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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연구/구원론

행13:48은 예정론 구절?

 

사도 파울/바르나바스가 설교한 장소인 피시디아 안티옼의 유대 회당 터 위에 세워진 파울(기념)교회당 유적   

 

 

행13'48은 예정론 구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한글개역 개정역. 굵은체 강조는 필자의 것)

 

위 본문 (사도)행전 13'48은 '예정론' 특히 칼뱅주의 5대 교의[각주:1]의 하나인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교의의 뒷받침이 되는 성경구절들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번역 문구 자체로만 보면, 영락없이 장로교/개혁교의 '예정'(Predestination) 교리와 동일한 개념을 내포하는 듯 보인다.

장로교인인 필자도 오랫동안 이 성구를 그렇게만 이해해왔다. 그러나 이 구절을 새삼스럽게 묵상할수록 칼뱅주의 '예정론'과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칼뱅주의자들은 절대로 이 구절이 예정/선택을 시사한다고 고수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 칼뱅주의권 사람들은 제발 '절대'라는 말을 좀 남용하지 말자고 권고하고 싶다. 성경엔 '절대'라는 말이 별로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http://scissurl.com/3/bo5 참조).

과연 본 절이 예정론 내지 무조건적 선택을 입증해 주는가? 


 

개정역 본문 풀이

 

우선 개정역 본문을 중심으로, 있는 그대로를 분석해 본다.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기뻐하고 주님의 말씀을 기렸는데, 마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기로(원문에는 '하나님'이라는 주어도, '주시기로'라는 말도 없음) 미리 작정하신 사람들만 믿은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믿었는데 구원을 다 얻은 것인지도 기자는 확실히 밝히지 않았다. 다만 믿으면 분명 구원을 얻는다고 했으니 잠정적으로 그렇다고 여겨질 뿐이다. 역으로 예정론에 입각해 본다면 문장상 또는 논리적으로, 말씀을 듣고 기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칭송한 사람들 가운데도 하나님에 의하여 미리 선택되지 않았다면 영생을 얻지 못할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개념도 가능하다. 그러니 어쩌면 칼뱅주의/개혁교가 추구하는 절대적 예정론으로서는 왠지 불완전(?)하고 불안한(?), 어정쩡해 뵈는 뒷받침이기도 하다. 

 


원문은?

 

그렇다면 원문(그리스어)상으로는 어떨까? 이 구절을 원문으로 따져 본 결과는 기존 번역들과는 사뭇 인상이 다르다. 물론 식자(識者)에 따라 견해가 다양할 수 있겠다. 필자가 충분히 검토해 본 대로는, 행전 13'48이 '절대로' 예정론을 뒷받침하는 구절이기는 어렵다는 결론이다. 원문상으로나 문맥상으로 충분히 달리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의 그리스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Ἀκούοντα δὲ τὰ ἔθνη ἔχαιρον καὶ ἐδόξαζον τὸν λόγον τοῦ θεοῦ καὶ ἐπίστευσαν ὅσοι ἦσαν τεταγμένοι εἰς ζωὴν αἰώνιον. 
   (한글음독) 아쿠온타 데 타 에트네 에카이론 카이 에돜사존 톤 로곤 투 테우 카이 에피스튜산 호소이 에산 테타그메노이 에이스 조엔 아이오니온)

  

그리스어 사본들이 모두 동일하다. 다만 일부 원문은 속격(소유격) θεοῦ(테우: 하나님의) 대신 κυρίου(퀴리우: 주님의)를 썼을 뿐이다. 그러므로 원문상의 이의는 있을 수 없다. 문제는 원문의 해석이다.

여기서 핵심 낱말은 τεταγμένοι(테타그메노이)이다. 다양한 번역판들을 보면, 압도적인 다수의 번역이 '작정된(ordained)' 또는 '정해진(appointed)'으로 옮겼다.

