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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바울서신

[딤후 3:14-17] 우려되는 한국 미래와 성경의 해답


바탕본문: 신약성경 티모테B서(딤후) 3'14-17

 

오늘은 주변 얘기부터 좀 할까 합니다.


한반도는 서해안을 중심한 거의 전체가 6월 25일부터 밤새 태풍권에 돌입했습니다.
26일 새벽까지 심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또 26일 중 북상한답니다.

소나기가 뿌리고, 나무들은 춤추고, 그 가지들은 기이한 소리로 노래했습니다.
바다는 격랑이 일었습니다.

그나마 어둔 밤에 주로 그래서 다행입니다.
아침엔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곳곳의 피해가 심합니다.

한국 전쟁 61주년을 기념하는 시즌이기도 합니다.
정부가 주관하는 기념식도 빗속에서 진행됐습니다.
유엔군 참전국 베테란(참전용사)들과 외교사절도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한국은 지금 심각한 문화 태풍과 격랑 속에 미래적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캄캄한 어둠과 안개 속에서 앞이 보이질 않습니다.

어린 자녀들이 학교 교사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겁니다.
군대에 가면, 강한 권위와 결속 중심의 단체 생활이니 울며 겨자 먹기라 해도 어쩔 수 없이 상관의 말을 듣지만, 그래도 잦은 사고와 비리로 불안한데..
요즘의 학교는 스승을 우습게 보는 아이들 탓에 한국 미래 교육이 '총체적' 위기를 맞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국의 미래는 한국의 현재 교육에 달려 있습니다.

이즈음 중고등학교 교육전선은 핸드폰(셀폰)이 다스리고 있답니다. 
아이들은 첨단 전자기기를 그 무엇보다 더 신임하고 사랑합니다. 아이들은, 목줄기를 노리는 칼날처럼 교사들의 일거일동, 일거수일투족을 지켜 보면서 조금도 자신이나 동료들에게 불리해지면 핸드폰 '직찍'으로 교사의 행동을 외부에 공개하면서 기승을 부린답니다. 교사가 약간의 매라도 들면, '폭력교사', '횡포 교사'라 낙인 찍힌답니다.
심지어 남학생들은 기회를 노려 여교사의 치마 아래를 찍어 인터넽 영상으로 올리는 등 사실상 스승 성희롱 및 성추행을 하고 있는 실정이랍니다.

이러니 선생님들이 어디 학교 와서 가르칠 맛이나 나겠습니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밥줄만 붙들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아이들이 부모를 제대로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순종하리라곤 정말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목하 한국교육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아이들 자신만의 탓은 아닙니다. 아이들의 현실은 기성세대의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잘못이 아이들의 잘못으로 전수됩니다.


한국은 세계 제1 수준의 IT 산업, 첨단 문화 혁명에 몰두해 왔습니다. 세계가 찬탄하는 기막힌 '물건'들이 줄곧 이 작은 나라에서 쏟아져 나옵니다. 
산업..여기에만 한국의 현재와 미래가 모두 달린 양 한국의 목숨이 걸린 양, 그렇게 달려 왔습니다. 그 결과 그 어느 나라보다 대중교통 속에 핸드폰과 고성능 전자기기로 넘실댑니다. 아주 어린아이들부터 노인들까지 핸드폰 없이 못 사는 곳이 한국입니다.

그뿐인가요? 한국은 온통, 눈과 귀로 즐기는 온갖 향락문화에 젖어 있습니다. 사회가 온통 잘난 사람들..아니 잘 다듬고 깎인 얼굴과 몸의 무슨 '-짱들' 중심으로 굴러가는 게 한국 정세라고 해도 그다지 과언이 아닐 정도로.

첨단 전자문화로 지구촌을 앞서가는 나라요, 텔레비전과 IT산업이 발달하다 보니..이젠 연예인들이 해외로 '수출'되어 온 세계에 한류 열풍을 일으키는 "놀랄 놀 자" 시대가 됐습니다. 옳든 그르든, 좋든 나쁘든 온 세계가 한국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삶의 가치가 직관과 시청각으로 좌우됩니다. 
그러다 보니 교육도 도덕이 아닌 첨단산업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언론 보도만 의존해 본다면, 한국은 교육도덕이 거의 사라져 가는 듯 합니다.


