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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사복음서

[마 7:7-12] 아버지와 남에게 바라는 대로


마태복음서 7'7-12 (사역)

  구해요! 그대들에게 주어질 것이고, 찾아요! 그럼, 찾아낼 것이며, 두드려요! 그대들에게 열릴 것이오. 
  구하는 사람마다 얻고, 찾는 사람은 찾아내고,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릴 테니 말이오. 
  그대들 가운데 누가,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주겠소? 또는 물고기를 달라는데 뱀을 주겠소? 
 
혹 그대들이 악해도 자녀들에겐 좋은 선물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그대들의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걸 주시지 않겠소?
   그러니, 무엇이든 그대들이 남에게 대우 받기를 바라는 대로 그렇게, 그대들도 남을 대해요. 이것이 곧 율법과 예언서라오.



위 말씀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몇 가지 큰 것들을 시사해 주고 계십니다. 
 
많은 신자들의 흔한 생각과는 달리, 본문은 단지 기도나 간구에 관한 것만은 아닙니다.
주님은 여기서 적어도 세 가지 서로 다른 동사들-구하기/찾기/두드리기-를 나열하십니다. 이 동사 묶음 속엔 요청하다/요구하다/간청하다/강청하다/추구하다/갈망하다/배우다/발견하다/(진입권을)얻어내다..등 다양한 뜻이 있지요.

사람들은 기도라는 격식이나 형태에 너무 묶이곤 합니다. 
우리는 흔히, 종교적인 '기도문'의 형태에 익어 있습니다.
예컨대..모임 끝에 소위 '주기도문'을 외우는 형식은 그 한 가지이죠. 뭘 하는지도 미처 모르는 채, 그걸 하곤 합니다. 하지만 '주기도'라는 것은 주님 자신의 기도도 아니거니와(주님 자신의 기도는 오히려 사역 중의 이런저런 기도나 겥세마네 동산에서의 간구, 요한복음 17장.. 등등이지요!), 더욱이 예배 격식의 일부로서의 어떤 의식문도 아닙니다. 단지 구약시대 끝에 살던 12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려던 기도의 한 샘플일 뿐입니다. 성령강림 이후 초기교회가 이 기도를 활용한 흔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예배 형식의 일부로서 말이죠. 별 의미성이 없는 형식은 형식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뭔가를 바라고 얻어 내는 방식엔 다양한 것들이 있습니다.
기도만은 아니라는 것이죠.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마르코스복음(맑) 11'23,24, 루카복음(눅) 17'8; 18'1-8, 요한복음 14'13,14; 15'7; 16'23-26 등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은 마귀를 대적하고 악령을 쫓는 과정에서도 주십시오/주세요/달라 형 기도만을 하기 일쑤입니다. "주님, 마귀를 물리쳐 주세요.." 식 기도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마귀를 물리치는 주체는 우리여야 합니다(야코보 4'7, 페트로A서=벧전 5'8,9)! 
이런 경우는 기도/금식 등을 한 뒤엔 요구하고 명해야 합니다! 선언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단지 '달라/주세요' 식 떼 쓰기 기도만을 위해 우리에게 입술과 혀의 권능을 주시진 않았습니다. 달라/주세요 식 떼쓰기는 새끼 동물들도 할 줄 압니다.

물론 그런 강청형 기도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내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아 모신 신자는 자주 믿음으로(!), 예수 이름으로(!) 명령/고백/선언/선포를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때에도 '떼 쓰기' 기도만으로 일관할 순 없겠지요.
이런 권한이 신자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입술의 열매를 먹고 사는 존재이니까요.

이처럼, 구하기/찾기/두드리기엔 분명히 예수 이름으로 명령/고백/선언하기의 기능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교계 일각의 비성경적인(!) 소위 '중단론/종식론'(cessationism) 사상과는 달리,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의 신자들은 누구나 영언(靈言/'방언')을 할 수 있고, 은사를 활용하게 돼 있습니다.
성령님은 어제나 오늘, 영원히 한결 같으시기 때문이죠. 
믿든 말든, 영언은 내 영이 하나님께 비밀을 아뢰는 중요한 채널입니다(코린토A 14'2).

그런데도 성경을 스스로 오해하여, 영언 '중단론', '무용론' 따위를 주장하는 교인들은 퍽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무기를 갖고도 쓸 줄 모르거나 쓰려 하지 않는, 무장해제된 병사나 다름 없으니까요. 그들은 행전 2장에 인용된 대언자 요엘의 '말세'가 어느 때를 가리키는지, 주님이 왜 맑 16'17a를 말씀하셨는지를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바로 이해하고 바로 분석해야 합니다. 개인 학자의 견해나 자신의 발상이나 "나름 성경해석" 따위를 진리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 앞에 실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특정 학자의 견해를 진리로 굳게 믿어 주니, 참 서글픈 일이지요.  

이처럼, 구하기/찾기/두드리기엔 분명히 영언도 포함됩니다!
안 그렇다면 성령님이 왜 초기교회와 이후 교회에 영구적으로(!) 영언을 주셨겠나요? 성령님의 불변성/영원성/전능성을 믿지 않는 일부 학자들의 신학적 견해에 불과한 '중단론/종식론' 따위에 믿음을 주거나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의 일대 착각(!)과는 달리, 요엘의 '말세'는 일시적 말세가 아니라 지속적/영구적(!) 말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약속하시고 성령님이 주신 모든(!) 방편들을 고루(!) 활용하는 것이 신자의 지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의 약속과 보장입니다.
주님은, 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얻을 것, 찾는 사람은 반드시 찾아낼 것, 두드리는 사람은 반드시 문이 열려 들어가게 될 것을 약속해 놓고 계십니다.
무엇에 근거해섭니까? 바로 하나님의 신실(信實/faithfulness) 내지 신실성이지요!

