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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사복음서

[마 5-7] 대가를 주시는 하나님





     바탕 본문: 마태복음 5-7장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가(代價)를 주시는 분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우리의 믿음을 값으로 쳐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신자가 이 사실을 못 믿는다면, 퍽 불행한 일입니다.

제가 존중하던 한 선배 사역자가 어느 교회 모임에서 이런 식의 말을 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차후에 어떤 종류의 대가나 상급이라도 바라선 안 됩니다. 늘 순수한 맘으로 해야.."

모임이 끝난 뒤 저는 그를 조용히 찾아가 히브리서 11:5 등 몇몇 성구를 들이대며 지적했습니다. 그는 새삼 놀라운 듯 말했습니다:

    "그런 성구가 있다는 생각을 미처 못했군요. 고치겠습니다."

순수한 신앙생활을 지향하는 많은 신자들은 흔히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행이 가장 순수하다고들 믿는 성향이 엿뵙니다.
'기복주의', '형통신학,' '번영신학' 등을 적극 규탄하는 신자들이 특히 그러기가 쉽지요. 하나님께 복을 바라지 말고 이미 받은 복으로 만족하는 대신, 바칠 것은 순수하게 바쳐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 중에 십일조를 반대하고 거부하는 분들이 흔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복이나 상급 따위를 기대하지 않고 자신이 "자발적"으로 바치는 헌금이 가장 순수하다고들 믿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자기 식으로 바꿔 오해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지요.
성경에 명시된 복관을 비롯한 기복주의를 거부하는 많은 사람들은 마태복음 5장 앞 부분을 참 복관으로 즐겨 인용하곤 합니다. 매우 윤리적이라는 소위 '8복'이 그것입니다. 그것이 '참 복'이고, 나머지는 복이 아니라는 식입니다.
그들 나름의 복관이지요. 하지만 자신들의 색안경으로 성경을 걸러 본 셈입니다.

이 부분을 구태여 이름 붙이자면, '8복'도 아닌 사실 상의 9복일 뿐더러 (11절도 따로 포함돼야 함), 한 가지 그들이 잊기 쉬운 것은 하나님은 대가를 주시는 분임을 이 9복 교훈 자체가 웅변했다는 진실입니다.

바로 말하면, 이것들은 "아홉 가지 복"이 아니라 주님을 믿어서 이미 복된=행복한 참 신자들이 으레 해야 할 행동과 그에 대한 대가론인 것입니다.
즉 '아홉가지 복'을 논하신 교훈이 아니라. 복된 사람들의 아홉가지 대표적인 행동과 그에 대한 보상을 논하신 교훈입니다.
또한 강조돼야 할 것은 그렇다고 이 '아홉 가지가 천주교에서 강조하는 소위 '선행구원론'의 바탕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 아홉 선행의 하나하나마다 대가가 딸렸다는 진리입니다.
과연 그런지 우리 한 번 살펴 볼까요?


행복한 사람들                      대가
-------------------------------
심령이 가난한 사람              천국

애통하는 사람                     위로

온유한 사람                        땅의 기업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배부름

긍휼히 여기는 사람              긍휼

마음이 청결한 사람              하나님을 뵘

화평을 추구하는 사람           하나님의 아들로 불림    

의를 위해 박해 받는 사람      천국

주님 때문에 욕설/박해/ 
거짓 증언을 당하는 사람       하늘상급


그렇지 않습니까? 과연 그렇지요!

여기서 복된 사람들은 이미 믿음으로써 복스러운 신자들이며, 존재론적, 주체적, 형용사적 행복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겐 대가가 약속돼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대가를 기대함은 당연한 것이며, 오히려 믿음의 행동입니다.

그런데 '절대순수'를 찾는 사람들은 마치 어떤 대가도 상급도 기대하면 안 되는 것으로 믿곤 합니다. 자신들만 그렇게 믿으면 그저 그만일 텐데, 더 나아가 남에게도 그 믿음을 받아 들이라고 강요합니다.

