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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슈/십일조론

'나름 신앙'과 반 십일조 사상



오늘날 사회에서 '나름'이란 말이 많이 유행합니다.
"자기 식"과도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나름'이란 낱말은 본래 한글문법 상 의존명사인데, 요즘 구어에선 거의 부사처럼 자유롭게 쓰입니다. "내 나름으로는 그렇게 생각해"란 말이 이젠 줄어서 "나름 그렇게 생각해"로 대체돼 갑니다.

나름은 긍정적/부정적, 양쪽으로 다 쓰이는 말입니다. 긍정적으로는 주로 개인의 고유한 자유와 개성, 창의적 노력 등을 뜻하는 데 쓰입니다. 부정적으로는..척도나 표준이 없는 성향, 상대를 무시한 자기중심적, 안하무인 격 방향 또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나름'은 어쩌다 부사화 되면서 유행어가 되기도 했지만, 사실 포스트모던사회에 매우 걸맞은 말입니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나름으로 살아가기 때문이죠. 나름은 말 뿐 아닌 현상으로도 나타납니다. 특히 2000년대 들어 부쩍 그렇습니다.
그래선지는 모르나 교계에도 개인/집합적 '나름' 현상이 잦습니다.

그런데..'나름'은 성경 진리에 있어선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바꿔 말하면, 성경 진리에 있어선 '나름 현상'이나 '나름 태도'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 말씀은 절대 진리이기 때문이지요. 만약 절대성을 빼 버린다면, 성경은 아무 것도 아니며 기독교도 별 볼 일 없어지고 맙니다! 

물론 성경 말씀으로부터 개인마다 나름의 감동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감동은 주로 주관적이며, 최대한 보편적인 선상에서 일부 객관화 할 수는 있어도 절대화 할 수는 없습니다. 계시가 아닌 탓이지요.
그런데 교인들, 신자들이 나름을 강조하다 보니 성경 자체가 아닌 자기 나름을 은연 중 절대화 하는 경우가 잦습니다. 그래서 분명히 성경과는 다른 비진리인데도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떠오르는 대로 성경을 해석하고선, "성령님의 감동"이라고 '나름' 주장하곤 합니다.

이런 '나름 현상'은 유서가 깊습니다. 일찍이 그런 나름 현상이 성경 역사 속에서도 자주 발견됩니다. 대표적인 예라면, 바로 이스라엘 판관(判官/Judges 한글성경의 '사사'/士師)시대였지요.

    "그 시대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마다 자기 뜻대로 했다." (판관들=사사기 21:25, 이하 사역)

판관기 기자는 두 번 같은 진술을 되풀이합니다(판관들17:6에도 있음).

그런데 이 나름 현상은 자연스런 게 아니라 잘못된 것이었지요.
일찍이 미쯔라임출국(출애굽) 후 광야시대 때 모쉐는 그런 성향을 경고한 바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여기서 저마다 맘대로 하듯 거기서는 그렇게 하지 마시오." (신명기 12:8)

당시는 주/야웨님이 큰 이적으로 직접 백성과 함께 하심을 여실히 보여 주셨어도, 백성은 강퍅하기 이를 데 없어 광야에서 제멋대로 반항하거나 우상을 섬기거나 음란해지거나 다른 향불을 드리거나 했습니다. 특히 경배/예배 이슈에서 그러했지요. 

그러나 모쉐의 이 경고엔 아랑 곳 없이, 이스라엘 백성은 모쉐의 후계자인 지도자 예슈아마저 죽고 나자, '나름'을 되풀이합니다. 사람마다 제 소견과 판단대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합니다. 그러다 보면 아무래도 무질서가 판 치기 마련입니다.  무정부국가의 특징이 여실히 나타납니다. 일종의 과도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그나마 하나님이 때마다 판관과 대언자들을 선임하시고 보내셔서 백성을 지도하게 하시지만, 한 때 얼마일 뿐, '나름' 현상은 왕정 시대가 자리잡히기 전까지 좀체 사라지질 않습니다.

