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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사복음서

[마 24:6-8] 두려워 말거라 (주님의 말세 예언 2)

바탕본문: 마태복음서 24'6-8


주님은 계속 말세에 있을 중요한 징조들을 나열하십니다.

    이미 앞서 다룬 가짜 메시아/재림주와 미혹자들, 거짓 대언자들 외에도..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잦고..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고.. 
    곳곳에 지진과 기근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재난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재난은 시작 때보다 더 잦아지고 심화될 것을 시사하셨다고 할 수 있지요.
확실히 그렇습니다.
또 우리는 더 깊은 재난 속을 통과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치 칠흑 같은 긴 터널 속을 통과하듯.

주님이 말씀하신지 불과 얼마 후부터 이미 그런 재난이 시작돼..
오늘날까지 계속돼 오고 있다는 말입니다. 
참 기나긴 재난의 터널이지요.

그리고 놀랍습니다.
초기부터 날이 갈수록 다양하고 참혹한 대형 재해들이 발생해 왔다는 현실 말입니다.
 
    현대에도 온 지구촌 곳곳에서는 난리에 난리가 겹치고..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칠 뿐더러
    곳곳에 지진과 기근이 발생하지요.

최근만 해도 하루가 멀다 하고 여기저기서 터지는 대규모 지진 사태들, 가뭄과 홍수, 화산재와 기름띠 공해, 또 에이즈/신종플루/구제역 등 온갖 역병들도 징조에 포함될 수 있겠지요.

뿐만 아니라, 끊임 없이 저질러지는 폭발 사건, 날이 갈수록 사악해져 가는 온갖 범죄 특히 성범죄들 등 다양한 인재의 악순환도 오벌랩 됩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것들을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말세 징조들에 대한 성도의 중요한 자세의 하나가 곧 담대해지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런 징조에 민감하게 깨어 있으면서, 두려워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엔..경외 곧 경건한 두려움처럼 때로는 필요한 두려움도 있지만, 겁 주기는 마귀가 악용하는 주된 도구입니다.
마귀는 성도를 초전박살 내 버리려고 겁부터 콱~ 줍니다.
그의 이 상투적인 전술에 우리가 넘어가지 말아야지요.
겁 먹지 말아야 합니다.

두려움 극복은 말세를 살아 가는 성도의 중요한 처세술이랄까 스타일의 하나입니다.
두려움은 종말 성도의 주된 도전의 하나이고, 꼭 다뤄야 할 극복 대상, 장애물의 하나입니다.
앞서 간 믿음의 사람들이 다들 이 두려움을 극복했습니다.


그런데 남의 그런 두려움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종말관을 갖고 성도에게 겁 주고 등 쳐 먹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그 예이지요.
아주 악질적/저질적인 발상입니다.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써 먹는 한결 같은 수법 하나가 바로 패닠(panic)입니다. 
이제 곧 종말이 다가오니 서둘러 준비해야 한다고 겁부터 주고 나서, 그 집단이 아니면 구원을 못 받는다는 공포의식의 도가니로 몰아 넣습니다. 일종의 종교적 협박이지요.

그래서 멋모르는 추종자들은 전 재산을 몰수히 팔아 추종 대상에게 선뜻 바치기도 합니다. 
급기야 필경 집단자살로까지 치닫기도 하고요.

이건 심리압박이요 코너로 몰기 식 겁 주기이기도 합니다. 시한부종말론자들은 알고 보면 빤한 싸구려 대중심리 기법, 집단 조종/최면의 대가(?)들입니다. 추종자들의 두려움/겁 먹기는 그 토양과 자양분 역할을 하고요. 그런 수법을 상투적으로 활용해 자기 주장을 펼친 책을 팔아 먹고, 헌금을 뜯어 먹는 그런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세상엔 수두룩하지요. 아마도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해럴드 캠핑('패밀리 레이디오' 대표)일 터입니다. 그가 이미 1990년대에 해 먹던 수법인데도, 여전히 잘 속아 주는 수많은 추종자들이 그를 아무 부담과 의심도 없이 졸졸 따라 다니니, 참 기가 찰 노릇이지요.

그런 그럴 듯한 수법과 꼬드김에 넘어가 주는 추종자들이 세상엔 늘 있기 마련이니, 이건 '되는 장사'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홀딱 넘어갔다가는 쫄딱 망해 버리고, 급기야 목숨까지 꼴딱 넘어가는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종말의 끝에 대비하면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해야 함은 사실입니다.
다만 그 해, 그 달, 그 날이 언제인지는 하나님 아버지만 알고 계십니다.
그 날이 오면, 대천사(천사장)의 장엄한 나팔소리로 알려 주실 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깨어 있어 늘 "마라나타(어서 오소서)!"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말세일수록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말세의 온갖 징조를 보더라도 겁 먹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엔 두려워 하지 말라는 말씀과 교훈이 매우 많지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자주 되풀이 됩니다.
하나님이 직접 믿음의 사람에게 들려 주신 말씀의 하나입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두려움, 윗 사람이나 위의 권세에 대한 타당한 두려움, 죄와 그 결과에 대한 당연한 두려움 등 외에는 다 나쁜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에도..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움과, 하나님을 아주 무섭고 잔인한 심판자로 여겨 멀리하는 두려움 등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두 가지가 있지요. 스베덴보리의 사상을 떠 받드는 문제종교집단인 새 교회의 얼굴마담 격인 헬렌 켈러는 후자의 두려움을 지닌 나머지, '구약의 하나님'을 혐오하고 신약의 하나님만 사랑했던 왜곡된 생각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나쁜 두려움은 마귀가 갖다 주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노래합니다.