성경으로 입증되지 않는 이런 것은 믿음이 아닌 나름의 신념이요 거의 환상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그들은 세상 윤리나 도덕율엔 밝은지 몰라도 아직도 성경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런 신념을, 우린 흔히 소위 인류애를 실천하는 박애주의자들에게서 발견하곤 합니다. 테레사 수녀, 헨리 나웬, 알버트 슈바이처 같은 사람들이지요.


성경의 하나님은 약속과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그 분은 범사에 늘 무엇인가 약속해 놓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 뭐가 약속돼 있다는 겁니까..?
대가가 약속돼 있지요!

어디 이 말씀만 그런가요?
우리는 자칫 '산상(山上) 교훈'이라면 이 '9복'만 연상하기 쉬우나, 기실 산상 교훈은 '9복'을 필두로 그에 잇따라 주님이 상당시간 동안 하신 다양한 교훈들입니다. 삶 전반에 폭넓게 걸쳐 적용되는 말씀들이지요.

9복은 따로 떼어 놓을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뒷 부분에 자연스레 연결됩니다.
복된 사람은 마태복음 5장 앞 부분 뿐 아니라 7장까지의 모든 교훈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란 뜻이지요.  
그런데 이 모든 교훈엔 늘 대가 또는 결과가 따릅니다.

시공간 제약으로 모두 다 다룰 수는 없으니 일부만 확인해 볼까요?

    그대들의 빛을 사람 앞에 비추라
    - 그들이 그대들의 선행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계명들 중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행하며 가르치는 사람..
    - 천국에서 '큰 사람'(위인)으로 불린다

    개인 구호사역은 몰래 해라
    - 은밀히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 주신다

    골방 안에서 기도해라
    - 은밀히 보시는 아버지께서 응답해 주신다

    사람의 과오를 용서해라 
    - 하늘아버지께서도 네 과오를 용서해 주신다

    금식은 남 몰래 해라
    - 은밀히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 주신다

    보물을 [네 자신을 위해] 하늘에 쌓아라
    - (손해 없이 네 것으로) 잘 간직된다 

    먼저 그분의 나라와 그 분의 의를 찾아라
    - 필요한 모든 것을 너희에게 보태어 주신다

    구해라
    - 주신다
    찾아라
    - 찾게 해 주신다
    두드려라
    - 열린다
    - 아버지께서 좋은 것으로 주신다


뭘 느끼게 됩니까?
언약의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은 대가와 상급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점을 족장시대로부터 깨우쳐 주셨습니다.
즉 아브람에게 스스로 나타나셔서 계시하신 전능한 하나님이 자신을 '너의 상급'이라고 하신 것입니다(창세기 15:1a).
마찬가지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그 분께 나아오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보상자"이시라고 증언합니다(히브리서 11:6). 거기서 '보상자'라는 말은 '상급'이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곧 하나님은 마치 일꾼이 마땅히 받아야 할 삯을 고용주가 갚아 주듯 우리의 믿음에 대가를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그 정도로 우리의 믿음을 정당하게 인정해 주신다는 암시죠.

알고 보면 사실, 믿음과 그에 대한 대가란 대단한 것이지요.
신자의 믿음이란, 하나님의 관점에서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 한 분을 구주로 믿음으로써 선조 아담의 죄와 나 자신의 죄로 인해 영원히 멸망 당해 마땅한 나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죄의 구덩이에서의 건짐과 구원, 의인(의롭다 하심), 영원한 생명, 천국 삶을 허락 받은 그런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보다는 차원이 낮은 나머지 좋은 것들과 복은 믿음의 대가에서 제외되나요?  유대인들도 좀처럼 받지 못하는 구원을 우리가 받았는데 유대인들이 받는 좋은 것들을 우리는 못 받습니까?
유대인들이 누리고 받는 온갖 복의 대상에서 우리는 이방인이라고 해서 제외됩니까?
논리적으로 우습지 않습니까?

