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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사복음서

[마 24:13] 끝까지 (주님의 말세 예언 5)

  "끝까지 견디는 사람-그는 구원을 얻게 되오." 
    (마태복음서 24'13. 이하 성구들은 사역)


주님의 말세 예언에 관한 묵상 시리즈의 계속입니다.


주님은 여기서, 끝까지 견디는 사람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문맥 상 신자/제자들이 받을 박해와 연관시켜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미 이전에도 12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마태 10'22 참조).
곧, 12 제자들을 둘 씩 짝 지어 이스라엘 곳곳에 사도/전도자로 파송(파견)하시면서 하셨던 말씀의 일부이지요. 그 때도, 제자들이 앞으로 받을 비슷한 박해와 고난을 예고하셨습니다. 

하지만, 비단 12 제자 뿐 아니라 모든 제자들의 가깝고 먼 미래, 그리고 오가는 세대의 다른 모든 제자/신자들의 앞날에도 이런 일들이 있을 것이라며, 끝까지 견딜 것을 부탁하신 것이죠. 박해의 내용 상 고대의 초기 교인들에게 국한되지 않으며, 앞으로 오는 세대, 우리 다음세대에까지도, 아니 주님 오시기까지 늘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끝까지'라고 말씀하셨으니까요.

끝.까.지.- 이 세 글자가 중요합니다.


'끝까지'라.. 그러면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가 받는 구원은 끝이 오기까지는 참 구원 아닌 가짜 구원이라는 뜻이냐? 그게 아니지요. 누구나 예수님을 믿으면 약속대로 구원을 얻기야 얻지요(행전 16'31; 로마서 10'9,10,13). 
단, 끝까지 견뎌야 받는 구원은 마지막에 하늘나라로 들어가게 되는, 최종적 구원을 가리킵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받은 그 구원이 완전히 마무리되는 구원이라는 말이지요.
이처럼 구원은 완성돼야 합니다(페트로B=벧후 1'10,11).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의 보장을 받았지만, 혹시 믿다가 나중에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면, 곧 구원을 잃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인하실 수 밖에 없으니까(마태 10'33). 이미 얻은 구원을 바로 다름 아닌 내 언행에 따라 잃을 수도 없지 않죠(히브리서 2'1; 3'12; 4'1; 6'4-8; 페트로B 2'20-22).
미리 보장을 받았더라도, 위약하면 보증금을 잃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부부가 한 맘, 한 몸이 됐어도 서로 부부임을 부정하면 이혼 당하는 것과도 마찬가지이고.


그래서 끝까지..이 '끝까지'라는 말이 대단히 중요하죠.

'끝까지'가 있으면, 당연히 "(미처 못 끝내고) 도중에.."라는 말도 있을 터입니다. 최종 도달/완성이 있으면, 중도 하차/낙오/미완성도 있게 마련입니다. 다들 믿었지만, 끝까지 버틸 사람이 있고 못 버틸 사람도 있기 때문이죠.

'끝까지'와, '도중에 그만..' - 이 두 부류가 믿는 사람들 가운데 분명히 있다는 겁니다.


믿는다고 해서 무조건 다 자동적으로 끝내 구원 받는다면, 신앙생활이 너무나 쉽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호락호락 쉽지만은 않다는 게 주님의 경고입니다. 한 번 잡은 것을 굳게 붙들고 지켜야 하니까요. 한 번 믿기 시작했다고 해서 마음을 턱~ 놓고 있어선 안 되겠지요. "자, 나도 예수님을 믿었겠다, 구원도 받았겠다, 됐어..됐고 말고! 안심이야. 뭐 이제 천국 자리는 따 놓은 당상일 테고, 어디 슬슬 세상 재미나 볼까.." 해선 위험하겠지요.

모래 위에 세운 집과 바위 위에 세운 집이 서로 같을 리가 없지 않나요? 집은 분명히 집인데, 비가 와서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끄떡 없는 집이 있는가 하면, 계속 견디는 것 같다가 끝내는 휘익~ 나자빠지거나 스르르 맥 없이 허물어져 버리는 집이 있습니다.
후자의 그런 집은 우리가 '든든한 집', '좋은 집'이라고 하질 않죠.

바로 그래서 우리가 믿는 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히브리 4'14b)!