당시는..
    기록 성경이자 성문법인 율법보다 구전(口傳)을 주된 지침으로 삼았고,
    집안에 올곧은 어른이 없을 때 신앙생활이 피폐했고
    당시 쉴로(=실로)에 있던 하나님의 집인 성막(聖幕/Tabernacle)보다는 편리하고 가까운 지족(支族)/가문의 터전에서, 심지어 개인 집안에서 '경배'하곤 했습니다. 

말하자면, 지족과 가문마다 '나름 표준'으로 '나름 신앙생활'을 한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봅시다.
에프라임 산지의 미카 가문은 은(銀) 신상을 만들어 신당 안에다 두고 떠돌이 레비 지족 청년을 아들 겸 집안 사제로 삼아, 주/야웨님께 '복' 받으려고 우상을 '경배'하곤 했습니다. 훗날 마땅한 주거지를 찾아 떠돌던 단(Dan) 지족은 그 신상과 청년 사제를 빼앗아 역시 주/야웨님을 섬긴다면서 우상을 섬겼지요(판/삿 17-18장).
 
미카는 평소 은상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나는 안다: 레비 사람이 나의 사제가 됐으니 주/야웨님이 내게 복을 주실 거야." (판관들 17:13)

우상을 섬기면서도 주/야웨님께 복 받을 것으로 '나름' 굳게 믿은 것입니다. 미카에게서 우상과 사제를 앗아간 단 지족 역시 그렇게 나름으로 믿었습니다.
쉴로 성막과 율법이 엄연히 따로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시대가 지난 역사로 끝난 게 아니라 오늘날도 재현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표준과 척도, 잣대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소견이나 생각, 전통과 사상, 성경에 대한 특정 해석 등을 진리의 대안으로 삼아 자기 나름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성경 말씀 대신 다른 것들을 절대 진리로 내세우기도 합니다.

    일부 신학 사상이 신앙을 대신하고
    잘못된 비성경적 교리가 성경 교훈을 대체하고
    타 종교의 요소를 끌어들여 기독교 진리와 희석시키고  
    성경적인 경건을 이상한 외래 영성으로 바꾸며
    방종과 무질서가 참 자유인 양 탈바꿈 해 가는..

그런 현상들입니다.  

요즘은 또, 웹 사회가 발달하다 보니 저마다 아이디어와 생각들을 짜내어..자기 생각들을 '복음화'시켜 내세우는 예가 많습니다. 현 교회의 법과 교리, 전통들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몽땅 싸잡아 '율법'으로 매도하고 '복음'이라는 미명 아래 그것들로부터의 완전 자유를 선언하는 현상이지요. 또한 기성교회를 모조리 율법주의자로 몰아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자신들은 가장 의롭고 가장 복음적인 존재로 포장하는 것이지요. 얼핏 그럴 싸 해 보이나 실은 비 복음 또는 반 복음, 이를 테면 '안티즘'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면,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덩달아 근래 부쩍 발달한 '반(反) 십일조 '사상이 그렇습니다. 처음엔 구석에서 작게 시작된 반 십일조 사상이 점점 커져서 얼마나 팽배해지고 세력이 커졌는지 지금은 십일조 교인 인구가 온 세계 교계의 10분의 1도 되지 않습니다!
십일조 인구는 본래부터 소수였지만, 지금은 극소수가 돼 가고 있습니다. 

자연히 교회 재정은 주로 헌금에 의존할 수 밖에 없고, 과거 세계 교계의 구호사역에 주로 쓰이던 십일조가 점점 사라져 감에 따라 구호비/선교비도 성도의 자발적인 헌금에만 의존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인 대 유행과 붐을 타고 있는 이 '반 십일조' 사상은 사실, 영광스런 복음 또는 복음주의로의 회귀 현상이 아니라 중대한 말세 현상의 하나입니다. '내 멋대로' 식, '나름'식 신앙 생활 방식의 하나라는 거죠.

