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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과 검증/현대영성비평

에니어그램 비평 (1)


'Enneagram' by Lee van Laer

    에니어그램의 모든 면을 다 다루려면 큰 분량이 되겠기에, 내용을 나누어 짧은 시리즈로 엮습니다. 첫 회에서는 서론적인 얘기와 관련 인사들 중심으로, 후반부에선 주로 인성유형론 자체를 다루렵니다. 이 글 내용은..일부 저의 생각을 빼고는 위키피디어 정보를 상당량 빌렸고 도서와 몇몇 여타 자료들도 참고했습니다. 추후 수정/보완될 수 있습니다.


엶글

에니어그램(enneagram)은 인성을 아홉 가지로 분류하는 방식입니다. 전체 인간그룹을 9 유형으로 분류하며 개인 속에도 각각 9 품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9 성격유형론, 9 인성론 등으로도 불립니다. 개인의 본질적/선천적인 개성 내지 심성과 행동 패턴을 범주학적으로 "읽는다"는 심리기법이죠. 그런 의미에서 심리학이나 오컬트 기술인 '독심술', 소위 투시와도 통하는 바 있습니다.

그래서 에니어그램을 배운 사람에겐 그것을 써 먹기 위해 남을 "읽는" 관습이 따릅니다. 단순한 성격 분류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것 자체가 즐거움이기보다 일종의 고통이고 노예일 수 있지요. 물론 전혀 비성경적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안"과도 다른 것입니다.

에니어그램이란 용어는, 본디 그리스어로 '아홉'을 뜻하는 '엔네아'(ennea)와 '그림/도형'을 가리키는 '그람모스'(grammos)어의 합성어입니다. '노나그램'(nonagram)이나 '에니어곤'(enneagon)과도 거의 같은 말입니다.
단순히 9각형/9각별로도 쓰이지만 일반적으로 에니어그램이라면 밑 부분과 밑변이 빠진 원에 둘러싸이고, 꼭지점들이 서로 연결돼 속이 거미줄처럼 얽힌 모습입니다. 
불균형 헥서그램(6각별)과 삼각형이 맞물린 형상이기도 합니다. 에니어곤은 본래 상징의 하나이며 숫자 중심으로 만들어진 고대로부터의 개념입니다.

현대 세상엔 에니어그램을 활용한 인성 분석이 활개칩니다. 미국을 비롯한 수많은 세속 정부나 사회 공공기구, 교육단체 등이 인력자원이나 구성원들의 인성과 심리분석에 이것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문화세계의 모든 인력 시스템이 통째로 이 '9각형'에 따라 움직인다 과언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문제는 교계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에니어그램이 활용될 뿐더러 다방면에 응용되고 있습니다. 다양한 이론적, 실용적 심리학 분야엔 물론, 소위 '내적 치유'에도 사용되는 이 관행은, 알고 보면 지도층이 교인들의 심리/성격분석에 응용하는 세속적 방법이고, 따라서 말세 현상의 하나입니다. 뿌리가 매우 수상쩍은 관행이지요.

우리는 세상 것과 하나님의 거룩을 조화시키거나 합성시킬 수 없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숫자와 도형을 중시/숭배함

에니어그램은 개념보다 숫자나 거기서 기원된 도형에 더 중요성을 두고 있습니다. 수많은 영지주의자들, 신비가들이 그런 관행에 젖어 있지요. [ 참조: http://blog.daum.net/discern  29. 영지주의, 카발라(오컬트), 뉴에이지(신지학)의 공통점 ]

숫자 9를 중심으로 한 에니어그램은 본래 옛적부터 있어 온 개념이고, 20세기 현대 에니어그램의 피상적 개념은 역시 9를 중시한 게오르기 구르지예프로부터 온 것입니다. 에니어그램 학자인 단 리처드 리소, 러소 헏슨의 글들을 읽어 보면, 3이란 수의 세 묶음인 3x3의 조합을 "가장 이상적"이라고 중시하고 있음을 봅니다.

고대 이교도들도 그랬지만, 현대의 비밀집단들은 숫자를 숭배하기까지 합니다. 고대 전통에 따라 숫자 '9'를 중시하거나 숭배하는 특수 집단들이 퍽 많지만 그 중의 하나가 프리메이슨들입니다. 또 중국/불교/힌두교/회교/유대교/바하이교/북구신화/싸탄교 등이 9라는 수를 매우 중시합니다.

에니어그램은 이처럼 숫자 숭배와 직결돼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에니어그램 수행자들은 '9'라는 수의 노예가 돼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숫자를 개념보다 더 중시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숫자나 도형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9 열매는 에니어그램과 무관!

