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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슈/십일조론

복과 십일조는 그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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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이스라엘의 곳간 (베에르쉐바와 마사다) 

십일조 폐지론 내지 무용론은 컴퓨터가 발달한 20세기 말 구체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2000년대초 십일조가 가장 많던 미국에도 퍼져 현재 전체 미국 교회가 극소의 십일조를 받고 있거나 부분적으로 이젠 더 거의 십일조가 나오지 않는 교회도 있다. 미국의 십일조 무용론은 한국 교계에 영향을 줬지만 한국보다는 비교적 늦게 번진 것으로 사료된다. 

한국은 작은 나라이면서 매우 보수적인 전통을 지녀 왔지만, 주로 첨단 컴퓨터 문화가 급격히 고도로 발달한 이후 매우 진보적인 국가로 급변해 가고 있다. 한국의 훗날 세대는 이루 어림잡기 어려울 정도로 진보적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교계엔 일찌감치 2000년 전후 무렵 십일조 폐지론/무용론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아마도 작가 C 목사의 책일 듯. 안 그래도 기성 중대형교회의 재정적인 문제점과 추문이 드러나면서 십일조 무용론은 빠른 대세를 탔다. C 목사의 책을 읽어 보면 1990년대 후반부터 웹에 여기저기 나돌던 미국의 영문 자료들을 짜깁기 한 인상이 든다. 

한국교회는 일찍부터 성미(誠米)나 십일조 전통 등이 강했다. 6.25 당시 한국에 구호물자 다량은 미국교회의 십일조로부터 온 것.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제 '배 부른' 인상이 든다.
그래서 때맞춰 대두된 십일조 무용론이 흐름을 타고 기승을 부리면서 한국교회를 빠르게 오염시켜 가고 있다. 

십일조 무용론자들은 십일조를 과거의 것, 율법시대의 것으로 치부하는 것을 가장 강력한 무기로 삼는다.

그러나 수많은 한국 교인들이 모르거나 간과하는 사실 한 가지가 성경이 십일조를 과거형으로 기재한 게 아니라 정반대로 현재형으로 기재했다는 점.
십일조에 관한 가장 중요한 성구의 하나인 히브리서 7:8을 모든 영문 성경들이 현재형으로 기재하고 있다.
그러나 유독 한글성경만은 표준 새번역 성경을 제외한 모든 번역이 과거형 또는 과거사인 양 표기해 놓았다.

십일조의 현재성을 가리는 이 중요한 부분을 다시 숙고해 보자.

히브리서 기자는 4:14에서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큰 대사제(대제사장)가 계시니 승천하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라고 장엄선언을 하면서 이 하늘 대사제에 관한 긴 해설을 시작한다.

이 간략한 서론에서 기자는..

율법과 이스라엘 레비 사제 제도를 초월하는 하늘의 대 사제가 계시며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는 중보자이시고
가능한 온갖 유혹을 다 받으셨지만 죄를 짓지 않은 무죄무흠한 분이시며
따라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으러 시은좌(은혜의 보좌)
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고 말한다. 물론 그분이 바로 예수 크리스토이시다!

놀랍게도 이 하늘 대사제는 고대 아브라함 시대에 지상에 있던 멜키쩨뎈을 계승한 사제로 하나님께 임명받았다. 예수님이 고대인을 계승한 사제라면 놀랍지 않은가.
멜키쩨뎈은 불가사의한 신비의 존재다. 샬렘(=평화) 왕, 엘리온(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사제였고 이름도 멜키쩨뎈 즉 의의 왕이며,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사람이다. 게다가 부모도 족보도 없고 삶의 시작과 생명의 끝도 없어 성자님과 방불하여 늘 사제로 있는 사람이며 존귀한 사람이었다.
그 외엔 역사 속에 나타난 적이 없는 멜키쩨뎈은 오로지 아브라함을 복 빌기 위해 나타난 사람 같이 여겨진다. 게다가 그는 예수님의 족보상 선조인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었다. 

이 멜키쩨뎈의 정체가 과연 누군가에 관한 다양한 추정이 있어 왔으나 어떤 답변도 충분치 못하고 여전히 신비의 베일에 가려져 있다(히 5:11). 다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그를 계승한 대사제라는 것이다.
여기 어떤 의미가 있는가?

히브리서 6장에서 하나님의 복과 자기맹세에 관해 말한 기자는, 7:1-10에서 유난히 축복과 십일조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성경의 장/절 분류는 본래 없었다가 후대에 추가된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즉 하나님의 복과 그분의 전능성, 신실성에 근거한 자기맹세는 축복 행위와 및 십일조와 직결된다는 의미를 시사한 것. 이것은 결코 구약에서 그치지 않는다!

레비 족 사제들은 멜키쩨뎈보다 훨씬 후대인들이고 멜키쩨뎈과는 달리 아브라함의 후예들이지만, 그들에게도 축복권과 십일조 수령권이 주어져 활용했다.

여기서 우리가 유추할 있는 것 한 가지는..
만약 십일조가 현대에 무용지물이라면, 축복권과 축도, 축복 행위 역시도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즉 십일조가 폐지됐다면 축도과 축복도 폐지됐어야 한다는 것. 그러나 현대교회 일각에선 '십일조 무용론'을 드높이 외치고 실행하면서 목회자/사역자들의 축도/축복은 지속되고 있으니 일종의 넌센스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글은 축도나 축복을 철폐하자는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반대로 십일조를 회복하자는 것이다.