히브리서 기자 역시 주님처럼 이 '끝까지'를 거듭 강조합니다(3'6b,14; 6'11; 10'23). 한 번 잡은 것을 끝까지 놓치지 말라고 애타게 타이르거나 경고합니다. 자칫 놓치면 잘못될 수 있다고(2'1-3; 3'12,13; 4'1,2; 6'4-8).
히브리서 기자는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미쳤다고 이럽니까! 아니, 한 번 일단 믿었으면 됐지 뭘 자꾸 다시 잘못될 수 있다며, 놓치지 말라고 잔소리를 해 대는 겁니까!

그야..이 '끝까지'와 또 '도중에'가 있기 때문이지요.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에 짐짓/고의로 계속 꾸준히 죄를 짓거나, 주님을 부인하거나 하는 중죄를 지으면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히 10'26-29). 회개할 기회도 사라지고, 다만 무서운 심판과 파멸의 불못을 기다리게 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신을 거룩하게 해 준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님을 모욕하는 탓이지요.

그래서 '끝까지'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도 몸소 이 진리를 뒷받침하십니다. 요한계시록에서 7 교회들에게 칭찬 또는 책망/경고를 하시면서 튀아티라(딴 표기: 두아디라) 교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네가 가진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꼭 붙잡아라!
     그리고 이기는 사람, 끝.까.지. 나의 일들을 지키는 사람-그에겐 내가 주겠다:
     여러 나라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요한계시록 2'25,26)

주님의 이 말씀은 아직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나 비신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지요.
이미 믿고 거듭난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신자라도, 붙잡을 것은 꼭 붙잡아야지 놓쳐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 가운데도 꼭 붙잡을 사람과 자칫 놓칠 사람이 있기에 경고하시는 말씀이죠. 

예, 그래서 우리는 뒤로 물러나면 안됩니다! 중도포기, 도중 하차해선 안됩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걸맞지 않습니다. 세상 마라톤이라면 몰라도, 구원 대열의 낙오자가 돼선 안됩니다.

그러려면, 영혼의 닻이신 예수님을 단단히 붙잡아야지요.
끝까지,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이 끝.까.지.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담겨 있어야 좋습니다.


마태복음으로 되돌아가 보죠. 
그러면서, 주님은 장차 사람들이 서로를, 심지어 가족이 자기 식구를 죽이라고 내주는 상황도 발생하리라고 예고하십니다(마 10'21. 참고: 24'9,10). 또, 주님의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 받을 때가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주님 말씀 그대로 현재도 그런 상황이 지구촌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남편이나 아내, 또는 부모나 자녀가 비신자여서 그들로부터 박해를 받아, 피눈물로 주님께 기도하며 자신이 겪는 몸과 맘의 아픔을 호소하는 수많은 성도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신앙 때문에 집에서 내쳐지거나 이혼을 당하기도 합니다. 물론 잘못된 이단교도들은 말고요.

무슬림(회교도)이었다가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알라와 무함마드를 배신한 중죄로 가족과 동족에게 버림 받습니다. "저건 기독교인이 됐으니 이제 더는 우리 가족이 아닙니다. 죽여도 좋아요!"라는 소리를 들어 가며 처형을 당하거나 박해를 받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유대인들도 그렇습니다. 유대교를 버리고 기독교를 믿게 되면, 자기 가족에게 냉혹하고 처절하게 버림 받습니다. 오래 전, '미취'라는 이름의 제 유대인 친구 하나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딴 크리스천과 결혼하기까지 한 동안 혼자 살아갔습니다.
슬픈 일이죠. 하지만 주님의 예언 그대로라고 믿으면, 성령님 안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예수님 이름을 사랑하고 그 이름을 버리지 않으려면 반드시 세상에서 박해를 받습니다.
가족에게까지 버림 받으니 오죽합니까.

이처럼 참 신자에게 그림자처럼 늘 따라다니는 게 박해입니다. 박해는 그래서 참 신자인지 아닌지 가리는 일종의 정체성이랄까, 척도와 표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박해를 받으면, "아니, 왜 내가..?"라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아, 그렇구나! 내가 참 신자이구나"라고 생각하면 맞습니다.

신자/교인인데도 세상에서 사랑 받고 환영받는다..그건 뭔가 이상합니다.
 
