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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사복음서

[마19:24] 낙타와 바늘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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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냐 밧줄이냐, 바늘귀냐 '침공문'이냐?

   "내가 다시 자네들한테 말하네만, 낙타가 바늘귀(원문: 바늘구멍)로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쉬우이!"(마 19:24 사역)
  
 

김삼읽기힌트 : 외래어는 현행 한글 성경/맞춤법 보다는 원문에 더 가까운 나름의 표기방식을 따릅니다. 독자의 양해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부자의 구원/영생 문제에 관해 말씀하신 마태복음서 19:25, 마르쿠스복음 10:25, 루카복음 18:25 등은 모두 거의 같은 문장입니다.

그런데 교계 일각에서 낙타는 본래 '밧줄'이라야 더 걸맞고, 바늘귀는 '침공문'(針孔門)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어 왔습니다. 전자의 주장은 아람어에서 낙타 즉 '가믈라'(그리스어의 '카밀로스'에 해당)라는 낱말이 밧줄이라는 뜻도 있으니까, 문장의 어감 상 밧줄이 더 어울린다는 관점에서죠. 그런가 하면, 후자는 본래 예루샬렘에 침공문이라는 이름의 좁은 문이 있었다든지 광야에 낙타 한 마리도 어렵사리 통과하는 골짜기의 협곡이 있다는 의미에섭니다.  

그런 견해들을 한 번 따져 보기로 하지요.

중요한 것은..성경학자들이나 독자들의 느낌이 아니라 과연 예수님이 본래 어떤 의도로 말씀하셨나입니다. 


낙타 아닌 밧줄?

우선, '밧줄'이라는 견해는 상당히 일리가 있어 보이지요.

    1. 위 세 구절 모두 낙타(약대/camel)가 그리스어 원문에 '카멜로스'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 후기의 그리스 사본 몇 가지는 카멜론(대격/목적형) 대신 '카밀론'(밧줄/거룻줄: 배를 나루에 잡아 매어놓은)으로 돼 있습니다.

    2. 공교롭게도 아람어 성경 역본인 신약 '페쉬타'는 아람어 '가믈라'(굵은 밧줄)로 돼 있어, 이 역시 은근히 '밧줄' 쪽에 손을 들어줍니다. 그래서 아람어에서 번역한 성경인 '람사' 역을 비롯한 일부 소수의 번역들이 '밧줄' 설을 따르고 있습니다.

    3. 바늘 가는 데 실 간다는 말도 있듯, 상식적으로 낙타보다는 밧줄이 덜 우스꽝스럽고 더 조화되고 하모니를 이룬다는 느낌입니다. 게다가 낙타의 털실로 짠 밧줄이라는 주장까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밧줄' 쪽을 지지하는 가장 초기 사본들은 5세기 경의 아르메니아/조지아 사본(둘 다 번역판)들입니다. 대문자 사본(949년)도 있고, 비잔틴 전승의 소문자 사본들(13,59,124,130,437,472,543)도 있습니다. 대부분 서기 1000년으로 꺾인 뒤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설의 특징을 좀 살펴보면...

첫째로, '밧줄'이라고 된 번역판은 매우 희귀합니다. 무수한 원어학자들/성경학자들이 연구해 옮긴 대부분의 성경 번역들이 '낙타'로 돼 있습니다.
 
둘째로, 수많은 성경원문 사본들 중 극소수 사본만이 이 설을 뒷받침합니다.

셋째로, 그 사본들조차 퍽 후기의 것들입니다.

넷째로, 신약사본들이 희귀하던 중세 교회사 초기에 몇몇 '교부'들의 빈약한 추정들이 그런 설을 북돋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리게네스의 '카테나' 단편(마태 19:24), 알렉산드리아의 퀴릴로스(마 19:24 주석 '파트릴로기아 그레카'(=그리스 교부 문서) 72.429D), 테오퓔랔투스(마 19장. '파트릴로기아 그레카' 123.356D) 등이 그것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서 윗 구절에서 '더 쉽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낱말 '유코포테로스'의 원형 '유코포스'는 우선적으로 "가벼운 수고로도"라는 뜻입니다. 분명히 어떤 산 존재를 뜻합니다. 즉 밧줄 같은 무생물엔 영 걸맞지 않는 뉘앙스의 낱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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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귀 아닌 침공문?