 

필자로서는 이런 번역 성향이 뜻밖이다. 왜냐 하면 어근 '타그'에서 비롯된 이 낱말의 원형동사 '타소(τάσσω)'는 본래 고대 그리스 군사 용어로서, 가장 일차적인 어의는 "(군함/군대를) 정열시키다(to arrange), (전열을) 갖추게 하다, 배열하다, 정리하다, 가지런히 놓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열병식을 위해서다. 따라서 수동형 관형어로는 (장교 등 외부적 존재에 의해) "채비가 된, 준비된" 등이 원초적인 뜻이다. 흥미롭게도 피시디아 안티옼은 당대 로마제국의 소아시아권 제1의 군사도시였다. 그런 도시에서 루카가 더더구나 타소의 원의를 되새기지 않았을까? 
그 다음으로는, 배치된/배정된/선임된/지정된/선정된/정해진/결정된/작정된 등의 뜻이 가능하다. 능동형으로는 '헌신한'으로도 쓰였다. (이상 참조: Strong 자전 신약낱말번호 #5021, Thayer 사전, Helps Word Studies, NASEC..등의 'τάσσω'항)

밥 윌킨의 지적대로, '타소'의 원의(原意)와 가장 거리가 먼 번역은 '앞서 정해진', '미리 운명지어진'(pre-destined) 따위(예: 아람어역, 불가타역)의 것이다. 특히 BDAG 렉시콘은 마태복음서 8'9, (행전의 기자이기도 한 루카가 쓴) 루카복음서 7'8, 로마서 13'1, 코린토A서(고전) 16'15 등을 본절과 함께 유사한 뜻으로 열거했다.

 

그런데도 '갖춰진/준비된'의 뜻으로 번역된 성경은 GOD'S WORD Translation 밖에 없다. 필자는, 압도적인 번역들이 한결같이 일차적 어의를 무시하고 이차적 어의를 더 중시한 데 대해 유감스러운 쪽이다. 필자가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 한 가지는 원문상에 (전치사+대격으로 추가됐어야 할) 하나님이라는 주체가 없기-생략됐기(?)-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타소의 이 (복수남성)수동형은 생략된 누군가 뚜렷한 주체에 의해 '정해진'의 수동태가 된 것이기보다 자신들이 두 사도의 말씀에 의하여 "채비된"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필자는 본다.

다만 영문의 컨텍스트 상 'arranged'라는 직접적인 어휘가 어색하기 때문에 그보다는 'set', 'prepared'가 걸맞다고 보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이 언급했듯, 우리는 '타소'의 이런 무드를 비록 이 동사를 쓰진 않았으나 역시 같은 기자인 루카가 쓴 다른 구절에서도 느낄 수 있다(예: 행 14'9; 16'14)

 

그런데도 대다수의 번역들이 이런 일차적 어의를 거의 전혀 무시하고 이차적 어의를 택한 이유는 도대체 뭘까? 이것은 학적인 태도도 아니다. 안타깝게도 그 점이 필자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필자가 이렇게 사뭇 다른 쪽으로 기울어지는 이유는 더 있다. 바로 문맥/컨텍스트상으로 그렇다! 이 점은 잠시 후 논해진다.


참고로, 본 절의 주요 번역문들을 나열해 본다. (강조는 필자의 것)

 

 

   바울로의 말을 듣고 이방인들은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작정된 사람들은 모두 신도가 되었다. (공동번역)
  
   이방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하신 사람은 모두 믿게 되었다. (새번역)
  
   그 말을 듣고 이방인들은 기뻐하며 주의 말씀을 찬양하였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선택된 사람은 모두 믿었다. (현대인의성경)


    그 이방인들이 그 말을 듣자 기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각주:2] 기렸으며, 영원한 삶(또는 영생)을 향하여 준비된 (만큼의) 무리가 다 믿었다. (필자의 사역)

   

