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런 전제의 간판만 내 걸었을 뿐 뒷받침할 근거가 없습니다.
그런 전제의 내막을 보면 [십일조=율법]이라는 공식을 깔고 있지요.
이 역시 가상적 공식일 뿐 성경으로 뒷받침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살펴 봅시다.
십일조가 '율법'이어서 신약시대에 십일조가 '폐지'됐다고 봐야 한다면, 역시 율법 시대에 시행됐던 헌물과 헌금, 낙헌제(樂獻祭, 레빝서=레위기 7:16 참조)와 감사제(레 7:12), 사실상 음악 예물이었던 찬양제도 율법이며..따라서 폐지됐어야 합니다!
[십일조=율법]이라는 공식이 가능하다면, 논리적으로..
[헌물=율법]이라는 등식과
[낙헌제=율법],
[감사제=율법],
[찬양제=율법]..
[헌금=율법]이라는 등식들도 가능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왜 딴 건 다 놔 두고 십일조만 예외라는 말인가요? 누구 맘대로? 반십일조론자들 입맛대로?
더 나아가 구약시대에 했던 모든 것이 율법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했던 모든 것은 폐기 처분돼야 하고, 신약성경만 달랑~ 남게 됩니다. 안 그런가요?
좀 더 풀어 보죠.
어떤 반십일조론자들은 구약 십일조는 모두 곡물이나 소산물로 했으나 현대는 현금으로 하니 어불성설이라는 식으로 주장합니다. 터무니 없는 발상이지요. 예수님 당시 이.미.(!) 로마 제국의 주화들인 현금이 십일조/헌물/성전세로 쓰였습니다. 페트로나 기타 어부들이 갈릴리의 물고기를 직접 십일조로 바쳤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농부도 아닌 주제에 농산물로 바친 것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은 신약시대가 도대체 언제부터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상에 계시면서 복음 전파를 하셨을 때는 구약시대인가요, 신약시대인가요?
흔히 우리는..4복음서도 신약 성경에 포함됐으니까 신약시대로 오인합니다만..복음서 교훈들은 다가올 신약시대에 관한 예언에 더 가깝고, 예수님이 지상에 계시면서 복음을 전하시던 당대는 아직 모두들 율법을 준수하던 구약시대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참된 신약시대 곧 은혜시대/성령시대/교회시대는 성령님이 오신 뒤에야 시작됐다고 봐야 합니다.
반십일조론은 짧은 생각입니다.
십일조가 한때나마 제도에 포함된 적이 있습니다. 주로 빈민들을 돌보면서 성전 사역자들인 레비인들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제도화 되기 전에도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율법이 아닌 초(超)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한때 제도화 됐다고 해서 언제나 영영 율법이 아니지요. 십일조가 한때 제도였기에 제도가 아니었던 전/후 시절의 십일조가 무용화 되는 겁니까? 그렇다면 역시 제도였던 헌물과 낙헌제, 더 나아가 헌금과 감사제와 찬양제도 마땅히 무용화돼야지요!
더더욱 나아가서..반십일조론에 따르면, [제도=율법]이란 공식이 가능해지며..결국 논리적으로 현재 교회가 시행하고 있는 모든 제도도 '율법'이어야 하는 겁니다. 안 그런가요? 각 교단의 헌법 즉 교단법은 어떻습니까? 감리교의 제도나 장정, 장로교 노회법, 교회 헌법 등은 뭔가요? 다 율법이 되는 겁니다!
십일조가 옛 제도였기에 율법이라면, 논리적으로 새 제도도 율법이라는 겁니다.
모든 게 다 율법이고 따라서 폐지돼야 한다면, 교회에서 시행되는 모든 것은 폐지돼야 합니다.
단지 민주주의적인 것이어서 안 되는 겁니까? 구약시대의 제비뽑기는 표면상 그 어느 것보다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성령님이 오시기 전, 신약시대에 제비뽑기가 시행됐다는 흔적이 없습니다.