만약 그런 발상이 옳다면..그들은 옛 언약의 사람이고 우리는 새 언약, 더 좋은 언약, 더 나은 약속의 사람들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옛 언약의 사람들이 누리던 걸 하나라도 우리가 누리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더 좋은" 내지 "더 나은"  언약이냐는 겁니다. 
만약 그렇다면..마태복음 5-7장에 약속된 온갖 좋은 것들과 대가도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말해야 정직할 터입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하는 까닭은..
고차원의 기독교 순수도덕과 윤리를 논하는 사람들이, 남이 믿음과 선행을 한 차후와 미래에 뭔가를 기대하는 것을 흔히 불순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약속된 복까지도 기대하면 기복주의라고 몰아댑니다.  

아니..하나님이 갚아 주신다고, 대가나 상급을 주신다고 약속해 놓은 것을 믿는 것까지도 불순한 것입니까?

도대체 순수와 불순의 차이가 뭔가요?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하나님이 약속한 것들을 전혀, 0%-100%도 믿지 않고 아무 것도 전혀 기대하지 않는 게 순수하고 더 좋은 믿음이라는 얘기가 되지 않겠습니까?
우습지 않습니까!

그렇다면..하나님은 뭣 때문에 우리에게 애써 수 천가지 복과 대가, 약속들을 구구히/누누히 강조하셨겠나요? 그러실 필요가 뭐냐는 겁니다.

기복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강조하고 내세우는 지고(至高)의 행복론인 '9복'까지도 이런 대가를 약속해 놓고 있는데, 성경의 나머지 교훈들이야 어떻습니까?
 
성경에 따르면, 대가 없는 약속과 실천, 노력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이기 때문이지요.

물론 반대로, 실천과 노력이 없는데도 따르는 대가는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 구원만 달랑 받는 가장 적은 대가가 기다릴 뿐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받는 극형으로 마지막 목숨이 꺼져 가면서 아슬아슬하게 간신히 주님께 낙원 허락을 받은 강도처럼 구원만이라도 '감지덕지'라면 할 말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구원의 감격만으로 만족하면서 거기서 머물고자 합니다. 십자가 위의 강도와의 차이가 뭐겠습니까?

그러나 구원과 거듭남은 기독교의 시작이고 기초에 불과합니다. 새로운 모험으로서의 신앙생활의 출발입니다.
거듭남은 "으앙!" 하고 갓 태어난 아기가 생동하고 움직이고 자라가는 삶의 첫 테이프, 시작일 뿐입니다. 결코 완성이 아닙니다.

모험에 넘치는 참 신앙생활은 구원과 거듭남의 시점에 머물 게 아니라, 거기서 더 움직이고 점점 자라나서, 하나님이 그 분의 말씀에 약속해 놓으신 온갖 좋은 것을 탐하여 얻고 누리며 사는 삶입니다.  

대가를 누리고 상급을 받겠다는 열성이 곧 신앙의 진전입니다.
성경이 약속해 놓은 온갖 좋은 것을 탐하며 갈망하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약속해 놓으시고 사도들이 받았던 방언과 은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대로 살고자, 주님의 모든 약속을 누리고자 하는 참 신앙인은..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잘 알지도 못할-'개혁'계 일각에서 뇌까리는 '중단론' 따위에 신경 쓸 여가가 없습니다. 

모험 길을 따라 믿음으로 앞으로 달려가기만도 바쁜데, 언제 그런데 일일이 관심을 쏟고 실험해 보고 귀착하겠습니까?

'중단론', '기복론'..믿고 싶으면 혼자 믿으라고 하세요. 다 세상에서 배부른 사람들이 하는 소립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사실 하나님과 더불어 그 분이 약속해 놓으신 것들 갈구하는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탐욕스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갈망하기에 그 분이 언약 속에 명시된 모든 선한 것들도 함께 갈구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린 성경에 약속된 모든 것을 고루 누리며 살 생각을 해야 합니다.

달랑 구원만 받아 놓고 다 된 것인 양 착각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대가를 믿기에 더 달게 선행을 하게 되는 겁니다.
아무 대가도 보장도 없다면, 뭣 땜에 복음을 믿는 겁니까?

현세와 미래에 대가나 상급이 없다고 믿는 믿음이 참 믿음이 아닙니다!
참 믿음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대가나 상급을 기대하는 믿음입니다.
 

   믿음 없이는 그 분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그 분이 계심과,
또한 그 분은 그 분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의 보상자이심을 믿어야만 합니다.