하나님의 이 신실을 구약에서는 '에메트'라고 했습니다. 진리/참됨/성실 등과도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은 늘 참되시므로 신실하십니다. 그 분에겐 거짓이란 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 분의 약속은 모두 흔들림 없고 변함 없는 진리/진실입니다. 그 분의 말씀을 붙들지 않고는 우리가 살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도 늘 말씀을 속에 머물려야(=머물게 해야) 합니다.

그 분의 신실성은 아침마다 떠오르는 태양처럼 영원불변합니다(참고: 이르미야애가=렘애 3'23)!


하나님은 또한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기도와 간구, 요구와 요청, 고백과 선언 등에 대한 그 분의 응답은 아가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같은 사랑을 구약에서는 '헤쎄드'(KJV성경의 'lovingkindness')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할 때는, 그 분의 에메트(진리)와 헤쎄드(사랑)에 공히 바탕을 두고 하게 되며, 그래야만 합니다.

주님은, 악한 아버지라도 자식에겐 좋은 것들을 주는데 하물며..라는 은유를 통해 우리의 간청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그 분의 신실과 사랑은 물론, 거룩하심과 참되심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리십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달리 악하신 분이 전혀 아니기에, 더더구나 기도의 응답을 늘 확실히 기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주님의 약속은 확고히 보장돼 있습니다.
그 분의 약속은 풍파 속에도 배를 묶어 두는 든든한 닻과 같습니다.
그 분의 말씀은 단단한 바위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진리와 사랑에 우리의 믿음을 걸지 않는 이상, 우리가 응답을 얻어낼 길도 묘연해집니다.


끝으로, 주님께서는 한 가지 더, 중요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녀에게 이처럼 응해 주시듯, 우리도 이웃들에게 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대우/대접을 받으려는 대로 우리도 남에게 그렇게 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바라는 만큼 우리도 남에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일각에선 이것을 소위 '황금율'(黃金律, the Golden Rule)이라고 불러 왔습니다.


최효섭 시인(목사)은 과거 이런 어린이시를 읊은 적이 있습니다.

    남의 말 내가 하면 그 말이 돌아오고
      남의 흉 내가 하면 나도 흉을 잡힌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고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도 있단다

      예수님은 오늘도 내 귀에 속삭이신다:
    "대접을 받으려면 남을 대접하여라"


우리네 속담들을 얼기설기 곁들여 엮은 이 시구 속에서,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이 부분적으로 어떤 성격인지를 대할 수 있지요.

   남의 얼굴의 미소를 보고 싶다면, 내가 먼저 미소를 띄어야 당연합니다.
   남의 인사를 받고 싶다면, 내가 먼저 인삿말을 걸어 주면 됩니다.
   남에게서 존댓말이나 좋은 소리를 듣고 싶걸랑 나부터 존댓말을 쓰고 좋은 말을 하면 됩니다. 
   남에게서 음식 대접을 받고 싶은 생각이 들면, 먼저 내가 몇 번 "쏘면" 됩니다. 어차피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보다 복되니까요.
   남에게서 존중과 좋은 대우를 받으려면, 나 자신이 그에게 존경과 좋은 대우를 해 주면 될 거 아닙니까?

'옆구리 찔러 절 받기'가 늘, 과히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문제는 얼마나 순수한 의도이냐이겠지요.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대(善對)/후대(厚對)/우대(優對)하시듯 그렇게 남을 대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바로 온 율법서와 예언서들의 정신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남이 내게 해 주길 바라듯 내가 남에게 해 주기..이웃을 사랑하길 내 몸 같이 하는 이 정신이 곧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라는 것이지요.


어저께 버스 안에서, 나날이 차가워져 가는 세상 인심을 새삼 발견했습니다. 
승객들이 빽빽한 차 안에서, 한 엄마가 아기를 안고 내내 서 있는데도 좌석에 앉아 있는 그 누구 한 사람 아는 척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기엄마가 무겁게 서 있는 광경을 눈으로 바라보고도 외면하거나 빤빤하게 잠자코 있는 등, 자신만 편하게 의자에 앉아, 양보할 생각을 전혀 않는다는 것이지요. 내 돈 내고 탄 버스 좌석에 내가 앉아 있는데 어쨌단 말이냐..란 식입니다.

철저히 이기주의적/개인주의적이고, 철저히 무정하며, 철저히 반인륜적입니다.  
이게 어디 동물사회이지, 인심과 인정이 있는 인간사회라고 할 수 있겠나요!
세상이 그렇게 돌아갑니다. 

저는 과연, 크리스천들이라면 저럴 수 있을까 잠시 의심해 봤습니다.
크리스천이 그렇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어찌 그런 일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길을 실천하는 것일까요?

기억하십시오:
내가 남을 대접할 줄 알아야 하나님께도 제대로 자녀 대우를 받습니다!
내가 해 놓은, 숨은 착한 일은 하나님이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역겨워 하실 만한 '뻔돌씨', '뻔순이'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럴 때, 주님은 우리를 "죄 없다"고 아니하십니다.
남의 어려움과 곤경과 역경을 돌아보지 않는데 어찌 내가 복만 받을 것이라고 기대를 할 수나 있겠습니까?
 
율법과 예언서가 우리를 단죄하게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남을 나처럼, 이웃을 내 몸처럼 대할 기회는 무척 많습니다.

그 기회를 최선껏 선용합시다.
하나님의 에메트와 헤쎄드를 기억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