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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메시아계보 대 장정

남북대전 (메시아계보대장정49)

                     벹 쉐메쉬의 유적


바탕본문: 왕들B서(왕하) 14:8-14. 연대기B(역대하) 25:17-24


아마찌야의 선전포고와 패전

한국에도 미국에도 남/북 전쟁은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와라면 모를까, 동족상쟁이기에 더욱 비참하지요. 
분열왕국-유다와 이스라엘도 그랬습니다.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은 과거에도 아주 잦았지요. 레호보암-야로브암 시대에도 그랬고, 아비야-야로브암 대의 제마라임 전쟁이 그랬습니다(왕A 14:30, 15:6,7=연대B 13:2-20). 또 아사 왕 때도 북의 바아샤 왕과 치열하게 싸웁니다(왕들A 15:16,32).
그나마 한동안 남북 사이에 평온이 유지된 것은 북의 아하브와 남의 예호샤팥이 연혼을 맺은 사돈 간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아하브 왕가가 멸문지족이 되고 난 다음, 북엔 새로 예후 왕조가 서게 되어 요아쉬(=예호아쉬)가 왕이었을 때, 남의 아하찌야는 무슨 생각에선지 갑자기 북에다 전령을 보내어 선전포고를 합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맞붙어 보자!"

당시 요아쉬는 즉위 2년째, 아마찌야는 첫 해였으니 서로 통치 경력은 비슷했습니다. 필시 아마찌야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에돔을 쳐서 대승한 뒤 자만했던 모양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아마찌야가 누군가와 "상의(相議)"하고 도전장을 보냈다는 사실입니다. 즉 누군가와 의논했다는 겁니다. 누굴까요? 대신들이었겠지요. 적어도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상의'해야 했다면, 그 대상은 다름 아닌 주/야웨님이었어야 합니다! 아마찌야의 옛 선조 다빋은 전쟁을 치르기 전 언제나 하나님께 여쭸던 '모범질문생'이었음을 우리가 상기하지요.
그러나 아마찌야는 지난 번 자신을 경고한 대언자의 입을 막아버린 이래(연대B 25:16), 전혀 뉘우치지 않았기에 하나님과는 사실상 단교된 상태였지요. 따라서 그가 하나님과 상의할 턱이 없었습니다.

아마찌야의 선전포고를 받은 북왕 요아쉬는 기가 찼습니다. 
    '지가 그래..모처럼 에돔을 쳐서 좀 이겼다고 기고만장해? 뭘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만.'

당시 북쪽엔 엘리야의 후계자인 늙은 대언자 엘리샤가 있어, 비록 요아쉬가 악한 왕이지만 나라를 지키며 왕을 돌보며 영적 자문 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엘리샤를 통해 나라를 지키신 적이 한 두 번 아니었지요. 

더욱이 요아쉬는 용맹스런 대 장군/왕 예후의 손자가 아닙니까?

요아쉬는 아마찌야의 당돌한 도전장에 점잖게 답장을 보냅니다.

    "레바논의 가시나무가 레바논 삼나무에게 전갈을 해 일렀단다: '네 딸을 내 아들에게 주어 며느리를 삼게 해 다오'라고. 그랬더니 레바논의 들짐승이 지나가다가 그 가시나무를 그만 짓밟아 버렸단다.
네가 에돔을 쳐 이겼다고 네 마음이 높아져 방자하구나. 네 집에서 잠자코 지내거라! 왜 스스로 화를 불러 너와 유다가 함께 망하려 들지?"

그러나 진짜로 시건방져진 아마찌야는 쉽게 물러서질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대언자가 판단하고 예언한 그대로였습니다. "..하나님이 왕을 멸하시기로 결심하신 줄로 알겠습니다." 좀 더 설명하면, 에돔 신상들을 갖다 섬겼기에 하나님이 본 때를 보이기로 하신 때문이었지요(연대B 25:20).

아하찌야가 그러자, 요아쉬는 "오냐, 정 너의 원이라면.." 하고 벹쉐메쉬로 쳐들어 와 양쪽이 서로 대전했습니다.
유다 군대는 힘없이 패전하여 뿔뿔이 흩어져 제각기 자기 장막으로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이라곤 전혀 없는 '콩가루 왕국'이었던 셈이지요.

