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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슈/십일조론

치부(致富)와 풍요의 차이



참고본문: 티모테A서 6:6-19
 
많은 사람들이 치부와 풍요의 차이를 모릅니다.
어찌 보면 사잇폭이 넓은 것 같기도 하고 종이 한 장 차이인 것 같기도 합니다.

돈과 부에 대한 환멸, 졸부들의 오만과 횡포 등에 질린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가난을 칭찬하거나 동경하기가 쉽습니다. 친구 목회자의 말을 빌리면, 가난한 사람들은 흔히 돈을 탐하기에 부유한 사람들을 공격/비판/혐오하기가 일쑤라고 합니다. [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 오해 마시길 ]

특히 풍요와 복을 연계해 생각할 때 사람들은 많은 혼동을 겪습니다.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마치 풍요가 성경과 거리가 먼 양, 가난이 더 성경에 가까운 양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난할 때, 우리의 삶은 그만큼 자유롭지 못하며 제한된 삶에 묶이기 마련입니다. 가난을 칭송하는 사람들도 가난에 찌들리는 삶을 충분히 겪어 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걸인들로 가득찬 사회가 이상향인지요?

한국은 올 때마다 달라 보입니다. 더 발전하고 풍요로워집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인간은 열심히, 성실히 살 때 재물을 얻고 풍요롭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하시고 복을 주셨음을 부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지금, 재물을 탐하고 그릇된 방법으로 돈을 벌고 미래나 내세와 상관없이 돈의 탑을 쌓아 가는 사람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획일주의나 흑백논리를 피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 파울이 믿음의 아들이자 후배 목회자인 티모테에게 한 위 교훈에서 분명히 치부와 풍요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성도가 부자일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성도들 중 부자가 많습니다. 초기교회 때부터 그랬습니다.
주님이 당대 사회에 가난한 사람들이 항상 있다고 하신 것처럼 우리네 교회에도 늘 가난한 성도와 부유한 성도가 공존합니다.
그러나 부자가 계속 부자로 살아 가려는 것도 잘못이고, 가난한 성도가 부유한 성도를 비판/공격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기독교는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아닙니다.

우리는 풍요로워야 제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넉넉해야 남을 도울 수 있고 선교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풍요로운 것은 처음부터 창조주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재물 얻을 능력을 내가 줬다"고 선언하시며 "은도 내 것, 금도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은과 금이 누구의 것이 됩니까? 성도들의 것이 됩니다.
 
가난과 헐벗음, 굶주림을 몰고 온 존재는 싸탄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늘 풍요로우신 분이시지, 신화에 나타나는 '가난의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개선하길 원하시지 가난한 사람들을 늘 가난에 머물게 두실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 기독교 사회주의적 발상이 늘어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변화!', '변화!', '변화!'를 외치는 사람들이 자신들은 사람들에게서 인기와 베스트셀러 등으로 명성을 누리고 동시에 쉽게 돈을 모으면서 사회 평준화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모습을 보곤 합니다. 그것이 지나치면 권력자들에 의한 부의 탈취와 이익의 강제분배를 뜻하게 됩니다. 실제로 그것은 세계통합을 위한 한 방향이기도 합니다.
통치의 힘으로 기독교의 힘을 빌려 세계의 빈곤을 제압하겠다고 주장합니다. 문제는 그 배후의 세력이 누구냐는 데 있습니다. 이 세상의 임금과 신은 마귀 싸탄이고 세상 시스템은 그의 메이트릭스입니다. 교계가 세상 세력과 야합할 때, 그것은 곧 타락과 배도를 뜻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 가운데 항상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보다 넉넉하고 풍요로운 사람들이 아가페 사랑과 자원하는 심령으로 도울 만큼 도와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그 사역을 해 왔습니다. 지금도 세계적으로-적어도 미국에서는 빈자구호사역, 빈곤퇴치사역에 가장 앞선 단체들이 기독교계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풍요롭지 못하고도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안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돕는 데는 한계가 뚜렷합니다. 그래서 풍요로워야 합니다.

