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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사복음서

[마 5:13] 땅의 소금과 진리



 

    그대들은 땅의 소금이오.
소금이 만약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것을 짜게 하겠소?
나중엔 아무 쓸모가 없어 그냥 바깥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라오.

(마태복음서 5:13 사역)   

주님께서는 우리를 "땅의 소금"(the salt of the earth)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이라고도 하십니다.

한국에서는 소금보다는 빛이 더 좋은지라 거의 언제나 '빛과 소금'이라고들 하길 선호하지만, 성경의 순서에 따른다면, 소금이 먼저이기에 '소금과 빛'이라고 해야 더 맞을 겁니다.

아무튼 이 비유는 신약 성경에 가장 먼저 나타난, 신자에 관한 매우 중대한 은유이지요!
주님께서는 마태복음서 5-7장에 기록된, 이른 바 '산 위의 말씀' 앞 부분(5:3-12)에서 신자의 아홉 가지 존재론적 행복론을 말씀하신 데 바로 이어 이 비유를 말씀하십니다[각주:1].
당시는 주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선택하신 지 얼마 안 된 사역 초기였고, 대상은 산 위에 올라온 무리들이었습니다. 이 말씀은..신자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존재는 복되고도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소금과 함께 빛으로도 은유하셨지만, 빛의 목적은 말할 필요도 없이 어둠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햇빛이나 달빛이 밝게 비췰 때 산 위의 동네가 그 빛을 피하지 못하고 환히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가 땅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면, 마땅히 짠 맛을 내고 밝은 빛을 비춤으로써 우리의 존재의 목적을 이행하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우리는 비록 세상을 살아가도 실상 사는 의미와 존재의 목적이 분명치 않은 존재인 셈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필요할 때 세상에다 우리의 존재를 알리고 그들로 하여금 의식하게 해야 합니다.

소금이 꼭 필요할 때 없거나, 눈으로 보기엔 분명히 소금인데 맛을 내지 못한다면,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 줄 뿐입니다.

요즘은 성인병인 고혈압이나 신장질환병 등 건강을 생각해서 되도록 염분을 섭취하지 않는다고 소금을 적극 피하지만, 그래도 땀을 흘리는 사람 몸에는 기본적으로 염분이 필요하며, 또 맛을 내기 위하여 소금이 꼭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 삶에 소금만큼 편리하고 좋은 게 얼마나 더 있을까요!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 아닐 수 없지요.
소금의 용도는 약 14,000 가지나 된다고 하며 통계를 보면, 그중 가정 용도로는 불과 3% 밖에 쓰이지 않는답니다.

가끔 소금이 꼭 필요해서 부엌 장 안을 온통 뒤지고 돌아다니며 소금병을 뒤지는데도, 소금통이나 병이 모두 텅 비어 있으면 실망스러워 혀 끝을 차게 됩니다. 워낙 건강을 위해 소금을 피하다 보니, 미처 사다 놓지 못해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아쉽습니다.

사람의 혀가 간사하다는 말을 합니다만, 간사한 혀 놀림은 맛 찾기도 포함됩니다. 단맛, 신맛, 매운맛, 고소한 맛 등 맛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짠맛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차적인 맛입니다.
짠맛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땀이나 눈물이 흐를 때 혀끝을 내밀어 보면 되지요. 사람의 오줌에서도 짠 맛이 납니다.
그만큼 사람에게 가장 가깝고 중요한 맛이 소금 맛입니다. 맛의 으뜸이지요.


그런데 소금이 없으면 이 짠 맛을 내지 못하는 겁니다. 남의 땀이나 눈물을 모아 소금 대신 쓸 수가 없겠지요.
꿩 대신 닭이라고..혹 소금이 없으면 된장이라도 있어야 맛을 냅니다.

요즘은 하도 성인병을 염려해서 소금은 백해 무익하다느니 하며 싱겁게 싱겁게 싱겁게 먹자고 하도 강조하다 보니 사람들이 싱거운 음식 맛에도 익어 있지만, 사실 싱겁고 밋밋한 맛은 거의 본능적으로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맛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약간이라도 맛 다운 맛을 내려면 '간'을 해야 한다고, 간을 맞춰야 한다고 말합니다. 고소한 맛도 실은 으레 소디움이나 간을 바탕에 깔고 있는 맛을 가리킵니다. 토마토는 기본적으로 소디움을 갖춘 자연식품입니다. 