에니어그램 활용자들은 우격다짐으로 신약 성경에 나타난 성령님의 아홉 열매(갈라티아서  5:22,23)와 이것을 결부시키는데..천만예요! 성령님의 아홉 열매는 본래 초자연적인 것이며 에니어그램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숫자만 같을 뿐입니다.

성령의 9 열매를 단지 아홉이라는 숫자에 맞춰 세상 심리나 윤리 차원에서 다루려는 사람은 커다란 오류와 착각 속에 갇힌 사람입니다. 성령의 9열매는 보통 사랑도 아닌 하나님의 조건 없는 초자연적 사랑인 아가페를 출발점/기초로 한 권능으로서의 열매입니다. 

만약 9라는 숫자 때문에 성령의 아홉 열매와 에니어그램이 "상통"한다면,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인 9 영적 은사와도 상통해야 할 것이며..그렇다면 성령의 9열매들, 9은사들도 9각형/9각별로 묘사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시도는 성령님 자신과도 무관한, 사악하고 더러운 의도입니다!  

이 점에서도 '9'라는 수를 중시하는 에니어그램은 이미 이질적/이교적입니다.


9개 굴레와 평준화

에니어그램은 사람과 성품, 그 삶을 아홉 개의 틀 내지 굴레 속에 집어 넣고 고착시킴과 별 다를 바 없습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개인과 개성의 범주화요, 상품에 준한 일종의 규격화/평준화/도식화입니다. 
이것은 바로 미래의 세계정부가 추구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온 인류를 편리하게 인력자원화 하고 '관리'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응용되고 있습니다. 예,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에니어그램은 어느 모로 보나 신세계질서(NWO)나 세계 단일/통합 정부가 바라는 방향으로 적용되고 있음이 훤~히 눈에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니어그램을 개인에게 억지 적용하는 사람들은 부지 중에 미래의 통합정부를 돕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세상의 모든 사람을 사람마다 고유하게 내셨습니다. 어떤 사람도 똑 같은 성품은 없습니다. 인류가 70억이면 70억명 개인마다 얼굴과 지문이 다르듯 틀과 성품이 다릅니다. 비슷할지는 몰라도 그렇다고 어떤 분류의 틀에다 끼어 맞출 수 없습니다. 같은 혈액형조차도 똑 같은 성품일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피를 나눈 부모와 자녀 간에도 서로 다릅니다. 더구나 거듭나 새 피조물이 된 신자에게 에니어그램을 적용한다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입니다.


영 아닌 혼 차원

에니어그램은 다른 모든 심리기법처럼 혼/프쉬케 차원일 뿐 결코 영/프뉴마 차원일 수 없습니다. 혼적/심적/정신적이지, 영적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본질, 참 자아는 속사람인 영이라고 강조합니다. 에니어그램이 아니라 에니어그램 할애비라도 인간의 영들을 범주화 하거나 분류하지 못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 영의 분류와 범주가 있다면, 딱 두 가지 일 뿐입니다: 거듭난 영과 거듭나지 못한 영.

아이러닠하게도 구루와 '도사'와 각자(覺者), 권위자를 자처하며 남을 분류하고 읽기를 원하는 에니어그램 창시자들과 그 제자들 모두는 거듭나지 못한 타락한 인간들에 불과합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영이 죽은 상태입니다. 영이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산 영을 분류하고 범주화 하고 읽고 성품을 고칠 수 있을까요?!

이래서 에니어그램은 거듭난 사람 즉 신자들에게 적용할 수 없습니다. 신자와 에니어그램-그건 상호모순이며..옥시모론(상호반대어)과도 같습니다. 


죄관이 흐리멍덩한 에니어그램

에니어그램에서도 '죄'와 '악성', 그리고 '선'과 개선을 논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성경의 선관이나 죄관과 다릅니다. 그들이 말하는 죄의식은 어디까지나 세속철학적, 형이상학적이고 따라 상대적인 것입니다. 에니어그램을 현대에 적용한 구루와 선구자들 자신이 모두 의인이 아닌 형편 없는 죄인들이며..더 나아가 신비술/심령학/영지주의 등에 팔린 악인들입니다. 따라서 성자가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똑같은 죄인들일 뿐입니다.
 
성경은 모든 인류가 죄로 인해 부패했고 죄에 팔렸다고 말합니다(로마서 3:10-18 참조). 만물보다 더 썩어 문들어진 게 사람의 마음입니다(예레미야 17:9). 그 속엔 참으로 선한 것이 있을 수 없으며, '선'이라면 상대적일 뿐입니다. 그러나 유일한 구주 예수 크리스토를 믿는 사람은 그 분의 절대 의를 힘입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어 참 거듭난 사람은 비록 혼과 몸이 약해 죄를 지어도 절대 의인입니다. 회개하고 자복하면 언제나 의를 유지합니다.