한국교계는 6.25 직후 처참한 가난을 면치 못하던 중에서도 국내외의 따스한 온정의 손길이 오갔기에 한결 비참과 좌절, 낙담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풍요로운 사람들의 넉넉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오늘날 교계가 가난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는 이상한 부르짖음이 있습니다.
동양적인 '청빈낙도' 사상이 교계에 침입해 있습니다. 수도원 영성, 도교, 불교나 힌두교와도 영향을 주고 받아온 관상영성의 작용 탓이기도 하고, 대형주의에 대한 혐오로부터 풍요를 무조건 소위 '기복주의'로 몰아가는 획일적 흐름이 상승기류를 탄 탓이지요.  
신자들이 넉넉한 손으로 남을 돕지 않고 모두들 구걸하며 살아가자는 말인가요..?
정작 자신들은 가난을 원치 않으면서, 믿는 신자들, 남들이 가난해지길 바라는 희한한 발상입니다. 

저는 티엘티 독자들이 늘 풍요롭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가난하여 쪼들리길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 원리를 늘 적용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상투적으로 대형주의/기복주의 규탄에 나선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성경적인 풍요의 원리까지 규탄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래서 내가 열심히, 성실히 일하여 벌 만큼 번다는 극히 일반은총적인 것만 진리로 받아 들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인본주의적인 것입니다.
내가 벌어 내가 쓴다는 데 뭔..? 하는 생각이 들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런 신자들은 흔히 십일조를 부정하거나 정신을 약화시키가 일쑤이죠.
 
성경은 성실히 자기 손으로 벌어 먹고 사는 것 외에 하나님의 힘으로 풍요로워지는 길을 수천년전부터 제시하고 있습니다.
풍요는 우리가 믿음으로 간구할 수 있고 해야 할 목록 가운데 포함돼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인 우리가 아버지께 믿음으로 당연히 구할 수 있는 대상에 돈과 풍요도 포함돼 있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께선 온 누리가 그분의 것이라고 하시며, 은도 내 것, 금도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우선적으로 누굴 위한 것입니까? 세상을 위한 것입니까, 성도를 위한 것입니까? 아버지는 우리 성도를 미워하시기에 세상을 더 복되게 하시고 더 부자 되게 하시는 것입니까?

많은 성도들이 마귀가 세상 부자들을 만들어 내는 줄로 착각합니다.
물론 졸속한 방법으로 돈을 긁어 모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마귀가 은과 금의 창조자가 아니지요! 창조주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내신 것은 모두 선한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선한 것을 오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돈 자체가 일만 악의 뿌리가 아니라 돈을 사랑함이 온갖 악의 뿌리라는 인식을 우리 자신에게 심어야 합니다.

거듭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풍요롭고 넉넉하길 원하십니다.
모자라고 가난하길 원치 않으십니다. 심령의 가난과 물질의 가난을 혼동하지 말기를!
그러나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가난의 상황을 허용하실 때가 있습니다.
결국 가난에도 처할 줄 알고 풍요에도 처할 줄 아는 사람들이 신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가난해져야 한다는 게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주/야웨 님은 나의 목자, 나 아무런 부족함도 없으리!
주/야웨 님은 나의 목자, 나 아무런 부족함도 없으리!
주/야웨 님은 나의 목자, 나 아무런 부족함도 없으리!

그러나 우리가 풍요롭게 살면서 주님 왕국을 위해 일하고 가난한 성도에게 온정을 베풀려는 것과, 나 자신이 치부하여 계속 혼자 부자로 살려는 것과는 엄연히 다릅니다. 후자는 온당치 못합니다. 바람직한 크리스천 부자는 계속 재물을 나누고 흩어 뿌려 돕는 사람입니다.

파울은 분명히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받는 온갖 유혹과 올무,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을 경고합니다. 돈을 사랑하던 신자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난 사실들을 예로 듭니다(티모테A 6:10).

가진 것을 교회/성도와 적절히 나누지도 않고 계속 눈을 높여 남다른 부자로만 남으려는 신자들은 눈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높이려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이 아니라 정함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는 사람들입니다(17절). 그런 신자는 경고를 받아 마땅합니다.