축복이 율법과 관계 없듯, 십일조 역시 율법과 근본적으로 무관했다. 초율법이라는 뜻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본 7:1-10에서 이 점을 극명하게 계시하고 있다.

그는 거듭거듭 십일조를 강조하면서(7회) 이 십일조의 결론 부분에서 십일조의 현재성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글성경 대다수는 이 부분의 현재형을 과거형으로 옮겨 놓고 있어 독자들을 혼동 속으로 몰아 넣고 있다.

8절에서 분명해 지는 것 몇 가지가 있다.

  1. 멜키쩨뎈은 과거의 사람인 동시에 현재의 사람이다. 그는 현존한다.
  2. 그의 사제직은 갈리지 않고 늘 지속된다.
  3. 그는 (유대계를 통해) 하늘에서 십일조를 받고 있다.  
  4. 그는 레비 지족의 사제제도가 끝난 이후에도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대대로 축복해 온 축복자(blesser)다.
  (5. 레비인들은 율법에 의해 축복권을 행사하고 십일조를 받았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다.
  1.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 영원히 한결같이 살아계신다.   
  2. 예수님은 부활/승천 후 멜키쩨뎈을 계승한 대사제로 하나님께 직접  임명 받으셨다.  
  3. 예수님은 한때 죽으셨으나 부활하여 현재까지 "살아계신다"(He lives!)는 증언을 받으신 분이니 당연히 현재 십일조를 받고 계신다!
  4. 예수님 역시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인 신약인들/기독교인들을 축복하시는 축복자이시다.
  5. 목회자는 독립 '사제'가 아니므로(온 성도가 사제들이다!) 다만 성도의  사역자/대표로서 전체 회중을 축복하고, 십일조를 적절히 성경적인 용도에 바로 사용해야 한다. 남용/전용해선 안 된다. 특히 목회자/사역자는 졸부가 돼선 안 된다!

재차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분명히 하나님의 복과, 복을 주시리라고 스스로 다짐(맹세)하신 그분의 신실한 언약/약속, 축복자의 축복은 모두 유관하다는 것. 그러므로 십일조와 복은 절대필수적인 상관 관계에 있다! 따라서 최후 대언자 말라키 3:10에서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다.  

[한 가지 유의할 일은 하나님은 복을 내신 분, 복을 직접 내리시는 분이시지, '축복자'(복을 비는 사람)가 아니시라는 사실. 축복이란 말은, 오직 자신보다 더 높은 분을 빙자하여 복을 비는 행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참고: 히브리 6:13b. 단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성자님이시므로 성도를 위해 성부님께 간구하고 복을 빌 수 있다. 이 점에 혼동이 없길 바란다.]

또 한 가지 유의할 것이 있다. 일부 신자들은 기복주의를 혐오하는 나머지 모든 복 개념을 좌시하고 시편 1편이나 마태복음 5장의 산상보훈 앞 부분을 신약인들의 복의 전형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것은 짧은 생각이요, 대단한 오해다!

만약 그렇게 본다면, 시1편이나 마태복음 5장 역시 시기적으로는 구약시대에 해당하는 교훈이며 따라서 유대인들을 주 대상으로 주어진 교훈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소위 '주기도'라 불리는 소위 '주님의 기도'(엄밀히 말해서 사도들의 기도모범이지, 주님의 기도가 아니다. 주님의 기도는 오히려 겥세마네 동산의 기도나 요한복음 17장이다. 왜 이 두 가지를 주님의 기도라고 부르지 않고 하필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모범만을 주기도로 부르냐는 것은 제도교회인 카톨맄과 생각 없이 그 뒤를 따른 개혁자들의 책임이다!)가 구약인들에게 주어진 기도모범이라는 사실과도 상통한다.

또 성경전체의 복관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목적물/대상(an object!) 즉 하나의 사물론적 복이지만, 시1편이나 5편은 인간 자체의 존재론적인(a subject!) 행복론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 점에서 성경의 모든 복관을 무시하고 단지 시1편과 산상보훈 앞부분만 강조하는 사람들은 솔직히 하나님으로으로부터 주어지는 대상으로서의 복을 현재 믿지 않거나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과도 같다.
존재론적인 행복자들도 복을 여전히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십일조 무용론자/폐지론자들이 상투적인 빌미로 삼는 것 한 가지가 신약에 십일조 언급이 적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성경 어디에도 십일조 무용론이나 십일조 폐지론을 시사한 구절이 단 하나라도 있는가?..없다!

십일조가 신약 성경에서 덜 강조된 듯 보이는 것은
1. 너무나 당연한 사실일 뿐더러
2. 율법적으로 강요하지 않고 자발적인 십일조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역시 십일조는 강요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할 일이며..그들을 위한 복의 언약은 초율법적으로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반 기복주의를 바탕으로 성경의 복관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복을 빌 자격이 없으며, 도대체 믿음으로 무엇을 믿는지, 어떤 기도의 응답을 바라는지조차 분명하지가 않다. 하나님께 복을 구하지 않겠다면, 단지 도덕적 완성? 돈 없는 선교? 복과 치유 등도 믿지 않는데 믿음만의 선교가 가능한가..?
역설적으로..자신들은 가장 영적인 수준이 높고,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사람이 가장 수준 낮은 사람이라면, 결국 믿음의 기초란 복을 구하고 받는 연습이 아니겠는가. 기초도 없이 단박에 높아질 수 있는 수준이 있다는 말인가?

상상은 자유지만 착각만은 모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