궤변이라고요? 궤변이라면, 정작 지금까지 살펴 본 반십일조론은 더 궤변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십일조가 제도여서 율법이고 따라서 폐지됐어야 한다면, 오늘날 교회가 하고 있는 각양각색의 헌금들도 제도이므로 다 율법이고 폐지됐어야 합니다.
따라서 한 마디로, 반십일조론은 교회에서 모든 것을 빼앗아 내팽개치겠다는 안티교회론에 불과합니다.
성전 파괴로 십일조는 끝?
또..성전이 파괴되면서 십일조가 폐지됐다는 주장이 왜 허황된 주장인지 좀 더 알아 보죠.
주전 6세기말 슐로모 성전이 파괴되고 유다인들이 포로로 잡혀 갔을 당시에도 십일조는 폐기되지 않았고, 여전히 유효했습니다. 포로 이후 제룹바벨 성전에서 십일조는 회복됐으니까요. 더구나 구약 끝 책인 말라키에서 대언자 말라키는 주/야웨님의 신탁을 받들어 다시 한 번 십일조 정신을 새롭게 강조합니다.
말라키 이후는 그야말로 계시가 끊긴 중간시대였지요. 그런데 십일조가 파기됐나요?
'헤로드 성전' 이후에도 십일조는 여전히 유효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당대인들에게 십일조가 무효화됐다고 선언하시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폐하지 말아야 한다"고 오히려 강조하셨지요.
주후 약 70년 헤로드 성전이 파괴되면서 비로소 십일조도 사라졌나요?
그런 추정이 사실이라면, 묘한 갶이 생깁니다.
헤로드 성전이 파괴되기 훨씬 오래 전 이미 신약시대가 시작됐기 때문이지요. 신약 시대가 시작되면서 즉 성령님이 오시면서 십일조가 폐지됐을까요?
우리가 아는 대로 성령강림 무렵 초기교인들은 거의 날마다 성전 또는 성전 부근에서 지냈습니다. 만일 그들이 십일조를 폐기했다면, 레비 성전 사역자들이 십일조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성전을 활용한다며 내쫓지 않았을까요?
초기 교인들이 말라키 3:10을 어겼다고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들이 오히려 말 3:10을 더 열심히 지켰다고 상상되지 않나요?
히브리서에 나타난 십일조의 2원성
반십일조인들 대다수는 분명히 신약 성경인 히브리서 7장에 언급된 십일조를 피하여 가곤 합니다. 그런데 사실상 십일조과 복의 관계의 핵심 비밀이 히브리서에 담겨 있지요!
히브리서 기자에 따르면, 이 기자 당대에 성전 사제들이 여전히 십일조를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자는 십일조를 2차원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십일조는 여기(땅)에서는 죽을 사람들이 받고 있지만, 거기(하늘)에서는 산다고 입증된 분이 받는다는 겁니다.
여기 히브리서 7:8의 '받는다'는 말은 원문 상 모두 현재형으로 표기돼 있습니다.
(영문 역은 모두 현재형으로 표기됐으나, 한글 역 일부는 과거형으로 표기함)
즉 십일조는 물적이면서 동시에 영적이라는 것이지요! 십일조는 동시에 영적이기에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하는 영적인 동기가 십일조의 핵심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십일조의 영적 동기가 복 받는 비결이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십일조의 영적 동기는 뭘까요?
신자들의 재정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이지요.
[십일조의 제도적인 면은 물론 승화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레비인들을 위한 것이 레비인 제도가 사라졌으니, 더는 레비인들을 위해 쓰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엔 이에 준한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비록 사제들은 아닙니다만. 더 나아가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왕족/사제이기에 십일조는 성도 구호에 우선적으로 쓰여야 합니다. 초기교회가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아울러 담임목회자는 제1인자나 왕, '왕회장'이나 CEO가 아니므로 십일조를 놓고 전횡하거나 전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율법 시대 이전에도 존재했던 초율법으로서의 십일조까지 사라져 준 것은 아니지요. ]
히브리서 기자는..이 점을 강조한 겁니다.
히7:8에 따르면, 분명히 십일조는 현재형 내지 현재지속, 진행형으로 돼 있습니다. 곧, 멜키쩨뎈처럼 살아 있다, 되살아나셨다고 입증된 예수 크리스토가 영적으로 십일조를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반십일조론자들은 이것을 안 믿을 뿐더러 부정하려 듭니다.