이러니 크리스천 부모들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못된 아이"들의 배경 가운데 혹 기독교권/교회권 가정은 없을까요..? 필시 있을 겁니다. 누구네 누구네, 연예인 연쇄 자살 사건이나 정계나 일반 사회의 추문사건에서 번번히 기독교 배경이 들먹여졌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적어도 이에 대한 해답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성경은 아직도 모든 문제에 대한 영원한 해답입니다!
물론 '안티'들은 "무슨 개뿔?! 성경을 지키지도 못하는 주제에.." 할지 모르죠.

물론 저를 비롯한 기성세대가 성경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 중대한 문제요 과오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생은 정도의 차이 뿐 어차피 불가능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너나 나나 누굴 탓할 것 없이 기본적으로 다 도토리 키 재기 식 죄인들이라는 거죠.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들 가운데도 특출난 의인들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드뭅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가치 판단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안 되네~" 딱지와 절망 쪽만 바라와야 합니까?

사실 맞는 말이죠. 우리는 안됩니다! 우리 자신으로서는 안됩니다. 안되게 돼 있습니다. 잘된다면 사실 거짓말입니다. 잘되는 듯 보여도 허상이기가 더 쉽습니다. 교육도 부모 맘대로, 교사 뜻대로 되질 않습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나 자신만 해도 오늘의 내가 나 된 모습이, 우리 부모가 자신들의 힘으로 성공적인 교육을 한 결과라고 믿지를 않습니다. 물론 우리 부모는 나보다 훨씬 나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안되네"에 대하여, 성경은 "되네"라고 답합니다. 성경은 언제나 "이렇게 하면 되네"라는 표지판으로서, 인생의 길목에 서 있습니다. 문제는 그 표지판을 돌아볼 여유가 우리에게 있느냐 입니다. 저마다 제 뜻대로, 제 힘대로 고속도로를 질주하느라 그 표지판을 지나치거나 빤히 바라보면서도 우습게 여긴다는 데 있지요. 당장 급한 일, 발등에 불 끄기 식으로 살아가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답입니다.
바로 그것을 신앙 선조들, 선진들이 입증했습니다.


예를 들까요?

교육이 성공한 예를 파울(바울) 당시 젊은 세대였던 청년 티모테(디모데)의 경우에서 발견합니다.
티모테가 십대를 어떻게 살았나요? 

가정 배경을 보면, 그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혼혈아였습니다. 그리스인 아버지와 유대계 어머니를 두었습니다. 그러니 사회의 멸시와 질시가 오죽했겠습니까. 어쩌면 티모테는 어릴 적부터 바깥에만 나갔다 하면 유대계와 그리스계 양쪽에서 손가락질과 욕질을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찌 보면, 자칫 상처만 받고 자랐을 잠재적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해가 잘 안 가서, "설마.. 어찌 그리..?" 하는 독자는, 오늘날 이스라엘의 유대인 사회를 방문해 보면 실감할 수 있을 터입니다. 유대인 다수는 자기네 동네를 찾은 외국인들을 마치 '개'처럼 거의 절대적으로 혐오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크리스천에 대한 그들의 혐오는 대단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돌을 집어들기도 합니다. 구약시대/율법시대가 이천년전에 끝났는데도. 아직도 그들은 선민의식과 자기의(自己義)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뭐, 아무러나..
성경은 티모테의 이방인 아버지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유니케와 외할머니 로이스 등 그의 모계는 훌륭한 신앙 가정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티모테가 어릴 적부터 꿋꿋이 믿음으로 자랐습니다. 더할 나위 없는 신앙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신앙 훈련과 외조모 로이스의 기도와 훈육, 돌봄과 사랑 가운데 지냈습니다. 어머니 유니케는 어린 티모테에게 날마다 성경 말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영혼 중심의 참되고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았습니다.

티모테는 그래서, 이런 사랑의 보호막 속에서 말씀을 먹으며 무럭무럭 자라갔습니다. 파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일찍부터 모든 구약 성경을 통달하여, 성경에 능통하고 능숙했습니다.