명목은 자발적인 정신을 중시하는 듯 하지만, [복음=자발]은 아닙니다. 복음 정신은 오히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알고 보면, 이것은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을 삶의 표준으로 삼지 않는 발상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왕이 없어 제 소견대로 하다가, 판관시대 말기에 이르면, 이웃 나라들의 왕들을 보자 부럽기도 하고 판관들의 비리에 대해 지겹고 실망스런 나머지, 마지막 판관이던 슈무엘에게 왕을 세워 달라고 떼를 씁니다.

그 때 하나님은 슈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의 왕임을 거부하는 것이란다" (슈무엘A=삼상 8:7b)

즉,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당신께서 실제적인 이스라엘 왕으로 군림해 계신 현실을 백성이 못마땅하게 생각해 왕정제를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왕정제를 허용하십니다. 그래서 왕국시대가 시작된 것이고요. 다빋처럼 하나님 마음에 맞는 선한 왕, 그리고 최후의, 궁극적인 모든 왕들의 왕-예수 크리스토-을 내다보셨기 때문이지요! 할렐루야.

이 경우는 반 십일조 사상에 적용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십일조를 내지 않아도 된다, 심지어 마땅히 '폐지'돼야 한다는 발상은 어찌 보면 하나님이 우리 삶의 왕이심을 거부함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이 내 존재와 내 삶의 왕이시라면..하나님은 동시에 내 재정의 왕이심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정신'이란 미명을 내세워 '자발적' 헌금을 강조하면서 십일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알고 보면 이런 인본적인 왕정제 타잎/스타일이기가 더 쉽습니다:

    "딴 건 몰라도 돈 문제 만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하나님은 재정 왕 노릇을 그만하시지요. 제가 기꺼이, 기쁜 맘으로 헌금을 바치니까 그 '율법스런' 십일조는 요구하지 마시고. 주님. 아시지요, 제 형편?"

그런 다수의 교인들이 현대교회가 십일조를 '강요'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교인들에게 십일조를 억지로 요구하여 강제로 내게 하는 교회가 얼마나 있는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그보다는..그런 옆의 십일조 교인을 염려하는, 또는 질시하는 '노파심'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닐까요? "십일조를 안 하려면 다 안 해야지, 왜 넌 하고 난리야.."
- 이런 '군중심리유도심리' 말입니다.

그래서 일부 교회는 십일조를 아예 잠정 폐지하거나 각자 알아서 하라는 개인사안으로 붙여 둡니다. 그런 교회는 목회자가 (반 십일조) 교인들에게 '부담'을 준다는 생각으로 십일조를 전혀 강조하지도 않거나 아예 율법으로 매도해 버리곤 하지요. 물론 십일조 교인들을 위해 특별한 복을 빌진 거의 않습니다. '기복주의'라는 명목 아래서지요.

목회자가 사실상 인구의 다수인 반십일조주의자들에게 굴복하는 시대가 돼 갑니다. 하나님을 재정 왕좌에서 내쫓고 그 분의 재정 왕복을 벗기는 시대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복을 구하는 사람들, 극소수의 십일조 교인들을 '기복주의자'로 내 몹니다. 과거 한국 교회를 복 주신 하나님을 이젠 '기복'의 대상으로 몰아가는 게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기분이 어떠실까요?
아마도 하나님은 이렇게 선언하실 법 합니다.

    "그래..그렇단 말이지? 그럼 나도 딴 건 몰라도 돈에서만큼은, 물질적인 복 만큼은 내가 알아서 할게. 십일조를 거부하는 널, 참 십일조 교인과 똑 같이 대할 순 없다. 알겠지, 내 맘?"

이게 과연 저의 발칙한 상상에 불과할까요? 황당한 공상에 그칠까요?

흥미롭게도 웹 사회에서 '나름 복음'을 목청 다해 설파하는 사람들은, 으레 반십일조주의자가 돼 있습니다. [ 십일조=율법 ]이라는 나름 공식 아래. 그들은 또 "낼 사람은 자기 할 탓이다..니가 알아서 내시오"라고 합니다.

이게 웬 모순이랍니까! 그렇다면 십일조 교인들은 자동으로 합법적(또는 비공식적?) 율법주의자가 되고 말지요. 안 그런가요? 그러니, 교회 안에서 합법적(?)인 비율법주의자와 비공식 율법주의자가 공존하는 셈입니다. What an odd couple..