   When the Gentiles heard this, they were glad and honored the word of the Lord; and all who were appointed for eternal life believed. (NIV) 
  
   When the Gentiles heard this, they began rejoicing and glorifying the word of the Lord; and as many as had been appointed to eternal life believed. (NASB) 

 

   And when the Gentiles heard this, they were glad, and glorified the word of the Lord: and as many as were ordained to eternal life believed. (KJV) 

 

   異邦人たちは, それを 聞いて 喜び, 主のみことばを 贊美した. そして, 永遠のいのちに 定められていた 人たちは, みな, 信仰にはいった.(新改譯)

 

 

 

피시디아 안티옼의 유적인 고대 로마의 도로. 이 도시는 당대 로마제국의 소아시아권 제1의 군사요충지였다. 

 

 

기자 루카의 용례

 

행전의 기자인 루카는 본절에서 어떤 생각으로 이 단어 '타소'를 썼을까? 흥미롭게도 루카는 그의 두 권서(券書)-루카복음서와 행전-에서 동사 '타소'를 그 어느 신약 기자들보다 더 많이 썼다(뤀 7'8, 본절; 행 15'2; 22'10; 28'23). 뤀 7'8에서는 '타소'가 직접 군사용어로 쓰였다. 행 15'2에서는 "배정했다" 정도의 뜻이다. 22'10에서는 (할 일들이) 스케줄처럼 미리 정리/배열/설정돼 있다는 의미로 쓰였다. 28'23의 '타소'는 날짜를 선정해 놓았다는 뜻이다. 이 모두가 영어 'arrange'에 해당한다.
아울러 이 개념은 본절에도 걸맞는다. 피시디아 안티옼의 이방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영생을 향할(εἰς ζωὴν αἰώνιον) 채비가 된 사람들이었다. 

신약성경에는 '타소'가 모두 8회 사용됐다. 위에 나열한 것 외에도 마태복음 28'16, 로마서 13'1, 코린토B 16'15에 쓰였다. 본절(행 13'48) 외에는 그 어느 구절도 타소가 영생과 관련되어 쓰이지 않았는데, 대부분 일차적 어의인 'arrange'의 개념으로 쓰였다.


 

문맥은?

 

본문의 배경을 파악하기 위해 13'44-47을 보면, 본절은 46절과 서로 대비가 된다. 파울과 바르나바스의 메시지를 들으려고 몰려온 피시디아 안티옼 시민 군중을 보고 질시한 유대인들은 (이미 한) 파울의 설교를 반박하고 비방하니까 두 사도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그대들에게 전할 것이로되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고 영원한 삶-영생을 얻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자처하기에 우리가 이방인들에게로 향한다"고 대응했다.
 
즉 (하나님이 예정하신) 선민인 유대인들은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영생을 거부한 반면, 이방인들은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와서, 듣고, 수납하고, 환영하고, 믿은 것이다. 요한복음서 3'18,19에 따르면, 이 유대인들은 선민으로 택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믿지도 않았기에, 이미 심판을 받은 셈이다. 
 
그러나 칼뱅주의 예정론자들은 (하나님의 예정으로!) 이미 선민이 된 유대인들이 자유의지로 버림받게 된 데 유의하기보다는, 본 절을 통해 이방인들 가운데 영생을 얻기로 (미리 앞서) 작정된 사람들만 믿었다는 주장을 하기가 쉽다. They are missing the point!

그러므로 어찌보면 이 경우 칼뱅주의 예정론은 옛 선민인 유대인들에게 적용될 것인지, 영적인 새 선민인 이방인들에게 적용될 것인지 애매한 것이다. 아마도 칼뱅주의자들은 유대인들이 선민으로 예정됐다가 이때 버림받기로 '예정됐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파울과 바르나바스는 분명 유대인들 스스로가 영생에 걸맞지 않은 것으로 자임했다고 지적했다! 즉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라 자유의지에 인한 스스로/나름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마음을 열지 않았고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채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이었으니 영생을 향할 리가 만무하다.
이것은 예정의 차이가 아니라, 자유의지의 차이인 것이다!