구원관이 없는 에니어그램

에니어그램은 성품의 문제를 제기하고 나쁜 성품을 더 좋은 성품으로의 개량/개선/향상/치유하는 방법론을 이야기할지 몰라도 늘 도토리 키 재기 식으로 비교상대적일 뿐이며, 근본적이고 영구적인 대책이 있을 수 없습니다. 글 후반에서 알 수 있듯 에니어그램 선구자 자신들이 이교도나 다름 없는 잡학자들, 부도덕한 인사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에니어그램으로는 성경적 입장에서 볼 때 참된 치유와 구원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에니어그램에 영구성을 부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착각입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심리 차원일 뿐인 탓이죠. 진통제나 미봉책, 임시방편 또는 플래시보-위약(僞藥) 내지 위약(慰藥)-의 역할에 그칠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의 구원은 영구적일 뿐더러 영원합니다! 사람의 나쁜 성품과 성향, 악습을 고치는 길은 예수 크리스토께 나아와 회개하고 구원받는 길 밖에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크리스토와 벨리알의 비(非) 조화 (코린토B서=고후 6:15-18 참조)

에니어그램의 근원은 옛 바빌론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바빌론은 온갖 잡신과 우상의 본 고장이었습니다. 바빌론에서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사실 에덴 동산의 뱀이 에니어그램의 뿌리입니다. 에니어그램은 뿌리를 볼 때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게 아니지요. 에니어그램의 뿌리는 결국  성령님이 아닌 악령입니다!

따라서 크리스토와 벨리알이 조화되지 못하듯 신자와 에니어그램은 조화될 수 없습니다. 이 점을 기독교계의 에니어그램 응용자들이 영적인 눈이 어두워 직시하지 못하는 현실은 한심하고 서글픕니다. 에니어그램을 신자에게 억지 적용하려는 사람들은..성경에 따르면, 에니어그램 선구자들과 똑 같은 무지한 악인인 셈이 되고 맙니다.
점성술/신비술/연금술 따위를 크리스천에게 적용할 수 없듯, 에니어그램은 크리스천에게 적용할 수 없고 적용해선 안 됩니다.


에니어그램의 출발점-신비술/오컬트

에니어그램의 발전에 관련된 모든 초기 인사들은 죄다 세속 신비가(mystic)였고 영지주의자들입니다.
'생명나무'를 신비적으로 해석한 유대교 신비술 카발라(kabbala, cabbala)를 르네상스 시대 신비술-헤르메팈스에서 활용하던 데서 유래했다는 유력설이 있어 왔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카발라와 에니어그램이 서로 연계돼 있다고 오래 통찰돼 왔지요. 유대교 라삐, 하워드 애디슨은 여기 관한 책도 썼습니다. 

현대 에니어그램의 선구자 게오르기 이바노프 구르지예프는 마술사가 쇼의 비법을 숨기듯 자기 가르침의 뿌리를 통 제대로 밝히지 않았는데, 그와 또 후대에 에니어그램을 활용한 오스카르 이차조(Oscar Ichazo)가 모두 카발라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차조 역시 구르지예프에게 간접적으로 받은 영향을 적극 숨기려 했습니다.)

카발라 사상은 프리메이슨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바 있습니다. 이 점에서 구르지예프, 이차조는 모두 메이슨리에 관여됐거나 메이슨 사상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중세 헤르메팈스(hermetics)에서는 서로 맞물린 삼각형으로 된 에니어그램을 썼는데, 점성술에도 흥미가 깊었던 14세기 카톨맄 철학자/포교사 라몬 룰(Ramon Llull)도 비슷한 9각형을 사용했다네요.

마술/마법도 연구한 수피교(= 회교의 범신론적 신비주의) 교사 이드리에스 샤(20세기 사람)는 에니어그램이 본래 수피교에서 비롯됐고 8각형으로 위장된 코드였답니다. 그러나 로빈 아미스는 정교회에서 유래됐다면서, 구르지예프와 우스펜스키가 그리스 아토스 산을 방문한 뒤 발전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 모두가 고대와 중세의 철학/형이상학/신비술/오컬트 따위에 연계된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선각자' 구르지예프

20세기 에니어그램의 선구자는 구르지예프(게오르기 이바노비치 구르지예프. 아르메니아어: Գեորգի Իվանովիչ Գյուրջիև. George Ivanovich Gurdjieff, 1866/1877?-1949. 그의 이름 게오르기와 성, 구르지예프는 모두 "성인" '조지'나 자신의 모국 그루지야-현 조지아. 미국의 조지아 주와 혼동하지 말 것-를 암시함. 당시 무슬림들이 그루지야 사람들을 '구르지스'라고 부름).