과연 십일조가 율법이고, 반십일조가 복음일까요? 최종 판단은 독자 개인에게 달렸습니다만, 티엘티의 여러 관련 글들은 지침이 될 것입니다.  

십일조는 나의 재정 왕이시기도 한 그 분의 왕권에 결부된 이슈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라고 하셨듯, 그리고 우리가 나라에 세금을 의무적으로 바치듯, 십일조는 나의 재정 왕께 대한 나의 의무 사안입니다.

율법으로서의 의무가 아니라.. 내게 돈을 비롯한 모든 것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 안에서의 표현으로서의 의무 이행이지요.
 
    그 분이 여전히 나의 왕이시고
    나의 삶의 모든 분야 위에 왕이시듯,
    나의 재정 분야에도 왕이심을 인정해 드리고,
    그 사실을 시인하고 고백하고 간증하고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십일조는 자원하는 헌물이나 헌금 즉 구약의 낙헌제(樂獻祭=자원하여 기쁨으로 드리는 제사)식 예물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나의 봉급이나 수입에서 일정 부분을 따로 떼어 하나님께 바치는, 사랑의 의무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약시대엔 십일조가 '폐지'됐다고 주장하는데..십일조 폐지 선언이란 것은 눈 씻고 봐도 없습니다. 또 은연 중 자동폐지, 잠정폐지 됐다고도 주장하지만 그런 흔적도 보이질 않습니다.

오히려 십일조는 맥맥히 교회 전통으로 남아있던 흔적은 있지요.

    "매주 첫날 개인이 수입을 얻은 대로 (미리) 저축하여 두었다가.." (코린토A=고전 16:2)

사도 파울이 갈라티아 교회와 코린토교회에 내린 지시입니다. 이건 자발적인 헌금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각자가 알아서 하는 헌금은 파울이 지시할 사안이 아니지요. 분명히 사도 파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갔을 때 (즉석) 연보를 하지 않게 하시오." (코린토A 16:2끝)

자발적 헌금도 미리 준비해서 내는 예가 더 많지만, 즉석에서 임의로 헌금하는 예도 흔합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그렇게 안 되지요! 십일조는 매 주 수입을 미리 저축했다가, 또는 매 달 수입에서 챙겼다가 내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싫어하거나 꺼리거나 반대하거나 무시하는 사람들은..오만 날 오만 가지 이론을 다 동원해서 교계와 웹에서 십일조 무효화 캠페인을 강행해 왔습니다.

그들은 소위 '십일조 율법론', '십일조로 인한(?) 타락론'을 부유한 대형교회를 상대로만 뿌릴 뿐 아니라..중소형교회도 뿌려 큰 재정적 손해를 끼칩니다. 궁극적으로 부유한 대형교회 타락 탓이 아닌, 십일조 탓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 결과 전세계적으로 교회의 재원은 나날이 줄고, 구호비/사역비/선교비도 줄어갑니다. 
십일조를 폐지했더니 오히려 재정이 늘었다는 교회는 뭔가 착각하고 있거나 단단히 잘못된 교회입니다. 

십일조는 창세기부터 히브리서까지 꿰뚫고 있는 복의 언약(계약)이요 복의 선언입니다.
십일조가 한때 율법 시행 제도의 일부로 편입된 적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자체가 율법은 아닙니다.

성경 권서(券書)들 중 십일조를 마지막으로 언급한 히브리서는 분명히 십일조를 현재형으로 명기해 놓았습니다.

    "..거기(하늘)서는 살아 계신다고 입증되신 분이 (십일조를) 받으십니다." (히브리 7:8b)

왜냐고요? 주 예수님이 현재 하늘 대사제이시니까요. 땅의 사제제는 폐기됐을지언정 하늘 대사제제까지 폐지되진 않았거든요. 아브라함이 엘 엘리온(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사제, 멜키쩨뎈에게 십일조를 바쳤듯, 우리는 멜키쩨뎈을 승계한 예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자고로 높은 분에게 낮은 사람이 복 빔을 받고, 복 빔을 받는 사람이 내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율법이 아닌 초율법이요 더 나아가 복음 즉 복된 소리의 일부입니다.