요아쉬 왕은 아마찌야 왕을 포로로 잡고 내친 김에 그대로 수도 예루샬렘으로 진격해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예루샬렘 성벽을 에프라임 문에서 성 모퉁이 문까지 총 400 큐빋을 헐어 버리고 성전 곳간 속에 오벧에돔 족이 늘 지켜오던 금은과 성전도구들, 왕궁 보물들을 모두 약탈하고 사람들까지 볼모로 잡아갔습니다.

아마찌야의 허영심이 하나님의 저주에 해당한 셈이었지요. 아마찌야는 요아쉬가 타일렀을 때 선전포고만 도로 걷어 들였어도 이런 처지를 당하진 않았을 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분의 백성을 친 북의 요아쉬를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전쟁 얼마 후 요아쉬는 죽어버리지만, 아마찌야는 15년을 더 생존합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찌야는 종내 뉘우치지 않습니다. 질긴 운명(?)이지요.





요아쉬와 엘리샤

여기서 잠시..메시아와는 직접 연관이 없지만, 악한 왕인데도 불구하고 대언자 엘리샤를 생애 말엽에 만나 마지막 교훈을 받잡던 북의 요아쉬 왕에 관해 좀 더 생각해 보죠.
요아쉬는 국방장관에서 왕이 된 할아버지 예후로부터 또는 엘리야-엘리샤 대언자의 사역들과 예언들, 이적들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을 터입니다.

엘리샤가 누구던가요? 선배/스승 엘리야로부터 두루마기와 함께 갑절의 영감을 받은 뒤 하나님이 그를 통해 하신 굉장한 온갖 이적들은 이루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국가적이고 대표적인 것만 나열해도..

    예호람 왕 당시 모압 정벌에 나섰던 이스라엘-유다-에돔 연합군이 위기에 빠졌을 때 골짜기 개천을 파서 
     이기게 함.
    아람 국방장관 나아만의 나병 치유를 도움.
    아람 군대의 도탄성 포위를 풀고 포로를 삼았다가 귀국시킴.
    아람군에 의한 쇼므론(사마리아) 포위와 시민의 굶주림 당시 아람군이 스스로 물러갈 것을 예언함. 
    아람 왕 벤(=바르) 하닫의 부하 하자엘이 왕이 될 것을 예언함.

그밖에도 크고 작은 수많은 이적을 성령님의 권능으로 베풀었습니다. 
그러니 가히 국보급 인사였을 수 밖에요.
 
더구나 요아쉬의 조부 예후 왕은 바로 엘리야/엘리샤의 예언에 의지하여 그 성취의 일환으로서 아하브 왕가를 '씨말림'하고 새 왕조를 세웠으니까요! 엘리야-엘리샤는 그만큼 유명했습니다. 특히 슈무엘이 창건한 라마 나이옽 대언자 공동체의 전통을 이어받아 엘리샤가 재건한 유명한 대언자학교를 모를 리 없을 터입니다.

그러나 이런 훌륭한 대언자를 뒀음에도 불구하고, 정의롭게 행했던 예후는 다시 우상숭배를 허용할 정도로 변질됐고 그의 아들 예호아하즈도, 그 손자인 요아쉬 역시 그랬습니다. 그들은 적극적인 우상숭배자는 아니어도 신상 숭배를 관용하고 방치했습니다. 그것도 선이 아닌 악이지요.
예후를 통해 나라를 개혁하시려던 하나님은 이들에게 노하여 마지 않으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에 이런 일을 미리 내다 보셨지요.

그러던 어느 날. 바로 그 엘리샤가 불치병이 걸렸다는 비보를 왕이 듣습니다.
    '뭐야, 그 분께서?! 아니, 엘리야처럼 하늘로 그냥 오르시는 게 아니고? 아..이 일을 어떡할고! 내 아버지요 이스라엘의 전마차와 마병 같은 분이..! 난 이제 어떡하지?'

눈 앞이 캄캄해진 왕은 급히 말을 몰아 엘리샤가 누워 있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병상 위에 누운 채 짙게 그늘진 눈자위의 엘리샤를 보자, 이 분을 뵙기가 이제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왈칵 눈물이 치솟습니다. 왕의 눈물이 줄줄 흘러 엘리샤의 얼굴 위에 떨어집니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전마차들과 마병들이여!"