구르지예프는 영지주의자/신비가/철학자/공상가에다 일종의 작곡가, 또한 발레 등을 연구한 안무가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에니어그램 가르침을 '넷째 길'이라고 명명한 사람은 그의 초기제자 우스펜스키(아래 참조)였습니다. 구르지예프는 자신의 가르침을 '비교(秘敎, esoterica)적 기독교'로 주장하기도 했습니다만 허황된 얘기입니다. 

구르지예프는 자신이 서구에 가져온 가르침은 자신의 경험에서 왔다며, 특히 고대 종교와 '고대의 지혜'를 통해 사람들의 매일 삶, 우주 속의 인류의 위치 등에 대한 자기각성을 돕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저작물은 '모두와 각각'라는 책에 집약돼 있지요. 이같은 생각들은 뉴에이지와 매우 유사합니다. 사실 뉴에이지 뿌리의 일부가 된 셈이지요.

구르지예프는 아르메니아의 알렉산드로폴(현 '굼리')에서 그리스계 아버지와 아르메니아계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카르스에서 자라다가 티벹을 비롯한 중앙/남서 아시아, 에짚트, 로마 등을 여행하고 러시아 모스크바로 돌아옵니다(1912년).  

그동안 우선 그는 수피교 신비술 그룹인 '사르뭉(페르시아어 '사르만') 형제회'에서 공부했답니다. 사르뭉은 조로아스터(배화교) 또는 벌떼(꿀을 모으듯 슬기를 모은다는 암시)의 교훈에 관한 모임일 수 있답니다. 아르메니아/쉬리아 공동체에서 '벌떼'라는 전설모음이 있는데 그 저자가 13세기 경교(네스토리우스주의)계의 연금술사 마르 살라몬이었습니다. (구르지예프의 제자 존 베넽에 의하면, 사르만은 머리가 정화되어 깨인 자 즉 선각자의 뜻이라고 함. 흥미롭게도 이것은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와 상통함.)
  
구르지예프는 사르만과 고대의 수메르, 에짚트 등을 서로 연계시키려 했다는 군요. 다른 자료에 따르면, '인류의 내부 서클'이라고도 불린 사르만은 BC 2500년경 바빌론에서 비롯됐답니다. 바빌론! 바로 최초의 적 크리스토-님로드와 바벨 탑의 제국이었지요. 이 형제회는 피타고라스의 스승 자라투스트라(=조로아스테르/자라투슅)와도 관련됐답니다. 
 
사르만은 그후 알렉산데르 대왕이 쳐들어 오기 전 바빌론을 떠나 티그리스 강변의 아씨리아의 옛 수도 니네베(현 모술)에 자리잡았답니다. 일설에 따르면, 사르만의 한 본부는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힌두쿠쉬 산맥에 수도원으로 자리잡았고 거기서는 ESP(초감각, 제6감) 연구도 했답니다. 그러나 마크 세드윜 교수 같은 사람은 사르만이 순전히 구르지예프의 공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구르지예프는 율리아 오스트롶스카와 결혼한 2년 뒤 첫 발레 '마술사들의 갈등'에 대한 광고를 냈습니다. 1915년엔 우스펜스키를, 1916년엔 작곡가 토마스 드 하르트만을 제자로 받아들였는데 그즈음 그의 제자수는 약 30명이었습니다.

그후 러시아 공산혁명을 맞아 이리저리 피난살이를 하면서 러시아인 제자들을 기르다가 1919년 그루지야 트빌리시에 '조화로운인간개발연구소'를 개설해 우주에서의 사람의 위치, 내적 개발의 가능성 등을 다룹니다. 일부인들은 구르지예프를 "객관의식을 지닌 영적 스승(매스터)" 즉 깨어있는 도사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비술사(秘術師), 오컬티스트로 규정합니다.

구르지예프는 인간이 혼을 갖고 태어나지 않고 따라서 의식이 아니라 단지 사회과정을 거쳐 의식임을 믿게 된다며..사람은 목표가 있는 가르침을 통해 삶의 과정을 통과함으로써 혼을 창조/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지 않는 인간은 개처럼 죽는다고 그는 단언합니다. 그는 또 사람이 잠자면서 태어나 자면서 살고 잠자며 죽으므로 단지 깨어 있다고 상상할 뿐이라고 합니다.

