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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슈/영언(방언)론

방언론 토론을 위한 발췌 (들풀)


        예루샬렘 마르코스 요한의 어머니-마리아의 '다락방'으로 추정되는 유적지와 옥성호 님의 저서 표지.  

토론을 열면서


요즘 들어, 은사주의권 -오순절이나 순복음 계열- 교회와 신사도 운동 측에서 방언을 강조하고 장려하는 책 출판과 강연 및 홍보 등에 노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반면, 방언을 반대하는 책과 주장들을 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티엘티 성도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1. 과연 방언이란 무엇이며 2. 현대에도 방언을 비롯한 은사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지, 아니면 과거의 어느 시점에 중단된 것인지 토론하고자 합니다.

우선 토론을 위한 매개체로서 옥성호 형제의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라는 책을 선택하였습니다. [독자 미쉘맘님의 추천이기도 합니다.] 제가 일단 그 책의 주요 내용을 간추려 올리고, 티엘티 형제자매님들께서 함께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아래에 요약 정리한 것은 토론의 소재로 중요하다고 생각되었기에 게재한 것일 뿐 옥성호 님의 주장들이 모두 다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또 앞으로 나올 티엘티 독자들의 주장과 맞물리는 또는 맞서는 옥 형제의 주장이 책에 있다면, 보다 올바른 토론을 위해 제가 적절히 추가하겠습니다.
이 기회에 바른 방언관 정립을 위해 독자 모두가 토론에 적극 참여해 주시면 바람직할 것입니다.


아래는, 섹션 별로 본 옥성호 님의 주된 주장들입니다.



옥성호 저자의 주장점들
 


1-1 주장
: "방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다 (고전 14:22)" 라는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지금부터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방언 사건들을 살펴 본다. 거의 대부분의 신학자가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방언은 외국어라는 데 동의한다. 

1-2 논거: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오순절날 쏟아진 방언이 단순한 외국어가 아니라, 외국의 특정 지역의 방언, 사투리였다고 동의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냥 한국어가 아니라 한국의 전라도 또는 충청도 사투리였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다 동의하는데) 아브라함 카이퍼만이 이에 동의하지 않는 대표적 인물로서, 카이퍼는 오순절에 발생한 방언이 외국어가 아니었고 일종의 하늘의 언어였지만 듣는 사람의 귀에 알아듣게 들렸을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행전 2장, 8장 (사마리아인들 사건), 그리고 10장 (고넬료 사건) 모두를 통해서 옥 형제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이 세 가지 사건들에서 방언은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장소에서만 나타났기에 방언이 나타나는 데에는 사도가 반드시 어떤 역할을 해야만 했습니다. 즉, 방언은 사도의 권위를 세우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했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야말로 표적이 필요했던 유대인이었던 것입니다(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하고 찾는 사람들이라는 근거를 마 12:38 말씀과 고전 1:22 말씀으로 제시하면서).
믿지 않는 유대인, 다른 말로 하면 세계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 여기에는 사도들도 다 포함되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사도들도 '믿지 않는 자'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으며 - 위한 표적이 바로 방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방언은 '외국어'여야만 했습니다. 복음이 세계를 향해 전파되는 사실을 의미하는 표적에 '외국어' 만큼 상징적이고 의미있는 표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방언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넓이와 깊이를, 사도를 중심으로 한 당시의 유대인들이 바로 깨닫도록 하기 위한 표적이었습니다.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주석가) 렌스키만큼 정확하게 설명한 사람은 없습니다:

     "누가는 바울이 고린도전서에 말한 ‘방언’이 무엇인지 당연히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사도행전을 썼으며, 바울은 오순절 이후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 속에 위치한 ‘방언’의 본질이 외국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고린도전서를 서술했다."

(참고사항: 신약성경의 배열 순서 상으로는 행전이 먼저 나오지만, 기록연대를 보면 고린도전서가 사도행전보다 먼저 기록되었다.)

