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묵상연구/바울서신

[갈 2:10] 가난한 사람들 기억하기


바탕본문: 갈라티아서 2'10
 

 "한 가지, 그들이 우리에게 바란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인데, 바로 내가 힘써 해온 것이기도 합니다." (갈 2'10 사역)


오늘날 범사에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가난에 찌들린 생활인도 많습니다. 
우리가 길거리나 장터나 전철 역 등에 나가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상황입니다. 

최근 뉴스에 따르면, 지난 몇 년 간 경제난의 여파로 현재 미국인들의 약 절반이 웰페어(복지혜택) 등 정부의 도움을 받아 살아간다고 합니다. 이것은 시대가 갈수록 세상이 점점 풍요로워지기보다 시대에 따라 넉넉할 수도, 가난할 수도 있는데, 결국 세상엔 부자와 빈자가 늘 공존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늘 그대들과 함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풍요로운 사람들이 내일과 미래가 늘 풍요롭다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늘 중요한 진리 하나는 가난한 사람들 기억하기가 사랑의 한 표현이고 그 실천의 한 본보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세 가지 종류의 바침/드림(giving)-십일조/헌금/연보-을 말씀하시면서 그 상당량을 빈민들에게 배려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 바침은, 우선 십일조는 소득에서 정해진 분량이고, 헌금은 자원하는 심정으로 바치기, 연보는 의무적이었으나 불특정 분량이었습니다.   

이 전통은 신약 시대에도 율법성을 빼 놓고는 맥맥히 이어져 내려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갈라티아 2장 앞 부분에서 사도 파울(바울)은 유대인들을 위한 예루샬렘의 유명 사도들의 사역과 이방인들을 위한 후기 사도들의 사역 성격을 구분하면서, 그 정리 부분에서 거의 갑작스럽게 가난한 사람들 기억하기를 말합니다. 

이것은 파울/바르나바스(바나바)/티투스(디도)를 비롯한 이방인 선교사들이 예루샬렘의 야코보/케파(게바 곧 쉬몬 페트로)/요한 등 초기 사도들과 만나 사랑의 대화와 친교의 악수를 나누면서, 그들로부터 부탁받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기억하기는 그만큼 중요한 사역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와 예루샬렘 지역은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고, 따라서 빈민 구호는 예루샬렘 교회의 주요 사역의 하나였습니다(행전 2'43-47; 4'32-37, 6'1). 
이에 비해 소아시아와 유렆(로마/그리스/마케도니아) 등의 이방인 교회들은 당대의 강국 등에 살면서 폭 넓은 무역 등을 통해 비교적 풍요로운 지역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교우들이 다 풍요로웠던 것은 아니며 그들 다수는 역시 가난했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 기억하기란, 더 쉬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파울은 이것을 앞서 몸소 행해온 것이라고 밝힙니다. 

사실 파울은 자신이 선교하고 세운 모든 교회를 상대로, 가난한 사람들 기억하기를 강조했습니다. 그 모든 교회들이 예외 없이 파울의 말에 순종하여 넘치는 연보(구호금)를 했고, 이것은 때때로 거액의 연보를 파울과 동역자들이 고국의 예루샬렘교회로 가져다 가난한 유대인 성도들을 돕는 사랑 실천이 되곤 했습니다. 

이것은 파울이 과거 율법학도로서 구약 성경을 철저히 연구하면서, 구약 성경에 이미 나타났고 예수님께서 몸소 강조하신 빈민사랑 정신을 배워오다 거듭나면서 성령님의 조명과 권능으로 더욱 깊이 가다듬고 이해한 사안이었습니다. 
 
구약을 보면, 대언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늘 가난한 사람들 기억하기를 강조했습니다(예샤야후서=이사야서 58'6-8, 이르미야서=예렘 22'16, 아모스서 2'6,7 다니엘서 4'27). 시편 기자도 그랬습니다(시 41'1; 112'9).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그러기를 가르치셨지요(마태복음서 6'1-7; 25'31-46, 루카복음=눅 6'36; 7'38; 12'33, 행전 20'35, 요한 12'6; 13'29, 갈라티아 6'2).

그러므로 사도들이 신약시대/교회시대에 이를 강조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파울이 특히 이 일에 앞장섰던 것은, 할례를 강조하는 유대인들과 무할례의 이방인들 사이의 격차를 좁혀 한 교회, 한 성령님 안에서 하나되는 사랑을 고무시키는 데 가난한 사람들 기억하기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신이 율법주의 유대교인이었던 파울이 복음주의자로 거듭난 뒤 유대교 율법주의에 저항하는 입장이어서,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예루샬렘 사도들은 파울에게 아무 것도 보태어 준 것이 없는데도(갈 2'6), 이방인을 위한 후기 사도들과 이방교회가 모교회에 보태 준 것들은 엄청났다는 점입니다(2'10). 
이것은 유대인들과 이방인 교우들의 화해와 하나됨을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선물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파울이 주도하여 예루샬렘의 빈민 성도들을 도운 구호사역은 기간으로는 근20년간에 걸쳐, 이방의 다양한 지역으로부터 걷은 연보로 실천됐습니다. 
지역교회들을 보면, 갈라티아/데르베/뤼스트라(루스드라)/마케도니아/베레아/테살로니카/필리피/코린토/에페소/트로아/튀로(두로)/톨레마이/퀴프로스(구브로)/케사리아(가이사랴)/로마 등의 교회들이었습니다.    
이 모든 교회들이 파울 일행을 통해 예루샬렘 교회의 빈민 성도들을 도운 것입니다. 이 사역은 파울의 핵심 사역의 하나였습니다(행 20'24; 24'26; 로마서 15'23,24,28). 

현대교회 다수는 NGO(비정부단체)인 아무개아무개 패러처치 또는 세상의 다양한 구호사역체들을 통하여 이름을 내면서 구호사역을 대신하기가 일쑤운데, 이들 구호단체들이 복음을 함께 제대로 증거하는 예는 흔하지 않습니다. 또한 소위 '세상(시스템) 변혁'과 지상왕국 건설이라는 그들 나름의 주권주의 어젠다가 있기 때문에 순수하지가 못합니다. 

교회는 초기교회처럼, 교회답게 우선적으로 교회 안에서 빈민 성도들을 도와야 모양새가 바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실행되지 않고, 대개 복음 없이 세상에다 돈을 뿌리는 모양새여서 안타깝지요. 사회복음은 참 복음이 아닙니다. 
아울러 사랑과 권능 없이 단지 재산의 '공평 분배'를 부르짖는 사회주의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돕는 것은 주님이 가르치신 사랑의 계명을 따라 성령님의 권능으로 행하는 주요 사역이어야 합니다. 

오늘날도 파울 시대처럼, 교회마다 연합하여 거액을 모아서 빈민 성도들을 기억하고 돕는 것은 올바른 사역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한낱 글쓰는 이의 이상에 불과할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