구르지예프가 남긴 음악은 그가 여행 당시 수도원 등에서 들은 가락들을 주로 제자 데 하르트만이 기보한 것입니다. 그는 또 '성스러운 댄스' 또는 '무브먼트들'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는데, 현재 '구르지예프 무브먼츠'로 남아 있습니다. 39개의 이 무브먼트들 역시 그가 여행을 다니며 여기저기서 수집한 것들입니다. 그 가운데는 '흑색/백색 마술'과 '할렐루야'도 있는데..참 한심합니다. 구르지예프는 이 춤 동작들 속에 오랜 세기를 거쳐 전수된 "구체적인 지식"이 담겨 있고 자세와 제스처 하나하나가 "우주적 진리"를 표현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황당합니다.

이상과 같이 구르지예프는 동서양의 옛 전통과 종교의 온갖 신비술/형이상학/영지주의 따위를 동원해 자신의 학문의 기초를 삼았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구르지예프의 '비밀'

그는 자신의 에니아그램 가르침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를 비밀에 붙여두고 밝히길 한사코 거절했습니다. 제자 우스펜스키는 용어 다수를 19세기 러시아 프리메이슨 사상에 나타난 테크니컬한 어휘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이 용어들은 주로 로벝 플러드(영국 오컬트 철학자/점성가/신비가)에게서 빌린 것들이고요.
보리스 무라비에프가 통찰한 바 있는 '비전적(esoteric) 기독교', 수피교 특히 12세기 수피 지도자 압두칼맄 구즈두바니, 코카서스 지방의 옛 전통과 구전, 티벹 불교 사상 등이 그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구르지예프의 추문(스캔들)

에니어그램을 선호하는 많은 사람들이 구르지예프를 무슨 성자나 도사쯤으로 보지만, 명사들이 으레 그렇듯 그에게도 각양각색의 복잡한 추문이 따랐습니다.

그가 늘 강조하는 바 '수면'으로 일관된 인생은 그가 최면술사가 아닌가란 의혹을 자아내곤 합니다. '마술사'라는 소문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일종의 마술사/영지주의자에다 작가/강사였던 사마엘 아운 웨오르(본명 빜토르 마누엘 고메즈 로드리게즈)에 따르면, 프란시스코 프로파토는 '베엘제붑' 구르지예프가 "흑색마법사"였다고 말했습니다. 
마틴 가드너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알기로..광증에 있어 구르지예프를 능가할 오컬트의 리조트가 있다면, 영국 오컬티스트 얼리스터 크롤리가 시칠리 케팔루에 세운 악명 높은 수도원이다." 

프리메이슨리 사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얼리스터 크롤리 역시 영지주의자로 한때 구르지예프의 퐁텐블로 학당에 접근했다가 구르지예프에게 축출됐습니다. 구르지예프는 그에게 "미스터, 갈 거요?..당신은 더럽소! 천박하오!"라고 고함 질러 크롤리를 꼬리를 감춘 강아지처럼 파리로 떠나가게 했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구르지예프를 크롤리와 대동소이한 사람으로 파악합니다.

폴란드 출신으로 영국에 귀화, 훗날 '주님 나라 임하며'를 쓴 저널리스트/전기작가/교육가/아랍학자로 구르지예프와 만난 적이 있던 1930년대의 롬 랜도는 구르지예프를 러시아 왕가에 영향력을 발휘한 신비가/수사 그리고리 라스푸틴과 비교한 첫 사람이었습니다. '타임' 매거진도 구르지예프를 "(서커스 산업의 선구자) P.T. 바넘, 라스푸틴, 프로이드, 그로초 맑스와 모든 할아버지들을 뒤섞은 '짬뽕'"이라고 묘사한 바 있습니다.

생년월일마저 분명치 않은 구르지예프의 삶은 늘 베일에 가려져선지 러시아나 기타 국가의 첩보원으로 의혹받곤 합니다. 자신이 훗날 정보요원이던 (위에 언급된) 롬 랜도는 아흐메드 압둘라의 '보고'에 따라 구르지예프가 "함브로 아쿠안 도르지예프" 또는 "라마 도르지예프"라고 불린 러시아의 비밀 정보원으로, 달라이 라마의 수석 개인교사였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전술한 얼리스터 크롤리도 한 때 첩보원이었기에, 첩보원이 첩보원 냄새를 맡고 따르려다 관뒀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지요. 