멜키쩨뎈은 살아 있습니까? 죽었습니까, 사라졌습니까? 영원히 살아있지요!
마찬가지로 예수 크리스토도 영원히 살아계시는 겁니다. 할렐루야.
성자님께서 지금 멜키쩨뎈을 승계한, 하늘 대사제이신가요, 아닌가요?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지금 중보하시나요, 안 하시나요?
그렇다면 그 분이 멜키쩨뎈처럼 우리의 십일조를 영적으로 받으시나요, 안 받으시나요?
만약 십일조가 사라졌다면, 거기 딸린 복도 사라졌다고 말해야 정직합니다.
십일조에 대한 하나님의 복의 선언이 사라졌습니까, 아직 유효합니까?
하나님의 선언이 사라지는 예도 있습니까?
율법을 봅시다. 율법을 대표하는 십계명의 단 하나라도 사라진 적이 있습니까?
반십일조론자들은 십일조는 율법이기에 사라졌고 기쁜 마음으로 자원해서 드리는 헌금만 남았다고 주장들을 합니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율법과 제도에 따라 자원해 드린 헌물과 낙헌제, 감사제도 사라졌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헌금도 사라져야 하지 않습니까?
이 시점에서 반십일조론자들의 어젠다는 분명합니다.
그들이 아무리 자신들이 더 복음적인 것처럼 미사여구로 꾸며가며 떠들어 외쳐도, 그들의 속내는 교회에 내는 것을 조금치라도 줄이자는 겁니다. 특히 요즘 같은 경제난 시대에 더 그렇겠지요. 십일조의 경우, 수입이 적을 때는 부담이 적지만, 점차 수입이 늘수록 십일조에 대한 부담이 커집니다.
그러니, 자연히 자신의 재정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 싫거나 하게 되질 않지요.
적어도 반십일조론자들의 일부의 어젠다는, 또는 그들 진영의 어젠다의 일부는 그렇습니다.
그중 일부-예컨대 조누가 '목사' 같은 사람-가 남을 위해 주구 역할을 하는지는 몰라도.
반십일조론자 대다수가 그렇습니다.
자발적인 헌금을 강조하지만, 사실 10분의1도 기꺼이 바치길 주저하는 사람들이 '자원', '자발적'이라고 하기 어렵겠지요. 그들이 말하는 '자발적'이란 곧 하나님의 경제 주권을 제쳐 놓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서 일방적으로 내는 헌금을 뜻합니다. 밀이야 바른 말이지, 그건 인본주의이고 자기중심이지 신본주의나 하나님 중심은 아니지요 .
그들 자신의 논리를 역적용한다면, 헌물도 헌금도 율법이어야 합니다!
왜냐..앞서 말했듯, 기꺼이 드리는 낙헌제도 율법에 포함됐었기 때문이죠.
반십일조론자들의 핵심 문제점은 제도로서의 십일조만 없애자는 게 아니라 십일조 정신 자체가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묻건대, 왜 교회엔 헌물과 대동소이한 헌금이 남아 있으며, 왜 감사 찬양이 남아 있나요?
제도로서의 레비 음악인 제도와 성전음악은 사라졌지만 그 찬양 정신과 현대형이 지금 엄연히 여태 남아있지 않습니까? 제도로서의 헌물과 낙헌제는 사라졌는지 모르나, 그 정신이 여태 교회에 헌금으로써 남아 있지 않나요?
그렇다면 십일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십일조만 제쳐 놓나요? 불공평한 처사지요.
최소한..최소한 10분의 1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시인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 드린다는 십일조 정신도 엄연히 살아 있습니다! 초기 교인들은 분명히 십일조 정신을 지켰습니다(코린토A=고전 16:2).
두 말 할 나위가 없습니다.
반십일조론자들의 속내는 그겁니다.
감사제나 찬양제, 낙헌제 등은 내기가 별로 부담스럽지 않아도 십일조는 아무래도 부담스럽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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