 

[들풀 도우미] 저자는 ‘방언 = 외국어’ 라는 자신의 결론을 성경 전체에 적용하였고, 또 자신의 책에서도 계속 강조하며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결론을 근거로 고린도전서를 해석하고 있고요. 따라서 ‘방언 = 외국어’ 라는 주장은 은사중단주의 측의 가장 근본적인 기반으로 모든 반론의 근거가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옥 형제는 주장하기를, 오순절 계통을 포함한 은사주의자들도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방언들이 외국어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들이 현대의 방언에 대한 근거를 사도행전이 아니라 고린도전서에서 찾으려 한다고 합니다.
또, 은사주의자들은 사도행전의 방언은 외국어였고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현대와 같은 뭔가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이라고 주장하였기에 자기 자신도 이것을 놓고 내내 고심하였으나 결론내리기를 “사도행전이나 고린도전서에서 모든 방언은 외국어였다’고 말합니다.


2-1 주장: 행전 2장에서 성령을 받고 방언을 한 사람들이 120 명 전체가 아니라 사도들인 12 명 뿐이었다. 

2-2 논거: 왜냐면 2장 전체에서 그 어디에도 사도들 외에 다른 사람들이 성령이 임한 그 장소에 있었다는 암시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날 방언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행 2:27)".
행전 1:11 말씀에서 사도들을 갈릴리 사람들이라고 부르지 120 명을 갈릴리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또한 이날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 120 명이 다 방언을 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라고 D. A. 카슨은 행 2:44 말씀을 근거로 지적한다는 것입니다. 행전 2장의 4절 말씀이나 44절 모두에서 "다, 모든"이란 단어가 공통적으로 등장하는데 44절의 "다, 모든"은 실제로 100 % "다, 모든"을 의미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4절의 "그들이 다 ...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라는 말씀의 "다"는 전체 120 명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3-1 주장: (현대에는 방언이 회심 후 한참 있다가 나타나지만 행전 기록에 의하면 회심과 함께 바로 나타났으므로 현대의 방언은 올바르지 않다는 맥락에서) 믿고 죄사함을 받는 순간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사실로 보아서 현대의 은사주의자들이 성도들에게 성령세례를 받으라고 가르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즉, 방언은 성령세례와는 무관하다.

3-2 논거: 행전 2:38~40 말씀을 살펴보면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하고 말씀하셨지 “일단 죄사함을 받고 크리스천이 되라 그 후에 성령세례를 간절히 구하면 성령의 선물인 방언을 받으리라” 하고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즉 믿음으로 구원받은 모든 자에게 성령이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날 삼천명이나 세례를 받았지만 믿은 후 잠시 있다가 방언을 하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오순절 사건을 관찰하면서 존 스토트는 중요한 한 가지를 지적합니다.
오순절 사건이 발생한 그 날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 중에서 사도들을 포함한 120 명과 그 날 회개한 수천 명의 사람을 구분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120명과 3000명의 두 그룹을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표준은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첫째 그룹이 아니라 둘째 그룹인 3000 명의 경험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120 명의 경헝이 명확하게 구별되는 두 단계에 걸쳐 이루어진 것은 단지 역사적인 상황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들은 오순절 전에는 오순절의 선물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특수한 역사적 상황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3000 명처럼 오순절 사건 이후에 살고 있다. 따라서 그들처럼 우리도 죄사함과 성경의 ‘선물’ 또는 ‘세례’를 동시에 받게 된다.


행전 8장에 기록된 사마리아인들의 방언 사건 역시 오늘날의 표준이 될 수 없는데 사마리아인들이 먼저 믿고 나중에 성령을 받게 된 것은,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퍼져 나가는 증거를 사도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고 또한 사도들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한 수단으로써 방언을 사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행전 19장에 기록된 에베소인들의 방언 사건도 현대의 방언과 같은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세례 요한의 가르침만을 알았던 사람들에게 바울이 복음을 올바르게 가르쳐서 성령을 받게 한 것입니다.
이들은 원래 잘 믿고 있다가 바울을 만나 2차 성령세례를 받아 더 능력있는 크리스천으로 업그레이드 된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은 바울의 사도성을 확립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사람은 빌립 집사였지만 나중에 방언이 터진 것은 요한과 베드로가 같은 자리에 있을 때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시에도 아무나 방언의 은사를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방언은 철저히 사도성과 직결된 문제였습니다. 