특히 사역자가 그런 뜻과 맘을 가질 때 문제는 심각합니다. 이런 말은 실제로 미국 등엔 거나하게 재물을 쌓아가며 대저택 속에서 자기네 가족끼리 뒹굴뒹굴 몸을 굴리는 졸부 목회자들이 흔하기에 하는 말입니다. 악명 높던 텔리밴젤리스트 짐 베이커는 엄청난 거액의 헌금/기부금으로 최고급 자가용차를 굴리면서 심지어 자기 애견을 위한 냉난방 시설 혜택을 배려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재능과 은사를 육적 만족에다 퍼붓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겐 실로 부와 자원이 복 아닌 저주가 돼 버립니다.

그러나 복을 복 답게 복스럽게 사용하는 슬기로운 신자도 많습니다.
가끔 티엘티 독자들이 하나님의 힘으로 보다 넉넉하고 풍요롭기를 원하는데 당연한 소망이요 욕구입니다.

이 사실을 부정하고 '청빈낙도', 늘 가난을 노래하며 칭송하다시피 하는 분들은 다음 성구를 유의하여 보시길 바랍니다.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넉넉히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넉넉하여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온정을 베푸는 사람들이 되게끔 이끌게나." (티모테A 6:17,18 사역)

아니..우리가 가난하면 이런 것을 할 수나 있습니까?
왜 성도가 넉넉해지고 풍요로워지겠다는 데 말이 많습니까?
재물 아닌 풍요의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넉넉히 누리게 하시고 선행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넉넉하여 나눠 주고 온정을 베풀 수 있게 되려면 넉넉하고 풍요로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런 기본 논리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성도가 풍요로워지겠다는 선하고 당연한 욕구를 획일주의적 깃발 아래 무조건 '기복주의'로 싸잡아  막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서글픈 일입니다.

그런 주장자들은 자신들이 가난해질 대로 가난해진 다음, 한 번 해외 선교사들을 도와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얼마나 도울 수 있는지..?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니, 진짜로 가난하여야 진짜 가난한 사람들을 진짜로 도울 수 있다" 입니까?
동양적인 청빈낙도 사상이나 어거지 어불성설은 성경 앞에서 '썰'을 삼가시길 바랍니다.
자신이 진정 먼저 찢어지고 째지는 가난을 원하는지부터 확인하시고 남을 비판 공격하셔도 늦지 않을 터입니다.

파울은 분명히, 명백히, 극명히..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셔서 누리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선행을 하고 선한 사업에 풍요롭게 나눠주길 즐기고 온정을 베푸는 신자들로 만들기를 원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자녀가 가난해지길 원하는 부모, 보셨나요?
자녀가 넉넉치 못한 데 맘 편한 부모가 있나요? 

저는 티엘티 모든 독자들이 파울의 위 교훈처럼 넉넉하고 풍요로워져서 하나님 왕국에 기여하길 바라며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려면 풍요에 관한 하나님 말씀들을 활용하십시오!
성경 말씀은 엄청난 풍요의 보고요 자산입니다. 
그 말씀들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백하고 선언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은 일을 이루고 성취하는 권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혀와 입술도 그렇습니다.
[이것을 소위 '도깨비 방망이'식, 뉴에이지 긍정철학과 가볍게 혼동하는 사람들의 말에 이젠 더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이젠 더, 절대반복(反福)주의, 반십일조주의에 귀도 기울이지 마십시오. 그런 주장과 발상들은 대형주의, 치부 정신에 대한 반사적인 획일주의적 반응일 뿐, 그런 주장 자체가 진리가 아닙니다.

문제는 벌어서 쌓아 놓고 제대로 쓰지 않는 치부와 졸부 신자, 졸부 대형주의 교회들일 뿐 풍요에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아닙니다. 사회주의는 최악의 적 크리스토인 '짐승'에 의한 세계강제통폐합을 원하는 자들의 기본바탕입니다.  

왜 우리가 풍요로워야 할까요?
우리 가운데 늘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끊임 없이 선행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미래에 자신을 위해 좋은 터를 쌓아 참 생명을 취하는 길입니다(19절).

요한복음서 10:10b 말씀처럼
티엘티 독자들의 삶이 모두 풍요롭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