왕은 나라의 기둥이 이제 떠나가는 것 같아 울부짖습니다. 아마도 요아쉬는 엘리야=엘리샤 스토리가 생각날 때마다 이 명언을 마음에 되새긴 듯 합니다. 또한 하나님과 그 대언자의 권능이 곧 이스라엘의 국방의 힘이었음을 새삼 절감한 듯 합니다.

위의 말은 옛 명언으로서, 바로 엘리샤 자신이 엘리야의 승천 때 하늘 전차를 향해 외친 말이었습니다(왕들B 2:12). 아마도 당시 엘리샤는 엘리야가 타고 가는 하늘 불마차를 보고 자신도 모를 감흥과 아쉬움 속에서 그렇게 부르짖었던 것 같습니다.
또 왕의 외침 대로 과연 엘리샤는 아하브-예제벨의 학정 아래 나라의 정의를 지키려고 힘과 애를 쓰다 갔던 대언자 겸 애국자이기도 했지요. 

미뤄 보건대 엘리샤와 요아쉬 왕의 사이는 퍽 가까운 사이였을 가능성도 엿뵙니다. 정의로운 예후 왕조 초기에 할아버지와 아버지 예호아하즈는 물론 자신도 왕세자로서 어릴 적부터 공히 엘리샤의 많은 자문과 조언을 받으면서 사귀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 왕들은 모두 우상숭배에서 떠나지 않아 늘 경고를 받습니다.

이제 엘리샤는 떠나기 앞서 왕에게 유언과 함께 마지막 축복을 합니다. 적국 아람에 대한 승전 예고였습니다.

엘리샤는 힘이 없지만 엄숙한 목소리로 왕에게 지시합니다.  

    "활과 화살들을 가져 오소서."

요아쉬가 냉큼 활과 화살을 가져 오게 하자, 엘리샤가 말합니다.

    "왕의 (한) 손을 활 위에 얹으소서."

왕이 활 위에 한 손을 얹자, 엘리샤는 두 손을 뻗쳐 왕의 두 손 위에 얹고 안수를 합니다. 여기엔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감과 권능이 대언자를 통해 상대방에게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동쪽 창문을 여소서."

왕이 동쪽 창을 열자 엘리샤는 이어서 말합니다.

    "쏘소서!"

왕이 활을 당겨 창 밖 허공을 향해 쏘았습니다.

   "이것은 주/야웨님의 구원의 화살 곧 아람으로부터의 구원의 화살입니다. 왕은 아람 사람들을 진멸하기까지 아펰에서 치셔야 합니다."

'아펰'은 아람(쉬리아)-이스라엘 사이의 가장 전략적인 요충지로, 과거 아하브 왕 때도 아람이 이스라엘을 두 번째 공격했을 때 치열한 격전지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하나님은 아하브를 싫어하셨지만, 당신께서 산의 신일 뿐더러 평원의 신이심도 입증하시려고 여기서 적은 이스라엘 군대로 아람 대군을 무찌르십니다(왕들 A 20:26-30).

엘리샤가 다시 말합니다.

    "화살들을 쥐소서."

왕이 손으로 화살들을 쥐자, 엘리샤가 연이어 말합니다.

    "(그 화살로) 땅을 치소서."

왕은 화살뭉치로 땅을 세 번 치고는 그쳤습니다. 그러자 엘리샤는 화를 내며 말합니다.

    "왕께서는 적어도 다섯 번이나 여섯 번쯤 치셔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아람이 전멸하기까지 물리치셨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 왕은 그들을 세 번만 치실 겁니다."

자..과연 요아쉬의 잘못일까요? 그렇다면 왕의 문제가 뭘까요?
여기서 요아쉬의 마음 상태를 잠시 점검해 보죠.