 

반면 피시디아 안티옼의 이방인 시민들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이미 회당에서 파울의 설교를 들은 데다 유대인들의 중상/비방에 대한 두 사람의 반박 선언을 추가로 듣고 반기고 기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렸으니까, 이들의 마음 상태는 이미 파울의 메시지에 의하여(!) 영생을 "향한"(원어 전치사 에이스) 채비가 되어 있었기에 믿게 된 것이다. 이들이 단지 이때에 믿었다는 것만으로는 훗날 끝내 영생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 단지 그렇게 믿어질 뿐이다.

그러나 칼뱅주의자들은 이들이 영생을 받기로 "미리 예정"됐으니, 반드시 다 받았다고 해야 직성이 풀릴 것이다. 왜냐 하면 그들로서는 본절이 예정론의 주요 뒷받침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상을 볼 때, 본절 행 13'48은 전혀 신적이고 무조건적인 선택을 지지해 주는 말씀이 아니다. 선택이란 개념도, 용어도 사용되지 않았다. 여기 선택의 개념이 있다면, 단지 인간의 자기선택일 뿐이다. 유대인들은 영생 쪽을 선택하지 않았고, 이방인들은 선택한 것이다. 관건은 채비이다. 같은 루카가 쓴 46절과 48의 대비가 보여 주는 양상이 그것이다.

 

만약 본절에 대한 칼뱅주의자들의 생각이 맞는 것이라면, 그래서 미리 작정되고 선택된 어떤 특정 그뤂에 속한 사람들만이 믿을 수 있다면, 왜 하나님에 의하여 선민이라는 특정 그뤂으로 오래 전 예정된 유대인들은 이때 믿지 않은 것인가?? 예정됐다면 그들도 믿어야 할 게 아닌가? 이때뿐 아니라 왜 파울 일행이 거의 가는 곳마다 믿지 않고 오히려 적대한 것인가? 
혹 칼뱅주의자들의 변명대로 하나님의 예정이 "바뀌었다"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예정은 수시로 바뀔 수도 있는가? 그런 예정이 어떻게 절대적일 수 있는가?


또 그렇게 해서 택정받아 믿는 특정인들만 영생을 얻는다면, 나 자신 그 특정인들에게 속해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내가 바로 지금 믿고 있기에 영생을 얻기로 앞서 작정된 것이라면, 차후에 혹여 어떤 동기로 믿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가? 영생을 얻지 않기로 (유대인들처럼) 작정이나 예정/선택이 뒤늦게 슬쩍 바뀌는 것인가? 아니면 애당초 나는 작정되지 않은 것인가?
그런 경우, 나의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이 보장해 주는가, 아니면 칼뱅주의 원칙이 보장해 주는가? 내가 '작정'됐다고 굳게 믿었어도 훗날 어긋날 것이라면, 칼뱅이나 칼뱅주의 신학자들, 기타 칼뱅주의자들이 저너머 세계에서 나를 책임져 줄 것인가? 막연하고 위태롭지 않을 수 없는 약속인 셈이다. 


윌킨이 강조한 대로, (칼뱅주의의 '무조건적 선택'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또 다른 교의인 '제한속죄(제한대속)'도 성경에 배치된다. 요복 3'16, 요한A서(요일) 2'2은 오히려 정반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영생을 얻게 된다. 영생을 위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가졌음을 안다(요복 11'25,26). 


결론적으로, 행 13'48은 무조건적 예정 내지 선택을 말하고 있지 않다고 필자는 믿는다.

 

 

  1. 약자 TULIP으로 대표되는 5대 교의는 1. 전적인 부패(Total Depravity)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3.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4. 불가항적 은총(Irresistable Grace) 5.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본문으로]
  2. 일부 사본들은 '주님의 말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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