박해..수난..솔직히 그 자체는 달갑거나 즐거운 일은 아니지요. 누가 박해와 수난을 반가워 하고 좋아하겠습니까. 박해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면, 무거운 맘, 두려운 맘부터 일어나기 십상이죠.


실제로 초기교회 제자들은 믿음 때문에 당대의 종교/정치 당국자들에게 체포돼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산헤드린 공회나 회당에서 잔혹한 채찍질을 당하고, 임금/총독들 앞에 소환돼 심문을 받기가 일쑤였습니다.

주님의 예언 그대로였죠.  

여기서, 채찍 형(刑)은 유대식으로라면 40회에서 1회를 뺀 39회를 뜻했습니다. 로마 식은 그보다 회수가 더 많았지요. 특히 로마식 채찍(플라겔룸)은 짧은 쇠가죽 띠 끝에 납방울이나 굵은 생선가시 따위가 달려 있어 계속 후려쳐 맞다 보면, 나중엔 살갗이 너덜너덜하게 등가죽이 벗겨지고 후려치는 강도(强度)에 따라 급기야는 뼈까지 드러날 수도 있어 거의 죽음에 이르는 극형이었지요. 우리 주님이 필라투스(빌라도) 총독의 프레토리움(딴 표기 '브라이도리온')에서 십자가 형 전에 받으신 바로 그 형입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집단 돌팔매질, 고문, 화형 등을 당하거나 콜로세움에서 굶주린 사자들에게 찢겨 죽기도 했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엄청나게, 형용할 수 없이 두렵고 고통스럽기도 했겠지요. 특히 어린이/청소년들처럼 어리거나 젊은 신자들은 그랬을 터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에서 박해를 받는 것은 곧 자신들이 주님을 제대로 믿고 따르는 참 신자임을 입증하는 셈이고, 따라서 하늘나라가 멀지 않다는 진실에 위로와 용기를 받고 담대히 믿음을 지켰습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저주하라는 강요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위해 욕을 얻어 먹고 중상모략을 당해도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는 진리 때문에 기뻐하고(마 5'11,12)..그 분이 앞서 받으신 고귀한 수난에 동참(함께 참여)한다는 의식은 그들을 더욱 기쁘게 했습니다.


우리가 그 분의 수난에 동참한다는 말은, 우리를 박해함이 곧 주님을 박해함과 같다는 뜻이기도 하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크리스천들을 몹씨도 박해하는 샤울(사울. 훗날의 사도 파울)에게 물으셨습니다.

    "샤울, 샤울! 너는 왜 날 박해하냐?..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행전 9'4,5)

그 샤울은 앞서 초기교회 7집사의 한 명인 스테판(스데반)을 죽이는 데도 앞장섰댔지만, 훗날엔 그 어느 사도들보다 더 많은 박해와 고통을 겪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그렇게 수난하기로 선택되고 작정된 사람이었으니까요(행 9'15,16).

파울이 얼마나 혹독하고 다양한 수난을 했는지는 행전 여기저기, 그리고 자신의 서신서(코린토B서=고후 6'4,5; 11'23-27)에 비교적 상세히 적혀 있지요. 사형에 준한 극형인 채찍형을 5 회나 당했고, 스테판처럼 자신도 거의 죽기까지 돌팔매질을 겪는 등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스테판처럼 끝까지..견딥니다.

하늘에서 금관과 상 받을 것을 생각하며 최후엔 기쁘게, 마치 전제(奠祭=관제/灌祭: 술을 부어 바치는 제사)와 같이 주님의 복음과 그 분의 이름을 위하여 몸을 바칩니다(티모테B=딤후 4'6). 성경엔 상세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받던 평소 계시의 말씀처럼 순교했을 터입니다.

하늘의 상과 의의 금관, 영광의 금관, 썩지 않는 금관을 사모했기 때문이지요. 파울은 이 의의 금관은 비단 자신 뿐만 아니라 예수 크리스토의 재림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이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티모테B 4'8). 할렐루야~! 우리 함께 주님의 재림을 사모합시다. 마라나타(아람어로 "주님, 어서 오소서"란 뜻)!

이처럼 박해는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박해를 받게 되면, "아하, 내가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게 되는 구나. 그 분이 앞서 받으신 고난에 드디어 나도 참여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면, 놀라운 감격과 위로를 맛보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지요.