4-1 주장:
방언은 다수 속에서 나타난 은사이지 개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4-2 논거: 행전 16장에는 유럽 최초로 복음을 받은 루디아의 회심 사건이 등장합니다. 유럽 최초의 회심자라는 상징성으로 볼 때 이 사건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방언에 대한 정서를 생각할 때 루디아와 그 가족이 바울의 세례를 받는 이 순간이야말로 방언이 터질 최적의 상황이 아닙니까? 그러나 방언은 커녕 성경은 그와 비슷한 어떠한 암시조차 없습니다 (행전 16:14~15).

16장에는 또한 루디아의 경우보다 훨씬 더 극적인 회심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자살하려다가 복음을 듣고 회심한 간수 이야기입니다 (행전 16:31~34). 여기에도 방언에 대한 아무런 암시조차 없습니다. 방언은 개인 회심과 관련된 표적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옥성호 님과는 반대 입장인 관련도서들


<사도행전의 방언 기록들에 대한 옥성호 님의 결론>

결론적으로 사도행전에 나타난 방언 사건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네 번의 사건은 각각 독특한 대상들을 향해 각각 독특한 방법으로 주어진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그렇기에 이 네 가지 안에서 방언이 ‘외국어’였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어떤 공통적인 패턴을 찾을 수 없습니다.
방언 사건 속에 공통된 패턴이 없다는 사실은 성령의 강림이 오늘날 결코 반복될 수 없는 독특한 예수님의 구석 사역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사건임을 대변합니다.
네 번의 방언 사건 속에서 본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방언을 하게 된 사람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복음이 전파되고 새로운 교회 시대가 자리잡도록 하는 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대상입니다.
예루살렘에 모여든 세계 각지의 유대인, 사마리아인, 이방인 그리고 구약적 사고에 젖어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오순절을 기점으로 사도들을 통해 이 각각의 독특한 집단에게 부어주신 사도행전 방언의 역사는 오늘날 ‘달라고 떼쓰고 기도하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그런 방언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5-1 주장: 사도행전의 방언이나 고린도전서의 방언이나 모두 ‘외국어’였고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방언과 같은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아니었다.

5-2 논거: (사도행전의 방언은 ‘외국어’였다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화 된 일종의 ‘명제’이므로 더 이상 논할 이유도 가치도 없고) 고린도전서에서의 방언이 무엇인지는, 저명한 성경주석자인 크리스웰 박사의 말을 근거로, 그당시 고린도라는 도시의 상황을 이해함으로써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의 고린도는 도덕적 윤리적 타락 뿐만 아니라 아프로디테 여신을 섬기는 신전으로도 유명한 곳이었는데 이 신전에서 사랑과 미의 그리스 여신이 성적 주신제로 숭배되었고 이 주신제에 고용된 신전의 창녀들은 이교적인 음란한 종교의식을 집전함에 따라 무아경의 광란 속으로 빠져들어 갔고 그들의 음란한 봉헌식에서 알려지지 않은 방언을 말하는 이러한 광란적인 여자들에 대한 광경은 그리스 로마 문화 시대에는 흔한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방언이 당시 고린도에서는 대단히 흔한 현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고린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그 유명한 ‘델파이’ 신전 때문인데 ‘방언 예언’ – [들풀 도우미] 여기에서 의미하는 방언 예언이란 뭔가 알 수 없는 ‘말’로 예언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으로 유명한 이 신전으로 인해서 고린도 사람들에게 방언이란 매우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하면서 이교의 방언과 성경적인 방언을 전혀 구분하고 있지 않는 점으로 보아서 고린도전서의 방언 역시 ‘외국어’여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사도 바울이 이교의 방언과 성경적인 방언을 전혀 구분하고 있지 않는 이유를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결국, 누가 보아도 성경적인 방언과 이교의 방언의 차이점을 쉽게 알 수 있으려면 이교의 방언은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기에 성경적인 방언은 외국어여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방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즉 이교의 방언과 같은 거짓 방언을 하였던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방언 – 외국어를 하였던 것인데 이 방언을 잘못 사용하였던 것이 바로 문제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전 14:18)»고 한 것은 히브리 말과 최소한 3 개의 외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음 항부터는 저자의 방언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성경해석을 요약하였습니다.>