'중간기'를 앞둔 구약 최후의 대언자 말라키를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내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게 붓지 않나 보라" (말라키 3:10)

이것은 율법제도가 있을 당시 하신 말씀이지만, 이 복의 선언만큼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왜냐..십일조는 본래부터 초율법이기 때문이지요.

한 번 물어봅시다: 십일조가 복된 소리가 아니라면 저주라는 말인가요? 물론 적극적인 반십일조주의자들에겐 십일조란 낱말조차 저주스럽게 들릴 수 있겠지요. 그런데 어떻게 헌금 하라는 교훈은 저주로 들리질 않지요? 그것마저도 저주스럽게 들리진 않습니까? 저주스럽지 않게 소화시켜 들어선가요?

더구나 믿음으로 십일조를 내는 사람들은..히브리서 11:6에 명기된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 없이는 그 분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 분께 나아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 분이 계심과, 또 그 분은 그 분을 찾는 이들의 보상자이심을 믿어야만 합니다."


십일조가 초율법 아닌 율법, 복음 아닌 저주라는 생각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나름 현상'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알고 보면 이런 나름 현상은 우리의 재정 위에도 왕권을 지니신 하나님께 대한 큰 오해입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 영의 왕좌 위에 모셔 놓은 그 하나님께 "[십일조=율법]..고로 '재정만은 제가 알아서 함'.."이란 딱지를 붙여 놓는 것은 나름 경배이고 나름 섬김이지, 성경 진리대로의 경배와 섬김은 아닐 터입니다.
더욱이 십일조를 포함한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는 진정한 복음적 자유의 선언이 아니라, 나 중심인 인본주의성 나름 철학, 나름 신앙 내지 방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이지, 결코..
    나 자신이나
    내 삶이나
    내 돈의
주인일 수가 없습니다!

십일조까지도 내가 알아서 낸다는 생각은 나 스스로 내 재정과 돈의 주인이 돼 있다는 표시입니다. 하나님 말고 나 중심의 다른 왕정제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같은 교회, 한 교회 안에서 "십일조를 내고 싶은 사람은 알아서 내라"고 하는 말은 "당신은 복 받고 싶은 만큼 내. 난 복 받고 싶지 않으니까 안 내!" 하는 소리와 같습니다. 

이런 '나름' 현상, '나름 스타일'을 누가 가장 좋아하고 반길까요?
바로 싸탄이죠! 싸탄은 교회가 날로 더 가난하고 피폐해져서, 과거 하던 일도 못하게 만들고 복음전파 비지니스가 날로 시들해져 가길 바라고 있는 장본인입니다. 그래서 [반십일조주의=복음]이라고 떠드는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입조심을 해야 합니다. 나름 신앙을 진리인 양 우기거나 착각하지 말고.

십일조는 율법이고, 반십일조주의가 참 복음이라면..복의 대안이 뭡니까? 하나님께 복 받을 길은 뭔가요? 산상보훈(마태복음 5:3-12) 중 '8복' 선언의 암송? 그리고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건 다 기복주의니..복을 안 받아도 된다, 아니면 복을 안 구하고 안 받는 게 더 복스럽다는 뜻인가요?

십일조가 불필요하다면..
내가 그 분의 청지기/돈지기인 표시가 뭡니까?
내가 알아서 내는 자원헌금?

나름 신앙, 나름 '복음', 나름 주장, 나름 선언과는 달리,
십일조는..
     여전히 유효한 복의 한 채널입니다.
     복의 약속이고 복의 선언입니다.
     하나님께 나의 재정도 마음 놓고 맡겨 드린 청지기의..
     복된 마음입니다.
그리고 천국신용카드입니다!

하나님은..
개인 삶 위의 모든 왕권과 함께 그 분의 재정 왕권도 믿음으로 시인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똑 같이 보시고 똑 같이 공평하게 대우하실 순 없는 노릇입니다. 그건 참된 의미의 공평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모두 거짓되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하라.." (로마서 3:4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