소금이 왜 짠맛을 낼까요?
인간의 "간사스런" 혀의 취향-세 치 혀 표면에 솔솔 돋은 '맛돌기'라는 것을 위해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소금은 그렇게 생겨 먹었습니다. 짠 맛을 내라고 존재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렇다면..소금이 소금 맛을 내지 못한다면, 그건 그야 말로 별로 무익한 것입니다. 소금은 불로 태우거나 파괴될 수 없습니다. 물 속에 녹을 뿐입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적절한 때 적절한 곳에 적정량이 사용돼야 정말 좋은 것입니다.
아무 때, 아무 데나, 아무런 양을 아무렇게나 마구 써 버리면, 맛도 버릴 뿐더러 건강에도 해롭지요.
소금은 다 맛이 짜다고 우리는 알고 있지만, 혹시 맛을 내지 못하는 소금이 있다면 별 쓸모 없이 밖에 내버려질 뿐입니다.

또 다른 복음서 기자 루카는 그의 기록문에서 주님의 약간 다른 말씀을 썼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요. 하지만 (그 좋은) 소금도 만약 그것의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걸 짜게 하겠소?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가 없어 내버릴 뿐이라오."

마르코스 복음서에도 언뜻 다른 복음서와 비슷하지만 뒷 부분이 약간 다른 말씀이 쓰입니다.

    "..만일 소금이 밋밋하면 무엇으로 그것을 짜게 할 텐가? (그러니) 그대들 가운데 소금을 간직해 두고 서로 샬롬을 지탱하오(=화목하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물음을 갖게 됩니다.
먼저, 주님은 왜 세상의 빛처럼 "세상의 소금"이라 하시지 않고 "땅의 소금"이라고 하셨을까요?
또한 주님은 왜 맛을 잃은 소금을 언급하실까요?

"세상의 소금"보다 "땅의 소금"이 더 정확하는 사실은 소금과 땅의 연계로도 알 수 있지요. 

식탁 위의 소금, 화학공식 NaCl, 소디움클로라이드인 소금이면 다 맛을 내게 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맛을 잃은", "밋밋한" 소금이란 뭘 뜻할까요?

당대에 주님이 주로 사역하시던 갈릴리 지방 부근에 흔한 소금의 하나로, 사해물을 말린 소금이었습니다.
황산칼슘(석고) 등 다른 광물질이 많이 섞인 조잡한 싸구려 잡소금이었습니다. 이 잡소금은 겉보기엔 소금 같아도 진짜 바닷소금보다 짠맛이 적어 맛이 밋밋하고, 방부제 효능도 약해 갈릴리 호에서 잡힌 생선을 절이는 데 비효율적이었습니다.  

이 소금은 밭 한 가운데 길을 내어 지나 다닐 수 있게 식물이 나지 않도록 하는 데 주로 도움될 뿐이었습니다. 
고대의 여러 제국들은 전쟁에서 이길 경우 패전국 수도의 주요 경작지에 소금을 뿌려 식물이 자라나지 못하게 하기도 했지요. 여기 주로 쓰인 소금이 이런 잡소금입니다.

예수님 당대의 예루샬렘 가옥들의 다락방은 손님들이나 특별한 경우를 위한 방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드신 마르코스 요한의 어머니의 다락방도 그 한 예이지요. 그런데 그 방들의 마루는 주로 나무나 석고로 처리되어 걸어다니다 보면 금 가거나 부서지기 쉬웠습니다.
이때 이 바닥을 튼튼히 하기 위해 쓰인 것이 광물질이 많이 섞인 잡소금이었습니다.      

반면..맛을 제대로 내는 진짜 소금은 귀했고 때로는 황금이나 돈을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복무비의 일부로 '살라리움'(소금)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직장인의 봉급을 뜻하는 현대어-'샐러리'가 생겨났지요.
그러다 보니 사람의 됨됨이로 치는 사람의 가치를 은근히 소금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영어엔 “not worth his salt"(자기 소금가치만 못해)라는 말도 있지요. 

고대 중동과 유렆의 소금은 주로 지중해변의 건조지대에서 생산됐고 에집트/스페인/이탈리아/그리스 등을 통해 주로 무역보급로를 통해 각 나라에 매매됐습니다.

소금은 광물이지요.
소금 중엔 주로 광산에서 캐내는 암염(巖鹽)이란 것도 있습니다. 온 세계에서 사용되는 소금의 60%는 이 암염입니다. 약 25%는 깊은 우물에서, 나머지 15%는 바다와 소금호수에서 얻습니다. 
이 암염은 땅 속의 염광에서 발굴해냅니다.  