6-1 성경해석: 고전 12:3 말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의 해석입니다.

6-2 저자의 해석: 이 말씀으로 보면 예수를 ‘저주할 자’라고 부르는 일단의 사람들이 있는데 누구나 다 알아듣는 말로 교회 내에서 예수를 ‘저주받을 자’라고 불렀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보다 훨씬 교묘하게 예수를 저주한 어떤 무리를 바울이 지적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결국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법으로 예수를 저주하는 방법은 방언을 이용한 방법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12 장 서두에서부터 고린도 교회 안에서 방언이 가장 극적으로 남용되고 있는 한 사례를 들어 읽는 이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7-1 성경해석: 고전 12:31 말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의 해석입니다.

7-2 저자의 해석: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라는 이 구절이 주는 가장 큰 어려움은 31절이 이 구절 바로 전까지 이어진 바울의 논점을 일거에 부정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전까지 바울은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은사는 하나님의 주관에 달린 것이고 은사 간에는 어떠한 등급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은사를 사모하라고 가르칩니다. 게다가 은사 중에서도 등급이 높은 것을 골라 찾으라고 가르칩니다. 

이 구절을 반복해서 읽을 때 이 구절에서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간절히’에 해당하는 ‘earnestly’입니다. 이 단어는 바울이 이 구절을 결코 은사를 사모하고 찾으라는 의미로 쓰지 않았다는 점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 줍니다. 바울이 은사를 그냥 ‘사모하라’도 아니고 아예 ‘간절히 사모하라’고 썼다는 사실은 그가 도리어 이 문장을 반어적인 의미로 쓰기 위해 의도적으로 강조하지 않았는가 하는 추측을 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의 내용은 «(바울이 말하기를) 직전의 구절들에서 모두가 사도가 될 수도 없으며 누구나 다 방언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보였다. 이렇게 얘기해도 너희가 달라지지 않겠지. 그래, 계속 너희가 최고로 여기는 은사, 방언을 사모해라. 그리고 나는 너희의 바램과는 관계없이 여전히 가장 좋은 것, 너희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을 지금부터 보여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8-1 성경해석: 고전 13:10 말씀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의 해석입니다.

8-2 저자의 해석: 여기서 핵심은 ‘온전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고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두 진영이 오늘도 팽팽한 설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은사종식주의자 (=은사중단주의자)들은 온전한 것은 성경의 완성이라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은사지속주의자들은 온전한 것을 예수님의 재림으로 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온전한 것’이 올 때 사라지는 은사들은 예언, 지식 그리고 방언만을 따로 떼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약 온전한 것이 예수님의 재림이라면 그때는 이 세 가지의 은사만 없어지지 않습니다. 앞에서 나온 다른 여러 가지 은사들도 다 사라집니다. 모든 지상 은사들의 마지막을 의미하는 재림과 달리 오로지 예언, 방언, 지식에만 직접적 영항을 미치는 또다른 온전한 것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만약 온전한 것이  예수님의 재림이라면 우리는 그날까지  «어린 아이와 같이 생각하고 어린 아이와 같이 보며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이 희미하게)» 산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성경의 다른 모든 가르침과 크게 모순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온전하여지고 장성하라고’ 여러 곳에서 지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 때가 되어야 비로소 이루어질 목표를 왜 성경은 미리 이루라고 강요합니까? 