엘리샤는 분명히 왕의 동편 창 활쏘기를 통해 아펰에서 이스라엘이 아람 군대를 칠 것이라고 성령님을 통해 믿음으로 예언하여, 믿음을 심었습니다. 이것은 여느 활과 화살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을 통한 절대 승리의 예표임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왕은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 그래서 나를 통해 아람 군대를 전멸시키실 표징이 바로 이 활과 화살이라는 믿음을 능동적/적극적/확신적으로 가동시켰어야 합니다.
그 확신이 강했다면, 왕은 화살뭉치로 땅을 몇 번이고 쳤을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믿음의 확증이고 그 믿음에서 우러나는 행동이고 표현입니다.
그런데도 3회로 가볍게 그쳤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약속에 대한 왕의 믿음이 적당주의로..얕고 엷고 가볍고 미지근하다는 암시일 수 밖에 없지요. 요아쉬의 믿음은 그 정도 밖에 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요아쉬는 화살도 먹이지 않은 빈 활을 동편 창밖으로 아무 표적도 겨냥하지 않은 채 허공에다 대고 시위만 당기라니 약간 황당하고 맹랑하고 우습게도 생각됐을지 모릅니다. 더구나 활로 쏘지 않고 남은 화살묶음을 들고 땅을 치라니 엉거주춤, 좀 계면쩍게 여겼을 터입니다. 
[ 일부 학자들은 여기서 화살묶음으로 땅을 친 게 아니라 활로 차례로 3대의 화살을 쏘아 땅으로 떨어트렸다고 주장하기도 함.]

아무튼 그래서 요아쉬 왕은 한 순간 이 행동이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됐을지 모릅니다. 이건 마귀의 적당주의 유혹입니다. 
    '흠, 이거 좀 우습다야..그냥 대강 해 둬.' - 이렇게 말입니다.

그래서 엘리샤는 노를 발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흔히 요구하시는 예상과 생각 밖의 특이한 행동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쉐의 양지기 지팡이를 권능의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판관(사사) 기데온에겐 대군 대신 단지 3백명의 군사들과 나팔과 횃불을 요구하셨습니다. 삼손은 나귀의 턱뼈로 펠레쉩 사람 수 천명을 물리쳤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에도 때때로 이런 믿음을 표출할 계기가 옵니다. 겉으로는 그것이 별로 시답지 않게 보여도 절호의 기회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를 우리는 잘 활용하여 적극적/능동적인 믿음을 행동으로 발동해야 옳습니다.
그런데도 늘 그러진 못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약함을 느낍니다. 말씀에 대한 신뢰가 옅고 얄팍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신실한 약속으로 되돌아가 그것을 상기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고백적 행동-이것이 우리 믿음대로 약속이 성취되는 데 중요합니다. 

우리는 성도들을 수시로 습격해 오는 원수 마귀의 군대를 물리치기 위해 활과 화살을 손에 잡고 겨누어 쏘아야 하며, 승리의 확신 속에서 화살을 쥐고 몇 번이라도 쳐야 합니다. 우리가 이길 것을 확실히 믿는다면, 능동적/적극적으로 몇 번이라도 기도하고 고백하고 선언하며 행동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입니다.

믿음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러 나아가는 사람은 그 분이 계심과 그 분을 찾는 사람들에게 보상자이심을 믿어야만 합니다(히브리서 11:6). 

그 후 엘리샤는 죽고 예언은 성취됩니다. 
요아쉬 왕은 아람 왕 하자엘의 아들 바르(=벤) 하닫의 군대를 세 번 쳐서 이기고 과거 선왕 예호아하즈가 전쟁 중에 뺏겼던 것을 되찾습니다.

그러나 그가 일찍 죽고 나서 아들 야로브암 2세는 41년을 통치하면서 광대한 영토를 되찾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었지요.


     오늘날의 라키쉬


아마찌야의 피살

유다 왕 아마찌야가 시건방을 떨던 끝에 북 이스라엘에 대패한 다음, 요아쉬 왕이 일찍 죽고 나서도, 창피를 무릅쓰고 15년을 더 살아갑니다. 수치의 세월이었지요.
그러자 일부 백성들은 무능한 왕의 모습이 한심했던지 왕 암살 음모를 꾸밉니다. 악의 순환이지요. 아마찌야는 선친도 당했던 암살이 무서워 허둥지둥 라키쉬로 달아납니다.
그러나 역모자들은 자객을 딸려 보내어 결국 왕을 라키쉬에서 죽이게 합니다. 그리곤 그 시신을 말에 실어다 예루샬렘에서 다빋 성에다 매장합니다.

하나님을 배신한 왕의 최후는 늘 이랬습니다.

필자는 외래어는 되도록 원음에 가깝게 표기하자는 생각입니다. 
이 점, 독자의 이해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