파울은 믿음의 아들 티모테에게 또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크리스토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사람들은 박해를 받을 것이란다." (팀B 3'12)

우리가 세상의 박해를 받는 건 당연지사라는 겁니다. 이건 한국이나 미국이나 세계 어디서나 마찬가지 상황이지요. 미국이라고 해서 더 나을 것 없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박해를 받기 마련이니까.

그러니, 주님의 이름과 믿음 때문에 내가 땅에서 박해를 받으면, 이상하고 억울할 일이 아니라 당연하게 여기고 기뻐할 일이지요. 우린 세상에 속하지 않고, 땅에서는 나그네이니까요. 앞에서도 말한 대로, 박해는 참 신자의 아이덴티티/정체성과도 같은 것입니다. 
 

파울은 또 바르나바스(바나바)와 함께 소 아시아에서 선교여행을 할 당시 만난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터입니다." (행 15'22)
 
이 말은, 유대인들이나 지역 동족, 로마 황제와 로마인 등에게 많은 박해를 받던 당대 신자들로서는 정말 실감나는 말이었습니다(테살로니카A=살전 3'14). 또 파울과 동역자들이 박해 받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곤 했으니까요.

아무튼, 파울은 끝까지 견디며 버텨야 비로소 구원의 최종적 완성인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강조하고 격려합니다.

끝까지..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에서 산 신앙박물관과도 같은, 앞서 간 믿음의 사람들이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더 나은 부활을 얻으려고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길 바라지 않았고, 어떤 이들은 조롱/채찍질/결박/투옥을 당했고, 돌팔매질, 톱질로 죽거나 험한 광야에서 숨어 지내며 유리방랑을 하기도 했습니다. 
참 믿음의 사람들은 다들 그랬습니다.   
 

물론 제자/신자들은 감동 또는 생각에 따라 환난과 박해를 빠져 나갈 길도 없진 않았습니다. 주님이 그런 언질을 주고 계시니까요(마 10'23; 24'16,22).

우리는 무조건 수난과 피(被) 박해와 순교가 제일이라고 생각할 순 없습니다. 주님은 박해가 심한 곳에서 때로는 그걸 받게 허락하셔도, 때로는 분명히 피할 문을 여시고, 길을 내시고, 숨을 곳을 마련하실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부러 자진해서 순교를 앞당기려고, 스스로 박해 받을 장소와 기회를 찾아 다니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고 어리석음입니다. 피할 수 있을 때는 피해야 슬기롭지요.

사도 파울도 천국 영광과 상급을 위해 순교를 간절히 열망했으면서도(코린토B 5'1-8), 때로는 복음 전도 기회를 위하여 슬기롭게 피신하곤 했습니다(행전9'23-25; 14'5; 코B 11'32,33..등).  

그러나 피치 못해 박해를 받아야 할 상황에서 주님의 이름과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다만 두려움과 겁, 고통을 피하고 빠져 나갈 길을 생각다 못해 주님을 부인하고 배신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파울은 선교여행 차 그리스 아테네에 머물러 있을 무렵, 티모테를 테살로니카 교우들에게 보냅니다. 자신이 "(조바심을) 참지 못하고" 티모테를 보낸 까닭을 테살로니카A서(살전 3'1-5)에 밝혔지요. 그 중 하나는 바로 교우들이 장차 조만간 다가올 박해/수난이 무서워 믿음이 흔들릴까 불안했기에 티모테를 시켜 믿음을 강화하려고 했던 때문입니다.


악명 높은 배신자 이스카리옽(딴 표기 '카리옽', '가룟') 유다처럼 당국에 적당히 아부하고 그들과 타협하여 배도하는 사람들은 물론 겉으로 아무 박해를 받지 않고 몸은 편할 수 있었겠지요. "어휴~, 저 끔찍한 고문과 무참한 수모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게 얼마나 편하고 좋은가!" 하며 안도의 한숨을 쉴 테지요. 그러나 그런 배도자는 장차 불못 속에서 신음하게 될 영원한 심판, 영원한 고문이 기다리고 있음을 잊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끝.까.지. 견디는 게 아니지요.

흥미롭게도 유다 역시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이 말씀-"끝까지.."를 두 번 들었습니다. 12 제자들의 2인조 6개 전도팀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주님의 이 말세 예언을 통해서. 그러나 유다는 "끝까지" 견디긴커녕 일찌감치 미리 빠져나가 배도했지요. 마귀에게 속아 스스로 슬기롭고 행동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그는 제 갈 곳으로 갔습니다(행 1'25).