이제 크게 두 번 째로..윗 구절 후반부의 바늘귀 대신 주장돼 온 '침공문'설을 생각해 보렵니다.

이것은 고대 예루샬렘에 '바늘귀'(=바늘구멍)란 이름의 작은 문이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그 문으로는 낙타가 지나가려면 짐을 다 내리고도 구부정하게 구부려야, 심지어 무릎을 꿇어야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통과하기 어려운 문이었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광야의 협곡에 낙타 한 마리도 통행하기에도 비좁은 지점이 있었다는 말과도 통합니다. 

역시 그럴 듯한 주장이지요. 이 학설은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주장합니다. 또한 외경의 하나인 소위 '페트로 복음서'에 따르면, 페트로가 하나님께 그런 권능이 있으심을 보여 주려고 어떤 '대문'을 초자연적으로 확장시켰다는 다소 황당한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문이나 그 정도의 협곡이 있었는지, 또 예수님이 딱히 그 곳을 짚어 말씀하셨는지는 역사적으로 전혀 입증되지 않고 있습니다!  


과도한 과장법?

위 두 가지 설에 대한, 매우 중요한 반증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원 의도와도 간접 연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 유대의 라삐 문서(rabbinics)에 이와 유사한 전통적인 과장법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바빌론 포로기 때 형성된 것으로 알려진 유대 외전의 하나-바빌론 탈무드 '바바 메찌아'(중간대문이란 뜻)에 다음 구절이 나오지요.

    라삐 쉐슅이 라삐 아므람에게 말합니다: "아마도 님은 '폼베디타'(현 이라크에 있던 고대 바빌론의 도시. 한 유대인 학파의 본거지)파의 한 분이신가 봅니다. 코끼리를 이끌어 바늘귀로 통과시킬 수 있다는."
불가능을 뜻하지요!

그밖에도 같은 문서의 38b에도 "코끼리를 바늘귀로 통과시킬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이 있습니다. 같은 문서 '베라코트' 55b에도 "그들은 한 사람에게도 황금 종려나무, 바늘귀로 통과하는 코끼리를 보여 주지 않는다"란 구절도 있습니다.

비슷한 과장법이 폭 넓게 유포돼 있다는 얘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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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에는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다섯 마리 코끼리를 한 쪽 팔 아래 숨기는 게 더 쉬울 것이다."


로마 시대엔 이런 속담이 있었습니다.

    "한 마리 메뚜기가 코끼리를 낳는 게 더 쉬울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 얼토당토 않은 코끼리 비유보다는 예수님의 낙타 비유가 오히려 훨씬 덜 과장돼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단지 문맥 상의 조화를 위해 '밧줄' 설을 끝내 고집한다면, 예수님은 우스꽝스런 과장이나 유머 감각이 전혀 없으셔야 한다는 강압적인 의도도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다양한 말씀에서, 분명히 그분에게도 과장법도 유머 감각도 있으셨음을 우리는 느낍니다.
다음을 보십시오.

    "눈먼 이끔이들, 그대들은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구나!"(마태 23:24)

사람이 낙타를 통째로 삼키다(!)니..이것은 과장법이 아니던가요? 또 은근히 신랄하고도 유머스럽지 않나요? 따라서 맨 처음 전술한 낙타-바늘 은유와 이 낙타 은유와는 거의 전혀 모순된다거나 불균형을 이루지 않습니다.


주님의 원 의도

이제 끝으로..우리는 다시 한 번 위 말씀에서 예수님의 본래 의도를 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선, 부자의 자기노력으로 천국 입국이 불가능함을 이 과장법으로써 극단적으로 표현하십니다. 좀 더 보편적으로..사람으로서는-사람의 행위로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마 19:26A).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뤄짐을 반증하고 계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서는 불가능도 가능해짐을 곁들여 강조하십니다(마 19:26b, 창 18:1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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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마술사들은 낙타를 '액화'해 바늘귀로 통과시키는 것을 보여 준다고 합니다. 저 유명한 동화/영화-'윌리 원카의 초컬맅 공장'은 통통한 말썽꾸러기 어린이를 전자 원심분리기 비슷한 기계에다 넣고 초컬맅 재료처럼 순식간에 '분해'시켰다가 재생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불필요한 우화적 기적보다는..
실제로, 예리코의 자캐우스(뤀 19:1-10), 아리마테의 요셒(마 27:57)과 같은 거부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하셨습니다. 또 행전에 나타난 초기교회 시대에도 그런 부자들이 있었습니다(행 4:34, ).