중요한 것은 ‘자라나라’는 모든 명령은 반드시 ‘말씀’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 어떤 것도 ‘은사’와 관련해서 자라나라는 명령은 없습니다. 따라서 완성된 말씀을 통해 우리는 더 이상 어린 아이처럼 행동하지 않고 더 이상 희미하게 보지 않아도 됩니다. 

로마서 1:11 말씀에도 은사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가 기록된  후 1년 남짓 후에 씌어진 로마서에  그 중요한 은사인 방언이 빠질 수  있습니까? 로마서도 성령의 영감을 받아  바울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록을 토대로 할 때 성령은 로마의 성도들에게는 방언의 은사를 주실 의도가 없으셨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방언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러 가지 정황을 추측하건대 방언은 A.D. 60년 전후로 사라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9-1 성경해석: 고전 14:2 말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의 해석

9-2 저자의 해석: 우리가  이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살펴본 바울의 풍자적 표현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들풀 도우미: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표현한 반어법이나  이중부정, '비꼼'과 같은 표현을 의미함] 

바울이 이 구절을  여기에 쓴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고린도교회가 마치 혼자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하나님과 자신만 아는 무슨  신비한 비밀을 서로 교통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방언을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2절에서 5절까지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 중에 방언은 혼자 말하면서 마치 하나님과의 직통으로 통하는 신비한 경험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내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잘 들어라. 예언은 (제대로 된 은사는) 자신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혼자 방언하며 신비한 경험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회를 세우는 은사의 본질을 떠나 자기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사람일 뿐이다.

물론 방언[ 들풀 도우미: 외국어 방언을 의미]이 제대로만 사용되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위험요소가 많은 방언에 비해 예언은 훨씬 더 안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된다. 따라서 방언 하고자 하는 자는 절대로 혼자 앉아서 말하지 마라. 바로 사용되지 않고 혼자말을 떠드는 방언은 결코 교회에 덕이 되는 바른 은사가 아니다.»


10-1 성경해석:
고전 14:4 말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의 해석입니다.

10-2 저자의 해석: 고전 13장에서 말씀하시기를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한다고 하였는데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하여 바울이 자기가 바로 앞에서 한 말을 스스로 뒤집는다고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방언은 스스로의 유익을 구하는 은사이기에 (통역이 함께 하지 않는 경우) 도리어 방언 사용을 꾸짖고 있다고 보는 것이 바른 해석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꾸짖음이 도리어 방언 사용을 지지하는 구절로 왜곡되어 인용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1-1 성경해석: 고전 14:14 말씀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의 해석

11-2 저자의 해석: ‘나의 영’은 인간의 영혼 또는 인간의 한 측면으로서의 영혼을 가리킨다고 보는 입장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울이 이 표현을 왜 썼는가입니다. 바울은 14절에서 19절에 이르러서는 ‘나의 영’으로 드리는 기도와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대비하면서 더 극적으로 영과 마음을 대비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결론은, 몸과 정신이 따로 놀며 영은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정신은 딴 데 가 있다고 하는 식의 가르침은 전혀 성경과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항상 전인격적인 존재와 전인격적인 예배를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의도적’인 분리를 서술하는 바울을 이해하는 길은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하고 비꼬고 있는 것입니다.

즉, 바울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영으로 기도한다니 대단하구나. 그런데 너희들도 알다시피 너희들보다 훨씬 더 특별한 나도 너희들처럼 영으로는 기도를 못하는데 말이다. 내가 행여나 너희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제대로 기도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구나. 내 마음이 내가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는데 무슨 기도가 제대로 되겠느냐? 나는 너희처럼 그렇게 특별하지 않아서 말이다. 그런데 너희는 영으로 기도한다니 참으로 대단하다...»

그래서 바울의 결론은 19절입니다.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또한 20절에서  말씀하기를,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고 하십니다. 왜 갑자기 바울은 지혜와 악을 대비시킵니까? 지금까지의 가르침을 통해 볼 때 악은 무엇이고 지혜는 무엇입니까? 너무도 자명하리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