미국과 캐나다의 미시건/온태리오/오하이오/펜실베이니어/뉴욬 주 등의 지하엔 약 17만 평방마일에 달하는 거대한 암염지대가 있습니다. 메트로 디트로이트 지하의 경우 약7천만년은 지속될 암염층이라고 하네요. 물론 그 전에 예수님이 오시겠지요.
암염은 아득한 고대에 거대한 양의 바닷물이 땅에 넘쳐 증발하고 남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마도 빙하기나 노아 홍수 때가 아닐까요?
물론 이 암염도 다양하게 쓰입니다.

이러기에 소금은 여러 모로 땅의 소금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우리가 바로 땅의 소금이라고 하십니다.


구약 성경엔 '소금언약'이란 말이 쓰였습니다(민수기 18:19).

하나님은 사제들에게 백성이 바치는 제사용 희생물엔 반드시 소금을 치도록 하셨습니다(레빝서=레우기 2:13). 그만큼 소금과 제사는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희생 제사를 잡수시면서 맛을 보시기에 간을 맞춰야 한다는 뜻일까요? 그게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언약의 관계임을 매번 상기시키기 위함이었지요.
소금은 영구성이 있기에 주님과 사제들 사이에 맺은 언약이 영구적이라는 암시라고 보기도 합니다. 

구약성경 연대기B서(역대하) 13장 5절을 보면, 남북 분열 왕국 당시 유다의 아비야 왕은 제바라임 전쟁을 치를 당시 '소금언약'을 언급합니다. 북쪽의 이스라엘을 맞상대하면서 북왕 야로브암에게 다빋의 언약을 말할 때였습니다. 즉 유다를 포함한 온 이스라엘을 다빋 왕조가 지배하게 돼 있음을 '소금언약'이라고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남북이 다 죄 탓에 이 언약을 지키지 못했지요.

'소금언약'은 그밖에도 매우 중요한 연원과 의미가 있습니다.

고대 사람들 다수는 허리에다 소금주머니를 찾고 다녔습니다. 소금을 구입해 작은 자루에 넣어 허리춤에다 차고 다녔습니다. 서로 언약을 체결할 때면 자신의 소금자루에서 약간의 소금을 꺼내어 상대방의 소금과 함께 뒤섞습니다.
양쪽의 소금은 비록 각기 다른 자루에서 꺼냈더라도..일단 섞이고 나면 한데 엉기거나 굳어지거나 녹아서 자기 것을 구분하거나 분리하여 낼 수가 없지요.
마찬가지로 서로의 말과 약속도 도로 물릴 수 없다는 것-이것이 바로 '소금언약'이지요!

소금은 비록 녹지만 사라지지 않고 맛을 잃지 않는 것처럼 상호 간의 약속도 다시 되물릴 수도 돌이킬 수도 없기에 서로 배신하지 말고 신의가 영구적이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땅의 소금인 우리는 주님 말씀처럼 우리의 짠맛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속에 신자로서의 고유한 맛을 늘 간직하려는 강한 의지와 투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필요할 때는 바깥에 그 맛을 내어야 합니다. 이때 그 맛은 제대로 짠맛이어야지요.

이 맛을 진리에다 비유하면 과언일까요?
진리는 차가운 것이 아니지요. 밋밋하고 무미건조한 곳에 맛을 내듯 정다운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도 파울은 콜로새서 4:6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말은 언제나 은혜롭게 하시오. 소금으로 고루 간을 내듯. 그래서 서로에게 응답할 것을 알게 말입니다."

우리의 교회와 티엘티는 믿는 사람들의 공동사회이며, 그래서 늘 은혜로운 말들이 필요합니다. 소금으로 골고루 맛을 내듯. 그 말들은 진리의 요소를 담고 있기도 하며 또 그래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참 샬롬을 맛보고 누리며 화목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야 우리는 속에 간직해 둔, 미리 준비된 맛으로써 서로에게 응답할 수 있게 됩니다.


티엘티 독자 여러분은 땅의 소금으로서
맛을 간직하며 고루 맛을 냄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필자는 외래어는 되도록 원음에 가깝게 표기하자는 생각입니다. 
이 점, 독자의 이해를 바랍니다.  


  1. '팔(8) 복'이란 말은 천주교에서 유래함. 마태복음서의 이 부분은 분명히 아홉 가지로 나뉘어 있어 구태여 숫자를 붙이려면 9복이어야 맞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