하지만..젊은 관원/율법사/부자는 슬기에 있어 영생의 비결에 근접했고 예수님이 제자의 한 명으로 초청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가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고 따르라는 한 마디에 낙담해 슬피 돌아갔습니다. 즉..그는 그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간곡한 권고로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불가능한 '낙타'였던 셈입니다!
고기잡이 배와 부친까지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던 일부 제자들과는 무척 대조적인 모습이지요.

그 젊은 관원/재벌은 왜 영생을 얻는 데 실패했을까요? 재물의 신 맘몬을 숭상한 탓이지요. 맘몬 신을 끝까지 놓치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보다는 맘몬 신을 선택한 것입니다. 역시 선택이 극히 중요해지는 대목입니다.

주님이 이 점에 대해 참으로 적절한 경구를 주셨습니다.

    "아무라도 두 주인을 섬길 순 없소. 한 쪽을 미워하고 다른 한 쪽을 사랑하든지 한 쪽을 소중히 여기고 다른 한 쪽을 무시하게 되오. 그대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가 없소!" (마 6:24 참고: 뤀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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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한 부자는 자신을 위해선 축재(蓄財)를 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는 풍요롭지 못한 사람이었지요(뤀 12:21).
 
성경은 거듭거듭 부자가 구원받기 어렵다는 말씀들을 합니다. 또 부자가 되려는 탐욕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팀A=딤전 6:9).
그런 한편,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을 잘 섬기는 (졸부 아닌) 거부도 있었음을 밝혀 줍니다.


그럼 도대체 우리더러 어떡하라는 말일까요..?
우리는 먼저 가난이 모든 성도를 위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라는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모두가 모자람과 결핍이 아닌 풍요를 누리길 바라시는 것이지요. "주/야웨님은 나의 목자. 나, 아무런 부족함도 없네!"란 다뷔드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광 가운데 풍요를 따라 우리의 모든 것을 채우시는 예호봐 이레-늘 마련해 주시고 예비해 주시는 위대한 공급자이십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복이 예수 크리스토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 모두가 거부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 중 남달리 큰 재물을 일종의 은사로서 누릴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거듭나기도 했으려니와 맘의 폭도 넓어 복음을 위해 성도와 함께 늘 나눠 주길 즐기고 좋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지요. 드물지만 우리 주변에 그런 선한 부자들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선 목적을 내세우면서 속으로는 지구촌 정복을 뀌하는 세상 비밀집단에 연계됐기에 자선가 생색이나 내고 나라의 면세혜택이나 누리고 이름과 '자선기금'을 내 놓는 거부 명사들을 의로운 크리스천 부호들과 혼동하면 안됩니다.  

그리고 베스트셀러나 '줄줄이 집회'로 졸지에 돈방석에 앉은 교계 명사들, 헌금을 받아 챙겨 수백만불 짜리 호화주택에 살면서 호화 자동차를 굴리는 텔리밴젤리스트들은 정말 천국에 갈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그렇게 사는 걸 알면서도 계속 헌금을 퍼 부어 주는 교인들도 문제고)!    

우리는 다뷔드 시대의 바르찔래(슈무엘B=삼하 17:27-29, 19:31,32, 왕들B=왕하 2:7, 에즈라 2:61, 네헤미야 7:3) 같은 슬기로운 부자가 될지언정, 다뷔드를 냉대한 (아비가일의 전남편) 나발(슘B 25:2, 5-13, 18-34), 어리석은 졸부의 비유(뤀 12:16-21)처럼, 또는 맨날 잔치하면서 라자로에겐 찌꺼기나 먹이던 부자(뤀 16:19-31)처럼 미련한 거부는 되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