콜린 윌슨은 구르지예프가 여성 제자들 '꼬시기'로 유명했다고 폭로했습니다. 윌슨은 1960년 한 교수로부터 미국 로드아일랜드 주 프로비던스의 한 남성이 구르지예프의 사생아임을 밝혔다면서, 구르지예프가 미국에 수많은 자녀들을 두었음을 진술했다고 전언했습니다. 게다가 뉴욬 구르지예프재단의 프랭크 싱클레어 회장은 "미쉘 드 살즈만"이 구르지예프와 잔 드 살즈만 사이의 소생이라고 확언한 바 있습니다. 화려하고도 기구한 삶을 산 단편작가 캐터린 맨스필드는 생애 말엽 구르지예프의 "돌봄" 속에 폐결핵으로 죽어갔는데 이것이 꽤 악명 높은 추문이 되기도 했습니다.


우스펜스키와 '네 번째 길'(제4의 도)

구르지예프의 초기 제자의 한 명이었다가 훗날 결별한 러시아 언론인/철학자/영지주의자, 표트르 데미아노비치 우스펜스키(Пётр Демьянович Успенский, Pyotr Demianovich Ouspensky, 1878-1947)가 쓴 책-'네 번째 길'(The Fourth Way)은 주로 구르지예프의 에니어그램 노선의 입장을 간추려 정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스승과 결별하고도 스승의 길을 가르친 셈입니다.

우스펜스키에 따르면, 구르지예프는 이런-네 번째 길 형태의 에니어그램은 "고대의 비밀"이고 "최초로 부분 공개"된다고 주장했답니다.

'제4의 길'의 개념은 구르지예프가, 용어는 우스펜스키가 지어낸 것으로, 1. 몸에 관한 파키르(fakir)의 길(수피교), 2. 정서에 관한 수사(monk)의 길(천주교/정교/불교), 3. 정신에 관한 요기(yogi)의 길(힌두교/시크교) 등 세속과 절연한 세 가지 길을 한데 종합하면서도 세상과 절연되지 않는 네 번째 길이 곧 '자기개발'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개발'은 훗날 뉴에이지 사상에 접붙여져 그 핵심 개념의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제4의 길은 신적 행동을 역시 핵심개념의 하나로 삼고 있는 '나티야 요가'와 매우 유사하다고 하네요.

네번째 길의 규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주택 보유자로서 삶의 요소를 직면한다. 2) 교육을 통한 지성/감성/신체 단련을 하되, 3) 부정적 정서를 표현하지 않고 성적 에너지를 활용한 생식 및 성적 승화(오르가즘/사정 등을 생략하는 성행위로 요가나 탄트라에서 강조됨)를 통하여 한다.


독립을 택한 우스펜스키

우스펜스키 자신, "한 가닥 하던 철학자"로서 심오한 우주 철학과 형이상학, 심리학 등을 연구하다 구르지예프를 만났습니다. 둘의 첫 조우 전, 그는 "더 높은 차원"에 관한 '제4차원'(1909), 역시 4차원적 존재와 우주, 과학과 현상, 오컬트와 지정의 의식론 등을 관조한 '테르티움 오르가눔'(1912), 점술/오컬트 관습인 타로 카드의 그림을 연구분석한 '타로의 상징주의'(1913), 섹스 등의 소위 비사(秘事: 아무도 모르는 비밀 전통)에 관한 '우주의 새 모델'(1931) 등의 책을 써 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오컬티스트였습니다. 철학에 심취하면 자칫 이런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연구와 저술로만 만족할 수 없어, 유렆과 인도/실론/에짚트 등을 두루 다니며 옛 지식과 신비학을 탐사했습니다. 인도 신비가 '오쇼'(바그완 슈리 라즈니쉬)에 따르면, 우스펜스키와 만나기 전 구르지예프는 무명의 파키르에 불과했다가 우스펜스키 덕분에 대중에게 알려지게 됐다는 군요.

사실 구르지예프가 영국 정부의 거부로 런던에 정착하지 못해 프랑스 파리 근교인 아봉의 퐁텐블로로 옮겨가 거기 학당을 차리도록 돈을 대 준 사람도 우스펜스키였습니다. 그러나 우스펜스키는 파리에서 구르지예프와 서로 맞지 않는다고 판단, "찢어져" 떠납니다. 1924년 우스펜스키가 런던에서 강의할 때 나름의 '네 번째 길'을 가르친다고 선언한 이래, 올더스 헉슬리, T.S. 엘리엍, 제럴드 허드 등의 지식인들이 경청한 결과, 1920-30년대 유렆 문학 특히 러시아 전위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자기기억'

우스펜스키는 구르지예프에게 일종의 심리기법인 '자기기억'을 배웠지만, 어렵다고 실토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에선 '성공'했다가 훗날 런던과 미국에서는 주로 수행을 강조하기만 했습니다. 이것은 '장미십자단'(Rosicrucianism)의 "주목의 분할" 원리의 일부로서, 바깥세계 뿐 아니라 그 이면도 동시 집중/주목한다는 테크닠입니다. 장미십자단의 이 원리에 따르면, 어떤 결과나 현현(나타남)을 얻기 위해선 세 가지가 필요한데, 두 가지는 자기기억과 자기관찰로 습득되며, 제3의 것은 "부정적 감정의 억제"라는 주장입니다.
 