과거 한국의 일정 시대 때도 비슷한 사람들이 있었지요. '친일파'라고 합니다만.
또 북한 공산당이 판 치던 시절에도 기독교인들 가운데 신앙 절개를 지키지 않고 타협한 사람들이 있었고요. 권력이 두렵고 박해가 두려워 미리 앞서 힘 앞에 굽힌 사람들이고, 주님께는 배신자들이지요. 추후에 회개했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끝내 마지막 불못 심판보다 박해를 더 두려워 한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했을 터입니다.

끝까지 견디지 못했으니까. 
 

사실 페트로도 유다 비슷한 도전을 받았댔습니다. 비겁하게도 한 군데서 한꺼번에 3회나 주님을 부인한 전적이 있거든요. 어린 여종의 말에 겁 먹기도 하고. 주님께서 붙여 주신 '케파'(딴 표기 '게바', 아람어로 '바위'라는 뜻, 그리스어 페트로)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였지요. 그러나 주님이 미리 해 두신 기도 덕분에 수탉 울음소리에 놀라 눈물로 뉘우쳤고, 마침내 성령을 받아 모시고 나자 담대한 복음의 증인이 됩니다.   


이런 경우를 위해 파울은 티모테에게 다시 말합니다.

   "이것은 믿을 만한 말이다:
   우리가 (그 분과) 함께 죽었으면, 함께 살 것이다.
   우리가 (끝끝내) 견디면,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부인하면, 그 분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다.]
   혹시 우리가 신실하지 못해도 그 분은 늘 신실하시다.
   그 분 자신을 부인하실 수는 없으니까. (팀B 2'11-13)


하늘나라가 보장된 절대 약속을 위해선, 그 분을 부인하지 말고 끝까지 충실해야 하는 조건이 필요하다는 뜻이지요.


우리가 여기서 또 유의할 것은, 끝까지 견뎌야 구원을 얻는다고 해서 믿음 구원이 아닌 이른 바 '행위 구원'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이 빠져 버린 영웅 의식이나 피박해/순교 추구 정신만으로 구원을 얻진 못합니다.
이젠 더 피할 길이 없고 막판에 하나님 뜻대로 박해를 받거나 순교해야 할 상황일 때 믿음으로 받고 하는 것이지, 그 때 가서 구원 얻기 위한 행위로서 순교를 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믿음으로 박해를 받다 최종적인 상황 속에 순교할 때, 궁극적인 구원의 완성인 하늘나라로 들어가게 됩니다. 

아가페 사랑이 빠져도 마찬가지. 내 몸을 설령 화형장에 기꺼이 내주더라도 아가페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코A=고전 13'3). 그래서 박해하는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저주하지 말고, 그 영혼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축복해야 하는 것입니다(루카복음서=눅 6'28; 롬 12'14; 펱A 3'9).

결국, 믿음/소망/사랑-세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되는 것이죠(코A 13'13).
주님을 끝까지 믿음으로 의지하고, 끝까지 천국 영광을 바라고, 끝까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교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는, 초기 교회 집사 스테판의 패턴을 늘 생각하고 본받아야 좋습니다(행 7'54-60). 하늘을 우러러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소서!"라고 부르짖었던 그는 그러면서 돌팔매질하는 박해자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시라고 사랑으로 외쳤습니다.

비록 돌에 맞아 피투성이로 죽어갔지만, 이제 순교자 스테판 집사님은 의의 금관, 영광의 금관, 썩지 않는 금관을 쓰고 하늘에서 반짝반짝 별처럼 빛날 것입니다.

어쩌다 그를 죽이는 데 앞장 섰던 파울 사도님 역시, 수난과 순교 후 하늘에서 그런 금관을 쓰고 스테판 집사님과 마주보며 환하게 웃고 있을 터입니다. 그 옛날의 샤울이..


둘 다 믿음/소망/사랑으로 끝내 승리했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소망/사랑으로 끝까지 견뎌야 이 모든 좋은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사람 -그가 마지막 구원을 얻을 사람입니다.


티엘티 성도들은 모두,
끝까지 견디어 마지막 구원까지 받아,
하늘 영광과 상, 금관과
무한한 기쁨을 함께 누리게 되길~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