말하자면, 성경과 어머니/외조모의 사랑, 이것이 어린 티모테로 하여금 하나님과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자신의 평생 삶을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게 된 첩경이었습니다. 그의 육의 아버지는 신앙인인지 알 수조차 없는 이방인이었습니다만, 티모테는 일찍이 하나님을 참 아버지로 받들어 모셨습니다.

어린 티모테는 그래서, 사회의 천대와 질시, 눈총에 좌우되어, 거기 압도 당하여 기가 죽어 지내는 청년으로 자라지 않았습니다.
세상과 마귀를 이기는 떳떳한 존재로 자랐습니다!
세상이 감당 못할 대상이 된 것입니다!

더욱이 그가 청년이 되면서 사도 파울을 만나게 됩니다.
어머니 유니케가 파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젊은 티모테의 앞날도 의탁한 모양입니다.
티모테도 파울을 통해 크리스토님의 복음에 접했습니다.
티모테는 파울을 통하여, 성경 말씀과 복음이 자신을 능히 구원하고 앞날을 모두 의탁할 바탕이라고 믿게 됩니다.  

파울은 티모테를 너무나 기특하고 귀하게 생각한 나머지, 자신의 믿음의 아들로 삼습니다.
사실 파울은 티모테를 친자식과 다름 없이, 아니 여느 친아들보다 더 사랑했음을 우리는 그의 여러 편지에서 번번히 느낍니다.
물론, 파울 자신 청년 시절에 일찍이 주님께 부름 받아 헌신하여, 평생을 홀몸인 총각으로 살며 선교사역을 했습니다만.

이런 과정을 통해 티모테도 파울 못지 않은 초기 교회의 일꾼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는 교회가 자랑할 만한 훌륭한 일꾼으로 믿음의 아버지, 파울의 뒤를 잇습니다. 파울은 선교사역으로 바쁠 때만 아니라 조만간의 죽음을 앞둔 가장 외롭고 쓸쓸한 때에 주님은 물론 아들 티모테에게 의탁하고 의존할 수 있었습니다(티모테B서=딤후 4장 참조 ). 그 얼마나 큰 위로였겠습니까! 


우리는 젊은 티모테에게서 교회의 미래를 봅니다.
약 이천년전 교회의 멀고 창창한 대망의 미래의 일부가 티모테를 통해 펼쳐져 갔습니다.
티모테는 초기 교회의 미래의 큰 몫의 일부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미래도, 우리 자녀의 미래도, 우리 교회의 미래도 티모테에 비춰 보며, 티모테의 훈육 배경을 거울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독자의 가정을 비롯한 신앙 가정의 미래도, 티모테와 같은 훈육의 바탕에서야 진정 안심되고 믿음직한 미래로 바라 볼 수 있습니다.

[ 만약 독자가 크리스천이 아니라면, 예수님을 마음으로 모시고 입으로 그분을 구주/주인/주님으로 고백하는 비교적 짧은 과정을 통하여 크리스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님도 올바른 미래의 '방주(方舟)'에 편승할 수 있습니다. ]

 
미래교육은 현재의 완전한 조건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런 이상은 꿈에 불과할 뿐입니다.
어느 누구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티모테는 부모중 '나머지 절반'으로부터 제대로 훈육받았습니다.
편모 가정과 다를 바 없는 세상 표준의 "불완전한" 가정 배경임에도 그는 충분 이상의 훈육을 받고 남 부럽지 않은, 아니 훨씬 더 나은(!) 영적인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현대의 첨단문화가 '완전충분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잘 다듬고 깎아 만든 얼짱과 몸짱이 미래교육은 아닙니다.


오직 유일한 진리의 말씀, 성경으로 훈육받는 데 우리의 진정한 성공적 미래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모두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참되시니, 그분의 말씀도 참됩니다.


오늘날 교육의 참된 해답은 티모테의 케이스에서 발견됩니다.

 

티엘티 가정들은 모래가 아닌 탄탄한 바위 위의 집처럼
진리 위에 굳게 서
흔들림 없이 주님 앞에 서게 되길 축복합니다.
주 예수 크리스토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