아리카 학파와 자칭 '시조' 이차조

현대에 와서 에니어그램을 인성론과 연계시켜 응용한 사람은 볼리비아 태생의 철학자, 오스카르 이차조(Oscar Ichazo)였지요. 그는 원론분석학 교육방법의 일부로 인간자기개발 내지 잠재력운동 프로그램인 '에니아그램 인성론'을 계발했습니다. 아리카 학파는 에니어그램을 '에니어곤'으로 주로 칭했습니다. 이차조는 자신이 한때 살았던 칠레의 아리카 시의 이름을 따서 학파명을 정했습니다. 아리카 스쿨은 1956년 시작됐습니다.

이차조는 1954년 자신이 에니어그램 도형과 고전철학, 3 과정법칙의 논리학이라는 자칭 '트라이알렠틱'(Trialectic) 논리 등 세 가지를 통해 인간의 기계적 반복 사고와 행동 패턴에 대한 "명확하고 직접적인 통찰"을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차조는 개인의 삶 초기단계에서 에고(자아)가 혼(프쉬케) 속에 고착되는 9 유형을 규명했답니다(이 역시 숫자 '9'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것이 자아상의 핵심이 되고 그 둘레에서 심리적 인성이 발전하며, 고착된 에고는 고유의 열정과 결점(악덕)에 의해 정서적 단계로서 뒷받침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9가지 에고의 고착 사이의 심리학적 연계성을 점과 줄, 원둘레 등 에니어그램으로 '매핑'할 수 있다는 지론입니다.

이차조는 매우 독과점적이어서 모든 훗날의 에니어그램 해석은 모두 바탕이 없고 호도됐기에 심리적, 영적으로 해롭다며, 타인의 에니어그램 가르침은 대부분 인성혼란을 가져 올 뿐이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그는 에니어그램들을 자신이 "개발했다"고도 주장했습니다.

또한 그의 가르침이 구르지예프의 '제4의 길'에서 도출했다는 일각의 주장을 극구 부인해 왔습니다. 이차조는 1992년 에니어그램 인성론의 지적소유권/판권을 주장했으나 실재적 기존 개념은 지적소유가 될 수 없다는 판시 아래 거부 당했습니다. 그러나 미 연방항소법원은 이차조가 에니어그램을 인성론에 응용한 오리지널 작가라는 점은 인정해 주었지요.

이차조 역시 동양종교/신비술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그는 1990년대 후기에 아리카를 탄트라 불교와 연계시키려 애를 썼습니다.
그는 또 [3x3=9]  조합 시스템을 에니어그램은 물론 빛의 스펙트럼, 힌두교 명상의 차크라(= 기/氣가 모였다는 척추의 7점)에도 연계시키고 있습니다. 즉 7 차크라에다 두 가지(엉치등뼈와 목뼈)를 더해 9개로 본 겁니다. 그는 9 꼭지점을 역시 힌두교 사상에서 딴 무드라(손짓)/비자(종자)와 연계시키기도 합니다. 
이차조는 당초 약 30년간은 꼭지점 연결선이 없는 소위 '무지개 눈'의 에니어곤을 주로 사용해 왔습니다.

이차조는 개성을 인성유형보다 '고착'(또는 고정. 일부의 '집착'이라는 번역은 걸맞지 않음)이라고 부르기를 선호했습니다. 아리카 학파는 특히 본질과 자아의 분리를 강조합니다. 또한 개인마다 9개 타잎을 갖고 있다며 "우리는 9개 위치를 모두 일깨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일깨움을 강조하는 뉴에이지 사상을 엿볼 수 있지요.
본질-자아의 구분과 함께 궁극적인 비이원론적 철학을 지탱하려는 것이 신비가들의 공통된 노력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로 공허하며 비어 있다는 비이원론(nondualism) 철학은 동양종교와 서양의 신비술/수도원에 거의 공통됩니다. 비이원론은 사실 선/악의 이원적 기원도 거부합니다. 

그러나 이차조는 "나는 차원 높은 지식을 지녔으니 특별한 인간이다"라는 자아의식 부풀리기를 방지하기 위해 그뤂 훈련과 대화를 통한 '자아축소' 등 방법론도 강조했습니다.   


