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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바울서신

[갈 1:6-12] 누구의 환심을 사려는가?

바탕본문: 갈라티아 1'6-12
핵심구절:

   지금 내가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신임입니까? 아직도 내가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 한다면, 나는 크리스토님의 종이 아닐 터입니다.                                     -신약성경 갈라티아서 1'10 (사역)

 

사람들이 진리를 따르려고, 또는 그럴 생각을 먼저 하려고 하기보다는.. 파워와 명사를 주로 좇는/따르는 사회적 현상은 슬픈 일입니다.
이건 바람직한 교회적 현상이 아니지요. 사회병리적 현상입니다. 
물론 예로부터 있어 왔기에, 눈과 귀에 익은 현상이죠만.

그런 명사에게 뭔가 흠모할 만한 요소가 있으면. 그것을 최대화하여 이른 바 '롤 모델'로 삼곤 합니다.
그런 명사적 요소만 있으면, 사람들은 그 명사의 본질이나 인격이야 어떻든 별로 상관치도 않습니다.

그런데..지금 독자와 나는 어떤가요?
우리는 혹, 지금 어떤 명사나 그 파워를 성경 진리보다 중시하지는 않습니까?
또 전통이라는 미명 아래 치우친 관례나 인습을 더 중시하는 건 아닌가요?


오래 전, 신약 초기 교회 시절의 갈라티아 교우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들은 교계 명사들의 "그 잘난 맛" 때문에 명사 치레를 하고 있었습니다.
코린토(고린도) 교인들도 비슷한 성향을 보여, 파울에게 꾸지람을 호되게 들었습니다만.
과연 그들이 얼마나 고치고 개선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교계에 가장 흔한 것 한 가지가 소위 "위대한" 사람, 위치나 업적, 저서 때문에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거나 외부 조건 따위가 탁월하여 모습이 두드러지는 교계 인사들에게 희망을 걸고 "매달리는" 현상입니다.
행여 그에게서 '뭔가'가 나오지 않을까,
얻어지지 않을까,
바라보고 읽고 경청하다 보면,
약간의 콩고물이라도 내게 떨어지지 않을까..식입니다.    

갈라티아 교우들도 그랬습니다.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죠. 그래서 파울이 꾸짖었고요.
그런데 현대 교회는 갈라티아 교회의 이런 부정적 면모를 오히려 더 본 받는 것인지요..?
거울 삼아 고치거나 개선할 생각은 않고.


하나님 아닌 사람을 더 존중하여 바라보거나 의존할 때 어떤 결과가 옵니까?

그 사람의 주장은 무엇이나 옳다고 받아 들이기가 쉽고, 결국은 사도들이 경고한 "딴 복음"을 수용하게 되기가 쉽죠. 
드문 일이 아니라 다반사입니다.
교회서 자주, 그리고 지금도 흔히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파울은 갈라티아 교우들에게 "크리스토의 은총으로써 여러분을 부르신 그 분을 그렇게도 빨리, 손쉽게 저버리고, 딴 복음을 따르는 것에 놀라 마지 않습니다"고 개탄합니다. 
현대교인들에게도 파울은 똑같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을 터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존중해 마지 않는 교계 명사가 속에/뒤에 딴 복음을 감출 수 있을 잠재적 위험 요소와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쇼핑을 하고 상품을 살 때, 속 빈 강정 같은 물건을 잘못 골라 살 때가 많습니다. 포장은 아주 그럴 듯 한데, 알맹이가 썩 좋지 못한 경우이죠. 상품 포장을 열어 보고는 비로소 속았다는 생각에 뒤늦게 깨달아 후회하고, 두 번 다시는 겉포장에 속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두곤 합니다.

그런데..물건 뿐 아니라 사람 역시 그럴 수 있는 대상이라고는, 좀체 생각하지 않는 악성향이 우리에게 있지요. 
아니, 물건보다는 오히려 사람에게 속아 피해를 보는 경우가 더 흔해져 가지요.
특히 교계일수록 그럴 빈도가 더 높습니다.
그들의 이미지와 메시지가 같지 않고 서로 다른 경우이죠.

하지만 신기하게도, 교계 지도자와 교인들은 겉과 속이 다른 물건은 탓할 줄 알면서, 겉과 속이 다른 인사들에 대해선 관대합니다. 심지어 잘못이 드러나도 웬만큼은, "뭐, 사람이니 그럴 수 있지. 저러다 곧 고치겠지"하고 점수를 추가로 더 줍니다! 그러니 명성과 위대한 조건을 갖춘 인사들은 더욱 관용을 누리고 힘을 더 얻고, 더욱 더 교계와 교회, 교인들에게 파고 들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위험한 현상이죠? 안 그런가요?

대표적인 사회악의 하나인 빈익빈 부익부라는 말처럼, 명성을 가진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이름도 빛도 없이 겸허하고 가난하게 섬기는 사람들은 더욱 더 빈약해지고, 이왕 이름을 날려 온 인사들은 더욱 명사로 뜬다는 말이죠.
잘난 사람은 볼수록 더욱 더 잘나 보이고, 못난 사람들은 더욱 못나 뵌다는 겁니다.
그것이 세상과 교계에 공통점이 되어 갑니다.

이것이 선일까요, 악일까요?
후자이기가 더 쉽지요.
그래서 외모와 겉모습, 조건만 갖고 차별하는 교회가 되어갑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참 교회보다는 세상을 더 닮아가지요. 나날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한 순간도 선택을 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지요. 특정 시각에 머리 속에서 어떤 생각을 하느냐도 선택의 대상입니다. 동식물마저도 본능에 의하여 선택하는 감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잘못 선택한 시행착오는 수정하고 바로잡아 나가게 됩니다.