    "나 비록 그늘진 죽음 골짜기를 걸어가도 해악을 겁내지 않음은,
     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님의 (목자)지팡이와 막대기-그것들이 나를 안심시켜 줍니다." (시 23' 4)

여기서 그늘진 죽음 골짜기는 죄악과 두려움이 가득한 세상을 상징합니다.
하늘 나그네인 우리는 어둡고 음침한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하듯, 캄캄한 터널 속을 지나듯, 이 죄악 세상을 살아갈 때 두려움 없이 전진해야만 합니다. 

고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미쯔라임(에짚트/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너갈 때, 그들에겐 상당한 두려움이 있었을 터입니다. 홍해가 갈라져 양쪽으로 좌악~ 길고 높은 물벽을 이루며 위로 솟구치고 있는데, 혹시라도 저 물벽이 무너지면 나는 어떻게 될까나..이런 두려움 말입니다. 그 물벽 저 편으로는 거대한 바다짐승이나 큰 물고기의 그림자도 흐릿하게 비쳤을지 모르지요. 더구나 뒤에서는 미쯔라임 대군이 맹추격 해 오니, 시쳇말로 "똥줄 타는"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워 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지요.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늘 우리를 안보해 줍니다.
그 분이 부리시는 지키미 천사들도 그렇습니다.
심지어 주님은, 비록 참새 한 마리라도 함부로 헛되이 죽지 않도록 목숨을 보존하십니다.
하물며 소중한 성도이겠습니까.

세상이 온통 노도 광풍에 휩싸여 드높은 험한 물결처럼 마구 요동해도 우리는 겁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두려워 마라고 명하시니, 거기 순종해서 두려워 하지 말아야죠.
두려움을 물리치는 순종 속에 참된 평화가 깃듭니다.


다빋은 아들 압샬롬(압살롬)의 쿠데타로 내쫓겨 피신해 다니며 나라와 자신의 목숨이 바람 앞 촛불 같을 때도 이렇게 고백하고 선언합니다.

    "예호바(여호와/야웨)님! 님은 나의 방패! 나의 영광! 그리고 내 머리를 치켜 드시는 분입니다..
수많은 무리가 나를 둘러 치려고 해도 나는 두려워 하지 않으리!"  (시편 3'3,6)

그는 또 노래합니다.

    "예호바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내가 누구를 겁내랴?
    예호바님은 내 삶의 힘!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랴?" (시 27'1)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무서움의 영이 아니라 권능과 사랑, 건전한 마음입니다. (티모테B서=딤후 1'7).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란 게 없습니다.
오히려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엔 으레 형벌이 개입되지요.
두려워 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온전히 이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요한서신A=요일 4'18).


그러므로 말세 현상이 가중되고 온갖 두려운 징조들이 주변에서 자주 발생하고 심화돼 간다 하더라도 우리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늘 지켜 주시고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눈꺼풀이 눈자위를 지키듯.
어미 독수리가 둥지 속의 새끼들을 지키듯 그렇게.
 
그래서 우리는 야베즈처럼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이 도움의 손길로써 우리를 늘 모든 아픔과 환난에서 지켜 주시리라고!


그러나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고 해서 다가온 위험에 대한 분별도 없이 전혀 방심하거나 만용을 부리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위험에 대처/대비하고 조심하고 분별하는 것은 두려움과는 또 다른 얘기입니다.

잔뜩 겁 먹은 채 잠 못 이루며 깨어 있으라거나,
위험이 다가오는 데도 태평하게 늘어져 잠만 자라는 게 아니라..
잔잔한 바다 같고 깊은 강물과도 같은 참 평화 속에서 영적으로 깨어, 징조의 의미를 살피고 늘 대비하고 있으라는 것이지요.

성경의 참 평화와..태평, 무사안일주의 따위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말세의 온갖 징조를 보더라도 무서워 하지 마라.
- 이것이 주님이 우리 말세 성도에게 주시는 주된 교훈의 하나입니다.

 

종말을 살아 가는 티엘티 독자들은
말세의 온갖 조짐을 헤아리고 대비하면서
두려움을 떨쳐 버리기를!

전능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