이차조의 비진실성과 잡학벽

이차조는 자신의 이론이 구르지예프에서 따 온 것이라는 일설을 잠재워 보려고 근래에 와서야 자신의 에니어그램 통찰이 고전철학과 플로티누스의 에네아드에서 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1950년께 구르지예프의 '네 번 째 길' 학습에 참석했던 일부 인사들을 포함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신비학 그룹에, 당시 그(19세)가 '커피 보이' 및 신비술 실험 대상으로 참여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이차조는 그보다 더 전에 자신이 에니아그램을 "이미 만났다"고 계속 주장합니다. 과연 그랬을까요?

당시 이 부에노스아이레스 그뤂의 멤버들은 수피교, 일본 선불교, 유대교 카발라 등의 늙은 교도/법사들이었고 그 대다수가 구르지예프의 '제4의 길'을 써 먹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차조에게 약 2년간 가르쳤고 동양 여행길도 열어 주자 이차조는 홍콩/인도/티벹(!) 등지를 여행하면서 무술/요가/불교/유교/역경(이칭)/연금술 등을 배웠습니다. http://www.sustainedaction.org/Explorations/Oscar_Ichazo_and_Castaneda.htm

그러나 이차조의 삶을 좀 더 뒤적여 보면, 그는 십대에 무술을 익혔고 안데스 산맥의 원주민들과의 접촉을 통해 전통 마약 복용도 하면서 민속 무당들과 접촉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에니아그램 인성론은 "성스런 기원"이 아니라 이런 잡다하고 복잡한 배경 가운데 태어난 것이지요.


클라우디오 나랑호(Claudio Naranjo)

이차조가 독점적으로 에니어그램의 비밀 전수를 강조한 반면, 칠레의 정신의학자 나랑호는 스승의 기법을 더 실용화시키고 활성화시킨 장본인입니다. 이차조는 제자 나랑호의 에니어그램 이해가 "제한돼 있고 불완전하다"고 비판했으나 다수가 나랑호와 여타 교사들의 영향력이 더 컸다고 입을 모으네요.

고대로부터 숫자 9의 상징은 있어 왔으나 구르지예프 이전에 수피교나 기타에서 에니어그램을 구체적으로 활용한 증거는 없습니다.


첫회 닫음글 

구르지예프, 우스펜스키, 이차조, 나랑호 등을 성자처럼 여기는 한심한 교계 사람들이 있어, 실로 황당하고 안타깝습니다. 에니어그램은 교계에서 폭넓게 활용되며..그 점에서 세속과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이것은 관상기도 등과 더불어 현대 교계의 뉴에이지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지요. 

에니어그램을 활용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구르지예프는 '매스터' 내지 스승으로 받들지만, 세속 비평가들조차도 그를, 자신을 높이고 과장하는 "허풍선이" 정도로 봅니다. 구르지예프는 당대에 표면상 '크리스천'들을 비롯한 수많은 엘리트들에게 영향을 미쳤지만, 그 중 한 명도 우리가 보기에 거듭난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의 가르침이 저러니 물론 거듭날 리도 없겠고. 그렇다면 그 제자들로부터 배운 사람들도 대동소이할 터입니다.

에니어그램이 비지니스/정신요법/조직체개발/경력코칭/예술/헬스캐어/자녀양육/교육에 응용된다고는 하지만 과연 그 실제 효과가 어떤지는 알 수 없고 영적 성장에도 도움된다고들 하는데 기독교적 영적 성장엔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근본적으로 그런 세속/오컬트 시스템은 기독교가 말하는 경건과는 전혀 상관 없기 때문이지요. 만약 상관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이단자나 다름 없습니다. 성경엔 그렇게 말할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신학교에서까지 에니어그램을 가르치고 배웁니다. 참으로 경악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학교가..잡신학교가 돼 가나요?
에니어그램의 성격유형 분류가 그럴 듯 하다고 해서, 개인에게 그럭저럭 "맞아 든다"고 해서, 온갖 잡학과 신비술과 연계된 에니어그램을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적용하려 드는 의식, 그것을 받아들이는 의식은..차원이 저급합니다.

에니어그램을 기독교와 성도에다 적용하는 심리학자들이여. 그럴 듯 해 보인다고 세상의 속된 것을 끌어다 거룩한 것에 적용하려는 발상은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역행입니다. 오히려 크리스천은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 구실을 다해야 하거늘 세상의 졸속 조명으로 크리스천들의 속을 비추겠다는 건가요? 


그런 교계 인사들에 관하여.."존귀에 처해 있으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짐승 같다"는 말씀을 묵상해 봅니다.

시리즈 다음 회는 에니어그램 자체를 성경적으로 분석/비평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