그러나..교계 사람들은 아주 잘못된 선택의 악성 패턴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선택을 잘못 했는데도, 그것을 발견하고도 고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분명히 성경과 비교해 볼 때, 딴 복음을 가진, 잘못되고 그릇된 명사들인데도,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라는 허울 좋은 명목 아래, 되도록 잘 봐 주고 덮어 주고 관용해 주고 계속 받든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파울이 살아 있다면, "여러분을 보고..정말 놀라마지 않습니다"라고 할 터입니다.


사람들이 왜 명사들을 좋아할까요? 왜 반해서 따를까요?

그 이유는 한 가지 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눈과 귀에게 더 잘 보이려고 온갖 수단과 술수를 쓰기 때문입니다.
인기와 점수를 따려고 심리적 계산을 하고, 머리를 짜내는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눈귀와 마음에 들려고, 사람들의 감관에 맞추려고, 하늘이 아닌 거기에다 초점을 두고 정성을 들이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더욱 더 말씨와 목청과 제스처와 외모에 신경을 쓰고,
고도의 심리기법을 활용해서.. 
예기했던 대로의 좋은 결과가 나오면, 옳거니 하고 더욱 그 쪽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마치 현대 연예인들이나 여성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면서 자기만족도 추구하려고 성형수술이나 근육운동 등으로 끝없이 계속 갈고 다듬기, 꾸미기를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진리에 귀착하기란, 정말 쉽지 않지요.
인기와 명성은 얻어도 진리는 희생시키리라는 것은 정말 당연지사이고, 자연 귀결입니다.
너무나 뻔~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보듯, 갈라티아 교우들에게처럼 현대인에게도 파울이 묻고 있는 게 아닙니까?

   "지금 내가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신임입니까?.."

여기서 환심/신임 사기를 뜻하는 원어 낱말인 '페이토'(믿어 주다)나, 후반절의 '호감 사기'에 쓰인 '아레스케인'이나 비슷한 의미로 쓰였습니다.  

사람의 환심을 사지 않으려고 굳이 애쓸 필요는 없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늘 하나님의 신임부터 사려고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정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의 언제나 그 거꾸로를 합니다.
사람의 환심부터 얻으려 든다는 것입니다.
아니, 사람의 환심/신임만 얻고나면 그걸로 끝!이기가 십상이지요.

하나님은 날 너무나 잘 아시고, 그래서 늘 나를 믿어 주시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지요.
오히려 역으로, 그 분이 우리를 너무나 아시는 만큼, 우리가 먼저 그 분을 바라보고 신뢰하기를 바라시죠. 그 분을 정말 신뢰하려는 사람들은 그 분에게서 먼저 인정을 받고 그 분의 호감을 사려 들기 마련이죠.


전에 제가 "질문 모범생"이라고 했던 다빋(다윗)이 그랬지요.
그는 그 어느 사람보다 하나님의 신임과 총애를 사기 원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앞서 하나님의 뜻을 여쭙던 사람입니다.

포로기 초기 시절 바벨론으로 잡혀갔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얼굴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먼저 하나님 얼굴을 구하고, 그 분 앞에 바로 서길 바랐습니다.

그랬더니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절로 책임져 주셨습니다.
이것이 참 경건이죠.


우리는 하나님과 그 분의 복음 앞에 두려워야 합니다.
그 복음을 듣거나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위 바탕본문에서 파울이 그런 태도를 보여 줍니다.

자, 파울은 자신이 어떤 경우에 크리스토님의 종이 "아니다"고 합니까?
다시 읽어 볼까요?

    "..아직도 내가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고 든다면, 나는 크리스토님의 종이 아닐 터입니다."

복음 문제에 있어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고 든다면 자신이 예수님의 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 봅시다.
교계의 존중을 받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글발' 좋고 '말발' 좋고, 외양이 화려하여 '조명발'까지 좋은 내노라는 저자, 내노라는 명사들이 있습니다.
외적으로나 조건 면에서 정말 교인들이 저절로 바라보고 존경할 만한 스타일이고 타잎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관건은..과연 정말 그가 하나님의 신임을 받으려고 얼마나 애쓰고 하나님의 호감과 은총을 얻으려고 애쓰냐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발이나 글발이나 조명발이 아니라..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연계된 뿌리로 알 수 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비진리에 뿌리를 박고 있지를 않습니다.

본 필자가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독자나 저나 같은 성도로서 하나님 앞에 양심을 따라 말한다면, 우리는 누구나 과연 하나님의 신임과 호감부터 사려고 하는지, 그것을 만족하는지 사람의 신임과 호감을 사려고 먼저 애를 쓰는지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복음을 전하는 지도적 위치에 선 사람은 그렇습니다.
만약 파울과 같은 태도가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비진리를 사랑하거나 증언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모르고 그랬다면, 즉각 고치고 비진리에서 떠나는 것이 옳습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
크리스토님은 진리이시며,
성령님은 그 분을 증언하시는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의 신임과 호감을 사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을 조심합시다.
화려한 언변과 그럴 듯한 글을 믿지 말고, 열매로 사람들을 가려 분별합시다.

만약 그가, 복음과 진리 문제에 있어, 사람의 신임과 호감을 사려고 애를 쓴다면..
파울에 따르면,
그는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