-보니게(Syro-Phoenikian: 시리아와 페니키아에 걸친 광활한 지역) 출신의 여자였다 .

이런 영적인 암흑과 경제적인 궁핍, 정치적인 암울함은 메시아에 대한 열망 외에는 달리 출구가 없어 보였다. 예수님 당시 스스로 메시아라고 자처하면서 추종자들을 몰고 다녔던 인물들이 다수 있었다(그래서 예수님은 마 24장에서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에 대해 경고하셨다. 4, 5절) 이런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이골이 난 제사장 그룹과 바리새인들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그런 부류의 사람일 것이라고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며, 계속 정탐꾼들을 보내어 현장의 정보를 듣고 있었다(마 15장, 막 2장 등).

유월절

유월절(Passover)은 유대인의 3대 절기 중 가장 큰 명절이었다. 거의 한 주간 동안 치루어지는 축제의 제사에는 세계 각국에서 몰려드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로 인해 예루살렘 거주 인구는 평소보다 1.5배로 증가한다. 저들은 제단에 바칠 짐승을 수 백, 수 천 킬로미터 떨어진 주거지 국가로부터 공수해 올 수 없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 부근에서 양, 염소, 비둘기 등의 제물을 구입한다. 이때 지불하는 화폐는 이스라엘의 화폐인 쉐켈이나 로마 화폐인 데나리온이 아닌 자기 지역 화폐가 대부분이어서, 환전은 필수적이었다.

환전상과 제물을 파는 상인들은 예루살렘 외곽에서 시장을 형성해서 돈을 벌다가 점점 규모가 커짐에 따라 성전 앞 마당까지 진출했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성전을 지키는 제사장들에게 뇌물을 바치는 것은 기본이었다. 왜냐하면 제사장들의 묵인 없이는 환전상이나 그밖의 상인들이 성전 안뜰의 지척에서 상행위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분노가 너무나 당연한 현장이었다 (마 21: 12, 13).

예수님의 탄생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르면, 딸이 초경을 지난 후 1년 혹은 2년에 부모들의 합의에 따라 중매결혼을 시켰다. 이런 전통을 미루어 보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만 15~16세쯤의 동정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 요셉은 20세 전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딸이 16-18세 사이에 결혼한 것이 전통이었다. 만으로 계산하면 15세~17세 정도이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록한 누가는 다른 저자들에 비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의 기록은 많은 부분을 간과하고 있다. 첫째로 아기 예수님 탄생 현장에 나타난 동방박사 세 사람은 별의 인도함을 받고 유대 땅 베들레헴까지 찾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출발지는 지금의 이란으로 추정되며, 예루살렘까지는 거의 1,600 킬로미터 정도의 먼거리였다. 그것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파르티안 사막(Parthian Desert)을 가로지르는 험로인 여정이었다. 낙타를 타고 하루에 몇 킬로미터를 갈 수 있었을까? 그것도 시종을 대동하고 밤에는 별의 인도함을 받으면서….

헤롯 대왕

아랍인의 피와 유대인의 피가 절반씩 섞인 혼혈인 헤롯 대왕은 권모술수로 로마 황제에게 아첨하는 데 명수였다. 10명의 아내를 둔 이 호색한 왕은 유대인들에게 인정받지 못했으며, 제사장 그룹에게는 눈밖에 난 왕이었지만, 오로지 로마 황실의 재가 하나만으로 자신의 왕권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당연히 자신의 왕위가 늘 불안할 수 밖에 없었다.

헤롯은, 개인적으로는 질병의 종합센터라고 할 만큼 여러 형태의 악성 질병을 안고 살았다. 신장 기능의 저하, 폐질환, 기생충, 심장질환 외에도, 심각한 괴저 질환으로 생식기가 썩어 들어가고 있었고, 그래서 말 안장 위에 앉을 수가 없어 왕으로서 말을 타지 못했다. 통풍(gout)이 심해 발에 끌리는 왕의 옷 아랫자락을 잘라, 무릎까지만 내려오는 기괴한 왕복을 입고, 통풍으로 신발이나 양말을 신을 수 없어 맨발로 왕궁을 거닐고 있었다.

이런 그에게 동방의 지도자 세 명이 느닷없이 들이닥쳤다.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아기가 어디에 있나이까?” 헤롯 왕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 아닐수 없었다. “내가 유대인의 왕인데 나 말고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아기가 있다니?!” 동방박사들의 옷차림이나 위엄, 그리고 가지고 온 선물과 시종들의 규모를 보면, 결코 헤롯 왕이 무시해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헤롯이 얼마나 공포에 질려있었는지 추측하기가 별로 어렵지 않다.

헤롯은 즉시 베들레헴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인근 촌락의 생후 2년 된 사내아이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유아 학살현장은 헤롯의 용병이었던, 잔인하기로 악명을 떨쳤던 시리아 병사들이 맡았다. 몇 주간 동안 계속된 이 유아 집단학살 사건으로 인해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그리고 인근 촌락에서 통곡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아기 예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는 생후 8일 된 핏덩이 같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생후 8일된 사내 아이에게 할례를 베풀기 위함이었다 (마 2:21).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까지 43 킬로미터나 되는 험한 길을, 출산한 지 겨우 8일 된 산모와 아기를 요셉이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성전이 지척으로 내려다 보이는 헤롯 왕궁에서는 아직도 아기 예수를 살해했다는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헤롯 왕이 전전긍긍하고 있는 바로 그 현장의 발 아래까지 아기 예수가 온 것이다. 아직도 헤롯왕이 내린 유아 학살사건이 끝나지도 않은 극도로 위험한 순간에 저들은 오로지 할례라는 모세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레12:2,3) 이 여행을 감행했다.

하나님의 특별 보호하심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요셉과 마리아는 이 위험한 순간에 아기 예수를 성전에 바친 후,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시므온과 안나 선지를 만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아기 예수가 생후 40일이 된 날에는 모세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먼저 태어난 장남을 하나님께 바치는 봉헌식(dedication)을 올린 다음, 이집트로 피난 길을 떠났다(마 2장). 생후 40일된 갓난 아기와 산모를 짐승에 태우고 예루살렘에서 이집트까지 거의 1,200 킬로미터의 사막길을 떠난 것이다. 마2:13의 말씀을 미루어 보면, 아기 예수의 생후 40일까지 헤롯의 시리아 용병들이 저지를 유아 학살 사건은 마무리 지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이 현재 온 세계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성탄절의 기원이다. 여러분 모두에게 Merry Christmas!

스티브 박 드림

[필자의 견해 일부는 본 블로그 입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